우리 삶에서 유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더 커져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마 그 투명함과 비춤의 속성 탓에 유리를 통해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지요. 그러나 반면에 그 속성 덕분에 유리는 아주 독특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대상, 저 너머 가려진 진실, 빛바래지 않은 과거나 간절히 엿보고 싶은 미래, 혹은 지금 이곳과는 판이하게 다른 세상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고요. 첨단 기업 마케터에서 르네상스 문학 전문가로 변신한 지은이는 «유리»에서 이런 기대들이 과거에나 현재에나 유리를 매개로 발현되었고 또 유리를 이용해 실현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셰익스피어의 거울에서 최신 웨어러블 디바이스까지.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의 대차대조표를 적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실은 기나긴 ‘유리의 세기’를 살고 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에 플레이타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불확정성의 원리> (왈리드 라드, 호추니엔, 재커리 폼왈트, 권하윤)와 그 연계 프로그램인 ‘재커리 폼왈트와의 토크’(모더레이터 서동진)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토크는 일종의 프리젠테이션이었는데, 작가는 네덜란드 증권거래소에서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와 길브레스 부부의 ‘모션 픽처’를 경유해 구글 어스/글래스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를 그려 보여 주었습니다. 이 토크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며 강한 반발에 부딪히는 등 여러 난관에 맞닥뜨려 몇 년 전 개발이 중단되었던 구글 글래스가 얼마 전 ‘산업용 에디션’으로 새로이 발표되었다고 하네요. 생산성 향상을 내걸며 인간을 통제하는 도구로 내세워진 모습이 백여 년 전 프레더릭 테일러나 길브레스 부부의 ‘과학적 관리법’과 섬뜩하게 겹치기도 하고(그 사이에도 과학적 관리는 현저히 발전해 왔지만), 구글(그리고 여타 대기업)이 검색엔진, 지도, 생산 도구(그리고 아직은 실현 못한 일상용 글래스)로 이 세상을 독점하고 지배하고 있음을 적나라한 형태로 드러낸 소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다른 이유로 구글 글래스 소식에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글래스(좋고 나쁘고를 떠나 가장 최신의 유리 중 하나인)가 ‘오브젝트 레슨스’의 한 권인 <유리>에도 (당연히)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유리>의 지은이 존 개리슨은 르네상스 영문학을 전공한 뒤 좀 엉뚱하게도 인터랙티브 테크놀로지 분야의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다가 대학으로 돌아와 르네상스 시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그 덕분에 이 책도 진정한 르네상스맨(?)의 저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유리를 통해(=투과해) 봅니다. 오랫동안 유리는 투명함을 약속하고 실행하는 도구로 사용됐고 그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쳤습니다. 안경에서 현미경/망원경을 거쳐 각종 인터페이스 장치까지, 그리고 최근에는 구글 글래스나 홀로렌즈 등의 인터랙티브 디바이스까지. 어쩌면 우리는 유리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본다는 것에는 늘 욕망이 작용하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유리에 바라는 ‘투명함’은 사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 이상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큰 것까지, 더 미세한 것까지, 심지어는 과거와 미래까지 보고 싶다는 소망이 유리에 투영(!)되는 셈이죠. 유리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게 이런 욕망 혹은 바람일 테고요.
지은이는 이렇게 유리가 어떻게 우리 욕망을 반영했고 또 거꾸로 우리의 문화와 경험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르네상스 문학에서 최근 대중문화 산물들까지 아우르며 박식과 통찰 가득한 짧은 단편들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각 장 분량이 적은 거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지만, 초교를 마치고 옮긴이 교정 중인 지금은 가끔 이 단편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리워지기도 하는… 그런 사랑스러운 책입니다. 😍
번역은 글에 대한 애정이 깊고 번역에도 관심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유리를 다루는 바텐더로 일하고 계신 주영준 선생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지은이만큼이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신 선생님이 바텐더의 세심한 손끝으로 번역하신 이 책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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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존 개리슨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르네상스 문헌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소니 일렉트로닉, 마블 엔터테인먼트, 야후, 파나소닉, 워너브러더스 등 유수의 기업에서 기술 개발과 마케팅 혁신 분야 업무를 담당하다가 학계로 돌아왔다. 이채로운 경력과 르네상스 문학을 향한 깊은 애정으로 현재 캐럴 대학 영문과 조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활발히 저술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저서로 «르네상스 시대의 우정과 퀴어 이론»이 있고 «초기 근대 영국의 섹슈얼리티와 기억»을 공동 편집했으며 다수의 르네상스 문학 연구 논문을 집필했다.
옮긴이 / 주영준
사회학을 공부했고 현재 신촌에서 작은 바 ‘틸트’를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매체에 술에 관한 짧은 글을 기고하거나 번역하기도 한다. «보건과 사회과학»(29집)에 ‹한국 성 소수자들의 성 파트너링 유형 파악›을 기고했고, «위스키 대백과»를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