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에세이

마이클 커닝햄이 쓰고 정명진이 옮긴 소설 «세월»The Hours에서 한 여성이 호텔을 찾는다. 아내이자 엄마, 가정주부로서 집에 묶여 보내는 나날, 그 무게에 질식할 것 같은 그는 집 밖에서 찾은 이 임시적인 공간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을 읽는다. “호텔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도망 나온 것 같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데버라 리비의 소설 «핫 밀크»Hot Milk에서는 한 모녀가 모친의 고질병을 치료해 줄 의사를 찾아 바다 건너 스페인으로 옮겨 간다. 이 고질병은 집안 병이자 모녀 병이기도 하다. 프로이트: 이 여자에게는 질병이 삶에서 스스로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된다.[1]
어떤 여자들은 불평하기 위해 호텔에 간다. 어떤 여자들은 치료를 위해 호텔에 간다.
병원으로 갈 것인가 호텔로 갈 것인가. 안을 찾아 밖으로 가야만 하는 이들. 내 방을 찾아 밖으로 가야 하는 이들.

 

방 구함

호텔이 한때 부녀자 전용 하숙이랄까 기숙사 역할을 하던 시기도 있었다.

호텔은 이러한 여자들[싱글 여성, 처녀, 노처녀]이 시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요 이들을 시중들 사람이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들이 유일하게 공적으로 존재하는 장소가 곧 호텔이었다. (조애나 월시, «호텔»)

이때 호텔은 일종의 ‘청결-안전 지대’인 걸까? 일정한 테두리 안의 사회적 장으로서 허용된 여성 전용 공간? 밖이면서 안인 곳? 그러나 그 안이 집 안(곧 安)은 아닌 곳?
집에서 유일하게 도피할 수 있는 곳, 내부를(내장을) 지닌 존재로서 사생활을 보호받는 유일한 방이 욕실인 것처럼, 아예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뒷간인 것처럼?
주방에도 침실에도 서재에도 거실에도 스모킹 룸에도 내 내적 생활을 향유할 공간이 없을 때 우리는 호텔로 또 목욕탕으로 간다(혹은—사회가, 내 처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걷는다. 버지니아 울프가 런던 거리를 배회했듯이. 그러나 역사적으로 길에 선 여자는 길 여자라 불렸다).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앉아서 주위를 둘러보면 시간도 계절도 나이도 실감나지 않았다. 세계는 작은 탕으로 축소되고 시간은 체온을 높이거나 낮출 때만 흐르는 것 같았다. 비현실적인 시공간의 어떤 틈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서유미, «틈»)

번민하는 중년 여자가 갈 곳은 많지 않다. (김성중, ‹오전 열 시의 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시간›, «악스트» 13호)

여탕에서 우리는 조금 편안하고 조금 외롭다가 조금 허기지며 조금 홀가분하다. 집에서 자유롭고 여전히 집에 붙들려 있다. 시선을 신경 쓰지만 시선에서 놓인다. 집과 집 아닌 곳의 거리, 나와 나 아닌 것의 거리. “아주 가깝거나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목욕할 수 있다”(«틈»).
그러나 때 목욕의 홀가분함으로도 끝내 번민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듯 잠재우기 어려운 초조함의 요소가 있으니 이는 내 여자 됨이다.

여성이라는 범주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더러움과 오염의 관념—그에 따라 여성은 더러운 여성과 깨끗한 여성으로 나누어진다—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여성은……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더럽다고 여겨지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도 하에서 여성은 사회 안에 어떤 적법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단지 스스로를 비가시화한다는 조건으로, 물리적인 의미에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동등한 사람으로서 사회 안에 현상하려는 순간, 이 허락은 철회된다.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프로이트에 따르면 그이[도라 어머니]는 자기 청결을 유지하느라고 집을 청소한다.……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의 본질은 동일하다. 집 청소는 누가 할 것인가? 누가 더러워질 것인가?
목욕도 결국은 집일의 연장에 불과한 건가? 침대를 도로 물리고 이불을 새하얗게 유지하는 집일의 지움, 유령처럼 객실에 진입해 투숙의 흔적을 지우고 사라지는 호텔의 숨은 ‘하우스 키핑’처럼?
혹은 애초 호텔로 향하는 충동과 마찬가지로 지우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열망을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목욕탕은 또한 드러내지 않고 드러내는 장소, 보이지 않게 “현상”하는 장소, 시험 삼아 “시위”하는 장소일 수 있으려나?.[2] 잠재적으로라도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내가 있는 곳?

그래도 그녀는 삶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기쁘다. 가능한 모든 선택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에는,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이나 교활함 없이 그대의 모든 선택들을 고려해 보는 행위에는 커다란 위안이 담겨 있다.……그것은 아마 호텔에 투숙하는 일만큼이나 단순할 수도 있어,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커닝햄, 정명진 옮김, «세월»)

사우나를 해방구처럼 이용하는 또 다른 인물은 흡연자인 정희다.……정희는 ‘사우나 흡연실’이라는 완벽한 공간을 통해 몰래 흡연을 이어 나간다. (김성중, ‹오전 열 시의 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시간›)

연기가 나는 곳에는 화재도 있게 마련이다.

 

방 구함 2

조만간 난 ‘쇼핑하는 여자’A Woman Shopping란 제목의 길고 슬픈 책을 쓸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할 일들에 대한 책이자 우리가 행하고 그로써 혐오를 사는 일들에 대한 책이 될 것이다. 시기심에 관한 책이자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한 책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문학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자 문학이 여성에 반하여 사용돼 온 역사를, 또한 문학을 반대하고 또 옹호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쇼핑을 반대하고 또 옹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돼 온 역사를 다루는 책이 될 것이다. 산책자flâneur는 시인이요 지갑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자지만, 어깨에 가방끈을 매거나 손에 클러치 백을 쥐지 않은 이상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이 책의 뒤표지에 실릴 말은 이뿐이다: 지갑이 없는 여자가 있거든, 우리가 그 대신 지갑을 상상해 주리라. (앤 보이어, ‹쇼핑하는 여자›, «여성에 반하는 의복»Garments Against Women)

지갑이 있어야 여자가 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프로이트: 가방은 보석 상자와 마찬가지로 비너스의 조개, 여성의 성기를 대변한다!—지갑이 없이 내 방을 장만하기는 불가능하다.
호텔에 가건 목욕탕에 가건 돈주머니는 필요하다(크세니아는 교환이었다). 당연히 장을 보러 가려도 돈주머니는 필요하다. 더욱이 쇼핑은 애초 장보기를 아우르는 말이다. ‘쇼핑하는 여자’는 장 보는 여자이기도 하다. 장 보는 여자도 장 보는 행위로 혐오를 사나? 혹은 ‘쇼핑’을 할 때나 그런가?
지갑이 있고 주머니가 깊다고 해서 무절제한 과소비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습관은 남자가 여자 손에 지갑을 쥐어 주던 때의 잔재 아닌가?
주머니가 있는 것도, 주머니에 넣을 것이 있는 것도 남편이다.
내 것이라고 부를 방도 내 것이라고 부를 주머니를 확보해야 가능하다.[3]
매무새만큼이나 내—‘공적’—기능도 중시하여 이것저것 챙겨 넣기 좋은 넉넉한 호주머니 여럿 갖춘 옷을 확보해야 가능하다.

 

방 짓기

조애나 월시의 단편 ‹벤티밀리아›Ventimiglia에서 ‘나’는 디올 립스틱을 새로 산다. 그러고 ‘당신’과 이메일로 다툰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웬 사치냐는 당신의 비아냥에 나는 디올 립스틱이 다른 립스틱보다 크게 더 비싸지 않으면서도 제품 하나하나의 색상에 들이는 심혈 덕에 유난히 더 아름답다고 설명한다.

디올 립스틱으로 혁명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게 내 말의 요지였다면 당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비 내리는 텐트 도시에서 혁명을 이루고자 디올 립스틱을 바르고 일하고 있었던 반면에 당신은 집에서, 혹은 해외에서 혁명을 위한 일이 아닌 일을, 적어도 직접적으로 혁명에 이바지하지는 않는 일을 하고 있었으나 그런 당신은 디올 립스틱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니 이는 혁명적인 제스처였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름다운 걸 만드는 내 지인들은 돈을 보고 일하지 않아, 내가 말했다. 그이들은 다만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싶어 할 뿐이지.
아름다운 것을 만들 필요가 뭐 있느냐고? 난 당신의 말을 ‘세상살이 흠점을 트집 잡고 다니는 걸로도 바쁠 판에 뭣 하러 립스틱 생각에 시간을 허비하느냐’는 뜻으로 이해했다. 아름다움은 쉽게 눈에 보이고 그러므로 만들기도 손쉬우리라는 생각, 그렇다면 그 손쉬운 정도에 비례해 진실보다는 허위에 가까우리라는, 야근을 해 가며 한가스런 모습을 완성시키는 잡지 속 여자들만큼이나 허상에 불과하리라는 생각. 당신은 진실이 추하다고 믿은 걸까? (월시, ‹벤티밀리아›, «그랜타» 126호 온라인판)

아름다움과 “세상살이”는 서로 동떨어진 것인가? 짓기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매일 행해지는 집일과 연관돼 있는 것은 아닐까?

집은 기예다, 나뭇결을 볼 줄 아는 게 기예고 나무판자를 잘라 침대를 만드는 게 기예듯. 대다수 사람이 지닌 기예가 바로 집이다. (월시, «호텔»)

건축함[짓기]이란 근원적으로는 거주함을 의미한다.……‘있음’bin은 고대어의 건축함bauen에 귀속하는바, 그 고대어는 다음처럼 답한다. ‘나는 있다’ich bin 혹은 ‘너는 있다’du bist라는 것은 나는 거주한다 혹은 너는 거주한다를 의미한다.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그 양식, 즉 우리 인간이 지상에, 즉 이 땅 위에 있는 그 방식은 Buan, 즉 거주함이다. 인간으로 있음이 의미하는 바는 죽을 자로서 이 땅 위에 있음, 즉 거주함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강연과 논문»)

거주는 무언가를 짓겠다는 최소한의 의도를 그 안 어딘가에 숨기고 있다. (월시, «호텔»)

그런데 살림이라는 짓기, 사사로운 영역이라는 집 안의 일은 ‘나는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즉 거주하는 인간 모두의 기예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특정된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일로, 그리고 그러할 때만 유용한 행위로 간주돼 왔다. 예술도 기예도 짓기도 아니며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소꿉놀이의 연장으로.
그러나 이에 반하여 작업해 온 이들, 묵묵히 여러 형태로 일하고 지어 온 이들은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들이 ‘사사로운’ 올가미에 잡혀 ‘보편적인’ 예술을 만드는 데 실패해 왔다면, ‘사적인’ 걸 보편화해서 우리 예술의 주제로 삼으면 안 되려나? (크리스 크라우스, «아이 러브 딕»I Love Dick)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그녀는 장사를 하는 어머니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우선적으로 우리를 “먹고살게 해 주는” 손님들 차지였다.……그녀는 고객을 대하는 얼굴과 우리를 대하는 얼굴,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문간의 종이 울리기만 하면 연기를 시작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참을성 있는 목소리로 으레 그러듯, 건강, 아이들, 채마밭에 대해 질문했다. 다시 부엌으로 들어올 때면 미소는 싹 사라졌고, “딴 데서 조금 덜 비싼 곳을 찾아낸다면” 언제라도 자신을 떠나리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다하느라 기진맥진해서,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니 씁쓸함과 환희가 갈마들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사람들이 전부 알아보는 어머니, 요컨대 그녀는 공인이었다. (아니 에르노, 정혜용 옮김, «한 여자»)

페미니스트란 자전 작가, 자기를 주제로 하는 예술가다. 공과 사 사이의 접점으로 역할한다는 점에서 이는 여성이 언제고 해 온 역할과 다를 바 없다만, 페미니스트는 이를 역으로 행한다. 페미니스트는 달래지 않는다. 반발하지. 페미니스트는 겉과 속이 뒤집힌 여자다. (레이철 커스크, «여파»Aftermath)

일인칭으로 글을 쓰는 것은 열등한 작법이라고 남자인 작가들이 말하는 걸 난 들어 봤다.……여자들의 글이란 개인적인 것과 근접하기에 “불행히도 취약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혼자 제 잉크 통 혹은 파워북과 맞대고 앉아 있는 순간에조차 몸 어딘가에, 그게 목일지 발일지 다른 어딜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하여간 어딘가에 남자들의 의견이 기웃거리고 있다는 걸 아는 여자인 작가가 내가 처음은 아닐 테다.……남자는 제 눈에 보이는 대로 ‘나’라고 쓰고, 그리 씀으로써 눈에 보인다. 관계가 명확하다. 여자는 ‘나’라고 쓸 때 봄과 보임을 조화시켜야 하며 일인칭을 제 용도에 맞게 치환하는 과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여자, 보이는 대상인 그가 어떻게 보고 보이는 존재인 저 자신을 직시할 것인가? 여자는 문장을 시작하면서 동일한 권위를 누릴 수가 없다. (드루실라 모드예스카, «과수원»The Orchard)

내 생각에 현대 여성 예술에 있어 ‘프라이버시’란 1960년대 남성 예술과 문학에 있어 ‘외설’obscenity에 상응한다.……여성의 고백이 회개와 치유의 서사란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질 경우에는 고백 자체에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그를 살피는 것, 제 머리 밖으로 경험을 끄집어 내 식탁에 늘어놓는 것은 여전히 지나치게 전투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크라우스, «비디오 그린»Video Green)

“저 이름 자자한 여성의 감정 내부를 묘사하는 것”……보내지 않은 편지들이 간직된 책상 서랍 안쪽의 그 내부, 혹은 읽히지 않은 편지를 담은 봉투 속과 매한가지인 그 내부를. (엘리자베스 검포트, ‹여성 트러블›Female Trouble, «n+1» 13호)

 

글짓기

내가 아는 게 정확히 뭔지 난 모른다. 내가 정확히 무얼 쓰려는 건지 난 모른다. (월시, «호텔»)

(떨지 않았는데, 입술이 지그시 떨렸다. 입술이 떨린다는 건 무언가 할 말이 많다는 것. 참았던 말을 토할 때 우리가 토하는 것은 참았던 시간. 나는 문득 십 년 치를 토한다.) (김효나, ‹이사›, «2인용 독백»)

내 작업을, 내 글을 어떻게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건지 난 알지 못했다. 오렌지를 까듯 창문을 열어젖힐 방법을 알지 못했다. 외려 창문이 도끼처럼 내 혀 위에 내리꽂힌 형국이었다. 이게 내 현실이 될 것이라면, 이걸 갖고서 내가 뭘 어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Things I Don’t Want to Know)

한때 호텔이 생활인 삶을 열망했던 적이 있다. 이는 여행이 삶인 생활에 대한 열망이었을 수도 있고, 매일같이 백지로 되돌려지기에 하루하루 새로운 시작을 보장해 주는 쾌적하고 정갈하며 어질러 놓은들 어김없이 재정돈되는 객실의 가능성이 곧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대변하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갈망이었을 수도 있다.
내 집이라고 부를 공간이 생기고(물론 어디까지나 내 의사와 무관한 임시 거처다) 집을 어떻게든 꾸려 나가게 되면서 호텔에 두었던 미련은 대부분 사그라졌다. 어느 한구석으로 물린 듯하다.
호텔 대신 내 방이 생겼다.
호텔의 최대 매력을 지금에 와서 설명해 보라면 희고 단정한 침대가 있는 방의 고즈넉한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를 설명하려면 이미지를 말로 옮길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말로 옮겨야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호텔에 애초 매료된 이유를 배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흠모했던 건 호텔의 빈 상태, 흔적이 남지 않기에 뭐든 가능할 것 같은 그 ‘순결한’ ‘백색’이었으니까(호텔에서는 나 또한 이상적인가?).
착오다.
내 방은 결코 정갈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품을 요한다. 더욱이 이곳은 ‘바깥’ 일터까지 겸한 복잡한 공간이다. 경계가 모호한 가운데 집일과 일일이 자주 부대끼고 겨루는 곳.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이 얼마만큼 폼나게 남고 있는지 살필 겨를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호텔에 대한 애틋한 감상이 물러난 데는 생활 여건도 한몫했다. 다만 생활 여건이 내 경우에는 진로에 펼쳐진 풍광과 따로 뗄 수 없는 자연 여건인 양 영 굳건하다. 고즈넉한 호텔 방과 그만큼 숭고하게 다가오는 호텔 욕실은(착오다) 내 주머니 사정과 화폐 가치가 허락할 때나 내게로 온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없느니만 못하다.
그래도 나는 간간이 사진으로 이러한 공간들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보다 흔하게 글로 그리한다. 글로 방의 윤곽들을 가늠해 본다. 내가 글로 세상의 호텔/방을 틈틈이 기웃대 왔음을 이 책을 옮겨 쓰고 또한 에세이라는 이 글을 시도essai하면서 깨달았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에세이는 다른 글을 읽고 인용하고 옮겨 가며 쓴 파편들로 이루어진, 내 징검다리 방들의 일시적인 모음이다(“나는 이 단어와 다음 단어 사이에 걸쳐진 채 추락하고 있어, 깨어지고 있어.” 앨리 스미스, 이예원 옮김, «호텔 월드»).
그때 그리던 부동하는 생활에 대한 갈망이 어디 간 것은 아닐 테다. 호텔, 심지어는 여행이라는 특정 형태를 띠지는 않게 되었지만, 조금은 다른 형태로 그 갈망을 일을 통해 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이 일을 하면서 호텔에 덜 집착하게 된 거려나.
증상은 욕망의 달걀 껍데기다, 라고 조애나 월시는 이 책에서 쓰고 있다.
내가 지금껏 번역해 읽고 번역해 써 온 글 위에는 달걀 껍데기가 얼마만큼 널려 있으려나.

 

방 잇기

이 주 후, 그녀는 노인병 전문 센터로 옮겨졌다. 병원 뒤,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삼 층짜리 건물로, 현대적이고 아담했다. 노인들은 대부분 여자들로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일 층에는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사람들, 이 층과 삼 층에는 사망할 때까지 머무를 권리가 있는 사람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과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주로 삼 층에 배정된다. 둘 혹은 혼자서 사용하는 병실들은 환하고 정갈하며, 꽃무늬 벽지가 발려 있고, 벽에 판화들과 괘종시계가 걸려 있으며, 인조가죽 안락의자들이 놓여 있고, 화장실이 있었다. (에르노, 정혜용 옮김, «한 여자»)

캐서린 맨스필드가 호텔을 메우고도 남을 자아들에 대해 쓰길: “나 자신에게 참되라고! 어느 자신? 내 하고많은, 그래, 따져 보면 수백에 달하는 것으로 보이는 나. 콤플렉스니 억제니 반응이니 공명이니 반영과 투영을 염두하면 종종 내가 옹고집인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고 열쇠를 건네느라 혼자 애면글면하는 주인 없는 호텔의 작은 사원에 불과한 느낌인걸.” («캐서린 맨스필드 작가 노트» 2권, 앨리 스미스, «예술책»Artful에서 재인용)

주차장에서 바라본 건물은 보다 환하고, 거의 안락해 보였다. 어머니가 있던 방의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가 있던 곳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구나.’ 처음으로 깜짝 놀라며 해 본 생각이었다. 21세기의 언젠가, 내가 이곳이든 혹은 다른 곳에서든 냅킨을 폈다 접었다 하면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들 가운에 한 명이 되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에르노, 정혜용 옮김, «한 여자»)

난 이곳 객실들을 누비며 사랑과 잠의 흔적으로 뒤엉킨 침대와 재단장을 마치고 제 품으로 미끄러져 들어올 몸뚱이를 기다리는 침대들을 구경해. 반듯이 접어 내린 이불귀와 서걱대는 침대보. 마치 침대가 반가운 입을 벌려 “안녕, 어서 들어와, 곧 잠들 시간이야” 하고 말하는 것 같아. 참 매력적이야. 매일 밤 호텔 방방이서 기꺼이 입을 벌리고, 홀로 혹은 함께 잠자리에 드는 몸들을 맞이하는 침대. 그러면 뛰는 심장을 가슴에 보듬은 수많은 사람이 다른 이들이 비우고 떠난 자리에 다시 제 몸을 뉘지. 몇 시간 전까지 같은 자리를 체온으로 훈훈히 덥혔던, 그러나 그 후 어디로 뿔뿔이 흩어졌을지는 하늘만이 알 그들 선임자들의 자취 위로. (스미스, 이예원 옮김, «호텔 월드»)

 

[1] 이 에세이의 본문(인용문 제외)에서 고딕 처리된 부분은 모두 조애나 월시의 «호텔» 인용문이다.
[2] “문자 그대로 시위示威란,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는 그 행위는 타인과 함께임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차미령, ‹너머의 퀴어: 2010년대 한국소설과 규범적 성의 문제›, «창작과 비평» 176호(2017년 여름).
[3] Rachel Lubitz, “The Weird, Complicated, Sexist History of Pockets”, Mic, Feb. 20, 2016(요약 번역은 ‹‘주머니’의 역사와 여성용 옷에 숨어 있는 성차별›, «뉴스 페퍼민트», 2016년 3월 4일, http://newspeppermint.com/2016/03/03/pocketsexism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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