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 나

유년기의 경우

쓰레기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한 번에 여러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던 대전의 작은 아파트 단지, 한 달에 한 번씩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져오라고 했던 재활용품들, 중학교 일 학년 때까지 겨울마다 교실에 놓였던 난로, 타고 남은 재, 쓰레기 컨테이너 바로 옆의 조개탄 창고. 대략 유년기라 명명될 수 있을 시기와 결부된 쓰레기들에는 어딘가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직 쓰레기의 영향력이 크게 체감되지 않았던 때였다. 내가 살던 저층 아파트 단지에는 정문 하나와 후문 두 개가 있었다. 엉뚱한 방향으로 튄 공을 쫓아 달려가다 보면 세상의 끝으로만 여겨졌던 후문 하나에 도달하고는 했다. 그곳에는 짐작컨대 세제 회사 협찬으로 세워졌을 표지판이 있었다. 이미 낡을 대로 낡아 군데군데 녹이 슬고 페인트 조각들이 떨어져 나간 표지판에는 ‘DO NOT WASTE WASTES’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window가 창문이고 eat가 먹다라는 걸 가까스로 아는 정도였던 내게 이 문구는 굳이 영어로 적힐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궁금증과 더불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해당 문구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표지판 앞에 서서 WASTE와 WASTES의 차이를 헤아리고 있었던 기억은 난다. 그리고 지금, 흐릿해진 표지판의 이미지를 애써 떠올리며 나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 새삼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니, 그러면 우리는 쓰레기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일까? 의도된 바는 알겠지만, 이 문구는 내게 어떤 본질적인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재활용품을 수거했다. 아이들에게 올바른 시민 의식을 함양하겠다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캠페인이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사이에 초등학교(실제로는 국민학교)를 다녔던 나는 이 시기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대전 변두리에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개천에 뱀 허물이 떠다니고 버려진 공터가 수두룩한 환경에서 한쪽에서는 혐오 시설이라며 종합병원 부설 장례식장 건설 반대를, 또 한쪽에서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떠들어 대던 시절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울올림픽이 치러졌다. 한참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거리 개선 사업이 있었다고 했다. 역시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그때 거리에서 치워진 것, 끝내 치워지지 않았던 것들이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이라는 시기에 어떤 정체성을 부여했으리라 여겨진다. 학교에서는 낙관적인 21세기상을 가르쳤다. 누구나(심지어 여자도) 무엇이든(말 그대로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한다면 훌륭한 국가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1997년 혹은 1999년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가짜 예언을 열심히 퍼뜨리면서도 긍정적인 미래상에 수긍했다. 미래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 중에는 물건을 아껴 쓰고 쓰레기를 재활용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였다. 물건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반만년 역사상 한국이 가장 부유했던 시기였다. 필통에서 연필깍지가 사라졌다. 아이들은 급식으로 나오는 우유를 먹지 않고 두었다가 하굣길에 도로를 향해 던졌다. 여전히 훈계와 처벌이 있었지만 때로는 어른들마저도 이러한 상대적 풍요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날이면 약삭빠른 아이들은 길가에 나뒹구는 신문지나 종이 상자를 들고 학교에 갔다. 이것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다른 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학교 등사실에서 갱지에 인쇄되던 시험지가 연필심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멀쩡한 백지로 대체되었다. 연필 대신 샤프를 사용하는 학생의 비율이 높아졌고 따라서 연필깍지는 어차피 많은 아이에게 불필요한 물건이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교실 뒤 사물함에 길에서 주워 온 멀쩡한 쓰레기를 쌓으면서 죄책감을 학습했다. 비슷한 유형의 다른 죄책감들도 있었다. 우리가 뭔가 잘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연필 하나를 다 쓰기 전에 새 연필을 깎으면 안 된다는 생각, 표지가 낡았거나 질렸다는 이유로 새 연습장을 꺼내면 안 된다는 생각. 하지만 때로는 손에 쥘 수 없을 정도로 짧아진 몽당연필을 버리면서도 어떤 종류의 죄책감을 경험해야 했다.
우리는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였고 한때 한 반 정원이 칠십 명을 웃돌기도 했으나 동네마다 꾸준히 학교 부지가 공급되면서 언젠가부터 한 교실에서 부대끼는 아이들도 오십 명 이하가 되었다. 내가 살았던 동네는 어느 집이나 사정이 어슷비슷했다. ‘적당히’ 아끼고 ‘적당히’ 낭비하며 사는 인구였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적당히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다.

 

검은 구멍의 경우

그때 쓰레기란 집안일을 본격적으로 해 본 적도, 구체적인 직업을 가져 본 적도 없는 내게 개천가에 붙박인 비닐 조각이나 축대 구석에 버려진 음료수 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쓰레기를 보면 즉시 주워 주변 쓰레기통에 넣거나 집으로 가져와 버릴 정도로 나는 잘 훈련되어 있었다. 가끔은 교실 안 공기를 불균형하게 데우던 난로에 종이를 넣어 태우거나 난로 표면에 지우개를 녹이며 장난을 치고는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으면 그만인 것, 난로에 넣어 태울 수 있는 것, 제대로 버릴 줄 안다면 간혹 칭찬이 딸려 오기도 하는 것, 더러운 것, 치워야 하는 것, 전혀 압도적이지 않은 것, 그리고 다용도실에 딸린 검은 구멍으로 던져 버리면 그뿐인 것이었다. 당시 다른 가정에서, 특히 아파트 거주민들이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살던 집 다용도실에는 말 그대로 검은 구멍이 있어서 여기에 쓰레기를 던지면 몇 초 후에 일 층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구멍에서는 늘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가 났다. 음식물이건 음료수 캔이건 가릴 것 없이 비닐봉지에 넣어 묶은 쓰레기를 검은 구멍으로 던질 때마다 나는 그것들과 영원히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늘 자물쇠가 채워져 노상 굳게 닫혀 있던 쓰레기 창고를 지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창고 근처에서도 항상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가 났다. 우리집까지 풍기지만 않는다면 참을 만한 냄새였다. 언제 어째서 검은 구멍이 사라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연탄 보일러가 도시가스 보일러로 바뀌던 즈음해서 분리수거 정책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던 것 같다고 추측할 뿐이다. 가끔 여전히 대전에(하지만 다른 아파트에) 사시는 부모님 댁을 찾아갈 때마다 나는 구기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작아지는 종잇조각이나 전단지 한 장까지 철저하게 분리수거하는 일상을 보면서 이 훌륭한 행동 양식이 언제부터 몸에 밴 것인지 궁금증이 인다. 서울올림픽은 아니었고, 대전 시민에게는 꽤 큰 사건이었던 1993년의 대전엑스포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앞두고 모범적인 시민의 삶에 요구된 조건 중 하나가 분리수거와 재활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의 기준은 합당한 것일까? 여전히 좀 부족한 기준은 아닐까? 언젠가 예전 집의 검은 구멍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고 아버지는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캐나다의 경우

학교 워크숍으로 캐나다에 간 적이 있다. 절반은 한국 학생, 나머지 절반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영어권 출신의 학생으로 구성된 무리와 함께였다. 닷새가량의 일정이 끝나고 밴쿠버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다 같이 햄버거 세트 메뉴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햄버거 포장지와 먹다 남은 감자튀김, 얼음이 잘강거리는 일회용 컵이 담긴 쟁반을 들고 일어나 분리해서 버리려는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입구가 하나인 커다란 쓰레기통들만 보일 뿐이었다. 내가 당혹스러워하자 한국에서 꽤 오래 체류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캐나다 학생 하나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그냥 한꺼번에 버려요.” 모종의 죄책감과 부끄러움, 민망함이 가미된 웃음이었다. 그러면 음료수는 어떻게 버리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냥 한꺼번에 버리면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커다란 쓰레기통 바닥에 온갖 음식물이며 액체, 포장 종이가 뒤섞여 있는 모습이 자동적으로 연상되었지만 별수 없었다. 공항이라는 특수한 장소여서 쓰레기를 이런 식으로 버리냐고 묻자 그는 아마도 캐나다와 미국 전역에서 같은 식으로 쓰레기를 버릴 거라고 대답했다. 흥미로웠다. 영국에서 온 누군가도 유럽에서도 특히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다. 역시 흥미로웠다. 다 선진국 아닌가요, 내가 농담조로 말하자 다른 사람들은 웃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기계적으로 쓰레기를 분리해서 배출하기를 훈련받아 온 방식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이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그저 액체와 고체, 혹은 재활용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해서 버리는 훈련에 익숙해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분리해서 버렸건 그렇지 않건 내가 쓰레기를 버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분리되어 있건 그렇지 않건 똑같이 거추장스럽고 똑같이 더러우며 똑같이 처리하기 힘든 쓰레기들일 뿐이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어쩌면 당연하게도) 온갖 종류의 쓰레기를 뒤섞어 한데 버리는 방식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배운 대로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리하면서 시민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를 전혀 배출하지 않고 살 수는 없으므로, 항상 쓰레기를 배출해야 하므로 ‘쓰레기와 나의 영원한 분리’는 허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재활용 쓰레기통은 완벽한 분류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플라스틱, 종이, 일반 쓰레기’이거나 ‘타는 쓰레기, 안 타는 쓰레기’이거나 ‘종이, 유리, 캔, 플라스틱, 일반 쓰레기’이거나. 이처럼 대략적으로 구획된 분리수거함 앞에서 폐건전지를 어디에 버려야 할지 몰라 아무 데나 던져 넣으면서 죄책감을 느꼈던 날도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완벽하고 절대적인 분리배출 자체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나는 새삼 궁금해졌다.

 

컴퓨터의 경우

처음으로 소유했던 컴퓨터 생각이 난다. 엄밀히 말해 아버지 소유의 물건이었지만 방과 후부터 아버지의 퇴근 시간 전까지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얼리 어댑터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던 아버지는 꽤 무리해서 286 컴퓨터를 집에 들였다. 둔중한 모노 모니터를 넓적한 상자형 본체에 올려놓은 모양의 컴퓨터였다. 나는 그 컴퓨터를 대개 게임기와 타자기로 사용했다.
그 후로 몇 년에 한 번씩 컴퓨터가 교체되었다. 지금의 생애 주기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그때도 최신 사양은 날마다 업데이트되는 것처럼 보였다. C언어를 수박 겉핥기로 배운 적은 있지만 나는 한 번도 컴퓨터를 유용하게 써 본 적이 없었다. 나와 동생의 공부방이자 아버지의 잡동사니를 한 켠에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작은 방 책장에는 5.25인치 플로피디스크 상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버전도 기억나지 않는 도스와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복사된 플로피디스크들로, 지금은 저용량 USB 하나면 충분할 것들이었다. 나는 몇 년에 한 번씩 바뀌는 컴퓨터들로 부모님 몰래 PC 통신에 올라오는 소설을 읽었다. 처음으로 습작을 쓴 것도 그때였다. 모뎀으로 통신망에 접속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상 세계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무거워서 제대로 들 수도 없었던 구형 모니터와 컴퓨터 본체 들이 어떻게 버려졌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준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버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버려진 풍경은 본 적이 있다. 텔레비전에서였다.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해안가를 비추고 있었다. 낡은 모니터와 한때 컴퓨터였으리라 짐작되는 네모난 덩어리 들이 잔뜩(우리에게는 더 적절한 표현이 필요하다) 쌓인 해변에서 아이들이 폐기물 더미를 헤치며 값나가는 부품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 내가 사용하던 컴퓨터나 적어도 동일한 모델이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고 내가 사용했던 컴퓨터들은 한국의 고물상에서 해체되었겠지만 나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옛날의 컴퓨터가 혹시 거기 있지는 않을지 열심히도 찾았다.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쓰던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 용량은 일 기가였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단위였다. 전화선에 의지에 문서 파일 하나를 겨우 내려받던 시기였다. 하지만 불과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내 무겁고 큰 컴퓨터는 폐물이 되었다. 가장 간단한 프로그램도 돌아가지 않았고, 싸이월드 접속조차 할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된 나는 이래서야 교우 관계에 문제가 생기겠다고 생각하며 동네에서 확성기로 영업 중이던 고물상에 전화를 걸었다. 모니터까지 만 오천 원에 처분해 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 기가와 만 오천 원. 5.25인치 플로피디스크. 구형 컴퓨터에 들어 있던 알량한 파일들은 3.5인치 플로피디스크 몇 장에 들어갔고, 나는 아직도 이것들을 갖고 있다. 적당한 디스크 드라이브가 없어 파일을 열어 볼 수도, 그 안에 어떤 파일들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길도 없다. 그저 버리지 못해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견 조금 달라 보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일들이 벌어졌다. 몇 달 동안 일해 받은 시급의 일부를 털어 처음 중고 노트북을 샀을 때 나는 그 작고 가벼운 물건이 영속하리라고 생각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내 노동의 대가였다. 그렇게 처음 샀던 노트북의 하드 드라이브 용량은 기억나지 않는다. 백 기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기본적인 OS 하나 돌아가기에도 다소 부족한 용량이지만 그때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파일을 이 하드에 다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지했던 것 같다. 이러한 생각들을 갱신하고 또 반복하며 지금이 되었다. 나는 이제껏 사용했던 컴퓨터와 휴대전화 수를 정확히 기억한다. 아마도 노동의 대가로 맞바꾼 물건 중 가장 값비싼 품목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중에는 도둑맞거나 잃어버리지 않은 경우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물건도 있다. 어댑터가 고장나거나 해서 아마도 다시는 전원을 켤 일이 없는 물건이 대다수인데도 어째서 이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폐기물이 된 전자 제품들의 역사가 내 역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면 아직 버리지 못한 것들도 충분히 머리를 아프게 하지만 앞으로 소유하게 될 것들, 따라서 아직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들 또한 대단한 골칫거리임이 분명하다. 지금 사용하는 노트북은 팔 년째 쓰고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은행이나 정부 관련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어 삼 년 전 서브 노트북을 구입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어느덧 하드 드라이브 용량은 일 테라를 가뿐히 넘어섰지만 그 안에는 영영 열어 보지 않을 파일들만 덧없이 쌓이고 있다. 그러므로 컴퓨터와 휴대전화는 내게 물질적인 동시에 크기와 무게를 지니지 않는 무형의 쓰레기가 되어 왔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다. 무형의 쓰레기를 보관하려면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어느 사막 한가운데 있다는 구글의 데이터 서버 센터를 찍은 항공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이미 거대하다라는 단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규모의 건물들이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증축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할머니의 경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와 가족은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다. 단촐하게 사셨던 분이라 따로 정리할 것이 많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옷장을, 아버지가 서랍장을, 내가 찬장을 맡았다. 찬장을 정리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온갖 크기와 모양을 지닌 유리병이 한가득 들어 있어서였다. 신문을 구독하지 않았는데도 차곡차곡 접힌 신문지도 꽤 쌓여 있었다. 할머니가 모아 둔 물건들이었다. 할머니 생전에 나는 여러 차례 유리병들을 내다 버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를 완곡하게 제지하고는 했다. 예전에는 유리병이 아주 귀했기 때문에 할머니 역시 하나라도 수중에 들어오면 깨끗이 씻어 보관하는 습관이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사용 빈도에 비해 너무 많은 유리병을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감히 유리병들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버려지기는 했지만, 나는 아직도 할머니의 유리병 두어 개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죽고 나면 이것들 역시 어딘가에 버려질 것이다.
가끔 내가 버린 물건의 총합이 나를 구성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우리는 이와 유사한 자아관을 여러 버전으로 가지고 있다. 내가 먹는 음식이 나를 구성한다거나, 돈을 지불하는 대상이 나를 구성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쓰레기 역시 자아관을 형성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쓰레기의 경우에는 내가 버린 것들의 총합이 나를 구성하는 것과 더불어 버리지 못했으나 쓰레기가 분명한 것들의 총합이 나를 구성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의 경우, 버리지 못한 쓰레기의 총합이 할머니를 어느 정도 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경우

버린 것이든 버리지 않은 것이든, 양쪽 모두 내게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실해지고 있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말하는 것처럼 쓰레기는 언제고 돌아온다. 쓰레기의 전반적인 이동 경로는 비가시적인 경우 파악하기 힘들지만, 쓰레기가 돌아온다는 것, 혹은 이미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체감하게 되었다.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터지고 며칠이 지났을 때 서울에는 비가 내렸다. 많은 사람이 빗방울에 방사능이 섞였을 거라며 우려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비를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후로 몇 차례 비가 지나가고 나자 나는 방사능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이런저런 수치, 통계, 자료가 동원된 기사를 읽을 때마다 무기력한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오래된 질문의 음화와도 같은 버전인 ‘미세 먼지를 택할래, 방사능을 택할래’라는 질문에서 나는 방사능을 택하고는 했다. 당연히 미세 먼지건 방사능이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보이는 쪽보다는 보이지 않는 쪽이, 당장 괴로운 것보다는 나중에 괴로운 것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다.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파악할 수도 없는 규모의 쓰레기 앞에서 무기력한 기분을 느끼는 것 자체에도 어째서 죄책감이 깃드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는 성년이 되자마자 할머니와 둘이 살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나는 기본적인 살림살이에 완전히 무지한 나를 발견했다. 집에서 요리를 거의 하지 않았으므로 내게 필요한 건 컵이 전부였다. 설거지가 귀찮다는 이유로 나는 종이컵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물이건 커피건 술이건 전부 종이컵에 담아 마시는 철없는 생활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사들인 종이컵을 미처 다 쓰기도 전에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그만두었다. 어릴 때 모범적인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자질을 교육받았기 때문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앞으로도 나는 배운 대로, 훈련받은 대로 쓰레기를 버리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올바른(올바르다고 여겨지는) 환경 정책을 내세우는 정당에 투표하고,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가능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쓰레기를 분리해서 배출하고, 최대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죄책감의 총량을 낮추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강 여기까지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어쩌면 죽음 이후에도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 삶은 나를 쓰레기로, 쓰레기를 나로 둔갑시킨다. 그러므로 분리배출 쓰레기장 앞에 선 나는 다음과 같은 자조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한다. 나는 타는 쓰레기인가, 안 타는 쓰레기인가. 나는 유리인가, 플라스틱인가, 종이인가, 일반 쓰레기인가. 나는 어떤 유형의 쓰레기인가. 나는 쓰레기에 대해 죄책감이 아닌 다른 종류의 감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계속해서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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