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 방위

들어가며

2017년 5월, 전 세계 23만 대 이상의 컴퓨터를 감염시킨 사상 최악의 랜섬웨어 워너크라이WannaCry(‘울고 싶지?’)가 컴퓨터 사용자들을 가히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영국의 국민건강서비스, 러시아 내무부와 방위부, 페덱스, 독일 철도가 최대 피해 기관으로 알려진 가운데 개인 사용자의 피해 사례도 속출했다. 한국에서도 CJ를 비롯한 기업들과 인터넷에 연결된 버스 정류장 컴퓨터들의 감염이 신고되었으며, 이에 청와대를 필두로 국정원, 미래창조과학부, 한국인터넷진흥원 등 관련 기관이 총동원되어 ‘국가 사이버 위기 경보’를 발령하고 대국민 행동 요령을 배포하는 등 국가 재난 수준의 대응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크립토-랜섬웨어crypto-ransomware는 감염된 컴퓨터의 파일들을 사용할 수 없도록 암호화하며, 요구하는 몸값ransom을 낼 때까지 인질로 삼는다. 워너크라이의 경우 암호화된 파일들을 복호화해 주는 대가로 300~600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세계 28개국어로 띄웠다. 보안업체 시만텍은 2016년 한 해 동안 매일 4,000건 이상의 랜섬웨어 공격이 있었다는 통계를 발표했으며, 역시 보안업체인 트렌드마이크로는 2016년 1분기의 랜섬웨어 수가 2015년 전체 수보다 172% 증가했다고 밝혔다. 한편 FBI에 따르면 랜섬웨어 가해자들은 2016년 1분기 미국에서만 2억 9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랜섬웨어 공격의 압도적인 빈도, 피해 규모, 증가 추세에 오늘날 디지털 세상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평범한 컴퓨터 사용자에게 해킹이란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그래서인지 사뭇 낭만적으로까지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랜 세월. 사람들은 해커들이 자신을 공격할 이유도 없거니와 혹여 운이 나빠 바이러스에 감염되더라도 적당히 백신을 설치해 치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해킹 수법은 날로 지능화되었고 그 목적은 악랄해졌다. 이제 보통 사람들이 입는 피해도 무시하지 못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고 해커들은 더 이상 공격 대상을 가리지도 않는 듯하다. 과연 이것은 예측 가능했던 해킹의 필연적 진화일까, 아니면 그 저변에 다른 원인이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해킹의 유형과 진화의 흐름을 간략히 짚고 감히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 현상의 원인과 해법을 논해 보려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직면한 현상에 대한 여러 가능한 추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터, 나는 독자들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 설명이 각자의 지식과 경험에 어느 정도 호환되는지 따져 볼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해킹의 산업화

확실히 과거의 해킹은 꽤나 낭만적이거나 합당한 명분들을 가졌던 것 같다. 해킹의 유래로 종종 언급되는 1970년대의 폰 프리킹phone phreaking은 전화 교환에 쓰이는 다이얼의 톤 시스템을 역설계해 전화기나 별도의 기계를 통해 특정 톤들을 재현함으로써 과금을 피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폰 프리킹은 단순히 공짜 전화 통화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닉슨 정부의 베트남 침공에 반대한 미국 시민들의 대대적인 반전운동과 연계된 것으로 불의한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에 전화비라는 형태의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시민 불복종의 일환이었으며, 길 건너편의 집에 거는 전화를 장거리 전화로 분류하곤 했던 전화 회사들의 부당한 정책에 대한 보이콧이기도 했다. 최초의 인터넷 웜 바이러스의 사례로 회자되는 1988년의 모리스 웜Morris Worm 사건은 남에게 피해를 줄 목적이 아닌, 단순히 인터넷의 규모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에서 스물두 살의 코넬 대학교 학생이 벌인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1995년 FBI에게 붙잡힌 전설적인 해커 케빈 미트닉은 자신의 행위는 결코 이익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단지 해킹이 좋아서 저지른 일이었다고 밝혔다.
한편 사회적 목적을 위해 해킹을 하는 이른바 핵티비스트hacktivist들은 일련의 윤리 강령을 따랐으며 주로 표현의 자유, 인권 보호, 정보 공개와 같은 가치들을 수호하고자 한다. 핵티비즘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1990년 홍콩블론드Hong Kong Blondes라는 해커 조직이 중국인의 자유로운 인터넷 접근을 기치로 중국 컴퓨터망과 인공위성 통신을 해킹한 사건은 주목할 만하다. 또 아랍 민주화 혁명이나 월가 점령 시위 같은 다양한 국내외 정치 문제에 개입했던 익명의 해커 조직 어나니머스 Anonymous, 주로 국가기관이나 기업의 부당한 기밀 정보를 폭로하는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WikiLeaks 등이 모두 핵티비스트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직화된 전문가들이 고도의 전략과 기술을 이용해 주어진 목표 시스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거나 적극적으로 정보를 탈취함으로써 구체적인 사회 변혁을 이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핵티비스트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한 해킹이나 일반인들이 참여한 아마추어적 해킹과는 구분된다.
자유소프트웨어free software 운동 역시 해킹의 역사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GPL(General Public License, 일반 공중 사용 허가서)과 카피레프트copyleft 개념으로 대변되는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은 소프트웨어의 독점적 상업화에 맞서 공유라는 소프트웨어의 본래 생산·유통 방식을 복원하고자 한 운동으로, 그 핵심 정신은 소프트웨어의 소스코드를 공개해 누구나 소프트웨어를 수정할 수 있게 하며 자유로운 복제와 배포를 허용하자는 것이다(https://www.gnu.org). 경제학자 장하준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멀리 보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라는 아이작 뉴턴의 말을 인용하며 아이디어란 여러 주체의 지적인 노력이 혼합된 발효조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므로 어떤 발명품에 ‘마지막 손질’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영예와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기술을 독점하려는 기업들의 선전과는 달리 지적 재산권의 지나친 보호로 인해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의 생산 비용이 높아지고 기술 발전이 가로막힌다고 역설한다. 이는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컴퓨터 역사 초창기에는 독점 소프트웨어란 일종의 불온한 개념이었다. 예컨대 많은 사용자의 사랑과 공분을 동시에 산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 운영체제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raphic User Interface가 발전하는 데 무시할 수 없는 공헌을 하긴 했지만 사실상 이는 공개 컴퓨터 기술의 바탕 위에서 이룬 결과물을 독점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는 웹브라우저와 미디어플레이어 등 시장의 경쟁에서 밀리던 자사의 제품들을 윈도우즈에 끼워 팖으로써 자본력과 운영체제 판매사로서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를 일삼았다. 게다가 윈도우즈의 높은 가격은 사회적 약자들의 디지털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회적 논쟁도 불러일으켰다. 이에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많은 해킹 사례는 윈도우즈 같은 독점적 소프트웨어를 대상으로 한 일종의 사보타주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설치 CD의 라이선스 번호에 대한 크래킹과 복제본의 무단 배포, 시스템의 취약점을 이용한 바이러스 공격 등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다.
반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날로 늘어나는 멀웨어, 스팸, 피싱, 랜섬웨어의 피해 사례는 해킹 기술이 금전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악의적 수단으로 완전히 변모했음을 보여 준다. 과거에는 단순히 홈페이지 이미지를 교체하거나 반대급부에 대한 요구 없이 시스템을 파괴하는 식의 단순한 공격이 주를 이루었다면 오늘날에는 표준화・기계화된 프로세스와 교활한 전략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공격이 유행하고 있다. 과거 호기심의 충족, 불의에 대한 저항, 메시지의 전달, 역량의 자랑을 위해 활동했던 해커들은 발견된 시스템의 취약성을 대중에게 공개하곤 했지만 오늘날 해커들은 자신들의 수익에 직결되는 이러한 정보와 그를 처리하는 기술을 독점한다. 이른바 해킹의 산업화industrialization of hacking가 더 신속하고 효율적인 범죄 경제 생태계criminal economy를 구축했으며 이제 해킹은 마약 거래나 인신매매와 다를 바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독버섯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개인들이 입는 해킹 피해가 과거와 달리 부수적이거나 간접적인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는 점이다. 웬만큼 운이 없지 않고서야 일반 개인이 해킹을 당할 리 없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제 대대적인 스캐닝을 통해 취약점이 파악된 불특정 다수의 컴퓨터가 즉시 일차 공격의 대상이 된다. 거대화된 네트워크와 서비스에 더 많은 사용자가 연결된 요즘, 해킹은 돈벌이 수단이 되고 변변한 방어 수단조차 갖추지 못한 평범한 시민의 재산과 개인 정보는 해킹 공격의 직접적인 피해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상태다.
해킹의 산업화에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실물경제의 운용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이 가속화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해커가 수익 추구 수단으로서 해킹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리라. 또한 세계화에 따른 경제의 통폐합과 그에 병행되는 시스템의 거대화는 설계상 이른바 단일 장애점single point of failure을 부르게 마련이고 해커들에게 이것은 최소 투입 최대 효과를 가능케 하는 매력적인 조건이다. 실제로 소수의 중앙 서버에 민감한 개인 정보와 재산을 통합해 관리하는 거대 글로벌 웹서비스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수천만의 개인 정보 및 재산을 탈취당하곤 한다. 디지털 자원의 집중과 해킹의 산업화 간에 인과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나는 그 이면에 보다 본질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이 작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아무래도 구식이어서 여전히 인간의 양심과 품위라는 것을 믿고 싶고 이기심과 악이 당당한 세상을 필연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사회적 불평등과 그로 인해 만연하는 불신과 증오를 해킹 산업화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하겠다. 불공정한 사회에서는 유사 이래 늘 있어 왔던 노골적인 범죄자들뿐 아니라 기술자로서의 자긍심과 양심을 지닌 컴퓨터 전문가들마저 해킹을 통해 금전적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불공정함에 대한 저항이거나 시스템의 횡포에 대한 정당방위라는 의식이 범죄 행위에 대한 간편한 변명 혹은 면죄부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자신을 불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자경단이나 의적 로빈 후드와 동일시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다. 이에 즉시 뒤따르는 물음은 시스템과 해커 가운데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가해자인가이다. 그들의 착각 혹은 믿음대로 해킹이 정당방위라면, 이를 막기 위한 시스템의 노력은 부당 방위가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 사회는 정말 불공정한가? 만약 그렇다면 그 근본적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기울어진 운동장

지난 반세기에 걸쳐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해 온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경제 이념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악으로 규정하고 시장의 완전한 자유를 통한 자본주의의 극단화를 지향한다.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의 수사를 들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 두기만 하면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시장과 이윤이 촉진된다고 주장한다. 경제 주체들의 이기심과 경쟁에 의해 형성되는 수요와 공급이 시장에 균형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 사상의 기초가 되는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무시한 채 후속작 격인 «국부론»의 일부만을 떼어 인용하면서 이념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것은 «구약성서»는 읽지 않고 «신약성서»만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과 진배없다. 이는 무지에서 비롯한 고전의 오독이거나 숨은 의도가 있는 발췌다. 나는 18세기 군주제가 야기한 통치 세력의 폭력과 불공정한 경쟁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던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을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조절 정책 일체를 부정하는 논리로 아전인수하고 왜곡했다고 생각한다.
정작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방임주의에만이 아니라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도 우려를 제기했으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 공정한 경쟁을 위한 국가의 심판 역할은 물론이고 정의를 강조했다. 정의란 사회 구성원들의 도덕성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형성된 공감대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사회복지 제도의 개념이 출현하기 전인 18세기에 시장의 성공을 위해 정의에 호소한 것은 자유 시장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더욱 처절하게 반증하는 것 같다. 실제로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이 공공의 선을 만든다는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를 ‘오류’라며 가차 없이 비난했다. 효율성의 촉진은 시장의 지속적인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거니와 시장의 성공이 곧 사회의 성공이나 구성원의 행복을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의 이념을 이렇듯 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되돌아본다면, 자본소득률이 점점 노동소득률을 앞질러 온 지난 200여 년의 흐름에서 얼마나 끔찍한 부의 불평등이 초래되었는지를 규명하고 국가의 재분배 기능이 모두 사라지게 되면 비민주적인 소수 지배가 생겨난다는 주장을 펼친 토마 피케티 같은 오늘날의 주목받는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수정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케인스학파, 심지어 초기 자본주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친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과도 일부 접점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해법은 달랐을지 몰라도 한결같이 시장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있기에 서로 달라 보이는 생각들 간의 상호 보완 여지가 있다. 반면 시장의 ‘완전한’ 자유를 움직일 수 없는 ‘목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다른 이념들과의 혼합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극단적 본질을 지닌 신자유주의는 내가 보기에 종교적 근본주의에 가깝다. 경제학이 환경 파괴, 천연자원 고갈, 사회·문화적 갈등과 같이 계산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들을 이론상의 편의를 위해 외부화한 덕분에 시장경제의 성질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모델을 정립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가 성장률, 국내총생산, 1인당 국민소득, 자본 산출 비율, 주가 따위의 추상적인 수치에만 병적으로 집착하면서 정작 인간의 삶에 중요한 현실 문제들을 도외시한 결과 대중은 참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허울뿐인 세계화(일반화)globalization는 국가와 민족 들 간의 화합은커녕 시장의 ‘병합’과 다양성의 파괴를 야기했다. 관세의 완벽한 철폐와 시장의 완전 개방을 기조로 하는 자유무역은 비교우위론을 내세우며 많은 나라(특히 힘이 없는 개발도상국)의 기간산업을 피폐화했는데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편에서 보면 이것은 ‘강요된’ 무역에 가깝다. 국민을 대변해야 할 많은 나라의 정부는 그저 글로벌 기업의 편의를 봐 주는 허수아비 기구로 전락하거나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 놓였다. 국민의 세금은 나라의 기반을 다지거나 복지를 향상시키는 정책 대신 원거리 수송, 값싼 노동력, 자본의 자유로운(규제가 전혀 없는) 이동 등을 필요로 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업에 우선적으로 쓰인다. 소수 글로벌 기업의 상품들은 이러한 숨겨진 혜택과 자본력으로 지역 단위 시장을 왜곡하며 필연적으로 경쟁에서 승리한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소품종 대량생산이 유리한 법, 시장의 인기 상품을 중심으로 표준화와 획일화 과정이 반복된다. 문화와 상품의 다양성은 점점 줄어들고 표준으로 채택되지 못한 것들은 그 가치와 무관하게 사라진다. 대도시 위주의 글로벌 경제성장은 지역의 고용 안정성을 악화시키고 실업을 늘린다. 지역의 실업은 자연히 도시로의 이주를 부르고 도시의 비대화는 결국 지역과 도시의 상호 파괴를 야기한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시장은 행복이라는 가치에 역행하는 결정들을 유도하곤 한다. 군산복합체 기업들은 범죄와 전쟁을 촉진시키고자 정부에 로비를 한다. 녹지와 유적지는 수익성의 요구 앞에 무참히 파괴되고 난개발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제 우리의 자연은 자정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오염되었고,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출처 불분명의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 레이블조차 없이 동네 슈퍼마켓에서 팔린다. 공공 부문을 죄악시하는 민영화(사유화)privatization에 따라 교통, 통신, 의료 등 현대 생활에 필수적인 영역에서조차 이윤 추구가 지상 과제가 된 결과 수익성이 높지 않은 필수 서비스는 폐지된다. 경찰, 소방, 보건과 같은 공공 부문에 대한 예산 삭감으로 시민 안전은 뒷전이 되었다. 시장의 과도한 경쟁은 비효율적인 자원 투입을 초래하고 이른바 인공적 필요artificial need를 양산한다. 인공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겨난 현대의 많은 직업은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소득을 올리는 반면 실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가치를 창조하는 직업은 소외받는다. 지나친 분업화로 인해 창의성은 질식하고 인간성은 모욕당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긍심에 상처를 입는다. 인간은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능과 성능을 갖춘 ‘모듈’로 전락한다.
규제 없는 시장이 야기한 부의 양극화는 이제 우리의 가치 체계인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마저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달러 1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시장은 1인 1표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충돌’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조절 정책을 거부한 채 파티를 계속하다 인플레이션과 거품 경제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는 시장은 미국의 대공황 같은 경기 침체와 2007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의 글로벌 경제 위기를 유발할 수밖에 없지만 그 뒷수습은 국가의 몫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가 이루어진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지속적이고 공정한 경쟁조차 불가능하며, 기회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은 무너진다. 자유경쟁을 통해 자유경쟁의 운동장 자체가 무너져 버리는 이 모순은 곧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경쟁 시스템과 사회 안전망에서 완전히 탈락해 버리면 자연히 절망과 증오에 따른 범죄와 테러리즘이 늘어나게 된다.

 

가치의 상실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문제들을 끝도 없이 나열함으로써 그것이 가진 이점마저 송두리째 부정하거나 혹은 그 대척점에 있는 또 다른 ‘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타파하고 남은 폐허 위에 무엇을 대신 세워야 할지 알지 못한다’. 다만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중대한 모순을 빚고 있는 자본주의는 이 세계를 불완전하게 설명하고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불완전한 해법을 제시하는 경제 이념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정할 것을 제안한다. 안타깝게도 신자유주의가 내포하는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논리는 이제 ‘시장’의 성질을 설명하는 레토릭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윤리 규범이 되어 버린 듯하다. 무한 경쟁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도덕과 양심, 사회적 의무 따위를 따르려는 노력은 조롱당하며 시장의 실패나 한계를 보완하거나 그에 대응하기 위한 대책들은 신성한 시장을 위협하는 비경제적인 ‘악’으로 묘사된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세상인가? 우리는 통신 회사들의 과열 경쟁이 빚은 막대한 비용의 중복된 인프라 투자 덕에 서울 시내 곳곳에서, 심지어 달리는 버스와 지하철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인터넷 즐기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점심 식사를 거르는 아이들과 겨울의 차디찬 쪽방과 거리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 가는 노인들이 넘쳐나는 모순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인간을 배제하고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을 야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개발과 효율화는 꼭 필요한가? 시장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와 일치하는가 아니면 충돌하는가? 우리는 공정한 레이스를 위해 더 엄격한 심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레이스에서 진 사람들이 다음 라운드에서 다시 뛸 수 있게 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영원히 탈락시키길 원하는가? 경쟁의 패배자를 죽게 내버려 둔다면 과연 인간 사회가 세렝게티의 초원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손익분기점을 계산하고 주식시장의 변동을 예측하는 따위의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구하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나는 사회의 모든 것을 수요-공급 곡선으로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적 태도와 경제성을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에 반대한다. 어떤 정책이나 행위는 시장의 관점에서 애써 설명할 필요 없이 그저 윤리적으로, 인간의 염치나 품위 면에서, 혹은 정치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일 수 있다. 오히려 시장에서의 손해를 감수하고서 내리는 어떤 결정들이 한 인간, 한 사회가 시장보다 고결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서 ‘경제학의 사고방식이 시장에 의거하는 한, 생명 속의 신성함은 상실’되어 버리는데, 이는 ‘값이 매겨진 것에는 신성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경제 문제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반에 퍼지면 양심이나 건강, 깨끗함 따위의 전혀 경제 외적인 가치조차도 그것이 경제적이지 않은 한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시장의 논리가 우리의 가치 체계와 정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지속 가능한 경쟁

다행히 최근 들어 세계 정치권에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무자비한 행진에 제동을 거는 신호들이 감지되고 있다. 2017년 영국 총선에서 ‘For the Many, Not the Few’(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라는 슬로건을 걸고 그간 지지부진했던 노동당을 승리로 이끈 제러미 코빈, 월스트리트의 입김이 거센 미국 정가에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 2015년 캐나다 총선에서 장기 집권 보수당에 과반 압승을 거둔 쥐스탱 트뤼도 총리 등은 모두 사회민주주의자로 신자유주의 일변도였던 서구 선진국들에서 정치 판도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도 이재명 성남시장이 2017년 대선을 위한 더불어민주당 경선에 지역화폐와 연동된 기본소득, 토지세 등 유권자에게 아직 생소한 정책을 들고 도전해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두었으며, 그의 정책과 아이디어 들은 경선에서 승리한 경쟁자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 공약에 부분적으로 차용되었다. 자본주의의 프런티어인 우편향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정책들이 괄목할 만한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책 구현상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와 같은 정치 세력들은 대체로 복지 제도의 복원, 누진적 조세 제도, 노동자 권익 보장, 국가 기간산업이나 여타 국민 삶의 필수 영역에 대한 전면 민영화의 재고, 탈핵과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의 발굴, 환경 파괴에 대한 대응, 민주적 가치의 구현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대중적 인기는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주장인 이른바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에 대중이 가졌던 환상의 종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민간과 시민사회 영역에서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자본주의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한 20세기의 끝자락부터 지속 가능성, 적정 기술, 사회적 기업, 지역화, 마이크로크레디트 같은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관심은 이제 공장식 축산에 대응하는 폴리페이스 농장Poliface Farm, 지역 농산물 이용 운동, 유전자 변형 식품 반대 운동, 가난한 지역의 영세민을 위한 소액 대출, 지역 화폐와 물물교환, 반핵·반전 운동 등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들은 자본의 논리에 맞서 사회를 실질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들은 언뜻 서로 무관해 보이는 각각의 주제나 목표를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이 복잡다단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데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탓에, 정부가 주도하는 상향식 위로부터의 접근 방식으로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이 운동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보완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앞서 다루었던 소프트웨어 독점의 문제에 있어서는 컴퓨터 역사 초창기부터 자본주의의 생리가 디지털 영역에 미치는 숙명적인 악영향에 대한 통찰을 가졌던 많은 지성과 전 세계 개발자 커뮤니티의 거센 대응 덕분에 공공성이 얼마간 지켜졌다. 핀란드의 개발자 리누스 토발즈가 주축이 되어 개발한 오픈소스 운영체제 리눅스는 유닉스나 윈도우즈 같은 상용 운영체제의 대체재가 되어 왔다. 개발 초기에는 응용프로그램들의 호환성 문제, 책임성의 부재, 컴퓨터 지식이 부족한 대중에게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때문에 고전했으나 개발자 커뮤니티의 공헌이 꾸준히 전개된 덕분에 이제 리눅스는 기업뿐 아니라 개인용 운영체제 시장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리눅스 배포판에 대한 유지·보수와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레드햇Red Hat과 같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성공적인 수익 모델은 이제 운영체제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전반으로 확장되었다. 아파치 소프트웨어 재단Apache Software Foundation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 , 모바일 기기 운영체제 안드로이드 Android, 빅데이터의 하둡Hadoop, 클라우드 컴퓨팅의 오픈스택OpenStack, 파이어폭스Firefox 웹브라우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의 PostgreSQL 등은 날로 번성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생태계를 보여 주는 극히 일부 예시에 불과하다. 이들의 경쟁력이 독점 소프트웨어 시장의 아성을 무너뜨려 기업들은 앞다투어 오픈소스 프로젝트들의 후원자를 자처하게 됐으며 급기야 2017년에는 독점 기업의 대명사 마이크로소프트조차 자사 제품의 전면적인 오픈소스화는 물론 개방형 기술 표준의 사용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소프트웨어 공공화의 의미 있는 승리이다.
이러한 대안적 정치 세력과 개별적인 민간 운동 들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방안이나 그것의 궁극적 성공 여부 및 의미를 이 짧은 글에서 일일이 따지지는 않겠다. 그것은 아직 현재진행형인 사례들에 대한 각고의 연구와 공부를 필요로 하는 일일 터, 독자들의 호기심에 맡겨 두겠다. 다만 이 논의의 시사점은 이들이 결국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 혹은 그에 저항하려는 방향을 취하고 있으며 오늘날 경제 이념이 차지한 가치 체계로서의 지위를 박탈함으로써 그러한 방향 전환을 이루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지형 변화가 어떠한 경제 시스템도 극단으로 흐를 때 정치적 불안정과 반작용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그리고 다수의 구성원이 수긍할 수 있는 분배 정의를 통해 사회의 근원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자유 시장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해

최신 디지털 기술에 정통한 영국의 인문학자 마틴 폴 이브는 디지털 보안에 관한 그의 저서 『패스워드』에서 “내가 아내를 믿는다면 질투심에 사로잡힌 애인처럼 그녀에게 세세한 일정표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며 “인증 기관에 공개 키의 인증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신뢰를 구축했다고 할 수는 없”다며 오늘날의 공개 키 메커니즘과 그에 대한 인증 기관의 보증이 디지털 보안 침해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렇다. 어떤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현상의 억제가 아니라 원인의 제거일 터이다. 식민주의와 패권적 외교 정책을 유지하는 국가가 국경을 따라 장벽을 세운다고 난민과 테러리스트의 유입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을 것이며(미국의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공약이었다) 강력한 진통제만으로 우리 몸의 암 덩어리를 완치할 수도 없는 법이다. 사회의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보안 기술이 다수의 이해 및 공공의 안전을 위하기보다 자원의 독점을 공고히 하고 사유화를 심화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될 때,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해킹 기술에 쫓기는 처지가 되어 버린 방어 기술을 그때그때 고안해 대응하는 것은 미봉책에 그칠 것이다. 오늘날 산업화된 해킹의 근본 원인 중에 사회적 불평등이 있다면, 이 불평등을 해소해야만 해킹의 산업화를 궁극적으로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기술적 해법이나 물질적 투자보다도 사회의 정당성과 정의라는 주춧돌을 바로 놓는 일이며 상실된 가치와 빈곤한 철학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사회는 해커들로부터 그들 행위의 명분을 박탈하고 그들의 양심과 인간적 품위에 호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매카시즘의 선전과는 달리 많은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은 국가가 어떤 일방의 경제 이념을 택할지를 특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경제 질서에 관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헌법이 수호하는 민주주의 질서 위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상위 1%의 부자와 엘리트, 거대 기업 같은 소수의 이익이 아닌 다수의 행복을 대변하는 다양한 경제정책을 혼합해야 할 것이며 그 과정에 수반되는 사회적 모순들을 방치하거나 약자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떤 경제 이념을 사회의 주된 기조로 삼을지라도 그것의 오류, 한계, 모순, 실패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정반합의 과정을 거칠 때, 그것에 수단을 넘어선 목적의 지위를 부여하기를 당당히 거부할 때, 비로소 사회의 공정하고 지속적인 번영은 물론 디지털 세상의 안전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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