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너무슬픔’이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오늘너무슬픔’이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다 [1]

2016년 3월 15일 | 헤더 해브릴레스키
김지현 옮김

슬픈 사람은 외로워지기 쉽다. 온라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곳은 파티에서 찍은 셀카, 요가 여행에 대한 페북 포스트, 최근에 당신이 가지 못했던 엄청 재밌는 이벤트에 대해 신나게 떠드는 사람들의 트윗 등이 넘실거리는 바다니까. 하지만 그 틈에는 불안의 섬, 애정 결핍 아웃사이더들의 놀이터도 존재한다. 멀리사 브로더의 ‘오늘너무슬픔’@sosadtoday 트위터 계정이 바로 그곳이다. “네가 두려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다른 나쁜 일이 일어날걸.” 2016년 3월 10일 자 트윗이다. 3월 9일에는 “내 불안이 여전한지 5초에 한 번씩 확인하는 것도 재능이지”, 3월 8일에는 “나는 뚱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무한한 우주의 작은 점일 뿐이야”라는 트윗이 올라왔다. 브로더가 이 익명의 계정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고독과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트윗을 하다 보니 고통은 의외로 친구 사귀기를 좋아할뿐더러, 고통을 재치 있게 표현한 트윗들을 하루에 최소 500~1000회 이상 리트윗하기를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0만 명의 팔로워가 열광적으로 리트윗하는 트위터 계정에는 으레 출판 제의가 간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나온 책들을 막상 읽어 보면 쓸데없고 장황한 말장난일 뿐이어서, 그냥 간결한 140자짜리 글들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경우가 많다. 브로더의 에세이집 «오늘 너무 슬픔»은 도발적인 예외다. 이 책에서 그녀는 자신이 트위터에 올렸던 음울한 단문들을 길게 잡아 늘이지 않고, 내밀한 고백과 편지글 들을 아찔하도록 현란하게 펼쳐 나간다. 구토에 대한 페티시가 있다는 것부터 지난 12년 동안 니코틴 껌을 30분마다 한 알씩 씹으며 지냈다는 것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까발리는 글들이다. 한 챕터에서는 평생에 걸쳐 벌여 온 섭식장애와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가 하면(“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먹보다. 나는 나 자신에게 형편없는 엄마고, 내 몸을 관리하는 솜씨가 형편없는 집사다”), 또 한 챕터에서는 실제로 만나지도 않은 남자와 수개월 동안 나눈 섹스팅에 대해 털어놓기도 한다(“그: 좁은 통풍관 안에서 너랑 떡 치고 싶어. 둘이 온몸을 딱 붙이고”). 자신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더 나아가 그 비밀들을 농담, 속임수, 깊은 모멸감, 허세, 시적 표현들로 장식하는 그녀의 능력은 가히 초자연적인 수준이라 할 만하다.
브로더는 직접 만나 보면 의외로 명랑하고 활달한 사람이다. 너무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화창한 캘리포니아 베니스 해변에 사는 세련된 전문직 여성으로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그녀와 점심을 먹으며 두 시간에 걸쳐 까다로운 질문을 많이 던질 수 있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자기 긍정을 위한 지난한 여정을 거쳐 온 사람답게, 솔직하고도 편안한 태도로 자신의 타고난 모순과 작품에 대한 내적 갈등 들을 털어놓았다.

당신의 책은 트위터와 마찬가지로 꽤 삐딱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아요. 주변 세상에 처음으로 의문을 갖게 된 건 언제였나요?
저는 필라델피아 외곽에 있는 브린모어 지역에서 자랐어요.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 엄청난 약쟁이가 되었고요. 주변에 저처럼 환각제에 절어 사는 사람이 많았죠. 핑크 플로이드에 심취했고, 세계에 대한 진실을 안다고 믿었어요. 그게 정확히 뭔진 몰라도, 아무튼 사회가 나쁘고 세상이 어떤 구조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반자본주의와 반기업적인 것들, 대충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환각 버섯을 많이 했을 것 같네요.
무진장 많이 했죠. 환각 버섯도, LSD도요.

약 기운이 돌면 세상의 모든 게 이해가 된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러다 결국에는 시시한 결론으로 압축되곤 하죠. “삶이란 눈물 한 방울 같구나!”라고나 할까요.
맞아요. 진실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약에서 깨고 나면 그 진실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할아버지가 빌려주신 커다란 포드 브롱코를 몰고 동네에 피자를 배달하고 다니면서, 나는 진실을 안다, 나는 반자본주의자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던 거죠. 자본주의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러다가 졸업하기 전 봄방학 때 엄마가 이러는 거예요. “너 이제 정장 사 입고 뉴욕으로 가서 입사 면접 봐라.” 그러자 제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네? 회사에 들어가라고요?”

«오늘 너무 슬픔»의 지은이로 세상에 알려지는 심정이 어떠세요? 지금 그걸 준비하는 단계에 있을 텐데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상해요. 원래 저는 제 심정이 어떤지 정확히 아는 때가 별로 없어요. 심정이라는 걸 파악해 본 적이 아예 없는 것 같네요. 생각해 보면 불안은 진짜 감정을 숨기는 가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속에서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얼마나 많이 쌓이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기도 한 것 같아요. 감정이 엄청 많이 쌓이면 불안도 엄청 심해지는 식이에요.

불안할 때는 불안감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나요? 제 생각엔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고, 자질구레한 결정을 내리고, 그럴 것 같은데요.
맞아요. 요즘은 헤어 관리 문제로 위기에 빠져 있어요. 물론 진짜 위기는 아니고요, 책 출간에 대한 불안감을 내 머리카락에다 온통 쏟아붓고 있는 거죠. 이를테면 미용실에 가서 염색을 하고는 집에서 엄청 번거로운 케라틴 트리트먼트를 죽을 지경으로 해 대는 거예요. 죽는 건 괜찮아요. 죽음에 대한 각오는 되어 있어요. 그런데 머리카락 끝이 너무 건조해져서 못 참겠단 말이죠. 거기에 막 집착하는 거예요. 그러다 제 담당 미용사한테 문자 보내서 막 난리 난리를 치면서 “내가 미친 걸까요?” 이랬더니, 미용사가 “그냥 여기로 와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헤어 팩에 돈을 왕창 쏟아부어 놓고는 결국엔 머리 끝을 다듬게 됐는데, 그러면서 이번에는 미용사가 너무 짧게 자를까 봐 안달복달했어요. “너무 짧게 치진 마요. 머리카락은 내 생명이란 말예요” 이러면서요. 저는 머리카락이 절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자신이 세상에 노출된 느낌 때문에 약간 부담되시진 않나요?
글쎄요, 아직 책이 나온 건 아니니까 딱히 그렇진 않아요. 제 부모님은 읽으면 안 돼요. 너무 더러운 내용이라서.

부모님께 읽지 마시라고 말씀드린 건가요?
네. 시집들 나왔을 때도 매번 그랬어요. 어차피 아빠한테 “읽지 마세요” 해 봤자 아빠는 그 책을 들고 찍은 사진을 문자로 보내고 그랬지만요. 그래도 뭐, 어차피 시는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이번 책은 너무 서사적이고, 직선적이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불안해요.
엄마는 예전부터 저한테 계속 “네 책은 언제 반스 앤 노블 서점에 나오니?”라고 묻더라고요. 반스 앤 노블에서 파는 책이 아니면 책으로 치지 않으시는 거죠. 이번 책은 드디어 반스 앤 노블에서도 팔 거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안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를 자랑스러워하시되, 정확히 뭐에 대해 자랑스러운지는 모르셨으면 좋겠어요.

이 책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많은 걸 드러내시는데요, 이런 글을 쓰게 되는 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자기 고백적인 인간이 된 건 방어기제 때문이에요. 내 결점을 남에게 들키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해 버리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늘 너무 슬픔» 책을 내면서 이제껏 지켜 왔던 익명을 깨려니 참 희한한 기분이네요. 여태 딱 한 사람한테만 말했는데 말이죠. 거의 3년 동안 비밀을 지켜 왔는데, 비밀을 잘 못 지키는 성격인 저한테는 대단한 일이에요. 트위터를 익명으로 했던 이유는 순수하게 글만 올리는 곳으로 두고 싶어서기도 했지만, 트윗을 너무 많이 하는 게 창피하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하루 온종일 트윗을 하니까요. 그리고 처음에 계정을 만들었을 때는 무엇보다도 내 목숨을 건사하려는 목적이었고요.

시작하셨을 때가 몇 연도였죠?
2012년요. 남편 건강 문제로 L.A.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을 때였어요. 남편이 신경면역계 질환 환자거든요. 살생 세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병이에요. 만성적으로 선열(腺熱)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상태라서, 앞으로는 내리 몇 달씩 침대에만 누워 지내게 될 거예요.

만약 제가 그런 상태가 된다면 많이 우울해질 것 같아요.
어떻게 여태 자살을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기적 같다고 할까요. 삶에 대한 욕망이 진짜로 절실한 사람들 있잖아요, 남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저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리고 병을 앓은 지 오래됐어요. 거의 15년쯤 됐는데, 병세가 그동안 많이 변했죠. 초기에는 세 달쯤 열이 심하게 나다가 1년 정도는 멀쩡해지는 식으로 오락가락했거든요. 그러니까 남편은 운동도 할 수 있고, 외출도, 음주도 할 수 있고, 하여튼 뭐든지 건강한 사람처럼 다 할 수 있었어요. 이따금씩 또 병이 도졌지만 그러다가도 다시 나아졌고, 그러면 다음에 병이 또 도질 거라는 생각을 안 하고 지냈죠. 현실 부정에 빠져들기가 굉장히 쉬운 패턴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병이 도지는 시기가 점점 길어지고 잦아지더니, 이제는 아예 한 순간도 멀쩡하게 지낼 수 없게 되어 버린 거예요.
그렇게 해서 2012년 가을에 저는 우리가 뉴욕을 떠나 다른 데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리고 병세가 변해서 이제는 한숨 돌릴 틈도 없게 됐다는 걸 깨달았고, 그 병이 진행성이었다는 사실도 뚜렷하게 인지했고요. 그러니까 현실 부정을 할 틈이 없어진 셈이었죠. 그랬던 데다 전 또 공황 발작과 불안 장애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싶은 상황이었어요. 그때 엄청 심각한 공황 발작이 왔고, 그러고 나니 또다시 발작이 일어날까 봐 엄청나게 두려워졌어요.

제 친구도 그런 경험을 겪었어요. 공황 발작이 일어날 거라는 공포 그 자체가 투병의 절반이라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악순환이 되어 버려요. 친구 분에게 인지행동치료를 권해요. 저는 정신역동요법을 굉장히 오래 했는데 불안장애에는 아무 도움도 안 돼요. 도구가 필요해요.

당신의 불안은 어떤 형태를 취하나요?
음,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상상력이에요. 지나친 각성 상태라고 할까요. 제 경우에는 이 삶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모두가 이해하길 바라게 돼요. 그게 바로 핑크 플로이드적인 진실이죠.
제가 늘 부딪히는 궁극적인 의문은 이거예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는 사람이 나 말곤 또 없나?” 그리고 불안이 극에 달하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들어요. “대체 어떻게 사람들이 충격을 안 받을 수가 있지?” 이건 허탈한 마음에 “왜 살지?” 하는 거라기보단, 겁에 질려서 “왜 사는 거야?”라고 묻게 되는 것에 가까워요. 이게 대체 다 뭘까? 어떻게 다들 이 문제에 파고들지 않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 저는 쓸데없이 사소한 것에 파고들기도 해요. 머리카락 가지고 안달복달하느라 일주일을 날렸다니까요. 제 생각에 이건 사치인 것 같아요.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존재론적으로도 사치죠. 어쩔 때는 너무 무서워서 내가 두 번 다시는 저 공포에 블라인드를 내릴 수 없을 거라는, 이 상태가 곧 내 현실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제 공포의 절반은 공포가 영원이 계속될 거라는 극단적인 상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악순환에 빠지면 굉장히 외로워지죠. 어째서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나 몰라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종교가 있는 것 같기는 해요. 자기들만의 서사나 상징 등으로 표현하긴 하지만. 그런데 그런 종교들 역시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는 않더라고요.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지 않나요?
정말로 힘든 시기를 보낸, 제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친구가 몇 있죠.

하지만 그분들에게 정말로 손을 내밀긴 하세요?
아뇨, 별로!

트위터에 손을 내미시겠죠, 그쵸?
맞아요. 그냥 트윗으로 풀고 말아요. 제가 트위터를 그만둔다면 그때야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어볼걸요.

트위터에서도 그렇고 책에서도 그렇고,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마법의 힘을 불어넣은 다음 그 사람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려고 애쓰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보기엔 당신이 마법을 원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걸 투사한 다음 그 사람이 거꾸로 당신에게 마법을 가져다준 거라고 상상하시는 것 같았어요. 한 남자와 문자 주고받는 내용의 챕터 있잖아요, 거기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는데요. 그 남자가 당신을 낭만화하는 방식은 사실 전부 당신에게서 배운 것처럼 보였어요. 그가 당신이 뭘 원하는지를 눈치채고 그걸 당신에게 되돌려 준 거라고나 할까요.
그렇죠. 아마 그냥 나랑 섹스하려고 그랬겠죠.

음, 거의 모든 사랑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쵸, 너무 슬퍼요! “아마 그냥 섹스하려고 그랬을 거다. 끝.” 아무튼 그래요, 전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고, 상대방에게 그 이야기 속의 배역을 맡아 달라고 하는 식이에요. 그리고 마법이 정말로 있다고 믿고 싶어요. 이건 환각제 하던 시절부터 생긴 믿음이에요. 우린 살아 있잖아요. 단순한 기능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죠.

마법에 대한 욕망은 정말 중독적인 것 같아요. 제 20대 시절이 생각나네요. 진탕 취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까? 예술, 섹스, 디오니소스적인 광란의 파티 같은 거나 하지 않고?”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게요. 우린 돈을 불태우고 섹스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마법에 대한 열망이 자신을 완전히 집어삼켜 버리기도 하지 않나요?
맞아요. 가끔은 내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될까 봐 무서워요. 저는 심각한 완벽주의자거든요. 일주일쯤 휴가를 갖는 건 엄두도 못 내요. 그랬다가 영영 일상으로 못 돌아가면 어떡해요? 그래서 ‘오늘너무슬픔’ 계정을 만든 거예요. 사무실에서 열심히 작업하다가, 어느 순간 집중이 안 되고 몸이 막 떨리고 그럴 때 내 어둠을 쏟아 놓을 장소가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트윗들을 써 놓고 보면 되게 반항아처럼, 썅, 다 꺼져 버려, 뭐 이런 어조가 되더라고요. 저는 딱히 반항적인 사람들하고 어울리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런 태도를 취하면 기분이 좋긴 해요. “나는 유머 감각이 있고, 사캐즘, 위트도 있는 사람이고, 내가 그렇다는 걸 나도 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네 세상에 엮이고 싶지 않다, 내가 그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당신네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나는 애초에 원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나 자신을 보호하기에 좋은 수단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확실히 중독적이죠.

책에도 트위터에도 슬픔은 많이 보이는데, 분노는 그만큼 표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분노를 표현하고 싶지 않아요. 화를 낸다는 건 그만큼 신경을 쓴다는 뜻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신경을 쓴다면 거부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되고요.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제 사고방식이 이따위라는 얘기예요.

분노할 때는 마음을 너무 많이 쏟게 된다는 거군요.
네. 화가 나면 루저가 되는 기분이에요. 난 그냥 “됐어, 난 괜찮아, 난 너 없어도 돼” 하고 넘기는 편이 좋아요.

실제로는 연약한데 그 위에 반짝거리는 에폭시를 한 겹 씌운 격이네요.
그렇죠. 그게 문제예요. 지난 4월에는 복용하던 정신과 약들의 종류를 바꾸게 됐는데, 그때가 굉장히 무서웠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그거에 대해 트윗을 했죠. 그런데 그때껏 제가 했던 온갖 슬픈 트윗들, 맛 간 트윗들에는 반응 않던 친구들이 처음으로 “너 괜찮니?” 이러더라고요. 제 팔로워가 아무리 많아도, 그때가 아마 20만 명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튼 팔로워가 그렇게 많아도 그중에서 가장 상태 안 좋은 사람은 나인 거예요! 다정하게 염려해 주는 말들이 저한테 막 쏟아지는 게 경이로울 정도였어요.
제가 두려워하는 건 인생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정신병동 급식에 나오는 매시드포테이토 같은 냄새를 풍기는 거예요. 제 팔로워 중에 간호사 일 하시는 여자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저를 걱정해서 말을 거시고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자신도 저 같은 과정을 거쳤다면서 “병원에서 잘 처방해 줄 거예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해 줬죠. 하지만 제게 말을 건 사람들이 다 도움이 된 건 아니었어요. 어떤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더라고요. 나도 저런 사람들과 같은 처지인 거구나, 싶어서요.

자기 고백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때 아이러니한 게, 고백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과 완전히 연결되고 싶은 건 또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자기 방식대로만 연결되고 싶은 거니까요. 그런데 «오늘 너무 슬픔»에서 당신은 자기 자신을 기묘하게 맞춰진 ‘정량’에 따라 제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거의 식당 진열창 안의 음식 모형 같기도 해요. 그리고 당신이 쓰는 시와 트윗은 또 다른 장르를 통해 당신의 절박함을 교묘하게 전달하고 있지요. 절박함이라는 건 물론 열정, 에너지, 좌절감, 갈망도 포함하는 감정이겠고요.
맞아요. 갈망이 크죠.

다음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싶으신가요? 계획이 있으세요?
있어요. 일단 지금은 시를 쓰고 있는데, «스케어크론»과 «마지막 섹스팅»에 수록된 시들을 다시 쓰는 작업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오늘 너무 슬픔»의 주제들에도 여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같은 주제들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에요. 아직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정말 흥분돼요. 저는 항상 저를 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작업들을 하다 보니까 내가 뭔가 다른 게 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해요. 내 영감이 흘러가는 데라면 어디든 따라가 보려고요.

 

[1]  원문은 «더 컷»과의 인터뷰다. https://www.thecut.com/2016/03/melissa-broder-so-sad-today-intervie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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