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7일 저녁, 기록적인 무더위를 뚫고 해방촌 별책부록으로 찾아와 주신 독자 분들과 함께 <오늘 너무 슬픔> 북토크를 진행했습니다.
사회자(백희원)의 질문에 옮긴이(김지현)가 답하며 <오늘 너무 슬픔>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짚어 본 1부, 일상을 지탱하기 위한 중독의 대상, 책 속 표현을 빌리자면 참가자 각자의 “수호성인”을 돌아보며 감상을 나눈 2부로 이루어진 90여 분의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흘러갔습니다. 북토크 프로그램이 종료된 후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라 먼저 일어나신 분들을 제외하고 짧은 뒤풀이 시간을 가지기도 했고요(본편 이상으로 폭소 터지는 자리였다는 후문입니다).
아쉽게 이날을 함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1부의 스케치를 공개합니다. 🙂
언제: 2018년 7월 27일 금요일 오후 8시 30분
어디서: 서울시 용산구 해방촌 별책부록 서점
누구와: 옮긴이 김지현, 진행자 백희원, 독자 참가자 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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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에 대해
희원: 번역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책과 번역자의 만남이 운명적이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이 책과 만나게 되었나? 그리고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나?
지현: 원래는 플레이타임에서 다른 책(오브젝트 레슨스 시리즈)의 번역을 제안받았는데 사정상 못 맡게 되었다. 대신 나중에 제안받은 책이 이 책이었다. 이제 와 보면 이 책을 맡기 위해 다른 작업은 맡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와 잘 맞는 책이었다. 운명적으로 책이 나에게 온 느낌이다. 처음에는 ‘트위터 책이구나’ 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그 이상으로 책으로서 흥미로운 시도라고 느껴졌다.
희원: 역시 트위터 책은 트위터 유저가 해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든다. 행사 오면서 다시 읽어 봤는데 특히 애인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부분 번역이 찰지게(!) 느껴졌다. 이 책 특유의 솔직한 문체를 잘 전하기 위해 더 신경을 쓴 지점이 있는지?
지현: 나는 주로 소설을 번역해 왔고 에세이 번역은 처음이다. 지은이의 문체도 솔직하지만 에세이라는 장르 자체가 갖는 특징인 작가의 전면화가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솔직하다 해도 결국은 책으로 하기 위해 정제되고 계산된 솔직함이지 않나. 그런 차원에서 화자 역시 (픽션의) 캐릭터라는 느낌으로 번역한 게 주효했던 것 같다. 문자 메시지 부분은 카톡 대화를 생각하며 옮겼다.
희원: 취중 문자의 오타 같은…
지현: 맞다. 내가 평소에 어떻게 오타를 내는지, 키보드 배치를 생각하면서 오타를 만들었다. 재밌었다. 비속어, 욕설, 인터넷 용어 등의 문어가 아닌 일상어들이 많이 쓰이는데 그런 것들을 적절히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언어 간에 이런 일상어의 일대일 매칭이 잘 안 되는데, 예컨대 번역서를 보면 우리가 평소에 잘 안 쓰는 “젠장” “제기랄” 같은 욕들이 나오지 않나. 이런 욕 누가 하냐 싶어도 이런 데 번역가의 고충이 있다. 책에서 사실적이고 노골적인 욕들을 쓸 수 없으니까. 다만 이 책에서는 그런 품위 유지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 것 자체는 여전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희원: “오늘 너무 슬픔”이라는 제목이 두 음절씩 딱딱 떨어지는 게 귀엽고 잘 와 닿았다. 다른 후보는 없었나?
지현: 처음에 이 제목이 생각났다. “슬픔”은 인터넷이 소재인 책답게 ㅁ접미사의 귀여운 느낌을 취했다. “오늘”은 “Today”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런데 “So”는 선택의 여지가 많다. “너무” 외에도 “완전”, “엄청”부터 “에바쎄바” 같은 소위 급식체까지도 떠올릴 수 있다. 제목만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닌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면서도 쉽게 낡지 않을 번역어를 찾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이 과정에서 검색의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다.
2. 책에 담긴 영향에 대해
희원: 통상적인 SNS 책, 트위터 책이나 인스타책이 그 내용을 단순히 지면에서 묶어내는 방식인 데 비해, 이 책은 트위터라는 매체를 딛고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느낌이 있었다. 가볍고 쉽게 읽히면서도 가볍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독서였다. 특히 지은이가 한 인간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발언하면서 자기 약점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솔직한 말하기 방식이 현재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을 막 학습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질 것 같다. 지현님은 이 책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지?
지현: 최근 사람들이 페미니스트적 롤모델, 모범적이고 영웅적인 여성상의 존재와 서사를 찾고 있는 것 같다. 그 필요성에 나 역시 크게 공감한다. 그런데 멀리사 브로더 같은 경우는 완전히 그 반대 경향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 존경스럽지만 솔직히 ‘이렇게 살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 불행하고 파괴됐고 불완전하며 형편없다고까지 느껴지는 자기 자신을 고백하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가 롤모델로서의 여성 이야기만큼이나 많이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도 인간인 이상 완벽할 수 없지 않나. 나름의 결함과 아픔, 고통이 있고, 그 정도는 물론 다 다르겠지만, 그런 개개인의 삶 이야기가 많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그런 차원에서 좋은 예를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성에 대한 성녀(어머니)/창녀 이분법 같은 획일적 이미지에 대한 고착이 가부장제 억압의 한 형식이라고 본다. 멀리사 브로더는 상처받고 파괴당한 사람이지만 이제껏 많은 남성 작가들에 의해 재현되어 온 여성상과는 다르다. 이 책은 타자화되고 피해자화되는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체성을 잃지 않고 어떤 획일적 여성상으로도 완전히 환원될 수 없는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로부터 여성상을 사유하기 위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희원: 내 경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남성 루저 캐릭터를 여성 캐릭터의 대체제로 소비해 온 것 같기도 하다.예컨대 홀든 콜필드.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런 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은이가 말하는 여성으로서의 약점이나 과오, 기이한 욕망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았다. 「옮긴이 후기」에서 지현님은 책을 읽으며 호기심이 공감으로 넘어가는 경험을 했다고 했는데, 그런 공감이 일어난 지점을 짚어 주실 수 있나?
지현: 모든 지점이 그랬다. 첫 장부터 내 얘기인가 싶었다(웃음). 뒤로 갈수록 멀리 나가는 얘기들이 나와서 ‘나는 이 정도는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만도 한데, 내 경우 구토 성애라는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고백하는 내밀한 부분이 오히려 더 깊이 와 닿았다. 멀리사 브로더를 따라 내 성적 판타지를 생각해 보면서 나 자신에 대해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지점에서 멀리사 브로더와 친구처럼 이야기 나눠 보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다.
희원: 나 역시 그 부분을 읽으며 내 이야기처럼 느꼈다기보다는 ‘저기까지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웃음).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책, 나를 변화하게 하는 영향력을 가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현님은 이 책을 읽은 후 변화한 점이 있는지? 내 경우 불안과 우울을 분리해 보게 된 등 감정을 생각하는 방식이 약간 변화했다.
지현: 나는 불안, 중독, 강박을 조금씩 갖고 있다. 그런 ‘정병러’적 측면에서 도움을 받은 것 같다. 비슷한 병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대처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지은이가 불안 너머 슬픔의 바다 얘기를 하는데, 그게 많이 와 닿았다. 「네 판타지에서 절대로 못 벗어나는 건 잘돼 가고 있어」에서 말하는 강령 같은 것들을 나는 꽤 진지하고 실질적으로 읽었다. 만트라를 외워 보라는 등의 병원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말이다.
3. 슬픔에 대해 사회적으로 말하기
희원: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책이 보여 주는 통찰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슬픔이 어디서 연원하는지, 그것이 사회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아주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 것 같다. 멀리사 브로더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항상 의식하고 말하긴 하지만 어떤 분석적 접근을 하는 책은 아니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이 책의 개인적인 차원의 영향력을 얘기했다면, 지현님은 이 책의 사회적인 영향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여쭌다.
지현: 사회적 차원을 전혀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고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 불안의 기저 원인을 생각하며 유대인으로서 받은 교육과 경험을 환기하기는 한다. 다만 (억측일 수 있는데) 멀리사 브로더가 일부러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의 슬픔’과 사회 간에 직접적 연관을 지어 얘기하면 슬픔의 고유성이 사라지지 않나. 사회 ‘탓을 하는’ 느낌을 주기 싫어한 게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 사회로부터 여성이 어떤 피해를 입는가는 지금까지 많이 밝혀져 왔지만 여전히 부족한 영역이 있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아직 여성들이 이 책이 보여 주는 것만큼 충분히 솔직하게 자기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여성들의 솔직한 말하기가 계속 이어지면서 개인과 사회의 연관성을 밝혀 나가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희원: 동의한다. 미투나 문단내성폭력반대 같은 운동들도 누군가의 고백들이 이어지면서 부상했는데 불완전한 여성의 이야기들이 이어지면서 생성되는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편 이 책이 미국의 특수성을 보여 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큰물이라 더 크게 망가지는가 싶은? 불안과 슬픔의 차원에서 공감하며 읽었으나 문화적 차이가 공감을 어렵게 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지현님은 미국 여성 정병러의 이야기를 한국 여성으로서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묻고 싶다.
지현: 독자평을 찾아보니 미국 사회 이야기라 거리감을 느꼈다는 분도 있었다. 나 역시 공감하기 어려운 소재, 예컨대 마약 같은 소재가 있긴 했다. 또한 보톡스 이야기도 한국 여성들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 보였다. 한국 미용산업, K-뷰티에서 보톡스 정도는 우스운 수준 아닌가. 이건 돌보고 가꾸는 방향으로 병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 마약에 아이돌 문화를 대입해 보면 어떨까(웃음)? 혹은 게임. 그리고 멀리사 브로더 본인이 미국 백인 여성이라는 자기 입지를 의식하는 편임에도 약간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기도 했던 등 뜨악하게 될 때가 없진 않았다.
희원: 우리 삶을 억압하는 것들이 사회 도처에 깔려 있다.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때, 운동을 만들어 나갈 때 우리가 공유하는 감정이 슬픔이나 위로보단 두려움과 분노일 때가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마지막에 전하는 메시지는 ‘슬픔의 바다를 통해 연결될 수 있는 우리’라고 생각하고 그로부터 위로도 받았는데 우리 현실에서 그런 위로를 찾기가 어렵지 않나 싶다. 한국에 사는 여성으로서 공유하는 슬픔의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지현: 우리가 느끼는 슬픔도 분노도 뿌리는 같을 것 같다. 어떤 감정으로 표현하고 느끼느냐의 문제 아닐까 싶은데, 슬픔으로 표현할 때 자신이 무력해진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슬픔을 공유할 기회도 줄어드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재밌게도 멀리사 브로더는 자신은 화를 내면 지나치게 신경 쓰는 루저가 된 느낌이 든다고 했다(『더 컷』 인터뷰 https://bit.ly/2O4yr73 참조). 슬픔으로 표현할 때 더 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분노로 표현하는 것이 또 누군가는 슬픔으로 표현하는 것이 두려울 수 있는데, 각각 나름의 콤플렉스를 보여 준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우리가 슬픔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표현하기가 겁이 난다면, 그건 우리 사회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억압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