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싶지 않은 것들> 권말에는 ‘추천의 글’과 함께 소설가 박민정 작가의 ‘후기’가 실려 있습니다. 많은 번역서에서는 말미에 옮긴이의 감상이나 해설을 담은 ‘옮긴이 후기’를 수록합니다. 그런데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은 일반적인 옮긴이 후기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을 작업 과정에서 이예원 번역가께서 주셨고, 플레이타임도 그에 공감해 내용에 대한 해설보다는 이 책에서 영감을 얻은 독자적인 글을 덧붙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작가를 떠올렸고 그중 옮긴이께서 제안하신 박민정 작가가 이 책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년기에 대한 관심과 여성 서사의 모색이라는 점에서 두 작가 사이에 접점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박민정 작가께 글을 청탁했고 원고를 읽어 보시곤 기꺼이 쓰겠다는 답을 주셨습니다.
도착한 글은 박민정 작가 버전의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이 글 <당신 작가 아닌가요?>는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세상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어린 시절 경험들, 그런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한 여성 작가의 자아에 미친 영향, 이 모든 것이 소설을 쓰는 데 있어 재산이 되더라도 이 재산이 그렇게 큰 가치가 있느냐는 의심까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의 질문들을 반향하며 자신만의 경험으로 번역한 또 한 편의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더불어 이 글은 한국에서 태어난 여성 다수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들로 가득 차 있는 지금 여기의 여성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글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북돋는 계기가 되기를, 나아가 살아가면서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게 되고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독자 분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며 블로그에 공유합니다.
* * *
당신 작가 아닌가요?
박민정
원고를 생각하는 내내 데버라 리비가 받았다던 그 질문을 떠올렸다. “당신 작가 아닌가요?” 지금 나는 얼굴을 달리한 수많은 저 질문 앞에 놓여 있다. 나는 데뷔 후 10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스스로를 ‘작가’라고 당당하게 소개하지 못했고,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그저 ‘학생’이라거나 ‘공부하는 사람’으로 나를 설명하기 일쑤였다. 언제가 되었든 내가 만난 애인들은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곧장 알게 되었지만, 지금껏 나를 정말로 위로해 주는 애인을 단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고 자처하는 나로선 그 사실도 별달리 위안이 되지 않는다. 뭇 사람들에게 단번에 내 일을 소개하지 못한다는 소소한 에피소드가 아니라도, 나에게 굳건한 작가적 자아는 요원한 일이었다.
한편 나는 어지간한 작가들보다도(감히 말하자면) 인생의 꽤 많은 부분을 작가적 자아로 무장한 시간들로 보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글을 썼고, 대학에서는 문예창작을 전공했으며, 스물다섯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문학이 아닌 다른 전공을 가졌거나 다른 분야의 일을 하다 온 사람들을 보면 질투심에 젖곤 했다. 나에게는 문학밖에 없었는데, 저 사람들은 다른 것을 해 보고 왔구나, 그러면서 더 좋은 곳이 없어 매번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내 처지를 탓해 보기도 했던 것이다. 작가적 자아라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움을 동반하곤 했는데, 내가 쓰는 글은 잘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내세워 봤자 유세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데버라 리비의 글을 읽으며 자연스레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일곱 살 나이에 내가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사실이 있었다. 다들 안전하다고들 말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때가 있었는데, 이와 연결되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내게 일종의 원년처럼 남은 1991년, 나는 그 느낌을 처음으로 받게 된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어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짜릿하면서도 언제나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는데, 내가 만약 그 시절부터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과연 작가가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내가 태어나기 전 사촌 언니 둘을 해외 입양 보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어느 날 천호동 성매매 집결지를 지나는 차에서 낄낄거리는 어른들을 본 끔찍한 순간이 없었다면. “박정희가 사람은 많이 죽였어도 우리나라 살린 대통령이었어” 같은 말을 어른들이 종종 나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면. 내가 싸워야 하는 세계가 ‘알고 싶지 않은 것들’로 점철되어 있고, 정말이지 나는 그것을 알고 싶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았을 때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1991년의 두 장면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얼마 전 1991년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 영화의 한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안경을 쓰고 운전하던 여배우가 빨간 신호등에 차를 멈춰 세우고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도 이제 차가 무지 많아요. 1999년쯤에는 도로가 포화 상태가 될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신호가 바뀌었고 그녀는 다시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흘러갔다. 그때 그녀의 옆을 지나가던 차, 아마도 그 시절에 유행했을 베이지색 소형차를 보면서 나는 거기 탄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거기 탄 건 나다. 뒷좌석에 세 살배기 동생과 함께 앉아 있고, 운전석과 조수석에는 고모와 고모부가 있는데, 이들은 옆 차선의 차를 보고 중얼거린다.
“납치당한 것 같아.”
그리고 믿어지지 않게도, 그들은 웃는다. 나는 그 차를 본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린 여자가 차창에 얼굴을 박고 있다. 고모는 얼른 내게 주의를 준다. 앞에 봐, 쳐다보지 마. 나는 겨우 일곱 살이고(아직도 그 순간이 떠오를 때면 이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한다), 어른의 말을 거역해 본 적이 별로 없고, 입안에 맴도는 말, “신고해야 돼요”를 용기 있게 내뱉지 못한다.
서울 도심 어디쯤의 왕복 8차선 도로인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차창에 박힌 여자의 얼굴은 수천 번 뭉개진 채로 내 머릿속에 박혀 있다.
그리고 또다시 1991년 어디쯤, 천호동 성매매 집결지를 지날 때. 여기가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그곳이 어디였는지, 자라나며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지금은 사라진 이곳은 이른바 ‘홍등가’, 빨간 불빛이 도열한 곳이었다. 웬일인지 나와 어린 동생을 뒷좌석에 태운 고모와 고모부는 거기를 지나며 즐거운 듯 낄낄거린다. 차창에 란제리만 입은 언니들이 달라붙어 호객을 하고, 고모부는 속도를 높인다. 그때 운전석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 이번에는 쳐다보지 말라는 주의도 주지 않고 낄낄거리며 나를 방치하는 고모. 저것 좀 봐라, 웃기지?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착한 아이여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아이여서가 아니라 그저 견디기 힘들기 때문에.
왜 그랬을까.
부모는 왜 나를 안전하지 않은 뒷좌석에 매번 맡겨 둔 걸까, 생각한다. “사람은 많이 죽였어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납치당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을 목격하고도 웃고 넘기며, 어린 조카들을 태우고 성매매 집결지를 마치 관광하듯 지나던 어른들과 왜 나는 함께 있었을까. 왜 나는 거기 있었을까, 생각하며 그런 경험들이 쌓여 나를 작가로 만든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기억들은 한 사람을 영원히 상처받게 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상기한다. 나는 어른들의 세계가 끔찍이도 싫었다. 왜 저들은 아무렇지 않게 혐오 발언을 내뱉고, 약한 자를 짓밟으려 하며,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심하다 못해 자주 그것을 농담거리나 웃음거리로 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기에 알려고 애썼지만 이제 나는 어떤 것들은 영원히 알거나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것들은 내가 ‘이해하거나 알아야 하는’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전쟁 문화, 강간 문화, 차별 문화에 익숙한 어른들의 영원히 미스터리한 말들을 해독하고자 공부하고 글을 썼다. 그리하여 여기서 다시 데버라 리비의 말을 생각한다. “여자애들은 큰 소리로 말해야 돼, 우리가 뭐라건 어차피 아무도 안 듣거든.”
대학에 입학한 그해 소설 창작 세미나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곳은 나같이 글쓰기를 좋아하는 애들이 모인 곳이고, 원하면 언제든 술, 담배와 연애를 해도 좋은 곳이다. 술에 취해서 쓰러져도, 담배를 줄창 몇 갑이나 피워 대도, 시끌벅적한 연애 사고를 일으켜도 곧장 회복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그땐 믿었다). 자유로운 캠퍼스란 여학생들에게는 안전하지 않은 곳이고, 자유에 취해 객기 부리는 여학생은 오랫동안 소문에 시달려야 한다는 걸 그땐 몰랐으니까. 내가 믿기로 교수건 학생이건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기에, 나는 어린 시절의 내 안전하지 못한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학우들은 대체로 내가 겪은 일이 일종의 아동 학대였다고 진단하고, 교수는 스무 살인 내가 지금도 그 경험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재의미화하는 것이 소설을 쓰는 데 있어 ‘큰 재산’이 되리라고 평가한다. 큰 재산! 두 경험 외에도 많은 것을 털어놓았는데… 그 무렵 아파트 복도에서 중학생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것, 부모에게 시시때때로 얻어맞았던 것, 길거리에서 외모 평가를 받고 놀림당한 것 등등…. 그것들도 재산이 될 수 있을까. 교수는 나에게 너는 누구보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고도 말한다.
“여성 작가는 자기 인생을 지나치게 또렷이 느낄 형편이 못 된다. 그리할 경우 그는 차분히 글을 써야 할 때 분노에 차 글을 쓰게 된다.” “그는 자신의 신세와 전쟁 중”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한 데버라 리비의 저 구절을 지금 떠올린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들이 나를 작가로 만들어 준 건 분명한데, 그것이 정말 작가적 자아를 위한 재산이었다면, 상처를 무릅쓰고도 떠안아야 할 만큼 고귀한 무엇이었나? 이건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호출한 질문이었고, 그것이 사사롭게는 뭇 사람들 앞에서 나를 선뜻 작가라고 소개하지 못한 까닭이기도 했다. 나 역시 그녀처럼 “작가가 되고자 나는 끼어들고, 소리 내어 말하고, 목청을 키워 말하고, 그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하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실은 전혀 크지 않은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노라고” 술회한다. 그녀가 런던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울음을 터뜨렸듯 나도 소설을 쓰는 순간마다 과거가 나를 생각하고 있음을, 실은 어떤 과거의 순간들이 전혀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음을 상기한다. 나는 1985년 서울에서 딸로 태어났고, 여학생으로 자랐고, 대학에서는 지망생과 여학생 사이를 오갔으며, 사회에서는 여직원이자 여성 작가였으며 여성 작가는 때로 ‘작가’라는 대립항에 부딪힌다는 것도. 대학에서 지망생과 여학생 사이를 오갔듯 문단에서는 여성 작가와 작가 사이를 오간다는 것도, 그리고 데뷔 초나 지금이나 내가 여성의 이야기를 쓰면 그것이 내 한계라고 종종 평가받았던 것도. 어쩌면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작가적 자아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꾸짖었던 여성 작가의 자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불어 생각한다. 당신 작가 아닌가요. 이 질문은 나를 떠보려는 질문일 수도 있고, 그저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정체성을 쥐고 흔드는 질문이다. 또한 지금 그 질문을 쥐고 앉은 나에게 주어진 지면과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