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 옮긴이의 글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옮긴이의 글’을 공유합니다. 옮긴이 박진철 선생님께서 마크 피셔의 생애와 지적 행보, 이 책의 핵심 주장과 의의까지 정리해 주신 글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피셔의 저작이라 상당수 독자께 피셔는 아직 낯선 비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옮긴이의 글’이 피셔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관한 관심을 북돋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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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번역을 결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은이가 오랜 우울증으로 갑작스레 스스로의 삶을 거두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마크 피셔는 시대의 변화에 유달리 예민했던 지식인이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 내고 동시대가 어떤 역사적 눈금 위에 있는가를 물으며 그로부터 변화를 모색하던 비판적 사유와 실천 들이 하염없이 과거의 유물로 사라져 간 것처럼 보였던 시기를 그는 거슬러 살았다. 지난 몇십 년은 적어도 그 자신의 진단 속에서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의 삶과 죽음은 한 시대의 변화를 보여 주는 기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상당한 독자층을 두었던 영국에서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 그의 이름이나 글은 아직 생소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온라인에서 드물게 소개되거나 관심을 보이는 정도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번역된 그의 논문이나 단행본이 없으며 그의 사유가 본격적으로 소개된 적도 없다. 부분적으로는 아카데미 전통에서 한 발 벗어나 있는 지적인 삶의 이력과 글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유의 깊이나 영향력과는 별개로 피셔는 아카데미에서 체계적인 방식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는 학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고도의 이론이나 철학적 지식에 누구보다도 해박하고 그것을 명민하게 활용하는 재능이 있었지만 그는 전형적인 학자보다는 당대의 문화적 담론과 정치적 지형에 개입하는 비판적 실천가의 계보에 속하고자 했던 지식인이었다.
피셔는 세계적으로 새로운 정치적 흐름이 분출하고 포스트구조주의가 지적인 흐름을 막 주도하기 시작하던 1968년에 태어났다. 그는 68혁명의 자장 속에서 이 시기 주역들의 지적 영향 아래 성장해 인터넷을 비롯한 기술 혁명과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반동을 가장 앞서 맞이했던 세대에 속한다. 피셔는 영국 헐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워릭 대학교 철학과에서 1999년에 «플랫라인: 고딕 유물론과 사이버네틱 이론-소설»Flatline Constructs: Gothic Materialism and Cybernetic Theory-Fictio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얻었다. 청년 시절에는 특히 포스트펑크에 심취했으며, 음악을 문학이나 영화, 정치와 교차해 읽는 음악 저널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문화적 변동을 해부하고 읽어 내는 작업은 이후로도 평생 이어진 그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피셔는 90년대 중반 무렵부터 주로 음악의 문화적·정치적 의미와 관련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90년대 후반의 대학원 시절에는 ‘사이버네틱 문화 연구소’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 CCRU라는 비공식적인 간학제 연구 집단의 설립 멤버로 참여해 곧바로 두각을 드러냈다. CCRU는 당시 제도화되었던 신좌파의 유산이나 득세하던 문화연구를 거부하는 특유의 비판 담론을 구축했다. 이들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프리드리히 니체 등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면서 진부한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에 저항하고자 했다. 특히 생산력의 발전을 가속화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른바 가속주의accelerationism 이념을 기반으로 신상황주의, 미래주의적 상상력, 사이버네틱스, 사이버펑크, 일렉트로닉 댄스 음악과 고스 음악, 소설가 H. P. 러브크래프트 등에 심취했다고 전해진다. CCRU는 공식적인 문화와 주류 제도에 대한 거부와 저항을 체화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냉소적이거나 손쉬운 희화화의 길을 택하기도 했고, 나아가 일부 구성원은 신좌파에 대한 반감 속에서 대처리즘에 동조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피셔는 이후 CCRU를 떠나면서 동시대 신자유주의 문화에 대한 좀 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견지하는 입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다양한 요소의 복잡한 일상적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특유의 이론적 감수성, 관습적인 아카데미의 규범을 거부하는 모종의 지적 분방함 등은 이후에도 지속된 그의 특징적인 면모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사 학위를 마친 뒤 피셔는 오래도록 비평 작업과 지식 공동체 확립에 매진했지만 2000년대 후반에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비정기적인 강의와 프리랜서 작가로서의 글쓰기, 고정되지 않은 직장 생활 등 불안정한 형태로 생계를 이어 가야 했다. 그는 연장 교육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골드스미스 대학교의 청각 및 시각 문화학과에서 객원 교수로 일했다. 신노동당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아래 영국의 공공 교육이 극적으로 붕괴되는 과정의 제일선에 있었던 연장 교육 대학교에서의 생활은 이후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일부를 구성하는 성찰로 이어지기도 했다. 피셔는 또한 뛰어난 편집자였다. 영국의 음악 잡지 «더 와이어»The Wire의 직원으로 일하며 음악 관련 책을 편집하고, 에든버러 대학교 출판사에서 펴낸 사변적 리얼리즘 시리즈Speculative Realism Series의 기획에 참여했으며, 다시 언급하겠지만 몇몇 출판사 설립에도 적극 관여했다.
피셔가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k-punk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2003년부터 시작해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는 블로그에 넓은 의미의 문화와 관련된 수많은 주제와 쟁점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방대한 분량의 비평 글을 썼다. 흥미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창의적인 글들은 지식인 동료를 끌어모았고 열렬한 지지자가 된 수많은 독자를 만들었다. 피셔를 거의 컬트적인 인사로 만든 블로그 k-punk는 무엇보다 다른 블로거들, 수많은 지식인 비평가 및 예술가 등과 네트워크를 이루고 새로운 담론장을 형성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활성화된 비평은 전례 없이 다양한 주제들로 확장되었고 또 논쟁의 중심에 서서 비판적 지식을 한층 더 공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동료이자 음악 비평가이며 그 자신도 블로그를 운영했던 사이먼 레이놀즈는 k-punk 블로그를 두고서 “영국의 대부분 잡지보다 뛰어난 일인 잡지”며 대중문화, 음악, 영화, 정치학과 추상적인 이론 등이 저널리스트, 철학자, 친구, 동료 등에 의해 나란히 논의되는 “블로그 성좌”의 중심 허브였다고 술회한다. 언제나 지식 공동체를 구축하는 데 전력하던 피셔는 이 시기에 알베르토 토스카노와 니나 파워, 비포 베라르디, 조디 딘 등을 비롯한 여러 지식인과 새롭게 교류했다. 또한 블로그를 통한 지식 교류의 성공에 힘입어 작가 매트 잉그램과 함께 인터넷 포럼을 위한 전자 게시판 ‘디센서스’Dissensus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k-punk 블로그는 아직 개설되어 있으며(http://k-punk.abstractdynamics.org) 여기에 게재되었던 글들은 다른 미출간 글과 함께 800여 쪽에 달하는 «K-PUNK: 마크 피셔 선집(2004~2016)»K-PUNK: The Collected and Unpublished Writings of Mark Fisher(2004~2016)으로 2018년 출간되었다.
피셔는 2009년에 친구를 도와 출판사 ‘제로북스’Zero Books를 설립하는 데 깊이 관여했으며, 나중에 ‘리피터북스’Repeater Books 창립 때도 주축 멤버가 되었다. 초기의 제로북스는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포함해 블로그 네트워크에 속한 핵심 동맹들의 일련의 에세이를 출간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세계적인 금융 위기의 여파 속에 고조된 영국의 학생 시위 정국에서 읽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피셔를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대열에 속하게 해 주었다. 어떤 이는 이 시기의 제로북스 출판사가 대처리즘의 신보수주의에서 시작해 신노동당 시절로 이어진 위축된 영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반격 대열의 선두에서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며 새로운 담론 공간을 개방하고 있었다고 회고적으로 말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 새롭게 등장한 정치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며 젊은 세대 공중의 지지를 얻었다. 피셔의 비평 작업은 언제나 이런 정치적 공간과 맞닿아 있었다. 급진적 철학에 접근하기 어려운 청중이나 고립되고 억압된 개인이 해방적 사유의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새로운 공중을 창출하려는 이런 노력은 이제는 희미해진 급진적 지식인의 실천적 전통에 속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그랬듯이 2010년대 들어 블로그라는 매체는 부작용을 노출하며 시들해졌다. 2013년 말 피셔는 급진 정치의 연대성을 압도하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한 글로 인해 많은 비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 글은 블로그에 실린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글로서는 마지막이었으며, 이후 피셔는 책의 저술에 점점 더 몰두했다고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발표한 뒤 그는 생전에 두 권의 책을 더 세상에 선보였다. 제로북스에서 2014년에 출간한 «내 삶의 유령들: 우울증, 유령학, 잃어버린 미래»Ghosts of My Life: Writings on Depression, Hauntology and Lost Futures는 블로그에 썼던 글 일부를 선별한 것이다. 여기서 피셔는 ‘존재론’ontologie의 언어유희에 해당하는 자크 데리다의 ‘유령학’hantologie 개념을 빌려 와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존과 부재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의 역사적 시간성이라는 문제를 성찰한다. 셋째 책인 «기괴함과 오싹함»The Weird and the Eerie은 2016년 말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리피터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친밀한 것에 깃든 낯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프로이트의 ‘언캐니’the uncanny, unheimlich 개념이 주체 중심적임을 지적하며 이를 외부의 관점에서 보도록 해 주는 weird와 eerie로 새롭게 개념화할 것을 제안한다. 이 두 단어는 ‘기괴한’, ‘섬뜩한’, ‘오싹한’ 등 우리말로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만, 피셔는 weird를 외부로부터 갑작스레 침입한 무엇인가의 현존에 기반하고 있는 정조로, eerie를 텅 빈 장소의 부재로부터 구성되는 어떤 분위기로 구분하고, 이 개념들을 통해 여러 음악, 소설, 영화 등을 독해한다. 그 외에 사후에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과 앞서 언급한 선집인 «K-PUNK», 이 두 권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비록 완결된 형태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마지막 시기에 피셔는 또 다른 책을 예고하고 있었다. «환각적 공산주의»Acid Communism라는 제목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던 이 책은 버소Verso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이었다. 그 미완의 <서문>(이 <서문>도 «K-PUNK»에 실려 있다)에서 피셔는 자본을 직접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보다는 자본이 차단해야만 했던 과거의 해방적 잠재성들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선회하며, 60년대 후반 반문화적 정치의 어떤 조류와 이후의 전개를 역사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그는 우리가 “모든 역사성이 상실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주장을 언급하며 ‘노스탤지어 양식’이 지배하는 문화의 유일한 대안은 모종의 모더니즘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피셔의 모든 문제의식이 이 언저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복고 혹은 노스탤지어 형태로 소비되는 과거와 진정한 역사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과거의 차이, 새로운 소비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파괴된 문화와 준자율적인 문화 및 예술이 창출할 수 있는 새로움의 간극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그의 삶 또한 이와 유사한 아이러니로 가득했던 것 같다. 그는 한 세대 앞선 정치와 문화의 화려한 조명 아래 성장해 이후의 그늘진 시대를 가장 먼저 겪었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암울한 진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추도문이 알려 주듯 누구보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시도의 끈을 놓지 않았으며,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울증을 끊임없이 공적인 정치적 문제로 전환하고자 노력한 우울증자였다.

 

이 책은 Capitalist Realism: Is There No Alternative?(Zero Books, 2009)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피셔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이 얇은 책은 단행본으로 나온 그의 첫 저서다. 여기서 피셔는 신노동당 집권 시기를 중심으로 영국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던 변화된 이데올로기적 환경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진단하고 있다.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다양한 철학 개념과 문화 영역을 폭넓게 넘나들며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지배를 다각적으로 살핀다. 이 책의 구성을 대략적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처음 세 장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정의하고 그 핵심적인 특징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힌다. 4~6장은 오늘날의 개인화된 정신 건강 문제와 새로운 관료주의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지배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장을 본격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이어지는 후반부는 대체로 정치와 주체화의 문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부록’으로 실린 대담에서는 그와 조디 딘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강조점과 그에 수반되는 쟁점을 짚으며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을 위한 의견을 나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은 이전에도 예술이나 광고 등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로 쓰인 전례가 있다. 피셔는 이 용어를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특히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나 의식적인 담론과 구별하기 위해 ‘무의식’, ‘정동/정서’, ‘분위기’, ‘정신적 하부구조’ 같은 개념을 일관되게 동원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현재 주어진 자본주의 체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가리킨다. 피셔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라는 정의를 제시한다. 이는 ‘다른 대안은 없다’는 주문을 외던 80년대의 대처리즘과 공명하며,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에 의해 선언된 ‘역사의 종언’을 반향한다. 피셔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표현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의미를 잘 포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핵심 논점 중 하나는 이제 자본주의가 자신이 가장 훌륭한 체계라는 이데올로기적 주장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그저 자본주의를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로 제시할 뿐이다. 자본의 착취와 억압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그 야만성과 무자비함을 노골적인 위협으로 바꾸어 버린 이 세계에서는 오직 생존만이 문제가 되고 어떤 희망도 위험한 환영으로 간주된다. 위기가 일상화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이 강해질수록 자본주의가 절대적인 지평이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세계에서는 사회적 상상력이 근본적으로 쇠퇴하고, 더 이상 새로운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불안한 확신이 지배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고갈됨에 따라 동시에 과거의 모든 역사 또한 단순한 소비 상품이나 심미적 대상으로 전환된다.
피셔는 이런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역사화를 시도하며 이를 ‘신자유주의’나 제임슨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 명명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비슷한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용어가 저 범주들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결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피셔에 의하면 제임슨이 자신의 테제를 발전시켰던 1980년대에는 계급 적대가 아직 가시적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명목상으로나마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들이 있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의 일정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정점에 이른 세계에서 이런 공간적·시간적 외부는 대부분 억압되어 시야에서 거의 사라졌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가 유토피아적 꿈을 완전히 식민화하고 현재라는 시간성만이 오롯이 남은 사회의 아포리아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피셔는 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전제들이 쇠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으며 명시적으로 자신을 변호해야 할 만큼 수세에 몰렸다고 진단한다. 이에 덧붙여 신자유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적이어야 했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신자유주의적일 필요는 없음을 피력한다.
이 책의 진면목은 이런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구체적으로 문화와 정신을 어떻게 잠식하고 있는지 보여 주는 자리에서 드러난다. 피셔가 주목하는 영역은 정신 건강과 새로운 관료주의라는 쟁점이다. 이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비일관성을 드러내고 논쟁적으로 구성하는 비판 작업이기도 하다. 피셔는 오늘날 광범위하게 퍼진 정신 질환 문제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지배하에 철저하게 개인화되고 또 자연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 청년들의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병리 현상에 내재한 ‘반성적 무기력’ 상태를 끌어내 보이며, 이를 훈육 사회에 뒤이은 ‘통제 사회’와 소비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징후로 포착한다. 또한 노동의 포스트포드주의적 재조직화에 따른 새로운 정서적 체계가 어떻게 영구적인 불안정성 및 전례 없는 정신적 장애를 초래했는가를 밝히고 이를 재정치화할 길을 모색한다. 이런 정신 건강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한물간 것으로 간주되는 관료주의와도 일정한 연관이 있다. 피셔는 일터나 교육을 비롯한 공적 제도의 일상에서 새롭게 증가한 관료주의적 행정 및 규제의 사례들과 그 효과를 분석한다. 여기서 그는 외양과 홍보가 실질적인 가치를 대체한 상황을 묘사하며, 이를 자본주의의 ‘진정한 정신’에서 일탈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이 자율적 힘을 획득하는 후기 자본주의 문화에 고유한 ‘시장 스탈린주의’로 파악한다. 그는 프란츠 카프카, 지젝, 장 보드리야르 등의 논의를 빌려 끝없는 미로 같은 새로운 관료주의의 비밀이 궁극적인 결정 기관이 없는 자본주의의 전체주의적 특성에 기반하고 있음을 밝힌다. 같은 맥락에서 무한히 가변적이고 대체 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 현실과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 작업’ 개념으로 살피고, 그 이면에 놓인 문화적 기억 장애라는 병리 현상을 짚어 낸다. 전자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매끄럽게 작동하도록 해 주는 메커니즘이라면, 후자는 그것의 결함에 대한 유비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이 모든 측면은 탈정치화 경향과 병행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이미 지배적인 스타일로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과 결합한 소비주의의 끊임없는 자극 및 이와 연관된 중독 상태는 진정한 단절을 도모할 수 있는 모종의 침잠이나 반성을 위한 여지를 주지 않는다. 또한 개인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강조 속에서 구조적 차원은 비가시화되며, 감정을 우선시하는 쾌락주의적 모델의 지배는 유아적인 순응의 문화를 양산한다. 이런 탈정치화 경향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효과지만, 역으로 보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정치적 반격을 시작해야 하는 핵심 장소임을 확인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피셔는 빠른 템포로 다양한 내용을 펼쳐 보이면서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의미를 엄밀하게 정의하지는 않고 있다. 일부 학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 책은 체계적이고 일목요연한 철학적 논의나 정치적 분석과는 거리가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도 엄밀한 의미의 개념이 아니라 명목상의 이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을 그저 이데올로기가 현상하는 일반적인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새로운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를 요약해 주는 용어로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대신 이에 대해 더 논의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 준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어느 추모글이 밝히고 있듯이 핵심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핵심이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학자 본연의 태도로 의도된 책이라기보다는 고전적인 팸플릿 혹은 위대한 정치 에세이의 전통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피셔는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에 등장한 대중들의 정치의식에 직접 개입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집필했다. 그의 책은 영국 정치를 오랜 잠에서 깨우려는 정치적 담론 공간 안에 있었고, 그의 관심사는 새로운 개념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정치적 성향과 인지적 관점을 직접 변화시키는 데 있었다. 알랭 바디우가 말하듯 오늘날 우리가 ‘세계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면, 어떤 점에서 이 책이 지닌 힘은 이런 세계에 다시 손에 잡힐 듯한 형체를 성공적으로 부여했다는 데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창적인 스타일의 글쓰기를 통해 피셔는 누구보다도 강렬한 방식으로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를 보여 준다. 이 책을 새로운 문화적 징후들을 과감하게 해석하는 사유 실험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나아가 이 책에서 밝히는 새로운 집단적인 심리 구조, 전통적인 좌파 정치의 쇠퇴와 더불어 나타난 문화적 변화 등은 일차적으로는 영국 사회의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우리 사회로 가져와 다시 읽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현재 주어진 사회경제적 체계를 가능성의 절대 지평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핵심이라면 여기서 realism은 일상적 용법에서 뜻하는 ‘현실주의’에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때로 이 용어는 무매개적으로 제시되는 현실을 가리키는 ‘사실’이나 ‘사실주의’ 등의 함의를 내포하기도 한다. 피셔가 소설이나 영화 등에 재현된 세계를 설명하거나 다른 맥락에서 연관 단어들을 활용하는 방식, 또는 이 책의 출간 이후 이 용어를 둘러싼 논의의 확장까지 염두에 둔다면 realism을 어느 하나의 뜻으로 제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가령 이 한국어판에 수록된 대담을 싣고 있는 편집서인 «자본주의 리얼리즘 읽기»Reading Capitalist Realism에서는 capitalist realism을 새로운 미학적 범주로, 특히 문학적 재현의 한 양식을 가리키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체하는 범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본 번역서에서는 다층적인 함의를 담을 수 있도록 realism을 발음대로 표기한 ‘리얼리즘’으로 옮겼고, 그와 연관된 real, reality, realistic 같은 단어는 가급적 맥락에 맞춰 ‘리얼’, ‘실재’, ‘현실’, ‘사실성’, ‘현실주의적’ 등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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