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오늘은 마크 피셔가 영화를 독해하는 방식을 잘 보여 주는 글을 한 편 올립니다. 2013년 말에 블로그에 올린 이 글에서 피셔는 금융 위기 이후 영국의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와 잘 어울리며 때마침 개봉된 영화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를 읽습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상품이지만, 가끔 우리는 스스로와 모순을 일으키며 상품 논리의 한계 영역까지 밀고 나아가는 작품을 보게 됩니다. <헝거 게임> 시리즈가 그 사례로, 이 시리즈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철저히 포획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혁명의 필연성과 이를 위한 새로운 집단성의 필요를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화가 암울한 현재를 절대화할 위험이 있다면, 피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영화를 빌려 그 출구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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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2013년 11월 | 마크 피셔
박진철, 리시올 편집부 옮김

영화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에는 기이할 만큼 때맞춰 도착한 무언가가 있다. 지난 몇 주간 영국에서는 지배적인 현실 체계가 요동치면서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인상이 확연했다. 쾌락주의적 우울증의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는 이 상황과 보조를 맞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증폭시키고 있다. 상품 세계 심장부에서의 폭발? 그렇다. 불길은 더 많은 불길을 일으킨다……

내가 ‘혼미’라는 단어를 과하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지난주의 <캣칭 파이어> 관람은 진정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험이었다. 몇 번이고 이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내가 이걸 보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해진 거지? 원작자인 수전 콜린스는 우리가 최근의 후기 자본주의에서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빈곤함과 협소함, 타락을 폭로한다. 사람들을 포획하기 위해 동원하는 양식은 쾌락주의적 보수주의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논평할 수 있고(그리고 우리의 트윗이 텔레비전에서 떠들썩하게 소개될 수도 있다) 원하는 만큼 포르노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미약하다. 자본은 우리의 노동뿐 아니라 우리의 쾌락과 꿈을 비롯해 모든 곳에 스며들어 왔다. 우리는 무엇보다 흥미 위주의 미디어 보도에 빠져 있으며, 만약 이것이 먹혀들지 않으면 그들은 기동 경찰을 투입한다. 경찰이 발포하기 직전에 텔레비전 중계는 중단될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관념들의 묶음 이상의 함의를 갖고 있다. 수전 콜린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대항 서사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후기 자본주의의 지배를 분석한 21세기의 많은 작업─<더 와이어>The Wire, <더 식 오브 잇>The Thick of It,[1] 그리고 [내 책인] «자본주의 리얼리즘» 자체도─은 체계가 전체적으로 닫혀 있다는 무기력한 감각만을 낳는 나쁜 내재론,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모종의 현실주의[리얼리즘]를 제시할 위험이 있다. 콜린스는 우리에게 출구를, 나아가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혁명적인 여전사 캣니스─을 제시한다.

아이를 팔아 식량을 구하라Sell the kids for food.[2]

신화의 성공 정도와 신화의 의의는 서로 결부되어 있다. 영 어덜트 디스토피아Young Adult Dystopia는 문학 장르라기보다는 2008년 이후 갈피를 못 잡고 소진된 세대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자본─지금은 신자유주의적 통치 양식보다는 니힐리즘적 자유주의를 활용하는─은 젊은이에게 부채와 극히 불안정한 상황을 안겨 줄 뿐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신자유주의의 장밋빛 약속은 물 건너갔지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계속된다. 미안하지만 대안은 없어요. 지난날엔 대안이 있었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아요. 그냥 현재 상황이 그래요, 오케이? 콜린스 소설의 주요 독자는 10대 여성이었다. 콜린스는 이들에게 기숙학교 판타지나 뱀파이어 로맨스를 제공하는 대신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그들이 혁명가가 되도록 훈련해 왔다.

어쩌면 <헝거 게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혁명이 필연적임을 단순히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문제는 병참학적인logistical 것이지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혁명이 일어나야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단순히 언제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가 쟁점이다. 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영화가 우리에게 주문하는 메시지, 부름, 윤리적 요구. 그것은 계급 의식을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는 집단성을 주문한다……(그리고 여기서 콜린스가 성취한 것이 계급, 젠더, 인종과 식민 권력이 결합하는 방식에 대한 교차 분석과 판독─뱀파이어 성Vampires’ Castle을 구축한 신성한 아카데미에서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신화학적 핵심에서 이루어지는─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는 더 많은 사유, 더 많은 죄의식을 부르는 탈리비도적 요구가 아니라 새로운 집단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도발적인 요청으로 기능한다.)

<캣칭 파이어>에는 한동안 어떤 문화적 생산물에서도 볼 수 없었던 펑크적인 내재성이 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는 그 자체의 틀을 이루는 상품 문화를 침식하는 전염성 강한 자기반영성 같은 것이 있다. 영화에 대한 광고는 마치 영화 안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공허한 자기지시성의 사례라기보다는 지배적인 사회 현실을 판독한 결과다. 자본의 사이버 홍보 공세에서 볼 수 있는 음울한 광택은 탈자연화된다.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 우리를 불러낸다면 우리 또한 그 세계 속으로 건너간다. 결국 그 세계는 우리의 것으로 밝혀지고, 이제 몇몇 오락용 장면을 치우고 나면 한층 분명한 모습이 드러난다. 가령 부자들은 화려한 화장과 옷으로 치장하고 있고 빈민들은 고된 노동을 하고 있는 신-로마풍의 사이버 고딕 야만주의가 여기에 있다. 빈민들은 캐피털[3]의 선전 프로그램에 언제나 접속되어 있을 정도만큼만 첨단 기술을 접한다. 사회적 통제 형식으로서의 리얼리티 텔레비전─경쟁을 자연화하며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의 재미 때문에 죽음에 이를 때까지 싸워야만 하는 오락이자 예속을 위한 스펙터클. 익숙하지 않은가?

콜린스의 상상이 지닌 정교함과 적실성이 돋보이는 부분은 매스미디어의 양가적인 역할을 간파한 대목들이다. 캣니스는 일종의 토템인데, 그녀가 캐피털에 저항하며 직접 행동─이런 상황에서 직접 행동은 어떤 형태를 취하겠는가?─을 취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차지하는 위치 덕분에 그녀가 없었다면 원자화되었을 주민들을 결집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역할은 상징적이다. 그러나 포획 체계 자체가 상징적이기 때문에 그녀가 촉매제일 수 있는 것이다. 불길 속의 소녀…… 그리고 불길은 다른 불길로 번진다…… 궁극적으로 그녀의 화살은 인간들 개개인─이들 모두는 대체 가능하다─이 아니라 리얼리티 시스템을 겨냥해야 한다.

콜린스는 자신의 세계에서 자본주의적 사이버공간을 제거함으로써 웹 2.0[4](스펙터클에 대한 해독제가 아니라 스펙터클을 한층 만연하고 전체적인 것으로 연장하는 참여)이라는 오락용 장치를 일소하며, 텔레비전 혹은 더 낫게 말하면 알렉스 윌리엄스가 “만인의 타블로이드”라 부른 것이 어떻게 여전히 현실로 간주되는 것을 낳는가를 보여 준다(웹 2.0을 수평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수사가 있기는 하지만 트위터에서 회자되는 트렌드는 대체로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이다). 만인의 타블로이드에는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된 영웅이나 악당 이야기, 혹은 어쩌면 어떻게 우리가 영웅에서 악당으로 변했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플루타르크 헤븐스비가 캐피털의 미디어 독재 권력의 본성은 채찍과 당근이라며 권력의 실행을 비즈니스처럼 묘사하는 장면은 놀랍고도 통렬할 만큼 정확하다. “더욱 강력한 처벌, 결혼식은 어떻게 보일까, 처형, 웨딩 케이크…”[5]블로거 ‘실직한 부정성’Unemployed Negativity은 <헝거 게임> 첫 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참가자들이 서로 죽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들은 강렬한 페르소나와 이야기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한 참가자들은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 그들의 승리에 내기를 건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합장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은 몸치장을 하고 <아메리칸 아이돌>의 경쟁자들처럼 인터뷰를 한다. 청중의 지지를 얻는 것은 죽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문제다.[6]

이것이 바로 참가자들이 리얼리티 텔레비전이 규정하는 꼭두각시 역할을 계속 맡는 이유다. 다른 길은 죽음뿐이다.

그런데 죽음을 선택하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첫 편의 가장 곤란한 부분이다. 나는 이에 관한 글[7]을 썼을 때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에게 의지했다. “자살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다.”[8] 자살하겠다는 캣니스와 피타의 위협은 <헝거 게임>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불복종 행위다. 다시 말하지만 저항이 아니라 불복종이다. 통제 사회를 가장 날카롭게 분석한 두 사람인 윌리엄 버로스와 미셸 푸코가 인식하고 있었듯이 저항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오히려 저항은 권력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무언가가 없으면 권력도 없다. 권력의 대상subject인 살아 있는 존재 없이는 권력도 없다. 우리를 죽인다면 더 이상 그들은 우리를 예속된 존재로 생각할 수 없다. 신음으로 환원된 존재, 이것이 권력의 한계다. 그 너머에는 죽음이 놓여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치 죽은 자인 양 행동할 때만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이 혁명가로 변해 가는 캣니스의 결정적인 일보다.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녀는 승리하고 삶으로, 혹은 더 이상 예속된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으로 복귀한다.

이 모든 것의 감정적 차원들은 결코 부차적이지 않다. 통제 사회가 정서적 기생寄生과 감정적 유대를 통해 작동하는 방식을 콜린스─영화는 대부분의 측면에서 그녀의 소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가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캣니스는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헝거 게임에 참가하고, 가족이 자기와 같은 운명에 처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 소설과 영화가 그처럼 강렬한 이유 중의 하나는 리얼리티 텔레비전 또는 눈물을 짜내는 광고나 연속극 등이 내세우는 합의적 감성의consentimental 정서 체제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캣니스 역을 맡은 제니퍼 로런스 연기의 훌륭함은 부분적으로 어떤 사사私事화된 감정들이 아니라 정치적 등록부를 지닌 감정들─분노, 공포, 단호한 결의 등─을 표현하는 그녀의 능력에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들 수 있는 사적인 영역은 없다.

헤이미치는 캣니스와 피타에게 결코 기차에서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리얼리티 텔레비전에서 맡은 역할이 그들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두 연기지만 무대 밖은 없다.

캐피털의 추적을 따돌리고 도망칠 숲은 없다. 우리가 도피하면 그들은 언제든 우리 가족을 체포할 수 있다.

그들이 폐쇄하지 않을 임시적인 자율 구역 따위는 없다. 이는 그저 시간문제다.

모두가 캣니스가 되기를 원한다. 캣니스 자신만 제외하고.

내 활을 가져오라, 불타는 황금의 활을Bring me my bow, of burning gold.[9]

때가 왔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리얼리티 시스템을 겨냥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인위적인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그런 다음 우리는 깨어난다.

그리고.

이것은 혁명이다……

 

[1]  [옮긴이] 2005년부터 2012년(시즌4)까지 영국 B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영국 정부를 배경으로 한 정치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2]  [옮긴이] 밴드 너바나의 노래 <인 블룸>In Bloom 가사의 한 구절.
[3]  [옮긴이] 영화의 배경인 독재 국가 판엠의 수도로 권력과 부가 집중되어 있다.
[4]  [옮긴이] 데이터의 독점 없이 누구나 데이터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용자 참여 중심의 인터넷 환경.
[5]  피셔는 영화의 이 부분을 기억에 의존해 떠올리며 대략적인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헝거 게임’의 기획자인 헤븐스비가 판엠의 대통령인 스노우에게 이미 대중들의 희망의 상징이 되어 있는 캣니스의 이미지를 어떻게 조작할지 설명하는 대목이다. 스노우는 캣니스의 결혼 장면을 처형 등의 장면과 교차함으로써 캣니스가 캐피털 편이라고 믿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6]  Unemployed Negativity, “Primer for the Post-Apocalypse: The Hunger Games Trilogy”, 5 September 2011, http://www.unemployednegativity.com/2011/09/primer-for-post-apocalypse-hunger-game.html?spref=fb
[7]  Mark Fisher, “Precarious Dystopias: The Hunger Games, In Time, and Never Let Me Go”, Film Quarterly, Vol.65, No.4, Summer 2012, pp.27~33.
[8]  Franco Bifo Berardi, Precarious Rhapsody: Semiocapitalism and the Pathologies of the Post-alpha Generation, Minor Compositions, 2009, p.55.
[9]  [옮긴이]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그 옛날 그들의 발자취>And did those feet in ancient time의 한 구절로, 이 시는 영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예루살렘>Jerusalem이라는 곡으로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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