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피셔의 K-punk 블로그는 한 세대 동안 읽혀야 한다

마크 피셔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관한 마지막 블로그 글을 올립니다. 피셔가 사망한 후 음악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가디언»에 기고한 추도문입니다(https://goo.gl/4QXjZ5). 이 글에서 레이놀즈는 피셔의 블로그 K-punk가 2000년대에 영국 비평계에서 차지했던 위상과 역할, 피셔가 매혹되었던 문화적 대상들, 지칠 줄 몰랐던 열정을 동료이자 독자의 입장에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피셔를 잃은 슬픔과 더불어 그의 작업을 이어받은 정신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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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의 K-punk 블로그는 한 세대 동안 읽혀야 한다

2017년 1월 18일 | 사이먼 레이놀즈
박진철, 리시올 편집부 옮김

지난 주 작가 마크 피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울증과의 단속적인 투쟁은 그가 여러 글과 기념비적인 저작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에서 솔직한 태도로 용기 있게 다루었던 주제다. 피셔는 우리 시대를 괴롭히는 만연한 정신적 고통을 상처 입은 개인들이 겪는 사적인 문제로 바라본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도 치유할 수도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정신적 고통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비정하고 희망 없는 정치―불안정 고용과 유연한 노동 패턴, 계급 연대 및 노동조합 같은 제도의 쇠퇴, 관리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없다’는 메시지를 집요하게 퍼뜨리는 주류 정치 정당이나 미디어―의 증상이다. 상황이 더 나아질 일은 없을 테니 그냥 견디라는 것이다.

피셔는 우울증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완강히 저항했지만 결국엔 우울증이 마흔여덟의 그보다 강했다. 그가 떠난 뒤 배우자와 어린 아들, 친구‧조력자‧동료‧학생으로 구성된 긴밀한 관계망, 그리고 점점 더 폭넓어진 독자층이 남았다. 모두 그가 다음에 말해야 했던 것을 듣고자 기다리던 중이었다.

피셔가 말해야 했던 걸 기다리던 경험을 나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한다. 2000년대 초중반에 나는 아침이 오면 차를 끓인 다음 기대감에 젖어 K-punk가 블로그에 게시물을 올렸는지 확인했다. 피셔의 얼터 에고인 K-punk는 나도 속해 있었으며 찬란했던 한 순간에 포스트펑크 음악 비평의 지적인 열정을 복원했던 블로그 회로의 허브였다.

피셔는 «NME» 같은 주간지를 두고 “그건[80년대 음악 잡지들은] 음악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고 음악도 음악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1] “그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매개였죠.” K-punk는 당시의 여느 블로그보다도 더 많이 록 잡지 황금기의 박식하고 독학자적인 정신을 소생시켰다. 이처럼 블로그에서 비중이 제일 높았던 건 음악이었지만 이와 더불어 그는 영화, 텔레비전, 소설, 정치도 논의했다.

당시 나는 K-punk가 영국에서 발행되는 대다수 잡지보다 훌륭한 일인 잡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셔 글의 정밀함과 폭넓음, 연이은 의견 개진을 통해 달궈진 복음주의적 긴급함과 신랄한 비판은 응답을 요구했다. 그에게서 배턴을 이어받은 동료 블로거들과 마찬가지로 피셔는 늘 다른 작가들의 논의에 기반을 두고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너머까지 사고를 밀어붙였다.

K-punk에게는 그만의 정전이 있었다. 피셔는 견줄 데 없는 통찰력을 갖추고 집요하게 자신의 토템들에 관해 썼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록시 뮤직과 재팬과 그레이스 존스의 글램 아트팝, 조이 디비전과 더 폴의 섬뜩한 상상, 어두운 정글 음악의 선구자들(러피지 크루[2] 같은)과 더 최근에는 레이브 이후의 시금석들(덥스텝 계열의 유령 같은 천재 베리얼을 포함하는)이 그런 토템이었다. 하지만 피셔는 언제나 우리를 놀랬다. K-punk의 팬들은 피셔가 예상 외로 다이도를 극찬했던 걸 애정 어린 마음으로 떠올릴 것이다. 황량하고 비타협적인 음악에 끌리기는 했지만 피셔는 판에 박힌 태도로 팝에 반대하기에는 너무나 예리했고, 그래서 리한나와 걸스 얼라우드, 로이진 머피, 그 외 차트를 수놓은 여러 스타에게 찬사를 보냈다.

또 K-punk는 분리되어 있던 두 블로그 회로, 즉 내가 속해 있던 음악 중심 무리와 철학 블로그 네트워크를 잇는 허브였다. 피셔가 90년대 말 사이버네틱 문화 연구소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에 관여한 덕분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워릭 대학 부속 기관이었지만 점점 더 해당 연구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활동했던 CCRU는 아주 과감한 발상들을 제시했다. 그때도 음악―특히 정글―이 피셔와 동료들의 핵심적인 정신적 연료였다. CCRU의 주된 유산 중 하나는 정치철학 영역의 가속주의accelerationism 학파다(이 학파의 주장을 요약하면 상황이 더 나빠진 뒤에야 나아질 수 있으니 사태를 나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90년대에 피셔는 경계를 해체하는 자본의 흐름을 환호하며 찬미하던 CCRU의 태도를 공유했으며,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노후한 20세기 초의 유물이라며 멸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K-punk 블로그를 시작할 때쯤엔 왼쪽으로 돌아와 한동안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여겼다. 더 최근에는 한층 실천적으로 바뀌어 노동당 같은 기존 제도에서 활동할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아마도 코빈주의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리라). 90년대 이래 피셔 작업을 관통한 줄기는 집합적인 것을 향한 열정이었다. CCRU가 코뮨 같은 결집력을 보인 반면 K-punk는 활기 넘치고 종종 제어하기 어려운 논쟁 공간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피셔 자신의 긴 글보다 더 열띤 말들을 쏟아내곤 했다.

협업과 공동 작업을 향한 충동은 ‘디센서스’Dissensus라는 전자 게시판의 공동 설립으로도 이어졌다. 또 다른 산물은 제로 북스Zero Books로 피셔는 창립자 타리크 고더드와 함께 편집 위원으로 활동했다. 제로북스는 K-punk 주변의 팝 컬트 및 이론 블로그 들이 드러낸 재능을 육성하자는 취지로 구상된 출판사다. 이곳에서 오언 해설리, 니나 파워, 로리 페니 등의 저술가가 쓴 일련의 날카로운 비평서가 출간되어 더 넓은 세상에 소개되었다. 이런 작업은 제로북스에서 독립해 새로이 설립한 임프린트 리피터 북스Repeater Books에서 지속되었다.

2009년 출간된 피셔의 첫 책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제로북스에서 출간되어 대성공을 거뒀다. 그 뒤 피셔는 둘째 책인 «내 삶의 유령들»을 선보였다. 이 책은 유령론hauntology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한 글 모음집으로, 문화적 엔트로피 및 마비적 복고 현상들, ‘잃어버린 미래들’이라는 관념, 언캐니한 것 등을 주요 분석 범주로 삼고 있다. 셋째 책이자 이달 출간된 «기괴함과 으스스함»도 이런 범주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망하기 얼마 전 피셔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환각적 공산주의’라는 제목의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론을 읽고 판단하건대 이 책은 60년대의 반문화적 아이디어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글램에 열광했던 피셔였기에 K-punk 시절에는 대중의 기억을 옭죈다는 이유로 60년대를 무시했던 바 있다.

그렇지만 그가 60년대의 잃어버린 잠재성들을 새로이 평가하는 것이 그렇게 불합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록시 뮤직과 잼처럼 자신을 형성했던 열정의 대상들부터 나중에 열광했던 <헝거 게임>과 러셀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피셔는 언제나 급진 아이디어들이 팝 문화를 경유해 대중 의식에 파고들었던 순간에 매료되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많은 것―대단히 혁신적이고 심층적인 프로그램이라고 그가 우리를 설득했던 텔레비전 시리즈 <사파이어와 스틸> 같은[3]―을 ‘펄프 모더니즘’이라는 개념 아래 정리해 보관했다.

피셔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파열을 일으키는 팝 음악을 사랑했는데, 음악 잡지와 더불어 이것들이 고급 문화와 단절되어 있던 노동자 계급 소년을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문화적으로 새롭고 낯선 것의 난입이 삶의 다른 영역에서 변화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 줄 수 있다고 끝까지 믿었다. 그런 소동들은 기존의 구조와 제약이 불변이 아님을 입증해 주었다. 조금은 과대평가한 것일 수도 있지만, 특유하며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피셔는 러셀 브랜드의 <메시아 콤플렉스>Messiah Complex를 “현실의 사이키델릭한 해체”를 실행하는 정치적 공연의 역작이라 묘사했다.[4]

비할 바 없는 엄격함과 설득력으로 미학과 정치, 비판과 활동 사이에 가교를 놓은 피셔는 참여 지식인의 전형이며, 레이브 음악 이후의 존 버거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그는 공적인 인물로, 여러 행사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발표자로 자리 잡았다. 그의 책과 기사, 음성 및 영상 기록물은 앞으로도 계속 남을 유산이다.

덜 주목받았지만 마찬가지로 생기 넘치고 생산적이었던 그의 활동 중 하나는 교육(가장 최근에는 골드스미스 대학) 및 청년 작가들에 대한 조력이었다. 피셔가 말해야 했던 것들을 기다리던 수년이 지나고 이제는 침묵만이 뒤따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최근의 위기 시기는 그의 정신을 필요로 한다. 그 명료한 시야를, 난공불락의 벽처럼 보이는 현재의 교착 상태에서 가능성의 틈새들을 찾고 발견하려는 의지의 낙관주의를. 위안이 되는 사실은 그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고 영감을 얻은 젊은 정신들이 곧 저 침묵을 깨뜨리리라는 것이다.

[1]  [옮긴이] “Mark Fisher interviewed by Agata Pyzik”, https://thequietus.com/articles/21572-mark-fisher-rip-obituary-interview
[2]  [옮긴이] 영국의 정글 뮤지션인 골디의 예명.
[3]  [옮긴이] 피셔는 «내 삶의 유령들»의 서론 격인 “잃어버린 미래들”에서 <사파이어와 스틸>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
[4]  [옮긴이] “Exiting the Vampire Castle”, https://www.opendemocracy.net/en/opendemocracyuk/exiting-vampire-ca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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