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
살아오면서 여러 고양이—대부분 암컷이었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처음이자 유일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고양이들은 모두 중성화 수술을 받았고, 그 탓에 짝짓기의 즐거움과 새끼를 키우며 가지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각각의 고양이가 보여 주었던 삶은 반복되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장난기 넘치는 처음 몇 달, 의기양양한 성숙기, 점진적인 근력 감소, 그리고 항상 똑같이 찾아드는 말년의 평온함까지. 살다 보면 시간이 점점 더 빨리 흘러간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반려동물의 미덕 중 하나는 아마도 그들이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곧바로 다른 반려동물을 찾아 함께하면 이전에 키우던 동물과의 사별이 안긴 슬픔을 줄일 수 있기는 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을 대체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그때부터는 인간과 동물의 운명이 나란히 놓이게 되리라는 걸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질적 환경 탓이든 권태 때문이든 더 이상 대신할 수 없을 마지막 고양이나 개의 죽음은 관점의 변화를 야기한다. 그 전까지 우리 눈에 반려동물은 불멸의 존재 앞에 선 필멸의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인간을 내려다보듯이 동정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리고 우리가 이들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슬프게 인식한 채로 개와 고양이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려동물을 앞에 둔 우리는 사실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반신반인조차도 아니다. 죽은 개나 고양이를 대체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우리의 반려동물처럼 우리 역시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반려동물과 동질감을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다. 또한 그들의 생이 보여 주는 평온함, 그리고 자연과의 친화성이 지닌 비밀을 곰곰이 생각할 기회기도 하다. 조르주 바타유가 ‘내밀성’intimité이라 부른 동물의 이런 특성은 이것이 개별성과는 궁극적으로 양립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우리가 오랫동안 예상해 왔다고 여겼던 그 사건[죽음]에 특히 예민해지게 되는 건, 우리 각자의 개별성이 용해되는 순간이 다가왔음을 더욱 의식하게 되는 나이에 도달해서다. 그때 고양이의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우에는 완전한 존재를 이루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는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루소는 비엔 호수 변에서 보냈던 행복한 시간이 주변 자연환경에 녹아드는 경험뿐 아니라 친절한 집주인의 존재 덕분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정과 사랑, 비탄 등의 감정은 인생이 타자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 주는 기호다. 나이 듦은 우리가 여러 다른 만남과 관계를 탐색하도록 해 주며, 가끔은 그런 만남과 관계로 인해 고통을 겪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제3의 인생’이나 ‘제4의 인생’ 같은 흔한 완곡어법이 등장할 만큼 기대 수명이 늘어난 오늘날에는 이 같은 경험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자기 인식이 항상 몸의 상태를 반영하는 건 아니다. 만약 떨어뜨린 열쇠를 주으려 몸을 숙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이런 동작 정도는 전혀 힘 들이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자기 이미지를 아직 내 안에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려 한다면, 내 몸이 뻣뻣해진 게 사실인 만큼 조금 더 부드럽게 거절의 뜻을 표할 것이다. 어느 정도 유연성을 유지하고자 운동하는 것과 열차에서 가방을 들어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게 함께 갈 수는 없는 걸까? 나이가 든다는 건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만 이는 알고 있으면 좋을 특권이다. 또한 누군가에게 노년은 윗세대가 느꼈던 감정을 궁금해하면서 상상해 오기만 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합류해 세대 간의 거리를 좁힐 기회가 된다. 노년이 되면 결국 무언가를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내가 어렸을 적에 노인들이 말해 준 것처럼 나이가 드는 게 크게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멀찍이서 바라본 타자와 같다는 점에서 노년은 이국적 정취exotisme와 같다. 사실 노년이란 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년에 이를 때까지 쌓여 간 시간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순서대로 더한 축적물이 아니다. 시간은 쓰여 있던 글자 위에 다시 글자를 써 넣은 양피지와 같다. 거기 기록된 모든 일이 다시 떠오르지는 않지만, 때로는 가장 먼저 기록된 일이 가장 쉽게 표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알츠하이머병은 망각이라는 자연선택 과정에 가속이 붙은 현상일 따름인데, 말기까지 남는 가장 끈질긴 이미지—사실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아니더라도—는 대부분 어린 시절의 이미지다. 이런 관찰에는 잔인한 면이 있지만, 우리가 이를 반기든 개탄하든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는 사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