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화하는 사회»는 책 넘김이 아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차적으로는 분량 문제가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질감이 지은이의 속도감 있는 문체와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표지와 본문 용지를 기존에 사용하던 것보다 한 단계 가벼운 종이로 정하고 대신 커버를 추가했다.
나는 커버 씌우는 방식을 좋아한다(리시올/플레이타임의 책 중에서는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커버를 만들었다). 얇은 종이로 한 겹 감싸게 되면 어딘지 선물을 포장한 것 같기도 하고, 또 표지 자체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파악할 수 있고 검색하면 단번에 찾아볼 수 있는 커버 표지에 비해 속표지는 숨겨져 있어 접힌 날개를 펴 커버를 벗겨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커버를 씌운 책들의 매력이 아닐까. 그런 수고로움을 거쳐 속표지를 확인하고 커버 디자인과 대조해 보거나 연결 고리를 상상해 보는 일이 늘 재밌기도 하고. 뒤에서 말하겠지만 특히 이 책은 모든 걸 ‘평면화’하는 감정화를 다룬 책이기 때문에 표지 디자인에 약간의 ‘입체감’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리고 커버로 감싼 책은 특유의 책 넘김이 있는데 그 감각이 좋다.
리시올/플레이타임에서 이제까지 출간한 비교적 얇은 책들은 대부분 평량 120g의 도톰한 백색 모조지를 본문 용지로 사용했다. 선명하고 매끈하며 꼿꼿한 질감이 꽤 마음에 든다. 가끔 책이 잘 펴지지 않는다는 지적을 접하기도 하는데, 새 책일 때 특히 그렇고 자주 펴 읽다 보면 금세 길든다는 걸 경험상 알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300쪽 이상 되는 무선 제본 책에 이 용지를 사용하자니 부담스럽긴 했다. 게다가 «감정화하는 사회»는 아주 잘 휘어지는 책이길 바랐기 때문에 100g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커버 앞표지는 푸른 바탕을 배경으로 붉은 면적이 넓게 채워져 있다. 거대하고 평면적인 감정 덩어리를 표현한 것인데, 이 덩어리의 경계선은 픽셀처럼 각진 사각형이 늘어선 모습으로 묘사했다. 언제고 더 팽창하거나 축소할 수 있을 것 같은 규모의 유동성이 느껴지도록 구성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늘지만 강렬한 어떤 힘이 균열을 내며 이 덩어리 한가운데를 가르도록 구성했는데, 자본주의와 감정화, ‘반지성의 쾌락’이 사회를 압도할 때조차 자신의 역할을 할 비평의 언어가 지나는 길이라 상상하며 이 공간에 제목과 지은이, 옮긴이 이름을 나열했다. 속표지에는 미세하지만 좀더 확대된 힘/길을 배치해 강조했고, 커버 뒷표지에는 훨씬 더 넓은 영역이 감정 덩어리를 침범하도록 디자인했다. 그리고 그 영역에 글을 집어넣었다.
판형은 기존 리시올/플레이타임 책들보다 조금 키웠다. 가로와 세로 비율은 기존 책들 비율과 똑같이 맞췄다. 앞으로 300~400쪽짜리 책들은 이 판형을 기본으로 삼게 될 것 같다. 내지 디자인도 조금씩 보완했다. 내지의 변화는 대부분 미세한 것들이지만 책을 한 권씩 낼 때마다 개선점들을 고민하고 있고, 지금 이 디자인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우리 책 디자인이다.
이런 구성이 책이 말하는 바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지는 늘 그렇듯 확신이 없다. 표지 디자인은 매번 그리고 갈수록 어렵게만 느껴진다. 이런 불확실함과 불안함으로 출간 후 첫 주를 보냈는데 다행히 몇몇 분이 디자인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얘길 들려 주기도 해 무척 기뻤다. 이런 즉각적인 반응들에 일희일비하는 나는 감정화된 사회를 사는 보잘 것 없는 1인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