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의 감정을 근거 짓는 것들

문학 평론가 김미정 선생님의 «감정화하는 사회» 서평 <오늘날 우리의 감정을 근거 짓는 것들>을 공개합니다.

2019년 출간된 김미정 선생님의 비평집 «움직이는 별자리들»은 우리 시대와 한국 문학의 장면들을 독창적이고도 선명한 비평 언어로 분석해 다양한 독자의 호응을 모았습니다. 저희도 «감정화하는 사회»를 작업하던 중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고, 거기 수록된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에 오쓰카 에이지의 ‘기능성 문학론’이 중요하게 논의된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감정화하는 사회» 출간 후 김미정 선생님에게 서평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감정화하는 사회»의 문제 의식을 두루 살피면서 주요 논지와 의의를 짚고 있으며, 우리 현실과 연결시켜 읽을 수 있는 지점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근대의 재실행’이라는 전제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가 제시한 ‘플랫폼 자본주의’와 ‘감정화’ 등의 문제 의식에 공감한다면 이를 다른 방향으로 이어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는 ‘번역’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글의 바람이 전달되어 우리 사회의 ‘감정화’를 둘러싼 더 다양하고 생산적인 논의들이 촉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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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의 감정을 근거 짓는 것들
ㅡ 플랫폼(자본주의)의 문제와 오쓰카 에이지의 «감정화하는 사회»

김미정

번역이란 결코 등가적이지도 일방적이지도 않은 작업이다. 어떤 문화·지식이 언어를 달리해 소개될 때 거기에는 늘 어떤 과잉과 결락이 있다. 얼마나 원전에 충실했는지의 문제와 별개로, 늘 원래 언어의 맥락과 어긋날 수밖에 없는 그 불일치야말로 어쩌면 번역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라는 이름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흥미롭다. 또한 다시 읽혀야 할 이유도 여럿인 인물이다. 한 예로 2004년 즈음부터 한국에서는 가라타니 고진발 근대 문학의 종언 논의가 오갔고 그 연장선상에서 아즈마 히로키의 근대 이후 인간론이 소개되며 읽혔다. 그런데 만일 실제로 근대 문학을 그만둘 작정이 아니었다면 그때 오쓰카 에이지의 작업도 함께 참고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가령 가라타니 고진에게 ‘근대 문학의 종언’ 선언은 결과적으로 문학을 떠나는 알리바이처럼 작동했다. 하지만 «감정화하는 사회»에서 알 수 있듯 오쓰카 에이지는 불철저했던 ‘근대(문학)의 종언’을 새로운 자본주의-테크놀로지의 조건 속에서 다시 실행시키고자 하면서 포스트모던 문학을 상상해 왔다.

«감정화하는 사회»는 오쓰카가 오랜만에 발표한 무게감 있는 문예 비평 작업이고, 한국에는 비로소 처음 번역된 그의 총론격 논의의 하나다. 제목에서 암시되듯 오늘날 세계의 감정화 경향, 즉 “자기 표출이 ‘감정’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상호 욕망하는 관계”로 구동되는 세계에 대한 문제 의식이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말과 소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요, 다양한 자기 표출 미디어와 연결된 우리 삶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감정화의 메커니즘을 질문하는 책

이 책은, 헤이세이 덴노天皇 아키히토의 2016년 대국민 담화가 일본인의 ‘마음’에 호소한 정황을 분석하며 시작한다. 저자가 말하려는 ‘감정화’의 성격은 도입부에서부터 확실하게 암시된다. 이 분석은 사회적 차원에서 내셔널리즘적‧배타적 여론이 형성되는 메커니즘, 그리고 문학적 차원에서 타자에 대한 감각이나 주고받는 말이 달라지는 양상을 암시한다. 이때 ‘감정화’가 ‘공감’의 메커니즘과 함께 이야기되는 지점이 특히 흥미롭다. 최근까지 ‘공감’의 재활성화를 강하게 요청해 온 한국 문학계에서의 논의가 우선 떠오르기 때문이다.

‘공감’ 논의는 잘 알려져 있듯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에서 연원한다. 근대 문학의 성립 과정에서 공감의 역할은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다. 오쓰카가 환기하는 근대적 공감은 “자기 내면에 ‘중립적인 관찰자’를 두고 그것이 자신과 타인의 ‘감정’ 및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형성하는 단계를 밟은 결과로 규범, 즉 ‘도덕’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지닌다. 그리고 그는 오늘날 우리가 “‘도덕’(넓은 의미의 규범 및 공공성)을 형성하는 회로”를 상실했고 “현재 우리는 단순히 ‘감정적’이고 ‘공감적’이며, 우리 마음속에는 ‘중립적 관찰자’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중립적 관찰자’에 대한 기대 역시 또 다른 이념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속도의 미디어와 늘 연결된 오늘날 우리의 조건 속에서 그러한 공감은 좀처럼 불가능하다. 각자의 성찰reflection을 가능케 하는 물적 조건이 허약해진 것이 사실일지 모르겠다. 속도의 미디어와 실시간 연결되어 있는 상황에서 “‘감정’이 우리 가치 판단의 최상위에 놓이고 ‘감정’을 통한 ‘공감’이 사회 시스템으로 기능”하는 양상은 그 사례들을 언급할 것도 없이 오늘날 빈번하게 체감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대적 공감의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공감’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거나 위험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공감’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태극기 부대도 반난민 집회도 약자 혐오도 모두 정당화될 수 있다. “우리 마음속의 중립적 관찰자”를 질문하지 않는 공감 논의는 무력할 수 있다. 공감 자체가 이념일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 버린 것이다. 이것은 공감의 무용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공감의 조건, 토대를 비로소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한다는 요청이고, 지금 한국에서도 더 논의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체론으로서의 비평 작업

‘감정화하는 사회(문학)’라는 명명은 역사, 사회, 공공성 등이 지워지는 문학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한데 이것이 문체론, 문체 비평에 가까운 것도 지적해 두고 싶다. 오쓰카 에이지의 문체 비평은 흔히 연상되는 소위 ‘내재적 비평’과 정반대의 작업이다. 그에게 문체는 (에토 준식으로 말해) 작가와 세계 사이의 교섭의 흔적이다. 쓰는 내면이 세계와 어떻게 길항·교섭하는지에 그는 관심을 두고 있다. 이것은 특히 ‘기능성 문학’을 논하는 장에서 두드러진다. ‘기능성 문학’이라는 말은, 일본의 독자들이 “즉효성 있는 정보, 단일한 감정을 서플리먼트처럼 자극해 주는 기능밖에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최근의 경향과 이에 부응하는 듯한 문학을 지칭하는 저자의 표현이다.

생물학적 격변을 겪지 않는 이상, 자기를 표현하고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자체가 폐기될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표현의 욕망과 접속하는 미디어는 계속 달라지고 있다. 자기 표현의 욕망과 별개로 그 형식이나 내용이 이전과 동일할 리 없다. 이때 저자가 라인LINE 같은 자기 표출 미디어, 일본형 AI 린나의 발화 등에서, 메이지기 남성 작가들에 의해 관리된 여성 1인칭의 성립 과정을 겹쳐 읽는 것도 꽤 흥미롭다.

우선은 이것이 근대 문학의 문제(자기 표현의 욕망)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시키는 단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례에 만일 젠더론의 관점을 개입시킨다면, 그의 논의(우려)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향후 문학을 생각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다른 지면이 필요하지만, 가령 그의 관점을 비틀어 한국‧일본에서의 «82년생 김지영» 현상을 읽을 때 특히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감정화’, ‘기능성 문학’이라고 지칭한 그의 다소 비관적인 시대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해도, 그가 근대 문학 초창기의 조건과 오늘날 문학의 조건을 겹쳐 이야기하는 과감함은 문학사를 생각할 때 꽤 자극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소비에서 노동으로의 선회

한편, 저자가 우려하는 ‘감정화하는 사회’, ‘감정화하는 문학’의 문제는 소위 플랫폼 자본주의, 특히 오늘날 ‘노동’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 책에서 저자는 과거 자신의 작업이 ‘노동론’이 아니라 ‘소비론’에 입각해 있었음을(«이야기 소비론», 1989) 자기 비판한다. 이 대목은 꽤 중요해 보인다. 당시 리버럴 지식인이 세기말 자본주의 이행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암시하기 때문이고,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우리의 말과 문학을 둘러싼 조건 변화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오늘날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나’의 조건을 생각해 보자. 인터넷에서 어떤 식으로 접속해 있든 우리는 각각 개별적 아이덴티티를 부여받은 존재일 뿐 아니라, 익명의 데이터 자원으로도 존재한다. 나의 일상적 검색 작업조차 어떤 플랫폼 기업에게는 노동력으로 활용된다. 그리고 그 산물은 빅데이터로 화하며 무상 노동 콘텐츠 상품이 되어 버린다.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인터넷에 접속해 활동하는 동시에 내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강요가 아니라 우리의 공모에 의한 것일 뿐 아니라, 착취가 착취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어떤 플랫폼의 유저로 참가하는 동의와 계약 과정에는 내 노동력과 무상 노동 콘텐츠의 활용을 위임한다는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은폐된 것을 우리는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그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무언가를 얻고 있다고 여기고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내가 제공한 것은 내가 얻는 것과 결코 등가적이지 않다. 애초 약관에서는 내가 제공한 것으로부터 또 다른 가치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누군가가 점유‧소유해 제3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사실까지 명시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접속해 있는 플랫폼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활동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의 자유일까. 정교하게 디자인된 알고리듬 회로 속에서 컨트롤되고 있을 이 자유는 정말 자유일까.

이것이 «감정화하는 사회»가 시야에 두고 있을 큰 문제 의식이며, 세기말부터 철학계에서 논의되어 온 통제·관리·제어하는 권력과 그 통치술에 대한 이야기(통제 사회control society)이기도 한데, 저자의 비평적 개입은 이러한 현상 분석과 진단에만 있지 않다. ‘감정화하는 사회’, ‘기능성 문학’ 등은 오늘날 현실을 승인하는 명명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조건이 왜 문제적인지조차 질문되지 않는 오늘날 문학‧예술에 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주의적 전제를 질문한다면

오늘날 세계의 전방위적 ‘감정화’를 우려하는 오쓰카의 논의는 확실히 근대주의자의 그것에 가깝다. 이 책은 ‘감정’의 반대편에 ‘이성’과 ‘합리성’을 놓는 근대적 이항 대립 구도를 연상케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이분법은 포스트모던적 비판과 질문을 통해 극복되어 왔다. 물론 이것을 저자가 모를 리 없었을 테지만, 이 책에서는 이성과 감정 사이의 관계를 자신이 어떻게 상정하는지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는 ‘비평’이야말로 바로 이 ‘감정화’ 바깥에서 기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금 그를 ‘근대주의자’로 지칭한 것은 그가 이런 이분법을 승인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후기>에서 “철저하지 못하게 끝나 버린 일본의 근대”를 인터넷상에서 재실행‧갱신할 기회를 엿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데, 이 대목이야말로 앞서 말했듯 가라타니 고진 및 아즈마 히로키와 오쓰카 에이지의 결정적 차이이기 때문이다(가라타니 고진이 근대 문학에서 역사철학으로 이동한 것,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의 서브컬처론에 내재된 역사관―혹은 몰역사성―과 비교할 때).

그런데 또 한편으로 만일 이러한 전제를 질문한다면 다른 이야기, 다른 해석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분석 대상들은 최근 ‘감정/이성’식의 구도를 비판·극복하고자 해 온 ‘정동’affect의 문제 의식을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재독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때의 분석이 반드시 근대주의자의 우려로만 귀결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앞서 이야기한 일본형 AI 린나와 문학사의 문제에 젠더적 관점을 개입시킨다면, 혹은 오늘날 플랫폼 시스템의 조건을 인간이 다양하게 다른 방식으로 전유하는 장면들을 떠올린다면 분명 다른 주제의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구조는 언제나 변칙성을 동반한다. 하지만 변칙성, 혹은 그 변칙성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이 책의 관심 대상은 아니다.

물론 오쓰카 에이지에게 이러한 문제 제기는 무의미할 수도 있다. 반복하지만 그는 “철저하지 못하게 끝나 버린 일본의 근대”를 재실행‧갱신할 기회를 고민해 온 사람이다. 방금 전의 질문은 어쩌면 세대, 젠더, 문화적 토대 등등이 다른 위치에서 출발한 이들이 고투해야 할 것일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모두가 공유할 큰 이야기는 사라진 지 오래라고 해도, 각자의 위치에서 제각기 말할 수 있을 공통의 화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주목하는 ‘플랫폼’과 ‘자본주의’야말로 오늘날 모든 이야기를 근거 짓는 초월론적transcendental 조건이다. 여기에서부터 다시 이야기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비평이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

«감정화하는 사회»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못한 흥미로운 대목도 많다. 특히 3장은 2000년대 이래 본격화한 일본 내 신자유주의 분위기와 스쿨 카스트 소설(특히 라이트노벨 쪽에서 학급 내 위계를 다룬 소설들)을 다루면서, 서열, 위계, 불평등의 문제가 어떻게 서사의 무의식을 형성하는지 분석한다. 7장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양억관 옮김, 민음사, 2013)를 “역사 수정주의에 호의적인 ‘우화’”로 읽어 내는데, 이는 일본 독자들에게 유독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한국에서는 꽤 중요하게 읽힐 장이다. 또한 여러 대목에서 논하고 있는 AI, 문체, 작가, 편집자 등의 문제는 서브컬처나 문학 쪽 관련자가 아니어도 공감할 대목이 많을 것이다.

문학‧문화에서도 미래학이 가능하다면 이러해야 하지 않을지, 이것이 비평critic이 장르의 자족성을 떨치고 기동력 있게 세계에 개입하는 방식 아닐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비평의 문제 설정 방식의 하나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지 오랫동안 생각하게 할 책이다.

 

김미정
문학 평론가. «움직이는 별자리들»(2019)를 지었고, 옮긴 책으로는 «정동의 힘«(2016), «군도의 역사사회학«(2017) 등이 있다. 정동, 비인간 존재, 공통장에 대한 관심으로 글을 쓰거나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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