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문화론»의 서장 ‹역사의 웅덩이› 본문을 공유합니다. 책의 기본 구도와 문제 의식, 지은이의 관점을 간명하게 제시해 줄 뿐 아니라, 사실史實과 이론을 자재로이 오가는 논의 스타일, 기백 넘치는 문체 등 이 책 고유의 매력을 맛보기에도 적절한 글입니다.
언뜻 밋밋해 보이는 부흥기라는 역사적 국면을 새로운 사유의 발판으로 삼는 지은이의 발상력, 재액으로부터의 ‘다시 일어서기’와 동양적 르네상스라는 부흥의 두 성격에 대한 스케치, ‘무한한 사랑’의 품을 떠나 ‘유체적 에로스’를 전전해야 하는 우리 숙명에 대한 묘사, 그리고 문화를 “손때 묻은” “골동품” 같은 완상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세계가 산출하는 새로운 과제에 응해 끊임없이 … 고쳐 써야만 하는 것”으로 선언하는 의지까지, 곱씹을수록 의미가 배어나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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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의 웅덩이
일본 문화는 대체 언제 창조성으로 넘쳐 나는가? 이 책의 관심은 이 소박한 질문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일본인론 혹은 일본 문화론은 예전부터 성황이었으나 이런 질문은 의외로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구획된 각 시대의 성격을 두고 이러저러하게 논평하지만, 창조의 환경이 어느 시기에 크게 자극받는지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늘 유감이었다.
본디 역사는 결코 평평하고 단조로운 평면이 아니라 요철이나 틈새, 단층이 많은 함몰 지대다. 그러한 요철을 억지로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몰이나 기복의 다채로움을 잃지 않게끔 역사를 측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 표제로 제시한 ‘부흥 문화’란 바로 그러한 측량을 위한 하나의 지표다. 간단히 말해 부흥기 혹은 ‹전후›戦後라는 것은 일종의 옛이야기와 같은—짧고 조금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나 때로는 듣도 보도 못한 기적이 일어나는—‘자유’의 시간대며, 이 때문에 동란기에도 안정기에도 볼 수 없는 특성이 나타난다. 거대한 파괴 후 다공질의 지반 위에 새로운 현상을 어느새 빗물처럼 모아들이는 역사의 웅덩이, 그것이 부흥기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부흥이라고 하면 전쟁의 환란이나 재액 등과 비교해 드라마로서 밋밋하고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갱신할 기회로 삼기에는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탓일까, 부흥기를 긍정적으로 다룬 철학이나 평론은 그리 많지 않다. 워낙 오늘날의 작가나 예술가, 비평가는 대개 동란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예외적인 카오스가 출현하는 때야말로 일상의 사회가 감추어 두었던 것—인간의 폭력성, 질서의 기만 혹은 정신의 기적적인 아름다움 등등—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평상시에 당연스레 여겨지던 것들의 비자명성이 사람들에게 재인식되기 때문이다. 분명 문화나 예술의 중요한 사명은 사회에 경보를 울리기 위해 ‘예외 상태’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문화나 예술에는 경보기라는 사명만이 아니라 부상당한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중요한 기능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 이 책의 기저에 있는 질문이다. 애초에 부흥 문화란 정의상 거대한 사건(전란이나 재액)의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사건 후에—혹은 그 흔적으로—작동하는 문화다. 그때 전쟁이나 재해 전의 기준선까지 완전히 회복하는 것만이 관건은 아니다. 사건 후=흔적에 새로운 소재나 방법론을 끌어들여 시스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것, 그것이 일본 부흥 문화의 본뜻이다. 반대로 옛 질서가 불사조처럼 화려하게 부활하는 이야기 전개는 일본 문화에서 선호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파괴나 재액은 종종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변화를 문화에 가져온다. 그러나 불가역적인 변화를 겪으면서도 파국을 향해 일직선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부흥기 혹은 ‹전후›라는 웅덩이 속에서 자신의 문화적 재산을 뒤섞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안식과 창조의 시간대가 일본 문화에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 시간대에서 선대의 비평가 하나다 기요테루가 말한 “부흥기 정신”의 빛을 발견한다.
2 두 종류의 부흥
확실히 해 두자면 ‘부흥 문화론’이라는 구상 자체가 내 고유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비평가 야마자키 마사카즈는 7세기에 벌어진 하쿠스키노에白村江 전투의 ‹전후›에 입각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아름다운 문화의 시대[하쿠호白鳳 시대—인용자]가 실은 하쿠스키노에 전투의 패전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663년 일본은 당의 수군에게 결정타를 맞았고 덴지天智 천황은 조선 경영을 단념해 내정으로 전향한다. 실은 이때 섬나라 일본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생각해 보면 일본 최초의 문화는 하쿠스키노에의 전후 문화였던 것이다. [……]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화는 언제나 부흥 문화로 발전해 왔는데, 그 원형이 저 옛 7세기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저 늠름한 하쿠호 문화의 기저에는 확실히 ‘부흥’이라는 동기가 있었다. 덴지 천황의 조선 경영이 하쿠스키노에 패전으로 좌절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0년 후 진신壬申의 난이 뒤따라 일어난 후, 거듭된 피해로부터 회복하듯이 아스카노키요미가하라노미야飛鳥浄御原宮 및 후지와라쿄藤原京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등장했다. 일본사를 돌아보면 확실히 이러한 종류의 ‹전후› 시공간에서 결정적인 변천이 거듭 발생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떠올려 보라.
하쿠스키노에 전투, 진신의 난(7세기 후반) → 하쿠호 문화
겐페이源平 전쟁(12세기 후반) → 가마쿠라 불교,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남북조 시대(14세기) → 노가쿠能楽, 『태평기』
오닌応仁의 난(15세기 후반) →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化
러일전쟁(20세기 초두) → 자연주의 문학
제2차 세계대전(20세기 중반) → 서브컬처
이 책에서는 이러한 부흥기 혹은 ‹전후›의 사례에 더해 중국의 동란에 대한 일본의 반응도 다룬다. 중국의 국가적 위기 및 멸망 체험은 종종 바다 건너의 일본 문화에도 중대한 변천을 일으켰다. 적잖이 기묘하게도 자국의 현실적real ‹전후›뿐 아니라 타국의 가상적virtual ‹전후›까지 일본 부흥 문화의 토양이 된 것이다. 이런 원격 조작이 일어난 것도 역시 극동의 섬나라다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일본사가인 하야시야 다쓰사부로도 야마자키와는 다른 각도에서 일본 부흥 문화의 의의를 논했다.
역사의 변혁기에 항상 고대가 부활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 복고주의와 상고尙古 사상 모두 현실에 대한 부정을 깊숙이 품은 혁신의 일본적 표상이기도 했다 [……] 엔기延喜와 덴랴쿠天暦 시기는 새롭게 장원을 기초로 하는 귀족 정치가 열린 전환기였으며, 일본 문화에 대한 자각과 함께 율령 국가가 깊이 되새겨져 «만엽집»万葉集 속편의 의미를 담아 새롭게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이 만들어졌고, «일본기»日本紀의 속편 내지 후속작으로서 «실록»実録이 편찬되는 등 노래와 이야기 모음집이 앞다투어 꽃피우듯 창작됨과 동시에 새로운 고전이 창조되었다. 이는 분명 고전 부흥에 의한 고전의 창조였다. 고중세의 변혁기에는 또 엔기와 덴랴쿠를 고전적 세계로 삼아 와카에서는 «신고금와카집»新古今和歌集, 회화에서는 야마토에大和絵의 에마키絵卷 등이 창조되었다. 가마쿠라 조각으로 말하자면 일약 덴표天平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야시야는 옛것에서 혁신성을 이끌어 낸 일본의 정치 및 문화 경향을 예리하게 짚고 있다. 예를 들어 메이지 정부는 천황 친정親政 및 행정 단위인 쇼省를 채용했는데, 이는 고대 율령 국가의 리메이크였다. 새로운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메이지인의 의도는 오히려 고대 국가의 틀을 형식적으로 ‘부흥’함으로써 완수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어디까지나 왕정 복고restoration였지 시민 혁명revolution이 아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나아가 서양의 르네상스가 이슬람을 경유해 전승된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정신을 부흥시켰다는 식으로 복잡하게 꼬여 있는 것과 달리, 일본의 ‘고전 부흥’은 어디까지나 자국에 남아 있던 자산을 되살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복고=혁신의 사상은 일본사에 한정되지 않고 중국사에서도 관찰된다. 3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중국이 이 사상의 선진이었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나는 하야시야와 같이 복고=혁신을 일본의 사례에 한정하는 데 반대한다). 동아시아의 시간은 꼭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옛’古은 단순한 과거 유물이 아니며 오히려 ‘지금’ 속에 잠재되어 신흥 세력이 스스로의 주장을 합법화하고자 할 때 재이용된다. 이러한 ‘왕복’의 시간 감각 속에서 동아시아의 정치와 문화는 서양과 달리 초월적인 신을 매개로 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정의正義의 보증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일신교적인 초월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정통성의 원천으로서 ‘옛’을 불러내는 것이 가장 실천적인 정치 수단의 하나였다.
아무튼 야마자키와 하야시야의 견해를 전제로 대략 두 종류의 부흥을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이나 재액 후의 부흥이며, 또 하나는 고대의 문화, 예술, 정치 시스템의 부흥=르네상스다. 이 책은 굳이 말하자면 전자에 무게를 두지만 그렇다고 후자의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의 견해는 결코 대립하지 않고, 양자 모두 문화의 재생 의료로서 부흥revival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니 말이다.
3 사회의 만성적 부상
부흥 문화가 일본을 해명하는 하나의 열쇠를 쥐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오늘날 일본 사회에도 새삼 적용해 볼 만한 가치를 가질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렇다’고 답하겠다. 왜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리고 있고, 그런 까닭에 탄력성이 풍부한 시스템을 채워 넣을 필요성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조금 에두르는 것이긴 하지만 이 점을 간단히 설명해 보자.
일반적으로 냉전 종식 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글로벌 패권을 장악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자본주의의 전면화는 소비 주기를 점점 가속화해 온갖 사물을 찰나에 유통될 뿐인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말하자면 유체역학적 상태를 초래한다. 이에 따라 종래 인간을 보호해 왔던 가치관에도 강한 타격이 가해진다.
‘사랑’과 같은 숭고한 가치관도 예외가 아니다. 본래 서양의 ‘사랑’ 개념은 절대적인 유한성에 갇힌 인간을 정신적인 무한성/영속성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유약한 개체는 사랑의 작용에 의해 특별한 존재가 되어 이 세계에 단단히 매인다…… 그렇지만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지금 무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행위가 되었고, 그 대신 유한하고 상품화된 ‘에로스’를 전전하는 것이 대대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했다. 정체성과 존엄성의 기반은 불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유체적 에로스 속에서 찾아진다. 물론 에로스는 타자를 상품으로 바꾸어 버리지만, 옮기기 쉬운 상품으로서의 에로스가 매개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종다양한 타자와의 소통에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다. 에로스는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주선한다는 점에서 양의적이다. 이러한 유한의 에로스가 행사하는 전제専制 곁에서 사랑은 이제 기껏해야 에로스의 대해에 가끔 기적처럼 출현하는 암초에 불과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한의 사랑과 영원의 행복을 꿈꾸는 시대 착오적 로맨스는, 현대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극한까지 포화된 에로스의 거품이 꺼진 후의 온갖 인간적 감정이 증발된 백치적인 미래에 영원히 갇혀 버리리라……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불가능한 사랑을 희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적이지 않은 무언가로의 변모를 초래하는 일이 된다.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한 욕망의 언어가 오늘날 사회를 넘치도록 채우고 있지만, 원래 에로스는 크든 작든 반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에로스는 때로 가정—즉 재생산=생식의 장—을 위협하며(불륜이나 동성애) 많은 사람의 미간을 찌푸리는 속악한 이미지를 사회에 흩뿌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들의 정체성 기반에 깊이 침투한 다종다양한 에로스의 에너지를 말소시키려 하는 것은 이제 인간 존엄성을 위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에로스의 영역에 정치 권력이 간섭하려 하면 그때마다 자주 격한 반발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서브컬처의 표현 규제를 둘러싼 작금의 혼란에도 이러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정치가의 이해 부족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렇게 유한한 에로스가 무한한 사랑을 대신해 정체성의 주역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에로스가 흘러넘치는 이 유체역학적 환경에서, 무한한 사랑에 보호받지 못하게 된 우리는 자각할 수 없는 미세한 ‘상처’에 점점 침식당하고 있다. 무언가를 손에 넣는 것과 무언가를 잃는 것을 분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게다가 이러한 유체화를 한층 더 가속하는 형태로 오늘날 정보 환경도 신진대사 속도를 높이고 있다. 너무나 방대한 정보가 존재하는 인터넷상에서는 낡은 기호=정보를 점점 도태시켜 정보 과부하에 대처할 수밖에 없다. 그 고속 순환 속에서 개별 기호의 수명은 한없이 짧아져 간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에서는 미시적 상실이 상례화한다. 자본주의의 유체역학적 운동은 결손을 일상적으로 발생시키며, 그 무수한 작은 손상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축적된다. 그리고 우리의 불안정한 개個를 안도시키고 인정하고 수용해 줄 공동체는 이미 여력을 다했기 때문에, 만성적인 상처가 완치되는 일 없이 우리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플라잉 더치맨)처럼 에로스의 대해원을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 한편으로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거시적 상실도 세계 전체에서 단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아무리 인류 사회의 문명화가 진행되어도, 아니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우발적인 사고가 초래하는 상실과 피해가 공포스러울 만큼 심대하다는 것은 오늘날 일본인에게 상식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여러 상처에서 인간을 완전하게 보호하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유체적인 세계에서는 어떤 무엇이 굴욕감의 원인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이나 발언이 어떤 박자에 따라 굴욕감을 부채질하고, 그 굴욕의 이유를 자신밖에 (혹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더 이상 ‘영원의 사랑’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한 채 죽음에 이를 때까지 크고 작은 여러 상처와 굴욕감을 이고 가는 것—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숙명적 상황 아닐까?
4 ‘다시 일어서기’의 철학
전쟁과 재해라는 거시적 상실이든 고도 자본주의 사회의 미시적 상실이든, 인간의 지적 능력을 초월하는 셀 수 없는 상처가 개인에게 축적될 때, 당사자에게도 자각되지 않는 비밀 영역이 늘어 간다. 그 상처=비밀이 일정한 양을 넘어서면 그때까지 친밀하던 인간과도 소원해지며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실제로 어떻게 해도 타인에게 전달될 수 없는 상처=비밀이 원만한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모티프는 오늘날 서구의 표현 양식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런데 뒤집어 말하면 누구라도 무언가 상처나 굴욕감을 가지고 있다는 그 하나의 사실이 오늘날 우리의 거의 유일한 존재론적 공통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짊어진 존재끼리 새로운 동료로서 서로를 발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상처=비밀의 축적이 단지 기존의 인간 관계나 공동체를 파괴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에로스가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처럼 상처는 소통을 단절하면서도 미지의 소통을 생성한다. 상실이나 실패가 분명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체험일지라도 거기에는 또 인간들이 새로이 결합하고 공명할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간단히 말해 상처는 연대의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셀 수 없는 상처=비밀을 짊어진 현재의 문명에서는 그 상처들에서 출발해 무엇을 건설할 것이냐는 질문이 더욱 중요해진다. 달리 말하면 어디에도 상처 없는 존재는 없고 인간에게도 사회에도 오류나 실패가 상례화되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로부터 어떻게 다시 일어설지가 문명론적인 과제로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상처를 미학적으로 관상観賞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천적 철학을 길러 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다시 일어서기’ 철학의 단서가 일본 부흥 문화의 역사 속에 충분히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반복하면 일본의 부흥기란 단순한 치료 요법이나 치유의 시간대 혹은 원래의 기준선으로 돌아가고자 덮어놓고 달려드는 시간대가 아니라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대다. 우리 선조는 폭풍이 지나간 후=흔적의 시공간을 다양한 사색과 표현을 발효시키는 특별한 웅덩이로 변화시켜 왔다. 이러한 웅덩이의 문화 체험 자체를 하나의 가치로 파악하고 우리 생존의 지침으로 삼는 것, 이 책은 그것을 겨냥한다.
물론 어느 시대가 부흥기인지는 나중에 돌아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정말 심각한 사태는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니까. 따라서 온갖 ‘부흥’은 반신반의로 행해진다. 특히 셀 수 없는 미시적・거시적 상실로 가득한 오늘날 사회에서는 지금이 사건 ‘후’인지 ‘전’인지 혹은 ‘한가운데’인지를 판별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예를 들어 2013년의 일본은 재해 ‘후’인가 ‘전’인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부흥’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의 상실을 거듭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다시 일어서는 힘(탄력성)을 문명에 심어 넣는 역사 기술記述이 제안되어야 한다. 거기서는 국민을 억지로 통합하려는 공식적이고 납작한 역사 기술이 아니라 생기 넘치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거점으로서의 전통이 높이 평가될 것이다.
원래 문화란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라 세계가 산출하는 새로운 과제에 응해 끊임없이 평가를 고쳐 써야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와비사비’侘び寂び나 ‘무상관’無常觀 같은 손때 묻은 일본적 미학을 염불처럼 되뇌는 것으로는 더 이상 오늘날의 복잡하고 가혹한 세계에 대응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오늘날 세계의 상황을 전제하면서 일본이 오랜 세월 가다듬은 부흥 문화를 하나의 가치 체계로 부흥하려 한다. 물론 이 시도가 성공적인지는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판단할 문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구성을 간단하게 설명해 두겠다. 어느 장부터 읽어도 상관없지만 나로서는 1장과 2장, 3장과 4장, 5장과 6장이 함께 묶이도록 전체를 구성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 부분에서는 일본의 고대 문학을, 다음 부분에서는 근세 중국 및 일본을, 마지막 부분에서는 근현대 일본의 문학과 서브컬처를 주요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두 장씩 한 단위로 읽으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보다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설이 길었다. 자, 이제 어서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