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3‧11 전날에 ‘부흥’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다” 시청 후기

“열 번째 3‧11 전날에 ‘부흥’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다” 시청 후기

3월 10일 «부흥 문화론» 지은이 후쿠시마 료타가 패널로 참여한 PLANETS의 인터넷 방송 “열 번째 3‧11 전날에 ‘부흥’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다”를 시청했습니다(유료 방송이었지만 방송 일부를 유튜브에서 무료로 시청할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Mh5kYM3uS8E). PLANETS는 비평가 우노 쓰네히로가 주도해 동명의 잡지 «PLANETS»를 중심으로 다양한 미디어 활동을 벌이는 기업입니다. 이 방송은 본래 PLATNETS의 오프라인 행사로 기획되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확산되어 온라인 방송으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고정 패널인 우노 쓰네히로, 게스트인 후쿠시마 료타와 가이누마 히로시(사회학자) 모두 각각의 관심사와 입장에서 주제에 대한 논의를 펼쳤습니다. 두 시간에 달하는 토의 전체를 요약하기는 어려워 후쿠시마 료타의 발언을 중심으로 인상적이었던 이야기 몇 가지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PLANETS와 참가자들의 허락을 받아 후기를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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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방송은 3‧11 대진재 이후 남겨진 ‘부흥’이라는 과제가 오늘날 빠르게 잊혀 가고 있다는 문제 의식에서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로 촉발된 혼란을 계기 삼아 진재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3‧11부터 구조화되어 이번 사태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짚기도 했습니다.

재액에 대한 일본적 상상력의 계보를 다룬 «부흥 문화론»의 지은이가 직접 현재 시점에서 ‘부흥’의 평가와 전망을 말한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고, 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보편적 재난의 현실을 부흥 문화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참조점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흥 문화론»에 이어 방송에서도 후쿠시마 료타의 언어 능력이 돋보였습니다. 시종일관 빠른 어조를 유지한 그는 이 방송에서도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펼치는 동시에 구체적 현실에서 시작해 사상적 문제를 짚어 내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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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는 윌리엄 버로스의 작품(“Word Virus”)을 인용한 다음 현재의 사태가 ‘언어가 바이러스처럼 해석을 증폭시키는 바람에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사회’, ‘리스크가 고정된 값을 가지지 않고 해석을 통해 증폭되거나 줄어드는 사회’의 현실을 잘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 필요한 처방으로 언어와 정보의 ‘속도 늦추기’를 강조합니다. 즉 3‧11이든 코로나든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여러 결단이 필요할 텐데, 그때 적절한 절차를 거치고 정보 공개를 분명히 함으로써 ‘속도’를 얼마간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또 이런 입장에서 현재 일본 주요 언론의 보도 행태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제대로 된 취재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를 첨부하는 등 불성실한 보도 행태가 사실을 ‘블랙 박스’처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그 결과 사회적 패닉이 초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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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해 곱씹을 만한 지적을 하나 던지는데 바로 ‘당사자 주권’의 맹점입니다. 재난 상황은 우리를 일거에 ‘당사자’로 만듭니다. 그런데 이 당사자들은 당연히 해당 문제를 해결할 특별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진’地震 같은 사회적 재난뿐 아니라 많은 사회 구성원이 살면서 마주하는 ‘임신’妊娠 문제도 그렇습니다(후쿠시마 료타도 얼마 전 아버지가 되었다고 하네요). ‘지진’도 ‘임신’도 한자에 ‘떨다’라는 의미를 가진 진辰을 포함하는데, 우리는 이런 사태의 당사자가 될 때 갑자기 동요하는 지면에 내던져져 생명과 관련된 무거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이때 우리는 공포와 불안의 감정에 휩싸이기 마련입니다.

그는 심리학자 대니엘 카너먼의 (감정적인) ‘빠른 사고’와 (이성적인) ‘느린 사고’ 논의를 인용하면서 사태 당사자들이 감정적인 ‘빠른 사고’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위험에 노출된다고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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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그는 이번 사태에서 ‘비인간적 리버럴(자유주의)’과 ‘인간적 리버럴’의 대결을 발견합니다. 그에 따르면 방사성 물질과 바이러스는 ‘인공/자연’의 대립을 보여 준다는 유사성을 지닙니다. 즉 방사성 물질이 인공물이 자연(대기)을 통해 확산되는 것이라면 바이러스는 자연계에서 만들어진 것이 인간적‧인공적 네트워크를 타고 확산되는 반전 양상을 취하며, 이 두 사례 모두 자연과 인공이 뒤섞이는 패러다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부흥 문화론» 6장을 연상시키는 분석입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리스크의 크기가 변할 수 있고(리스크의 신축성) 인위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런 존재들을 후쿠시마는 비인간적 리버럴이라고 부르며, 원래 경계 없는 세계를 옹호하던 기존의 인간적 리버럴은 이 비인간적 리버럴의 확산 앞에서 혼란에 빠져 폐쇄적 조치로 나아가거나 우경화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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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같은 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근대적 전제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그러나 합의 가능한 정보 발신의 중요성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요). ‘상호 이해’나 ‘소통’을 무작정 외칠 수 없는 시대가 우리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특히 생식 의료 문제를 중요하게 언급하는데, 인간의 재생산과 직결되는 동시에 급격한 테크놀로지 발전의 영향과 세대 간 이해의 단절이 확연히 표출되는 사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비평가는 이렇듯 소통의 실패가 드러나는 사안에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현실의 결절점을 세밀하게 독해하고 어디서 소통이 어긋나는지를 집어내는 것이 이 시대 비평가의 역할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할 수는 없더라도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차이를 드러낼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의 개인주의»에 나오는 “개인주의란 외로운 것”이라는 말을 인용해 ‘다원적으로 산다는 것은 외롭게 산다는 것’강조합니다. 이 숙명을 인정하고 소통 불가능성을 받아들인 위에서 사회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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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는 문학 평론가로서 3‧11 진재 후 일본 문학의 현실도 간단히 진단합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일본 문학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운 문학이 뚜렷한 강세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관동 대지진 후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융성했던 것에 대응된다고 해석합니다. 진재 자체가 테마가 되기보다는 사람들의 인식 구조를 바꾸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편 진재 직후 무라카미 류가 발표한 에세이 «벚나무 밑에는 와륵이 묻혀 있다»(2012)를 인용해 올바르고 아름답다고 행한 일의 하층에 존재하는 기만, 즉 추하고 미화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하는 문학의 역할을 말하며, 지금 문학에서 이 역할이 쇠퇴하고 ‘벚꽃’에 대한 이야기만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우려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문학에 대한 후쿠시마의 자세한 평가가 더 궁금해지는 대목이지만 이번 강연에서는 이 정도의 인상평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름답지 않은 일’, ‘싫은 일’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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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표적으로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문제가 이런 ‘싫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문제와 대결하는 것은 아무런 카타르시스도 주지 않으며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현재 일본에서 여론이 바이러스 문제에 열중하는 것이 이런 ‘싫은 일’을 피하고자 하는 심리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 묻기도 합니다. 즉 바이러스는 싸워 승리하고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는 내부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필요한 부흥은 이 ‘싫은 일’에 직면(지난한 설득과 정보 공개)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 주장은 곧 싫은 일을 하는 주체에 대한 요구로 이어집니다. 오염수 문제를 피재해지인 도호쿠 지방에 떠맡기는 것은 내부 식민지적 발상인데, 현재 일본에서는 이런 희생 강요에 대한 부채 의식조차 희박해졌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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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는 자신의 문제 의식을 ‘인식의 지도 다시 그리기’로 요약합니다. 즉 수도와 지방의 관계, 방사성 물질의 확산이나 반복되는 바이러스의 위협, 인간 재생산 구조의 격변 같은 사건들을 사상의 차원에서 언어화해 ‘싫은 것’과 마주할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과 함께 최근 높은 평가를 얻고 있는 독일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신실존주의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실존주의보다 오히려 퇴보한 철학’이라고 짧게 언급할 뿐이긴 하지만, 적어도 후쿠시마가 생각하는 ‘부흥’의 철학은 이러한 사상 경향과 거리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더 상세한 비판은 최근 웹진 «Real Sound»에 기고한 «신실존주의» 서평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1]).

후쿠시마의 가장 최근 저작은 2019년에 발표한 «백 년의 비평: 어떻게 근대를 상속할 것인가»로, 현재에 의미를 줄 자원을 ‘과거’에서 구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 방송에서 포부를 밝힌 ‘새로운 인식의 지도 그리기’가 앞으로 어떤 작업으로 전개될지 더욱 기대가 됩니다.

 

[1] “다만 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정신의 고유성을 강조할 때 신실존주의는 ‘새로운 실재론’이라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간판을 과연 필요로 하는가? 그는 구축주의에 대해서는 실재론을 들고 오고 자연주의에 대해서는 관념론을 들고 오는 듯하다……그렇다면 그의 철학은 누에[일본 민담에 등장하는 여러 동물의 외형이 혼재된 요괴]와 같아 딱히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사상은 과대평가되었는가?: 후쿠시마 료타가 «신실존주의»를 읽다>, «Real Sound» 2020. 2. 25. https://realsound.jp/book/2020/02/post-510064_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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