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문화론» 디자인 후기

488쪽. 지금까지 리시올/플레이타임에서 펴낸 책 중 가장 두껍다. 쪽수가 많은 책을 디자인할 때 제일 많이 고민하게 되는 건 종이와 판형을 결정하는 일인 것 같다. «감정화하는 사회»(128×200, 312쪽) 때도 책 두께 때문에 고려할 점이 많았는데 «부흥 문화론»은 거기에 얇은 책 하나를 덧붙여 놓은 만큼 분량이 많다. 유통되는 책들 크기가 예전에 비해 많이 작아지는 추세고 이제 신국판(152×224) 정도만 돼도 사전처럼 보이는 상황이지만 판형을 키우는 건 피할 수 없은 일 같았고, 서점 매대에 깔린 책들을 참고해 가장 적절해 보이는 정도(138×210)로 결정했다. 가로x세로 비율은 기존 리시올/플레이타임 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임의로 괜찮아 보이는 판형을 정해 놓고 기존 책들과 가로x세로 비율을 비교했을 때 비슷한 수치가 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우리는 이 정도의 비율이 보기 좋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걸 기준으로 몇 밀리 더하거나 빼는 식으로 조정했다.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며 우리 책을 펴내고 있다는 사실이 쓸데없이 마음에 들기도 한다.

판형도 판형이지만 제일 걱정과 고민이 컸던 건 본문 용지였다. «감정화하는 사회» 디자인 후기에도 썼지만 ‘오브젝트 레슨스’ 시리즈,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자본주의 리얼리즘», «나이 없는 시간» 등에서 사용해 온 120g 평량의 조금은 낯설 정도로 도톰한 백색 모조지가 꽤 마음에 들었는데 책 두께가 많게는 세 배 가까이 되는 «부흥 문화론»에서는 이 용지를 엄두도 못 낼 것 같았고, «감정화하는 사회» 때처럼 한 단계 낮춘 100g을 사용할지 라이트지 계열이나 마카롱 같은 대안적인 종이를 사용할지 많이 고민했다. 기출간 책들과 종이 샘플을 많이 만져 보고 넘겨 보고 구부려 보고 했는데 결론은 100g 모조지로 내렸다. 이게 소신 있는 결정인지 우리 책과 모조지에 대한 쓸모없는 고집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결정했다. 책이 좀 무거울 것도 같았는데 한 손에 들고 쓱싹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니까 크게 거슬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완성된 책을 마주했을 땐 다행히 아주 만족했다.

«감정화하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날개가 없는 속표지에 날개 있는 커버를 씌우는 방식으로 제작하기로 했다. 다만 훨씬 두꺼운 책인 만큼 튼튼하고 단단했으면 해서 속표지 용지를 좀 더 두꺼운 걸로 변경했다. 지난번에 커버를 씌우는 방식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쓰기도 했는데 <부흥 문화론>도 역시 마음에 들고, 책상 한 켠에 꽂아 둔 편집본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가져와 괜히 한번 넘겨 보며 책 넘김을 느끼고 다시 꽂곤 한다.

이 책은 흔히 일본 정신의 핵심에 ‘무상관’이 있으며 이 세계관이 일본적인 것을 설명하는 유일한 원리라고 간주하는 경향을 반박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통에는 체념적 관조와 정반대인 ‘부흥’의 원리가 생동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나는 일본 정신의 핵심에 ‘무상관’이 있다는 얘기도 접한 적 없을 만큼 일본과 일본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래서 나와는 관련 없는 책처럼 느껴졌고 작업을 시작할 때는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디자인 작업을 위해 원고를 읽기 시작해 본론으로 들어가자 속도가 붙었고 중반쯤부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읽어 치웠다. 글을 잘 쓴다는 게 이런 거라며, 나 같은 문외한도 빨려 들어가게 만들 정도로 흡입력 있는 구성과 문장이라며 거듭 거듭 감탄하면서. 그중에서도 «수호전»을 다루는 너무너무 재밌었는데, 혹시 이 책을 읽으려다 방대한 분량에 부담을 느끼는 분이 있다면 이 부분부터 읽어도 좋을 것 같다(저자도 꼭 책의 순서를 지켜 가며 읽지 않아도 괜찮다 했음!). 책을 너무 재밌게 읽었더니 이제는 내가 만든 표지가 책이 발산하는 흥미로움에 미치지 못할까 봐 표지를 구상하는 게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장>에서 후쿠시마 료타는 «부흥 문화론»의 목표를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선조는 폭풍이 지나간 후=흔적의 시공간을 다양한 사색과 표현을 발효시키는 특별한 웅덩이로 변화시켜 왔다. 이러한 웅덩이의 문화 체험 자체를 하나의 가치로 파악하고 우리 생존의 지침으로 삼는 것, 이 책은 그것을 겨냥한다.” 표지를 구상하면서 ‘부상’과 그로부터 ‘다시 일어서기’라는 테마를 이미지로 구현하고 싶었다. 커버 앞표지에는 검은 배경 위에 ‘부흥문화론’이라는 원제가 흔적만 남은 듯한 형태로 어둡게 깔려 있다. 이 글자의 획들은 배경에서 떨어져 나와 아주 밝은 형태로 하단에 쌓여 있다. 폐허가 된 부상당한 사회에서 그 잔해들을 이용해 다시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부흥’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인데, 캄캄한 어둠 가운데 밝고 강한 빛을 발휘하며 의지를 발현하는 획들의 색상 대비가 꽤 좋아 보이고 어둠 속에 어렴풋이 흔적을 남긴 원제의 색상이 여명의 하늘빛처럼 느껴지기도 해 마음에 든다. 커버를 펼쳐 놓고 보면 획들이 쌓인 모습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짓거나 이루고자 하는 동적인 에너지가 조금 더 잘 느껴지는데 그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책 넘김과 함께 내가 이 책을 곱씹어 음미하는 지점중 하나다(독자들도 함께 음미해 주시길!). 산뜻한 레몬 색상의 면지도 어두컴컴한 배경 색상에 생기를 더하는 것 같아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속표지는 약간 의외의 감각을 주고 싶어 옅은 하늘색 배경으로 정했는데 별로 의외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 같다(^^;).

부흥문화론 커버(1)부흥문화론 커버(2)

본문 디자인도 기존에서 미세하게 다듬었다. «감정화하는 사회»와 «부흥 문화론» 두 책 모두 원서가 일본어고 원어 병기가 많은 편이라 한자 병기에 신경을 많이 썼다. 병기에 사용한 서체가 무척 마음에 들어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또 각주 번호와 쪽 번호에 사용한 숫자 서체도 수많은 서체 가운데에서 고른 회심의 일격이니 교감해 줄 독자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동료들이 디자인 후기를 쓰라고 할 때마다 “쓸 말이 별로 없는데요”라고 답하는데 막상 쓰다 보면 생각보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것 같다. 한 권 한 권 세상에 내보낼 때마다 디자인에 대한 부담이 가중돼 스트레스도 크지만 완성된 책을 붙잡고 있으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함이 밀려온다. 그래서 이렇게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게 됐는데 작업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내게도 좋은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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