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관을 넘어

«부흥 문화론»의 종장 ‹무상관을 넘어›를 공유합니다. 약 1400년에 이르는 일본 문화사의 흐름 속에서 “징검돌처럼” 모습을 드러냈던 부흥 문화의 계보를 다룬 여섯 장의 본문에 이어, ‘도래해야 할 부흥 문화’에 대한 지은이의 제언을 담은 에필로그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종장에서 지은이는 주류 일본 문화론의 기저에 흐르는 ‘무상관’에 대한 반대의 뜻을 명확히 하며, 한편으로는 무상관의 관념을 추수하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무상관을 반박하는 부흥 문화적 방법론을 보였던 양면성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읽어 내며 오늘날 요구되는 부흥의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다른 장보다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2011년 3·11 대진재 이후 일본의 전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 ‘부흥’의 문제에 대답하고자 한 이 책의 문제 의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긴 여정을 함께한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미래를 향한 선언이기도 하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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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흥 문화의 기민함

우리는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에서 출발해 ‹전후›의 몇몇 풍경을 둘러보았고 마침내 현대에 이르렀다. 이제까지 스케치한 것은 유구한 강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가 아니라 이를테면 정원의 징검돌과 같은 불연속의 역사다. 그러나 그 징검돌을 잘 이어 놓으면 일본의 무수한 문화 현상을 요약하는 하나의 전시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책에서 반복해 서술한 것처럼 부흥 문화는 재난 후=흔적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리고 부흥기는 문화에 있어 단순한 통과점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계절이다. 일본에서는 앞으로 무엇이 닥쳐올지 모를 ‹전전›의 긴장을 견디기보다 ‹전후›의 충격과 혼란을 받아들여 문화를 재구축하는 재건 사업에 보다 많은 문학적 재능을 투자해 왔다. 예를 들어 과거의 수도를 순회하면서 ‘관객’ 중심의 리얼리즘을 일본 문화에 불러일으킨 히토마로, 거듭되는 재액과 운명을 기록하고자 화한 혼효문을 사용한 «헤이케 이야기», 중국의 멸망/부흥 체험을 통해 일본 국토=네이션의 상상력을 흔든 바킨, 관동 대지진의 후=흔적 위에 미의 극장을 설계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인공적 공간에 대항해 괄호 친 ‹자연› 혹은 ‹일본›을 불러들인 미야자키 하야오…… 이들은 과거의 크나큰 충격을 받아들이기 위한 새로운 문화적 신경 조직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형성했다.
여기서 문제는 이 문화적 신경 조직이 대체 어떤 자본에 근거해 만들어졌느냐는 것이다. 그 자본은 개인일까 국가 혹은 사회일까? 아니면 그것들을 관통하는 생태계일까?
우선 개인의 죽음에 대한 일본 문화의 감각은 아마도 다른 어떤 문화와 비교해 보아도 손색없을 만큼 예민하다. 노能를 예로 들어 보자. «헤이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제아미의 슈라모노修羅物에서는 다다노리, 기요쓰네, 아쓰모리 같은 헤이케의 유령들이 여행승 혹은 아내의 꿈에 등장해 이승에 남긴 미련과 정념을 이야기한다. «헤이케 이야기»는 헤이케라는 집단이 섬멸당한 과정을 이야기하는 반면, 노는 오히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영적 장소를 준비한다. 제아미는 망자 개인의 목소리를 듣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럼으로써 무대 위에서 ‘진혼’을 완수한다. 집단 서사인 «헤이케 이야기»는 제아미에 이르러 개인을 중심으로 재편집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혼 문학으로서의 노에 그치지 않고 일본 문학에서 죽음이나 멸망 혹은 종말 감각은 종종 ‘개인’의 정념과 연결된다. 야스다 요주로가 말한 것처럼 일본의 고대 문학은 “항상 짝사랑과 실연을 출발점으로 삼아, 원망의 마음부터 떠올리고는 연가 속에서 종말감을 노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일본의 종말 감각은 종종 실연당한 한 사람의 개인 혹은 한을 품고 죽은 ‘영령’에 맡겨져 왔다. 이 기묘한 개인주의는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다른 한편 ‘국가’ 혹은 ‘사회’의 죽음이 일어났을 때는 그 예민한 감각에 느닷없이 잡음이 끼어든다. 일본은 외래 종교인 불교나 중국 내셔널리즘의 힘을 빌려 국가 이미지의 윤곽을 그려 왔고, 지카마쓰, 게이사이, 바킨을 봐도 내셔널리즘=충신royalist은 중국 유민의 상과 중첩된다. 전면적 멸망을 경험하지 않은 일본에서 ‘애국심’은 외래의 심정 양식을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시민이 집단 생활을 영위하는 ‘사회’를 보더라도 근대 문학에서는 짐짓 음영 없이 평평하고 순조로운 것, 표층적이고 깊이 없는 것으로 파악되어 왔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가 묘사한 것처럼 근대 일본의 시민 사회는 불황의 일격에 휘청거릴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문학적인 애착의 대상으로는 상승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국가나 사회 속에서 “종말감을 노래”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이처럼 ‘국가의 신화’는 그저 이국적인 것(가라고코로)이었고, 시민 사회의 이미지는 여전히 막연했다. 이에 반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괄호 친 ‹자연›을 동원한 것이나 앞으로 논할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자본주의를 동원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일본의 부흥 문화는 그 자양분을 오직 국가나 사회보다 작은 것(개인), 아니면 반대로 국가나 사회보다 큰 것(생태계나 자본주의)에서 찾아 왔다. 그에 따라 종말론eschatology이 검출되는 국면 또한 비련에 몸서리치는 개인의 절망적인 비탄(동반 자살!)과 생태계의 착란・폭주(부해!)로 쉽게 양분되었다.
나아가 이들 일본 부흥 문화가 기민한 반사 신경을 동반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본래 역사란 항상 일정한 속도로 진화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헤겔은 세계사를 수많은 매개와 우회로로 가득한, 더없이 유장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 속에서 정신의 진화를 위한 막대한 지출이 일어난다. “세계사는 이러한 소비를 하기에 충분히 풍요롭다. 그것은 자신의 사업을 대규모로 행하며, 나아가 마음껏 소비하기에 충분한 민족과 개인을 갖고 있다.” 현대를 소비 사회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헤겔의 말을 들어 보면 오히려 세계사 쪽이 인간을, 민족을, 문화를 아낌없이 낭비하면서 유유히 나아간다.
이 점에서 일본사는 상당히 기민하다. 한번 심각한 상실이 일어나면 곧바로 그 후=흔적을 메우려는 문학이 발동한다. «헤이케 이야기»도, 아시카가 요시마사도, 데즈카 오사무도 전쟁(재액)이 끝난 직후 숨 돌릴 틈도 없이 ‹전후›의 시공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민첩한 행동이 종종 문화적 혁신을 일으켰음에 주목하자. 어지러운 부흥기는 새로움이 가장 침입하기 쉬운 시간대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일본사에 깃든 ‘역사의 천사’의 모습을 공상한다. 일례로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에서 영감을 받은 전전・전중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역사의 천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상상했다. 천사는 얼굴을 과거로 돌리고 하나의 파국catastrophe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파국은 잔해를 하나씩 천사의 발밑에 던진다. 천사는 그 자리에 머물고 싶지만 낙원에서 불어오는 폭풍 탓에 산처럼 쌓인 과거의 잔해 더미를 보면서 등 뒤의 미래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일본의 ‘역사의 천사’들은 다소 조급하다. 분명 그/그녀도 과거의 재해와 잔해를 바라본다. 그러나 클레-벤야민풍의 천사와 달리 일본의 천사들은 미래로 떠밀려 가기 전에 간발의 차로 ‹전후›의 지상에 내려온다. 그리고 이 천사들의 지령에 따라 일본의 문학가는 강렬한 충격이 가시지 않은 가운데 급히 진혼과 기록의 작업에 매달렸다. 이런 묘사가 일본 문학을 우롱하는 것처럼 들릴까?—그러나 나는 오히려 바로 이 기민함에 애착이 있다.
여하간 천사들의 발 빠른 처사를 극동 섬나라 특유의 옹졸함으로 봐야 할까, 애처로움으로 봐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다만 여전히 “웅덩이에 떠오른 물거품”처럼 명멸하는 무상의 세계를 넋 놓고 바라보는 것만이 미에 대한 일본적 감상 태도라고 여기는 풍조에는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하겠다. 히토마로와 구카이, 『헤이케 이야기』와 나카가미 겐지, 바킨과 아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미시마 유키오, 혹은 데즈카 오사무와 미야자키 하야오—이들이 수행한 ‘부흥’을 알고서도 과연 그처럼 두루뭉술한 ‘무상관’無常觀의 미학이 일본 문화의 주류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2  무상관의 함정

그런데 적지 않게 유감스러운 것은 이러한 미학이 현대 작가들에게서 안이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반년 후 카탈루냐 국제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어에는 무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상태=변치 않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결국 소멸하며 모든 것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변천합니다. 영원한 안정이나 의지하고 따를 불변 불멸자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불교에서 온 세계관인 이 ‘무상’이라는 사고 방식은 종교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일본인의 정신성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으며, 민족적인 심성으로서 고대 이후 거의 그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모든 것은 다만 지나갈 뿐이다’라는 관점은 말하자면 체념의 세계관입니다. 이는 사람이 자연의 흐름에 역행해 봤자 모두 허사라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러한 체념 속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의 존재 방식을 찾아내 왔습니다.

일본인의 미나 정신의 본질을 ‘무상관’에서 찾는 것은 예부터 끊이지 않고 반복되어 온 틀에 박힌 방식이다. 무라카미는 결국 재해를 구실 삼아 서양인의 구미에 맞는 일본의 이미지를 재강화한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렇게 말하면서 일본인 스스로도 점차 무상관을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자신의 미학이라고 착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외국인이 일본의 미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질문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답할지 상상해 보라. 결국 머뭇거리다 ‘무상’이나 ‘와비사비’侘び寂び와 같이 묘하게 신비화된 개념만을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라카미의 발언과 달리 본래 일본 문학에서 무상관은 그저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했고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예를 들어 구카이는 «»삼교지귀» <서문>에 “경비유수軽肥流水를 보노라면 홀연히 번개 허깨비가 나타난다”고, 즉 가벼운 옷을 걸쳐 입고 살진 말에 올라탄 귀족들을 보고 있자면 번개나 허깨비와 다를 바 없는 세상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마음이 일어난다고 했고, 불법仏法을 옹호하는 가명걸아는 옥을 굴리듯 장대한 ‘무상의 시賦’를 읊는다. 그러나 그렇게 세속 부귀 영화의 허망함을 말한 구카이가 과연 그 후 ‘체념’의 경지에 빠져들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구카이보다 초인적인 행동력을 갖춘 인간은 전무 후무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제행무상의 반향’에 귀 기울인 «헤이케 이야기»조차 결코 퇴행적인 체념을 말하지 않았다. 이시모다 다다시의 말처럼 본래 ‘무상관’ 자체는 당시의 진부한 인식에 불과했다. “헤이케의 작가는 사상가로서는 평범하기 그지없고 오히려 상식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기온정사祇園精舎의 종소리’로 시작하는 유명한 권두 문장은 분명 대구가 중첩되는 ‘명문’이지만 사상만 보면 그 시대 평범한 뭇 귀족의 사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헤이케 이야기»의 작가(들)는 기껏해야 범용한 사상에 불과한 무상관을 발판 삼아 일본어 문학의 새로운 구상을 제시했다. 우리는 오히려 그 점에 놀라야 한다.
물론 무라카미가 말한 것처럼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체념’이 필요한 국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무상관이나 체념에 머무는 미학에 우리가 정말로 매료될 수 있을까? 미의 진정한 힘은 오히려 그러한 니힐리즘을 격파하고 인간과 세계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의 문화 자원 가운데 무엇을 새로운 미 혹은 가치로 가다듬어야 하는지, 또 그 자원이 과연 오늘날의 세계에 이용 가능한 것인지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있다. ‘무상관’이라는 전형은 그러한 검증과 고찰을 건너뛰게 하는 원인의 하나다.
게다가 더욱 어려운 점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결국 소멸하며 모든 것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변천한다”는 사상으로 일본을 대표해 온 것이 결코 무라카미 같은 소설가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기기 신화記紀神話를 예로 들어 “점차 번져 가는 기세”, 즉 자연 생성을 긍정하는 의식이 일본인의 정신 구조를 깊숙이 규정하고 있다고 했다. 지적인 “작위”가 아니라 끌려가는 “생성”—어떻게든 된다!—이 일본의 “고층”古層을 이루며 그것이 일본인의 정치적 결단을 주저앉힌다는 것이다. 반대로 일본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마루야마의 이론을 반전시켜 오히려 “점차 번져 가는 기세”=자연 생성이야말로 미적인 것이라며 감상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요컨대 칭찬이든 비난이든 일본은 종종 “무작위”의 나라, 자연의 “기세”에 몸을 맡기는 주체성 없는 나라로 여겨져 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본론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 문화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며 더구나 미래 지향적인 것도 아니다. 마루야마건 포스트모더니스트건 결국은 단순히 일본 문화의 일부만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무상관과 생성의 미학은 오늘날까지 때마다 반복되며 비평적 분석에서 다양성을 빼앗아 왔다. 이러한 지적 태만이 앞서 언급한 무라카미의 발언과 엮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3  무라카미의 문학

게다가 본래 작가로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결코 무상관 앞에 멈추어 서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문학에 힘이 있다면 그것은 고도 자본주의 사회 속 ‘부흥’의 모습을 그 나름대로 그려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무라카미의 연설을 일부러 비판적으로 인용한 것은 그 내용이 작가로서 그의 작업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설명해 보겠다. 무라카미의 문학은 ‘너무나 무라카미적인 주인공’의 패턴을 반복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서명으로 삼는다. 즉 요리와 의복, 음악 등에 관한 자기 나름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청결을 선호하고 주위의 번잡스러움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30대 남성, 그런 그가 “어휴”라고 말하며 높은 데서 세계를 방관하는 것이 무라카미 주인공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는 사적인 영역을 수호하기에 급급한 소시민인 한편 세계의 모든 혼잡함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이러니를 겸비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로부터 이중화된 의식 형태, 즉 “경험적인 자기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초월론적인 자기”를 발견한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무라카미의 “초월론적” 자기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경험적” 투쟁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중산 계급(중류)의 생활 보수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한편 페미니즘이나 퀴어 이론같이 마이너리티를 옹호하는 측에서도 무라카미를 비판해 왔다. 그의 소설에서 여성 혐오나 동성애 공포(호모포비아) 경향을 찾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의 주인공은 여지없이 이성애자 남성이며, 남성 간의 호모소셜한 관계에 몰입하지만—예를 들어 초기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風の歌を聴け부터 «양을 쫓는 모험»羊をめぐる冒険까지 무라카미의 주인공은 ‘나’와 ‘쥐’라는 두 남성이 맡았다—동성애에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는다. 2013년 간행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 彼の巡禮の年에서도 절친한 남성에게 구강 성교를 받는 환상을 체험한 주인공은 동성애를 ‘죄와 더러움’으로 여겨 배제하려 한다. 무라카미는 남성 간의 친밀한 관계에 동경을 품으면서도 동성애는 잠재적인 범죄 행위로 간주한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동경과 배제는 이성애자 남성의 가장 흔한 심리다. 무라카미의 선배인 미시마 유키오나 오에 겐자부로 등의 작가가 시민 사회의 터부를 답파하고 동성애(호모에로티시즘)를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 끌어들인 것에 비해서도 무라카미는 크게 후퇴했다. 엄격한 시선으로 보면 무라카미의 작품은 항간에서 말하듯 술 취한 ‘팝 문학’일 뿐 아니라 전후 일본 사회 주류(=중산 계급 이성애자 남성)의 겁 많고 소심한 소시민적 감정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실로 보수적인 문학에 지나지 않는다.
무라카미의 문학은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편에 서려 하지 않으며, 그에 따른 여러 약점을 품고 있다. 그 점에 눈감은 채 일본의 ‘국민 작가’로 그를 내세우는 작금의 풍조에 나는 전혀 동조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문학 전부를 무작정 거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약점이 장점으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명 무라카미의 문학은 얼핏 보면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니컬한 자의식에 지배되고 있고 그 시니시즘=“어휴”는 전후 일본 사회의 주류를 슬그머니 긍정한다. 그런데 그 주류의 “냉정한 초월론적 자기”를 붕괴시키는 불안과 위협이야말로 그의 진짜 주제라고 본다면 어떨까?
본래 무라카미 문학의 모티프는 고도 자본주의에 숨겨진 현대 사회 속 ‘악’의 이미지를 그려 내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종교 분쟁부터 대테러 전쟁에 이르는 모든 것을 엔터테인먼트의 도구=상품으로 바꾸어 버리므로, 외부적=초월적인 악을 지명하려 해도 이는 결국 ‘진짜’의 숭고함보다 ‘가짜’의 싸구려스러움을 표출시킨다(부시 정권이 내세운 ‘악의 축’과의 전쟁이라는 메시지가 매우 만화적=서부극적인 것이었음을 상기해 보자). 그러나 초월이 끊임없이 내재화=상품화해 가는 현대 세계에서 무라카미는 이제 싸구려 만화가 되어 버린 악을 어떻게든 다시 작품 속에 불러들이고자 했다. 예를 들어 홋카이도 오지에 우익적인 폭력의 기억을 가진 ‘양 남자’를 살게 하고(«양을 쫓는 모험»)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후=흔적에 지렁이와 개구리의 이미지를 불러들이는 것이(«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神の子どもたちはみな踊る) 바로 그러한 실천이다. 그가 그린 공포와 불안은 종종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싸구려와 섬뜩함, 상품과 악을 중첩시키려는 무라카미 나름의 방책이다.
상품으로 뒤덮인 세계에 사는 중류층 주류들을 그려 내면서 겉으로 보이는 안정적인 “초월론적 자기”에 불길한 악을 잠입시키기. 무라카미 문학에서 이러한 시도는 2인칭적인 구조에 의해 지지된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발표한 단편집 «회전목마의 데드히트»回転木馬のデッド・ヒート의 <글머리에>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가 달려 있다.

……여기 수록된 문장은 원칙적으로 사실에 기반한다.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문장으로 옮겼다. 물론 당사자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세부 사항을 조금씩 바꾸었기에 완전히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사실이다.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기 위해 과장하지도 않았고 덧붙이지도 않았다. 들은 그대로의 이야기를 되도록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문장으로 옮긴 셈이다.

무라카미는 자신의 풍부한 육성을 1인칭으로 말하는 타입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회 여러 계층을 두루두루 신의 시점=3인칭적 시점에서 망라하는 타입도 아니다. 무라카미 문학을 특징짓는 것은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는 2인칭적인 ‘받아쓰기’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를 비롯해 무라카미의 작품은 종종 타인의 ‘실화’를 주인공이 듣는 형식을 강조하면서 허실피막虛実皮膜[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넘나듦]의 문장을 직조해 냈다(따라서 무라카미의 문학이 ‘괴담’ 스타일에 가까운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 문학의 전통을 전제하면 이러한 스타일에서 많은 시사적인 문제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근대 일본의 사소설은 ‘나’의 확고한 육성보다는 오히려 유동적인 ‘기분’(하이데거가 말하는 정조情調, Stimmung)에 근거한다. 일찍이 가라타니 고진이 분석한 것처럼, 시가 나오야나 가무라 이소타嘉村礒多의 사소설에서는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실상 ‘기분’이 주역을 맡는다. 사소설의 ‘나’는 불안정하고 쇠약하며 변덕이 심하다. 그래서 야만적인 성 충동이나 폭력 충동에 쉽게 휩싸인다(반대로 소설에 사상적인 자기 표현=자기 변호를 능숙하게 삽입했던 구카이는 이제 오히려 일본 문학사에서 이례적인 인물anomaly이다). 그에 반해 무라카미의 방식은 오히려 이러한 1인칭 ‘나’의 취약성을 역이용한다. 그는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는 자기를 일종의 미디어로 바꾸고 그 속에 ‘당신’들의 이야기를 꼼꼼히 담는다. 즉 이야기의 화자 지위를 타인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다만 듣는 역할을 맡아 이야기를 정리하기만 한다. 이러한 2인칭적 구조는 정확히 제아미의 몽환능에서 여행승의 꿈에 헤이케 귀족들의 유령이 나타난 것과 동형적이다.
그리고 타인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구조는 고도 자본주의의 섬뜩한 ‘악’이 주인공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게 하는 장치기도 하다. 시니컬하고 평범한 소시민인 무라카미의 주인공은 자신의 취약성 탓에 종종 악몽의 이미지를 대량으로 불러들이고 만다. 그의 논픽션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지하철 사린 사건을 다룬 두툼한 인터뷰집인 «언더그라운드»アンダーグラウンド에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광범위하게 수집되어 있다. 한 측면에서 이는 사린의 비가시적 공포를 언어로 어떻게든 벌충하려는 강박 관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다른 측면에서는 무라카미 자신이 그 공포에 침윤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간 그는 사린이라는 공포를 어디까지나 ‘받아쓰기’ 스타일로 끌어들인다. «언더그라운드»는 분명 논픽션이지만 픽션인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와 방법론을 공유한다.
혹은 1990년대에 쓴 장편 소설인 «태엽 감는 새 연대기»ねじまき鳥クロニクル에서는 아내가 갑자기 실종된 실업 상태의 남성을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에로틱한 여성들—미국 하드보일드 소설에 등장하는 치명적인 여성(팜 파탈) 같은 캐릭터—이 차례차례 찾아온다. 세타가야구에 사는 평범한 소시민인 그는 낯모를 여성들에게 이끌려 마침내 전시에 일어난 노몬한ノモンハン 사건과 러시아군이 일본 병사를 고문했을 때의 극악 무도한 이미지를 이식받는다. 아내의 부재를 다른 여러 에로틱한 ‘치명적인 여성들’이 가져온 잔혹한 이야기로 메우는 것, 그리고 그녀들을 말하자면 강령술의 매개로 삼아 전시에 벌어진 ‘악’의 기억을 전후 일본 사회에 하나하나 불러들이는 것, 이것이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기본 구조다. 이러한 ‘받아쓰기’가 축적되면서 주인공과 아무 관련이 없었을 터인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치명적인 사건의 기억이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이러한 작업들을 뒤쫓다 보면 앞서 논한 무라카미 비판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될 것이다. 분명 어느 측면에서 보면 무라카미 문학은 주류의 자기 정당화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의 본령은 오히려 주류의 “냉정한 초월론적 자기”가 수많은 인간으로부터 수집된 ‘이야기’, 즉 에로스화된 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는 데 있다. 앞서 ‘무라카미의 약점이 때로는 그 자체로 그의 문학의 장점으로 바뀐다’고 한 것은 주류를 긍정하면서도 위협하는 이 양면성 때문이다.

4  추상적인 상실로부터의 ‘부흥’

나는 2장에서 이미 일본의 이야기가 일종의 ‘봉헌물’ 성격을 띠고 있다고 했다. 무라카미의 받아쓰기 소설, 특히 중국 대륙 변경 지역의 전쟁과 재해를 상기시키며 그것을 무녀적인 여성=팜 파탈들로 회수하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바로 이러한 일본적인 봉헌물로서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데뷔 당시에는 미국 문학의 영향이 지적되었지만 무라카미 문학은 해가 갈수록 좋든 싫든 일본 전통의 ‘이야기’에 가까워진 것 같다.
다만 반복하건대 무라카미는 끈질기게 현대의 고도 자본주의를 응시하고 작업하기를 선택한 작가다. 여기서 「서장」의 서술을 다시 확인하면,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유체역학적인 환경에서는 무한한 사랑이 후경으로 물러나고 유한한 에로스가 폭발한다. 이는 수많은 인간이 더 이상 알아차릴 수 없는 무한한 미시적 상실=상처가 현대 사회에 가득하다는 뜻이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잃고 있을까? 혹은 그 대신 무엇을 손에 넣고 있을까? 이를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되었다. 단적으로 말해 오늘날에는 상실 자체가 추상화되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라는 이노우에 요스이적 질문에 이제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라는 새로운 질문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리고 무라카미는 찾는 것도 잃은 것도 알기 어려워진 시대 상황에 맞추어 일본적인 ‘이야기’를 수선한 것이다.
실제로 무라카미는 ‘상실의 추상화’를 일찍부터 문학의 테마로 삼아 왔다. 예를 들어 1969년 전후의 학원 분쟁 시대를 무대로 한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은 구체적 상실이 리얼리티를 가졌던 마지막 시대를 그린다. 이 소설에서는 성 해방을 배경으로 한 ‘에로스의 만연’이 과시적으로 묘사되는데, 그런 한편으로 주인공은 ‘나오코’라는 고유명을 가진 소녀를 어떻게든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에 비해 «1973년의 핀볼»1973年のピンボール에서는 ‘나오코’라는 고유명이 이제 후경으로 물러나고, 인간은 208/209 같은 무기적인 숫자로 환원되고 만다. 1970년대 들어 모든 것이 대체 가능한 ‘숫자로 셀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하자 사랑은 에로스 앞에 무릎을 꿇고 상실 체험은 추상적인 것이 된다. 뒤집어 말하면 『노르웨이의 숲』은 구체적 상실을 간신히 실감할 수 있었던 시대, 즉 ‘에로스’(숫자)에 대해 ‘사랑’(고유명)이 간발의 차로 우월을 확보했던 시대를 기리고자 한 일종의 진혼 문학이다.
상실이 추상화되고 무수한 상처가 사회에 넘쳐 난다는 것, 이는 사실 대형 재해 후에도 마찬가지며 진재와 같이 거대한 구체적인 상실이 눈에 보일 때조차 현대의 인간은 종종 그 이상의 추상적인 무언가(존엄, 자긍심, 안도감, 장래의 보장)를 잃은 것처럼 느낀다. 진재를 통해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잃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극히 모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도 작업’에 착수할 수 없고 프로이트적으로 말하면 ‘멜랑콜리’(우울)에 빠진다. 잃은 대상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면 장례를 치르고 마침내 정상성으로 복귀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없을 때 상처는 결코 애도 작업을 통해 봉합되지 않으며 멜랑콜리가 해소되지도 않는다.
무라카미 문학에는 항상 이러한 추상적 상실과 멜랑콜리가 떠다닌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를 잃어 가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부흥’(다시 일어서기)을 그려 낼 것이냐는 난제에 몰두한다. 물론 그것은 이미 일반적인 의미의 ‘부흥’일 수 없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주인공은 아내가 실종된 후=흔적으로부터 자신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 보려 하지만 도리어 과거의 악몽적인 폭력과 원한을 차례로 불러들이니 말이다. 정말로 그는 치명적인 여성들과 사귐으로써 자신의 공허를 메웠을까? 아니면 새로운 상처를 늘려 가고만 있는 걸까? 이 양자의 경계는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추상적인 혼란은 «태엽 감는 새 연대기»가 끝날 때까지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긴 소설 말미에서 주인공이 아내(구미코)로 짐작되는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도달했을 때조차 그녀는 “정말로 내가 구미코야?”라고 도발적으로 물어 온다.

그 순간 나는 방향을 잃고 말았다. 내가 전혀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잘못된 장소에 와서 엉뚱한 상대에게 그른 말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은 시간의 소모, 의미 없는 우회로였다.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몸을 가눠 방향을 바로잡았다. 나는 현실을 확인하듯 무릎에 놓인 털모자를 두 손에 꼭 쥐었다. (강조는 추가)

상실 그 자체가 추상화된 이상 무언가를 되찾으려 해도 크든 작든 “엉뚱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구미코가 마지막까지 주인공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그가 ‘정상성’으로 복귀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오류투성이의 어둠 속에서 자기를 더듬어 찾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자기 것이 아닌 악몽적 기억에 가위눌리면서도 한 줄기 ‘현실’을 움켜쥐려는 것이 무라카미의 ‘부흥 문학’이 견지하는 자세다. 이 점에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제대로 된 부흥(=애도 작업)이 있을 수 없는 세계의 ‘부흥’을 그려 내는 작품이리라.
여기서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이외의 작품에 눈을 돌려 보면, 잃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유체역학적 상태에서 현실을 더듬어 재건하고자 할 때 무라카미가 시간을 조금 되돌려 보는 방법론을 채용해 왔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서도 반쯤 잊힌 ‘가까운 과거’로 되돌아가 그 덧없는 ‘기원’에서 몇 번이나 세계를 재시작해 왔다. 구체적으로는 1982년에 73년을(«1973년의 핀볼»), 86년에 69년을(«노르웨이의 숲»), 90년대에 84년을(«태엽 감는 새 연대기»), 2000년대에도 마찬가지로 84년을(«1Q84») 회고하는 식으로 그의 소설은 많은 경우 가까운 과거를 회고하는 구조를 갖는다.
수없이 많은 미시적인 상실을 눈앞에 두고 무라카미는 골동품이 되고 있는 과거를 ‘기원’으로 삼아 우리가 그 이후 무엇을 손에 넣었으며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세세하게 검증해 왔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주류적이고 사적인 ‘창세 신화’를 쓰는 것을 의미한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그러한 ‘신화’가 열 폭주를 일으켜 상실의 유적지에 오류투성이인 이미지를 심어 넣은 기괴한 소설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어둠 속에서의 ‘방향 상실’을 포함하는 현실의 재구축이야말로 멜랑콜리와 추상적 상실의 시대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부흥이다. 그렇다, 주인공은 최종적으로 그 무엇도 되찾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오류 속에서 쌓아 올려진 악몽적 이미지는 전후 사회의 봉인된 악을 끄집어내고 주류의 안정성을 위협한다. 이것이 꼭 우리 삶에 대한 부정적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자기 것이 아닌 악몽에 습격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인식은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할 기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하간 막연한 멜랑콜리가 사회에 만연할 때 그 모호한 감정을 무상관 혹은 체념으로 흡수해 버릴 것인지, 아니면 «태엽 감는 새 연대기»와 같은 기괴한 상상력으로 전환할 것인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문학의 숨결은 천지 차이로 달라진다. 이때 무라카미의 본령이 어디까지나 후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사족에 불과하리라.

*

이제 이 책도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부흥 문화론»이라는 다소 과장된 제목을 걸었지만 이제 와 보니 불충분한 개관에 지나지 않았음을 일단 받아들여야겠다. 일본 부흥 문화의 흔적은 또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므로.
다만 나는 일본의 문화사를 구석구석까지 정밀하게 조사하기(그러한 작업은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도 부족하다)보다는 일본의 역사적 체험 패턴을 추출하고자 했다. 즉 부흥기에 때때로 혁신을 일으켜 온 역사 자체가 일본 문화 활동의 심층에 있는 동력인 동시에 현대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말하고 싶다. 일본인의 정신이 직접적인 오락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과 창조를 엮어 내는 복잡한 조작도 딱히 혐오하지 않고 받아들일 만큼은 성숙해 있을 것이다. 좋음을 만들어 내는 비법으로서 나쁨을 겁내지 않고 이용해 온 문명의 노력에 나는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물론 일본 열도에 축적되어 온 문화적 체험의 가치를 검증하는 작업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본래 일본의 문화 영역은 하이컬처든 서브컬쳐든 일본이 ‘되기’ 위해 진력하기보다 오히려 일본 아닌 무엇으로 ‘변신’하는 데 더 높은 평가를 내려 왔다(6장 참조). 일찍이 이러한 풍조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본 이가 바로 모리 오가이다. 예를 들어 오가이의 단편 소설 <공사 중>普請中은 근대 일본이 문명 개화 와중에 전무 후무한 무엇으로 변신해 가는 사태 그 자체를 작품의 테마로 삼는다. 그러면서 특유의 심술을 발휘해 그 변신 중인 주체=일본의 내실이 실은 텅 비어 있음을 폭로한다. <공사 중>은 “예술의 나라가 아닌” 으스름한 일본이 다른 무언가로 변신해 가는 허무한 풍경만을 절묘하게 잘라 낸다. 그는 일본이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변신하려는지, 변신 후에는 무엇을 하려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공사 중」의 주인공은 서둘러 무엇인가로 변신하고 싶어 하는 주위의 소박한 욕망이 내리치는 망치 소리를 아무 감동 없이 들을 뿐이다.
나아가 문제는 이러한 도덕moral도 목적도 없는 변신 욕망이 이른바 ‘신국’ 사상과 태연하게 양립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종종 무언가 다른 것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변신 욕망의 배후에는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의 동일성이 결코 위협받지 않으리라는 암묵적인 안도감이 있다. 일본이 유일 무이한 것은 엄밀하게 증명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전제기 때문에, 아무리 변신 욕망을 발설해도 그 정체성은 진정한 위기를 맞이하지도 흔들리지도 않는다. 반대로 이 ‘자연’스러운 유일 무이성에 온몸을 담가 버리면 터무니없이 높은 자기 평가—신국 일본!—가 출현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일본 이외의 무엇으로 변신하고 싶어 하는 것과 일본을 반성하지 않은 채로 유일 무이한 신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에 결여된 것은 일본이 긴 세월에 걸쳐 축적해 온 경험이란 무엇이며 그 저장고를 현대의 과제와 어떻게 결부시킬지 생각하는 끈덕진 ‘증명’ 작업이다. 오늘날 일본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온 힘을 다해 일본이 ‘되는’ 행동action을 포함해야 한다.
물론 이 책의 증명이 탁월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퇴행적인 ‘무상관’을 말하는 것이 증명으로서 부족함은 확실하다고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일본의 체험에서 틀에 박힌 무상관의 더께를 걷어 내면 그 속에서 ‘고쳐 하기’ 혹은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격려하는 부흥기의 천사가 환한 얼굴을 내비칠 것이다. 그리고 독 기운에 휩싸여서도 한낮의 미소를 잃지 않는 이 자그마한 천사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다시금 미래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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