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가상 국가>
A 가상 국가
3장에서 잠시 중국 대륙으로 눈을 돌려 유민 내셔널리즘의 탄생과 전개를 고찰했던 «부흥 문화론»은 4장에서 유민 내셔널리즘이 근세 일본에 미친 영향을 살핍니다. 유민이 존재하지 않는 일본에서 유민 내셔널리즘이 수용된 양상을 후쿠시마는 ‘가상 국가’라는 개념으로 풀어 나갑니다.
후쿠시마는 «부흥 문화론» 전반에 걸쳐 일본이 ‘멸망을 모른다’고 지적합니다. 망국의 역사도 없거니와 ‘부분적 멸망’의 경험조차 직면하기보다는 주술화=예능화해 의식 바깥으로 몰아내려 한 일본에서는 중국 유민이 만들어 낸 ‘유민 내셔널리즘’ 같은 강렬한 내셔널리즘이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일본에서 내셔널리즘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요. 4장 A편은 중국발 유민 내셔널리즘이 근세 일본에 ‘감염’된 경위를 보여 주며, 중국 유민이 그렸던 상실된 국가의 이미지가 일본에 ‘가상 국가’로서 덮어쓰기된 결과로 일본 내셔널리즘의 태동했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 리얼리티의 형성을 강력하게 후원한 것이 앞 장에서 논한 근세 중국의 ‘유민 내셔널리즘’이다. 물론 일본인에게는 중국이 겪었던 것과 같은 실제 역사가 부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유민’ 이미지는 가상의 문학적 정보로서 근세 일본에 유입되어 내셔널리즘에 중요한 소재를 제공했다. 지금부터 나는 근세 일본의 문학 상황을 중심으로 일본사에 빙의한 이 기묘한 ‘가상 국가’의 면모들을—그러니까 현실의 멸망 체험이 아닌 이국의 멸망 체험에 접속된 부흥 문화의 형태들을—밝히려 한다. 이는 일본 내셔널리즘이 지닌 이방의 기원을 고찰하는 것이다.” (246~247쪽)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가 14세기 후반에 성립된 군기軍記 이야기 «태평기»입니다. 왕조의 정통성을 다툰 남북조 시대를 다루며 훗날 존황양이, 황국 사관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 텍스트지만, 중국사의 장면들을 일본사에 덧씌운 듯한 모방적 묘사가 어색함을 자아냅니다.
“«태평기»에서 일본은 중국과 천축에서도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한 군세를 동원할 수 있는 대국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호들갑스러운 서술 덕분에 ‘소국’ 일본에서는 본래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태평기» 안에서는 빈번히 일어난다. 등장 인물도 예외가 아니다. [……] 남북조 시대에 발생한 대규모 내란의 실상을 그리는 것은 때로 판타지 그 자체에 가까웠던 것이다.” (258쪽)
«태평기»라는 텍스트의 부조화스러움은 한 세기 전 작품인 «헤이케 이야기»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고전적 균형”이 상실된 결과입니다. 그러나 후쿠시마가 이를 단순한 문화적 퇴보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이 속에 존재하는 새로운 문학의 맹아에 주목합니다.
“고전적 균형을 결여한 이 “불가사의”하고 일그러진 작품 세계는 «태평기»가 역사의 새로운 무대에 발을 들였음을 암시한다. [……] 『태평기』는 이름 그대로 ‹전후›의 ‘태평’을 기원하는 주술적=예능적인 부흥 문학이었으며, 그런 한에서 일본 문학의 콘셉트를 올바로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태평기»는 그러한 전통의 틀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주술적=예능적인 이야기에 중국사의 기억이 덧칠될 때, 그 속에서 종래의 일본사와 일본 문학에 출현하지 않던 “불가사의”한 인간들의 약동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259쪽)
특히 «태평기» 속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17세기 일본으로 망명한 명나라 ‘유민’ 주순수에게 재발견되어 “근세 이후의 정치적 모델”의 지위를 얻게 되며, 나아가서는 이렇듯 중국 충신의 비감을 덮어쓴 반쯤 허구적인 인물이 이후 일본에서 애국의 범례가 되기에 이릅니다.
“«태평기»의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중국사에서 차용한 ‘세계’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었고, 그의 기질, 의지, 정념, 행동은 근세 이후의 정치적 모델(신화소)이 될 수 있었다. 국가의 창설 원리와 정치적 사명을 한 번도 보여 주지 못한 종래의 일본 문학과 달리 «태평기»의 근세적 독해에 의해 탄생한 충신 마사시게는 무지와 악폐를 교정하고 사람들을 정치적 정의로 이끄는 교육자로서의 과제를 짊어졌다. 실제로 «태평기»는 마사시게가 보여 준 충신의 의지를 일본 민중에게까지 널리 각인시켰다.” (262쪽)
한편 중국사를 그대로 가져다 ‘덮어쓰기’했던 «태평기»의 상상력은 «주신구라» 같은 텍스트를 거치며 일본이라는 하드웨어에 맞게 최적화됩니다. 후쿠시마는 이처럼 원본인 중국사를 기호화해 일본의 내셔널리즘적 텍스트에 도입하는 시도에서 서브컬처의 논리를 발견합니다.
“실제로 이 가상성 탓에 «태평기»에 제시된 네이션은 그 규모가 때때로 변한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태평기»는 중국의 국가 간 전쟁과 멸망 형식을 반복하는데, 그것이 ‘소국’ 일본이라는 하드웨어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훗날 이 ‘중국화’ 프로그램에 경량화・고속화 처리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일본 대중 문화(서브컬처)의 대표작을 낳게 된다.” (263쪽)
기호화=서브컬처화는 중국 유민의 상실감과 애국심을 역사적 맥락에서 탈각시켜 일본에 이식시키는 기술이었습니다. «수호전»에서 카니발적 에너지에 추동되었던 네이션의 상상력은 근세 일본에서는 외래 역사의 기호화에 의지해 구현될 수 있었던 셈입니다.
B 고스트 라이팅
중국발 유민 내셔널리즘이 근세 일본에 ‘감염’되며 가져온 변화를 다룬 A편에 이어, «부흥 문화론» 4장 B편에서는 이 새로운 사태에 항체 반응처럼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 혹은 응전하려 했던 18세기 일본 문학가들의 작업을 검토합니다.
18세기 후반의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유민 내셔널리즘의 중국색(‘가라고코로’)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중국적인 것에 대항하는 일본적인 것을 제시하기 위해 고전 연구에 몰두했으며, 흔히 국수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리나가의 활동은 유민 내셔널리즘이라는 외래 프로그램에 대한 일종의 문화적 항체 작용이었다고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그는 중국적인 것 속에서 초월자에 대한 일원적 ‘애’愛를 발견하고 일본 고전에서 찾아낸 다원적 ‘연’恋의 사상을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넘어선 초월자와 일체화하려는 ‘애’로서의 충성심 대신 여러 여성을 ‘연’하는 히카루 겐지, 즉 “연의 혼란함으로 가득하고 그 가운데 그지없는 불의도 행하는”(«겐지 이야기 다마노오구시») 이 발칙한 허구의 인물을 높이 평가한다. 중국적 ‘애’의 수신처가 일원적이라면 일본적 ‘연’의 수신처는 다원적이고 분열적이기에, 노리나가는 후자를 통해 전자를 극복하려 한 것이다.” (275쪽)
그런데 이런 ‘연’의 논리 끝에는 ‘애국의 불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내셔널리즘은 초월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기 때문입니다. 종교 혁명의 뒷받침으로 내셔널리즘의 시대가 개막할 수 있었던 서구와 달리, 근세 막부 체제는 세속화와 쇄국으로 사회에서 초월성을 일소했습니다.
따라서 지상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 아닌 초월적 국가nation에 대한 사랑이 자랄 토양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후쿠시마는 이 애국의 불가능성을 예민하게 포착한 뒤 천황에 대한 ‘연’을 대안으로 삼으려 했던 사례로 현대 문학가 미시마 유키오를 들기도 합니다.
“미시마가 생각하기에 아가페에 기반한 ‘애국심’은 일본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시마는 «하가쿠레»에서 연, 다시 말해 육체의 관능과 깊이 연관된 감정 양식, 즉 “에로스와 아가페를 준별하지 않는 연애 관념”이라는 단서를 발견하고, 그 극점으로 천황 숭배를 든다. 요컨대 미시마는 일본인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단지 천황을 사랑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라고 말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주장은 노리나가의 사상과 바로 연결된다.” (278~279쪽)
그러나 이 사랑은 패전의 역사로 실패를 맞고, 이로 말미암아 미사마의 “궤도를 잃은 에로스의 폭주”는 “황군의 만세를 기원한다”는 유서와 함께 할복 자결하는 군인을 그린 소설 「우국」을 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연극적인 죽음으로 몰아붙이게 됩니다(미시마는 이어지는 5장에서 더 상세히 다뤄집니다).
논의를 다시 근세 일본으로 돌려, 후쿠시마는 «우게쓰 이야기» 등 전기傳奇 소설 작가로 알려진 우에다 아키나리를 높이 평가하며 그가 논적 노리나가와 달리 중국의 문학적 자원을 끌어와 일본 문학을 고쳐 쓰려 한 독특한 문학가였음을 보입니다.
‘문헌학적 니힐리스트’ 아키나리는 옛 문헌이 승자의 창조물일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었고, 따라서 왕조 문학 전통도 그에게는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풍아의 미학을 내세우는 전통에 사실은 악몽적 기원이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품고 고전 설화들을 섬뜩한 괴담 스타일로 풀어 냈습니다.
“바킨이 일본 본토로부터 주변의 섬을 향해 네이션의 상상력을 억지로 확대했다면, 아키나리는 일본 문학의 잠재 의식에 스며들어 그 속에서 작업했다. 더욱이 아키나리는 그 잠재 의식 영역에서 논적인 모토오리 노리나가처럼 ‘순조롭고 아름다운’ 왕조 시대의 미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령과 괴물이 도량발호하는 섬뜩한 풍경을 써 넣었다. 그는 말하자면 왕조 시대 이래 일본 문학이라는 소프트웨어의 알맹이를 바꿔치기한 특급 해커였다. 그때 «수호전»을 비롯한 근세 중국의 백화 소설이 아키나리에게 새로운 프로그래밍 기술을 제공했다.” (296~297쪽)
중국 유민 내셔널리즘이 일본 문화에 촉발한 반응을 다룬 4장의 논의를 이상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 논의가 중반을 넘어오며 부흥 문화의 작용과 반작용 양면을 가감없이 살피려는 이 책의 의도도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번 장은 일본 내셔널리즘의 ‘가상적 기원’을 밝힘으로써 국수주의적 일본상에 균열을 내고, 그런 한편 ‘가상’을 통해 ‘진짜’ 역사의 동력이 생겨나기도 한다는 통찰을 이끌어 내 부흥 문화의 복잡다기함을 곱씹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무대는 근대 일본으로 옮겨 갑니다!
“계속 강조했듯이 가상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감정 양식이 아니었다. 노리나가와 미시마가 힘이 잔뜩 들어간 이국풍 ‘사랑’을 의심하고 감정의 수신처를 정당화하는 데 몰두한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완고한 ‘중국화’가 때로 정치적 실책의 간접 원인이 된 것을 생각하면(야마모토 시치헤이의 말을 빌리면 «정헌유언»의 <사방득>에는 ‘대동아전쟁’ 때 일본이 보인 완고하고 어리석은 외교 전략이 이미 예고되어 있다), 노리나가와 미시마의 시도를 싸잡아 보수・반동적인 일본의 회귀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섬나라 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유치한 국수주의도 졸렬하지만, 이국의 종교적 내셔널리즘 또한 사고를 경직시킬 수 있다. 그것이 일본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295~296쪽)
5장 <전후/진재 후>
A 전후 = <나>의 문학
7세기의 가인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에서 출발한 «부흥 문화론»의 논의는 5장에 이르러 근대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후쿠시마 료타는 우리에게도 꽤나 익숙한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그리고 약간은 놀랍게도 에도가와 란포 등의 문호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오늘날 일본에서 ‘문학’이라고 하면 “유머가 부족하고 음울하며 내향적이라는 이미지”부터 떠올리게 되는데, 후쿠시마는 근대 문학의 시대가 러일전쟁 ‘전후’에 개막되었다는 사실에서 이런 “습도 높은 문학”이라는 인상이 유래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일본인은 문학(특히 순문학)이 유머가 부족하고 음울하며 내향적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독자는 그 침울함이 문학에 주어진 성격이라며 별 의문 없이 납득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야마자키에 따르면 그처럼 습도 높은 문학이 계속해서 나타난 것은 러일전쟁 ‹전후›의 사회 환경에 따른 것이지 결코 예부터 내려온 전통이 아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메이지 유신 이래의 공적인 국가 목표=문명 개화가 일단 달성된 순간 “일본 중산 지식 계급”은 되돌릴 수 없는 음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간단히 말해 러일전쟁 ‹전후›의 근대 문학은 공적인 가치관, 즉 ‘거대 서사’의 상실에 직면한 지식인이 만들어 낸 문학인 것이다.” (323~324쪽)
그리하여 5장 A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를 중심으로 하는 러일전쟁 전후의 문학을 ‘나의 문학’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작품에서 ‘우리’의 불가능성과 ‘나’의 폐역에 갇힌 불쾌한 자아라는 테마를 검출합니다(그리고 이를 넘어서고자 한 ‘우리의 문학’의 가능성을 5장 B에서 살펴봅니다).
러일전쟁은 일본사에 드문 승리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후는 일본에 영광이 아니라 불황을 가져왔고(‘중간 계급의 붕괴’), 국가와 나의 중간을 메워야 할 시민 사회가 빈약해지고 국가가 공적 영역을 잠식한 상황에서 이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문학가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나’로 분해하는 문학을 창작하게 됩니다.
“일본 부흥 문화의 계보에서 러일전쟁 ‹전후›의 근대 문학은 상당히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제까지 검토한 것처럼 일본의 부흥 문화는 종종 전쟁이나 혼란 이후에 ‹우리›를 수용할 새로운 장소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러일 ‹전후› 문학은 그와 반대로 불쾌 혹은 광기의 밀실에 유폐된 ‹나›를 강하게 욕망했다.” ( 334쪽)
후쿠시마는 일본 근대 문학이 호모소셜한 우정에 기반한 ‘남성 연대’ 이상의 연대성(‘우리’)을 그려 내지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소세키는 바로 이 빈약한 ‘우리’가 삼각 관계 같은 연애 사건의 개입과 함께 붕괴되는 과정을 자신의 작품에서 거듭 변주한 작가였습니다.
“예컨대 영화 쪽을 봐도 구로사와 아키라부터 시대극과 야쿠자 영화에 이르기까지 호모소셜하고 남자 냄새가 물씬 나는 우정이 작품의 윤곽을 결정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으며, 순문학에서도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 나카가미 겐지,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하루키 등이 모두 ‘남성 연대’를 그렸다. 소년 만화나 BL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근현대 일본의 문화사란 ‘우정의 문화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이는 ‘남성 연대’ 외에는 ‹우리›를 윤곽 지을 자원이 희박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정이 아닌 연대의 이미지가 근대 이후의 일본에는 정말 빈곤하다.” (334~335쪽)
또 러일전쟁이 초래한 불황기에 태어난 낭만주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사회에서 ‘나’를 격리한 끝에 작품을 넘어 자신마저 파멸시키는 폭주로 나아가게 됩니다. 낭만주의란 산업 사회가 낳은 평균화에 대항해 예술을 매개 삼아 단독성을 추구하는 사상으로 요약되는데, 다자이는 예술의 문맥이 부재한 일본이라는 조건에 민감하게 반응한 탓에 고립된 자아 자체의 작품화(‘특별한 존재로 만들기’)라는 위험천만한 길을 택했습니다. 후쿠시마는 그를 숭고한 예술의 추구가 비참한 광대를 낳는 역설을 직접 체현한 작가로 평가합니다.
“다자이는 “아무것도 쓰지 마라. 아무것도 읽지 마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오직 살아 있어라!”라며 ‘소설다운 소설’을 일본에서 쓴다 한들 무용지물이라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게다가 그저 “살아 있을” 뿐인 자신을 그 자체로 낭만의 자원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실제 삶에서 몇 번이나 과격한 ‘사건’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모종의 희극인처럼 이것저것 다각적인 화제를 뿌리고 이를 통해 한계에 임박한 음산함을 작품화하기—이는 자기 존엄을 끝없이 감산하는 허수적 낭만주의다.” (337쪽)
후쿠시마는 5장 A를 마무리하며 이 두 작가가 묘파한 곤경(‘우리’의 불가능성)이 일본 근대 문학의 ‘구조적 약점’이 되었으리라 예상합니다. 그리고 이 약점을 만든 세 가지 구조적 원인(‘음성의 약화’, ‘수사의 약화’, ‘표기의 난잡함’)을 짚기도 합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언문일치체의 출현과 함께 문학에서 음성이 내향화해 낭독과 거리가 멀어졌고, 한문에 기댄 문체인 한문맥을 멀리하며 언어가 무미건조해졌으며, 근대 일본어가 정서법(맞춤법)조차 확립하지 못해 오늘에 이르는 문체의 무규범화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본래라면 근대 문학에 문어적인 것과 구어적인 것, 즉 문자(쓰인 것)와 음성(말해진 것)의 관계를 새롭게 고쳐 연결시키는 역할이 있었을 터인데, 일본에서는 그 작업이 결코 잘 풀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요즘에는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일본어’라는 식의 마초적인 목소리가 국민적 동일성을 날조하려 한다. 이러한 마초적인 목소리의 대두는 그만큼 일본 근대 문학에서 사회적인 ‘목소리’—‹나›의 고유성과 ‹우리›의 연대를 다시 연결하는 목소리—가 희미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345~346쪽)
“실제로 소세키, 오가이, 미시마 등은 미적인 레토릭이 필요할 때 화문맥이 아닌 한문맥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였다. 반대로 한문맥의 기호적 화려함을 버리면 대체로 소박한 문체만이 남게 된다. 리얼리즘을 지향한다면 이래도 좋겠지만, 일본어 문장의 무미 건조함을 수립했다는 의미에서는 큰 결점이 되었다.” (347쪽)
“이러한 사정 탓에 일본어 필자는 개인으로서 문체의 자유를 향유하는 한편 집단으로서 문체의 무규범화를 촉진한다. 근대 이후 일본인의 문장 의식은 결국 정연한 질서가 아니라, 옳건 그르건 간에 개별 필자의 취향에 기반한 문체적 아니키즘으로 기울기 쉬워졌으며, 그것이 ‹나›의 문학의 밑바탕이 되어 갔다.” (349쪽)
얼핏 기술적인 문제들로 보이지만 이것들이 모여 일본 근대 문학의 고립성과 ‘소박주의’(있는 그대로 내면을 쓰기)를 뒷받침했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한국어 문법의 체계성과 한국어의 문학적 적합성이라는 문제에도 시사해 주는 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B 진재 후 = <우리>의 문학
이렇게 «부흥 문화론» 5장 A에서 후쿠시마 료타는 러일전쟁 ‘전후’의 문학, 나아가 일본 근현대 문학이 ‘나’의 밀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장 B편에서는 ‘우리’의 문학을 위한 실마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탐색합니다.
“‹나› 지향 문학과는 별개로 미를 회복하고자 한 작가들이 특히 1930년대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그 과정은 관동 대지진 이후의 도시 부흥과 함께 표면화되어 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의 순문학은 러일 ‹전후› 들어 내향화했고, 관동 대지진 이후의 부흥기를 하나의 중요한 계기로 삼아 외면적 미를 재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된 일일까?” (350쪽)
고립적 ‘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공공적 ‘우리’입니다. 후쿠시마는 ‘우리’가 문학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그 구심점이 될 ‘우리의 미美’가 확립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며, 이 과제에 도전한 근대 부흥 문학가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에도가와 란포, 미시마 유키오를 호명합니다.
이들에 의해 (재)발견된 ‘우리’의 이미지는 ‘관객’입니다. 이 작가들의 작품에서 구조화된 ‘극장이 상연하는 미’를 중심으로 관객이라는 우리가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이 극장적 미의 선구자가 «설국» 등 일본 전통미의 작가로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입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진재) 이후 재건된 도쿄 아사쿠사에서는 도시적 예능 문화가 유행하며 새로운 대중화를 촉진했고, 이 현상에 주목한 청년 가와바타는 «아사쿠사 구레나이단» 같은 작품을 통해 극장적 미를 자신의 작품 세계에 녹여 냈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평온하고 고요한 일본의 전통미를 그린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사쿠사 구레나이단»의 여러 장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작가로 출발했을 무렵 가와바타는 오히려 도시의 대중화 현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진재 후 대중의 욕망으로 채워진 «아사쿠사 구레나이단»과 표면적으로는 대극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에도 ‘아사쿠사적인 것’—안전하고 깔끔한 아마추어 예능을 빛나게 하는 극장적 메커니즘—이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355쪽)
도시의 작가와 전통미의 작가라는 가와바타의 두 얼굴도 이렇게 문학적 극장을 유지한 채로 무대 공간을 바꾸어 나갔던 것으로 해석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후쿠시마에 따르면 가와바타는 이야기보다는 극장의 구조성에 집중한 작가였다고 할 수 있어요.
다른 한편 같은 시기 아사쿠사를 무대로 약동하는 이야기를 상연해 관객=독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작가가 에도가와 란포입니다. 흔히 두 사람은 순문학과 장르문학으로 구분되어 하나의 계보 속에서 해석되지 않지만, 후쿠시마는 둘이 같은 시대적 변화에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했다고 평가합니다.
“진재에 의해 수직적으로 우뚝 솟은 상징이 붕괴한 후 란포는 도쿄 전체를 일종의 극장으로 변형해 탐정과 범인의 현란한 스펙터클과 정보전을 펼쳐 보인다. 나아가 그의 탐정 소설은 작중 인물과 하나가 되어 범인을 추리하는 관객=독자도 만들어 낸다. 가와바타와 란포 모두 진재의 잔해 위에 세워진 대중 사회의 ‘극장’에서 관객이라는 존재 양식을 본떴다. 그렇다면 가와바타의 일본미와 란포의 전위적 외설성은 그 표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가까이 자리했던 것 아닐까?” (359쪽)
가와바타와 란포가 선보인 극장성은 ‘우리의 문학’의 가능성을 펼쳐 보였습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독자=관객 개개인의 차이가 평균화되었고, 독자들은 내면성이 희박한 주인공들의 시선에 이입해 때로는 도회적 스펙터클을 또 때로는 일본적 서정미를 함께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관객’으로서 우리에게는 철저한 수동성이라는 약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가와바타의 작품에는 미의 응시가 음침한 관음증으로 전이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후쿠시마는 이것이 “관객과 작품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라고도 말합니다.
“가와바타는 미를 아이의 위치에 놓으려는 욕망을 종종 내비친다. 미는 세계의 부모가 아니라 세계의 아이며, 아이와 같은 이 미를 다만 ‘관객’으로서 감상한다는 것이 가와바타의 기본 자세였다. 따라서 «이즈의 무희»를 필두로 가와바타의 문학에서 모종의 아동 포르노적 요소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아동 포르노적 성격이 «잠자는 미녀»에서는 노인=관객의 불모적 섹슈얼리티와 혼연 일체가 된다.” (360~361쪽)
그럼에도 그는 관객이라는 존재 양식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가 보기엔 자율적 연기자들로 구성된 ‘시민 사회’가 뿌리내리지 못한 일본에서는 ‘관객으로서 우리’라는 이미지가 “호모소셜한 우정의 문학을 제외하면 근대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능했던 <우리>의 문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근대 일본의 ‹우리› 문학이 미의 극장성에 기반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를 함의한다. 자율적인 연기자들로 이루어진 건전한 시민 사회가 일본에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 지는 오래되었다(근대의 불철저!). 나도 이 견해에 이의는 없다. 그러나 반면 관객으로서의 ‹우리›가 문화 영역에서 활발하게 생겨났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극장을 모델로 한 가와바타와 란포의 문학은 연기자적인 시민이 아닌 관객적인 시민이라는 ‹우리›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는 결국 호모소셜한 우정의 문학을 제외하면 근대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능했던 ‹우리›의 문학이 아니었을까?” (363쪽)
그러나 극장적 미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결국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것이 후쿠시마의 생각입니다. 그는 이 미의 맹점과 실패를 가와바타의 비판적 계승자인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세계를 읽으며 보여 줍니다. 그에 따르면 미시마는 관객의 수동성에 내재된 운명을 낱낱이 드러낸 작가였습니다.
후쿠시마는 특히 미시마의 대표작 «금각사»를 가와바타적 관객 미학을 정면에서 비판한 작품으로 해석하는, 내면성이 표백된 가와바타의 주인공과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 미조구치는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데다 신체성을 상기시키는 말더듬증까지 지닌 ‘관객’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장편 소설은 1950년 실제로 금각사에 불을 지른 승려를 모델로 집필된 미시마의 대표작이다. 미시마는 비할 바 없이 장려한 수사를 구사해 금각사라는 ‘미의 극장’을 그려 냈다. 그러나 미시마의 진짜 계획은 이 황금빛 미의 극장에 마음을 빼앗긴 관객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데 있었다. 가와바타의 카메라는 오로지 미의 극장(예능인)을 향했지만, 미시마는 그것을 180도 회전시켜 관객의 생생한 모습을 포착한다. 거기 비친 것은 일본인 승려 미조구치의 비참하고 연약한 모습이다.” (370쪽)
미시마는 2차 대전 패전 후의 비참한 ‘나’라는 실체를 이렇듯 적나라하게 비추고, 그 ‘나’가 금각사라는 미의 극장에 거부당한 끝에 극장을 향한 테러에 나서는 이야기를 만들어 관객으로서 ‘우리’의 맹점을 폭로했습니다.
후쿠시마는 미시마가 ‘관객의 문학’과 ‘연기자의 문학’을 공존시킨 작가였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 공존은 결국 파열로 치닫습니다. 말년 4부작 «풍요의 바다»에서 미시마는 ‘미의 극장’의 영고성쇠를 그린 끝에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고, 작품을 완결하자마자 끔찍한 ‘연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풍요의 바다»는 근대 일본에서 ‘미의 극장’이 거친 영고성쇠를 훌륭히 그려 낸 연작이다. ‘관객’ 혼다는 기요아키, 이사오, 진 잔, 도오루라는 ‘연기자’를 통해 남성들 간의 우정(호모에로티시즘), 테러리즘, 소녀애 이미지를 ‹우리› 독자의 눈앞에 강림시키고, 그러면서도 최종적으로는 미의 극장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든다. 이는 전시에 집필된 「중세」부터 이어져 온 미시마의 문학적 강령술에 종언을 고함과 동시에 가와바타와 란포에서 이어진 ‹우리› 관객의 문학이 하나의 전기를 맞이했음도 암시한다.” (384쪽)
이렇게 5장에서 후쿠시마는 일본 근현대 문학이 ‘나’에 침잠했다가 이후 관객이라는 ‘우리’를 발견하고자 했지만 결국 좌절한 과정을 그립니다. 또 미시마의 «풍요의 바다» 이후 “이 계보에 더해질 만한 새로운 작품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며 그 이후 문학에 다소 비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달리 말해 이는 문학의 역할이 여전히 무궁무진하지만 “혹성 규모의 대극장”이 들어선 오늘날에는 문학이 지도적 미디어가 되기 어렵다는 진단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2차 대전 전후의 일본에서는 문학과는 다른 유형의 미가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6장에서 다루는 애니메이션입니다.
6장 <혼이 돌아갈 곳>
A 자연의 말소 (디즈니/데즈카 오사무)
«부흥 문화론» 6장은 일본을 처음으로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2차 대전 ‘전후’의 부흥 문화를 다룹니다.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장르/형식은 서브컬처, 특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입니다. 6장 A편에서 후쿠시마 료타가 주목하는 작가는 ‘일본 만화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입니다.
후쿠시마는 일본의 전후 서브컬처가 “숭고한 예술”을 해체하는 “유치한 엔터테인먼트”로 싹텄으며, 나아가 전승국인 미국에서 수입한 ‘풍요’의 이미지를 번안한 “문화적 식민화의 산물”이라며 자못 냉소적으로 들리는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전후 일본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탄탄히 짜인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정신과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불가해한 덫으로 가득한 지독히 뒤죽박죽인 사회였다. 멸망에 익숙하지 않은 민족이 느닷없이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멸망 직전까지 끌려간 이 의외의 역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망국을 피하고 살아남았다는 이상한 행운을 배경으로 숭고한 예술을 해체하는 ‘코미디’를 만연케 했다.” (399쪽)
이 부흥 문화의 첫머리에 위치한 데즈카 오사무도 미국의 월트 디즈니가 일군 기호의 제국을 패전으로 초토화된 일본에 옮겨 심으려 시도한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역사적 뿌리가 부재한 가벼움이 혼란에 빠진 전후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는 데는 오히려 적합했다고 후쿠시마는 평합니다.
후쿠시마에 따르면 데즈카는 단순히 디즈니적인 디자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까지 흡수해 문화적 번역을 완수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디즈니 사상의 핵심에는 강렬한 ‘자연 부정’의 욕망이 존재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데즈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애호가였고 그 유사물을 일본에서 만들어 내려 했다. 이는 디즈니적인 디자인을 흉내 내는 데 머물지 않고 디즈니의 사상을 흡수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내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월트 디즈니가 강렬한 ‘자연 부정’ 사상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다.” (400쪽)
미주리의 개척 농민 집안에서 태어난 월트 디즈니는 가혹한 자연 환경에 맞서 싸운 선조들에게서 안전과 쾌적함에 대한 갈망을 물려받았고, 그 결과 “청결하고 낙천적인 생쥐” 캐릭터인 미키 마우스를 자신의 분신으로 창조하게 됩니다.
나아가 디즈니 세계에는 자연과 인간의 투쟁 자체가 철저히 소거되어 있기도 합니다. 인간과 동물, 꽃, 곤충, 심지어 유령까지 불화 없이 함께 노래하게 만드는 안전하고 쾌적한 ‘미의 극장’은 전 지구적 ‘우리=관객’을 창출해 내기도 했습니다.
“불길한 자연을 철저히 부정하고 그 부지 위에 ‘위생적인’ 기호를 번식시키는 그의 애니메이션은 자연을 순치하려는 근대적 욕망으로 넘쳐 난다. 더구나 이때 일찍이 가혹한 자연에 맞섰던 선조 농민들의 ‘투쟁’이 남긴 흔적은 남김없이 소거된다. 둥글둥글한 미키 마우스 디자인은 애니메이션에서 공격성과 완고함을 제거해 작품 전체에 온화한 행복감을 부여하는 데 일조한다. 곤충과 꽃이 노래하고 춤추며 인간과 동물이 사이좋게 노닐고 해골조차 밝은 음악을 연주하는 평화로운 기호 세계, 바로 이러한 자연의 삭제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특징짓는다.” (402쪽)
그리고 전후의 폐허 한복판에서 부흥 작가로 각성한 데즈카 오사무에게는 이 풍요로운 인공성의 세계가 절호의 소재로 비쳤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식하진 않았더라도) 동세대인 미시마 유키오의 절망과 폭주를 답습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여기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데즈카는 디즈니적 기호화의 기술을 활용한 덕분에 일본의 현실=자연이 부과하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미래의 일본’을 그릴 수 있었고, 이로부터 국적성을 모호하게 만든 <우주 소년 아톰>(철완 아톰)이나 인류사 전체를 무대 삼은 «불새» 같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디즈니적 자연 부정을 경유한 일종의 잠재적인 일본 부정의 욕망을 발견한다. 데즈카의 만화에서 일본은 종종 쓸쓸하고 비참한 패전국이라는 실상과 멀리 떨어져 장대한 인류사/미래사의 연회에 동석한다. 디즈니가 진흙과 먼지의 자연을 잊게 만든 것처럼, 데즈카의 «불새»는 대우주의 생명 속으로 일본을 용해시킨다. 부흥기 작가로서 데즈카는 영원히 생기발랄한 디즈니의 반자연적 세계를 도입해 일본적 자연과는 다른 허구 세계를 일본의 서브컬처에 등록할 수 있었다.” (409쪽)
즉 서브컬처의 가벼움에 기대 현실=자연을 회피하고 사회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 2차 대전 전후 부흥의 한 방법론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전후의 경제적 풍요 덕분에 가능해진 소비 사회적 향락에 의지해 전전戰前의 정치적 아포리아를 망각한 서구 선진국들이 걸은 길과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1945년 이후 선진국의 ‹전후›를 “풍요로움이 사회의 핵심이었던 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사회의 번영(부)을 과시하는 동시에 계급, 연령, 성별을 떠나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다종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 낼 것,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의 이론적 한계를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갈 것.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전후› 대중 민주주의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392쪽)
러일전쟁 전후의 불황에 휘청거렸던 근대 문학 작가들과 달리, 자본주의화한 2차 대전 전후 일본에서 데즈카가 창조한 반자연적 풍요의 이미지는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에게 불편함을 안기지 않고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자연 부정’은 데즈카의 야심인 동시에 당대 중산층의 욕망이기도 했던 것이죠.
“일본에서 디즈니=데즈카적 서브컬처의 융성은 소비 활동과 심리적 위안을 중시하는 중산층 가족의 문화적 승리를 보여 준다. 인간을 위축시키는 흉포한 ‘자연’을 지운 다음 가능한 한 많은 인간에게 다양한 경이로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러한 서브컬처의 교육적 자세는 자신의 인생 체험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어 한 중산층의 가치관과 정확히 일치했다. 문명의 신입 교사로서 서브컬처는 사람들에게 현실성보다 가능성을, 고귀함보다 잡다함을, 진리보다 흥분을, 소박함보다 장식성을 사랑하는 심성을 철저히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교육’에 즈음해 날것의 가시 돋친 자연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감춰졌다.” (413~414쪽)
B 자연의 회귀 (미야자키 하야오)
디즈니의 반자연주의 사상을 흡수한 데즈카 오사무는 전후 일본의 현실=자연을 억압하고 그 위에 새 시대의 부흥 문화인 서브컬처의 토대를 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전후 서브컬처가 그려 낸 풍요의 이미지가 일본을 뒤덮었을 때 ‘억압된 것의 회귀’가 일어납니다.
“한번 억압되었던 자연은 미주리의 황무지도 일본의 온화한 자연도 닮지 않은, 끝까지 괄호가 벗겨지지 않은 전대 미문의 ‹자연›으로 부흥된다. 자연은 애니메이션의 역사 밑바닥에 봉인되어 있는 동안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그로테스크한 무언가로 변모해 섬뜩한 끈적끈적함으로 재생된다.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것의 회귀’ 그 자체다.” (421쪽)
«부흥 문화론» 6장 B편의 논의는 일본 문화에서 한번 소거되었던 자연을 한층 흉포한 모습으로 ‘부흥’시킨 미야자키 하야오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리고 이 미야자키의 부흥은 데즈카와 디즈니라는 전후 서브컬처의 기원에 대한 명확한 부정 의식의 소산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의 이미지는 서브컬처의 영역에서 얌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윽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단 제압했던 자연에 복수를 당하게 된다.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정체성의 모험을 하라고 장려하는 디즈니=데즈카의 반자연적 세계의 풍요에 명쾌하게 ‘아니요’를 들이댄 작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을 들 수 있다.” (417~418쪽)
초기 대표작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핵전쟁 후 ‘부해’腐海에 뒤덮인 지구를 그리며, 이 부해는 인간에 적대적인 거대 벌레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아끼는 공주가 주인공이라는 설정까지 포함해, 이 작품을 고스란히 데즈카=디즈니에 대한 비평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우시카»의 괄호 속 ‹자연›=부해의 불길한 외관은 청결하고 가벼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음화며, 나아가 디즈니=데즈카의 반자연적 위생 사상을 근저에서부터 뒤엎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유전자 조작에 의해 급격하게 증식해 부해를 모조리 뒤덮은 ‘점균’의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이미지—여기에는 미야자키 취향의 점착성이 완벽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괴벨스와 리펜슈탈을 매료시킨 디즈니의 가볍고 실내악적인 이미지와 완전히 대조적이다.” (420쪽)
미야자키는 작품 내적 측면만이 아니라 산업적인 면에서도 데즈카가 확립한 일본 TV 애니메이션 시스템, 디즈니의 거대 스튜디오 제작 방식을 모두 거부하고 “마을 공장”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와 함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수공업”적으로 제작하는 길을 고수해 왔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는 비행기가 자주 나오며 또 반드시 비행기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수공업자’(호모 파베르)가 함께 그려진다. 황홀하리만치 자유로운 비상은 매일의 지루한 노동과 유지 보수 속에서만 생겨난다는 것이 미야자키의 올곧은 장인 윤리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디즈니=데즈카의 마술적 세계에는 이러한 ‘수작업’의 무게가 빠져 있다.” (419쪽)
대지의 속박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했을 때 진정한 비상의 쾌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미야자키 세계를 관통하는 법칙입니다. 미주리의 모래폭풍을 막으려 성을 쌓은 디즈니 세계에서는 이처럼 청량한 ‘바람’을 느낄 수 없고, 이는 미야자키가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유려한 클래식 음악과 어울린 데 비해, 느닷없는 낙하와 비상을 강조하는 미야자키의 연출은 종종 그러한 음악적 리듬을 모조리 날려 버리며 관객에게 신체적 쾌감이나 공포를 강하게 환기시킨다(이러한 신체 레벨에서의 동일화=나르시시즘의 움직임 덕분에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은 언어와 개념 등의 상징을 공유하지 않는 외국인에게도 전달 가능하다. 이와 같은 원시적 나르시시즘이야말로 작품의 월경을 지탱한다). 오염된 대지와 청정한 바람, 끈적거리는 것과 중력을 가르는 것 사이를 가로지르는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은 디즈니의 규칙을 일신한다. 다시 말해 미야자키의 바람과 벌레는 애니메이션사의 저 너머에서 온 것이다.” (421쪽)
그렇지만 90년대 이래 미야자키는 청량한 ‘바람의 작가’에서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물의 작가’로 전직하게 됩니다. 후쿠시마는 이 변화를 버블 붕괴와 장기 불황이라는 일본 사회의 새로운 전개와 연계해 보는 시각을 제시합니다.
1차 대전과 이후의 공황이라는 실제 역사를 배경 삼은 <붉은 돼지>는 이탈리아 공군의 비행사였으나 전쟁과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로 돼지가 되기를 택한 주인공을 내세우는데, 후쿠시마는 이 캐릭터를 거대 애니메이션 산업에 포획된 미야자키 자신의 희화화로 해석합니다.
또 작품 후반에 그려지는, 주인공 포르코가 세상을 떠난 옛 친구들과 아름다운 구름의 평원을 비행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비행을 비롯한 전쟁 테크놀로지를 “천진난만한” 시선으로 그려 온 전후 애니메이션에 대한 ‘장례’이자 ‘진혼’이기도 했답니다.
“적기에 쫓겨 상공으로 도망간 포르코는 검푸르게 아름다운 아드리아해 위에 떠 있는 구름의 평원과 수평으로 비행한다. 그의 눈앞에서 이제는 죽어 없는 친구들이 온 하늘을 메운 비행기와 함께 조용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이 ‘진혼’ 장면을 그렸을 때, 미야자키는 비행을 항상 긍정적으로 다루어 온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 즉 전쟁 전의 프로파간다 영화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세오 미쓰요 감독)이나 전후의 <우주 소년 아톰>으로 이어져 온 천진난만한 기억을,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과 이미지를 가지고 은밀히 장례 치르는 것 같기도 하다.” (423~424쪽)
이렇게 ‘바람’과 멀어지게 된 미야자키는 중세 일본을 무대 삼아 메르헨적 기호를 남김없이 걷어 낸 <모노노케 히메>를 통해 ‘물의 작가’로의 전직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비평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이 작품에 대한 후쿠시마의 평가는 상당히 복합적입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아시타카를 막부를 거부한 북방 에조(현재의 홋카이도)의 소수 민족으로 설정하고 사무라이와 싸우는 여성과 병자의 공동체를 그리는 등 데즈카=디즈니풍 애니메이션이 수용하지 못한 소수자의 이미지를 끌어안습니다.
또한 인간과 대립하는 자연 묘사도 매우 강렬합니다. 야성과 지성을 겸비한 거대한 동물들은 고결하고 신화적인 존재로 그려지지만 인간이 쏜 총탄으로 장엄한 신화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저주와 재생의 양면성을 가진 사슴 신의 체액이 숲부터 인간들의 근거지까지 뒤덮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본 아닌 일본’으로서 에조, 사슴 신의 숲이 그리는 우림 이미지 등은 사실 현실과 유리된 가상성의 산물입니다. 일본의 시골 풍경을 부정하던 미야자키는 이방에서 문명의 뿌리를 찾은 ‘조엽수립 문화론’에 크게 감화받았고 그 영향이 이 작품에도 녹아들었습니다.
“이 가설에 공감한 미야자키는 “국가의 틀도, 민족의 벽도, 역사가 주는 무거운 답답함도” 뚫고 나가는 모종의 제국적 조엽수림 문화권으로 일본의 농경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그가 좋아한 미끈미끈하고 끈적끈적한 자연은 반디즈니적인 기호였을 뿐 아니라 초라한 일본적 풍경을 풍요로운 ‘제국’을 향해 해방하는 암호기도 했다.” (432쪽)
미야자키는 이방의 이미지를 동원해 표면적으로 전후 일본을 부정했으나 이 상상력은 사실 전전 대동아공영권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었고, 미야자키는 의도치 않게 옛 ‘제국’의 상상력을 되살리게 됩니다.
“이 원시 숲에서 일본의 생활 양식은 그대로 ‘동아’의 생활 양식과 이어진다. 고립된 벼농사 문명(농민)으로 상징되어 온 일본은 미끌거리는 액체로 이루어진 시시가미 슬하에서 조엽수림에 근거한 제국적 농경 문화에 접속해 결국 수렵민과 천민 등 ‘이방인’까지 수용한 완전히 다른 ‹일본›으로 다시 태어난다. 다른 관점에서 이는 전쟁 전 ‘대일본제국’의 지리적 상상력을 되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432쪽)
‘물의 작가’ 시기 들어 미야자키의 자연 묘사는 현실과 “이음매가 어긋”나게 되었고, 2000년대에 제작된 <벼랑 위의 포뇨>는 상투적인 민담 패턴을 도입해 보지만 “스토리는 거의 지리멸렬”해지고 해안가를 덮치는 해일의 이미지 역시 상쾌하지도 흉포하지도 않은 “느슨”한 것에 그칠 뿐입니다.
여기에 많은 논쟁을 일으킨 <바람이 분다>까지 시야에 넣는다면 ‘전쟁으로부터의 부흥’이 ‘전쟁의 부흥’에 이른 미야자키의 아이러니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후쿠시마는 이 아이러니가 결국 “현실의 국민 국가로서 일본을 있는 그대로 부흥하기”의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봅니다.
미야자키의 실패가 현실 너머 ‘풍요’ 이미지의 무리한 도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전후 일본 서브컬처는 현실의 ‘가난함’을 더 솔직하게 마주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후쿠시마는 미야자키의 곁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던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를 인용하며 시사합니다.
불황의 만성화, 나아가 현재 세계가 맞은 전 지구적 위기는 전후 체제를 가능케 한 ‘풍요의 환상’에 시효 만료를 고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전후 부흥 문화로서 서브컬처는 이제 어떤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부흥 문화론»을 매듭짓는 6장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