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문화론» 내용을 소개합니다(1~3장)

«부흥 문화론»은 여섯 개의 장을 통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일본 문화사를 ‘부흥 문화’의 관점에서 새로 쓰고 있으며, 각 장은 상보적 성격의 A와 B 두 편으로 나뉘어 구성됩니다.

이 구성을 따라가며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고 저희가 생각하는 이 책의 매력도 짚어 보려 합니다. 특히 지은이 후쿠시마 료타의 힘 있는 문체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자주 본문 인용을 했으니 꼭 함께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

1장 <부흥기의 ‘천재’>

A 히토마로적인 것

1장 <부흥기의 ‘천재’>는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와 구카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둘 모두 대부분의 국내 독자에게 낯설 것 같은 이름이지만, 일본 독자라고 해서 그렇게 많이 다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우리도 우리 고전을 잘 모르듯😅).

후쿠시마는 먼저 “천재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미래의 현실이 될 만한 씨앗을 미리 한 아름” 품고서 “문명의 존재 방식을 예고한 존재”라고 답하며 히토마로와 구카이를 고대 부흥기의 두 (상반된) ‘천재’로 호명합니다.

이 가운데 히토마로는 “시가의 성스러운 기원”이자 시가집 «만엽집»을 대표하는 “가성”歌聖으로 숭앙되는 인물입니다. 후쿠시마는 그를 ‘진신의 난’이라는 일본 고대사 최대의 내란 ‘전후戰後 문학가’로 정의함으로써 이 책의 주제 의식을 가시화합니다.

“특히 『헤이케 이야기』와 『태평기』부터 제아미의 복식몽환능, 나아가 ‘메이지의 정신’을 추도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일본 문학은 종종 패자에게 바치는 주술적=예능적 언어로 기능해 왔다. 이러한 ‹전후› 문학의 계보를 상정할 때 히토마로가 틔운 역동적이고 무성한 장가의 그늘 아래 일본 문학의 열매가 이미 가지가 휠 정도로 열려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이 책에서 나는 그 열매의 속살을 차례차례 점검한다). 나는 히토마로가 이처럼 풍성한 리얼리티를 선취했다는 점에서 그의 ‘천재성’을 찾고자 한다.” (43쪽)

이 정의는 일본 ‘전후 문학가’의 계보 가장 앞에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라는 이름을 새겨 넣어 과거와의 거리감을 단숨에 좁히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현대적 시선을 과거에 적용하는 서술 전략은 «부흥 문화론»의 도드라지는 매력 가운데 하나기도 합니다.

“엄청난 무엇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감으로 가득한 아키노의 ‘햇살’(서광)이나 어딘가 우주적인 인상을 주는 아카시의 “아침 안개”를 읊은 노래에 비하면 히토마로적인 밤은 영적인 드라마에 미치지 못하고 그의 문학적 능력이 있는 그대로 발휘되지 못한 시간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38쪽)

“이때 율령 국가 체제 자체가 극히 ‘모던’한 제도였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본가’인 중국에서 종래의 호족이나 귀족 중심 정치를 대신해 과거제와 관료제에 바탕을 둔 법치 국가=율령 국가 시스템이 건설된 것은 6세기 후반 수나라 시대 이후의 일이다. 일본은 그로부터 100년도 채 되지 않아 중국과 같은 숙성기도 거치지 않고 율령 국가 도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율령 국가의 여백 또한 컸다고 말해야 한다(게다가 수나라가 30년 만에 멸망한 만큼 율령제가 진정 우수한 통치술이라는 보증도 없었다). 히토마로가 남긴 고도의 문학은 바로 그 여백에 잠입한다.” (44~45쪽)

1장은 이 책의 여정에서 반복될 주요 테마들을 추출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그중 하나가 문학의 주술성, 특히 폐허=고도를 향한 진혼의 성격입니다. 이 테마는 20세기의 나카가미 겐지,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에게도 계승되어 생명력을 잃지 않는 ‘고전 정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가인으로서 히토마로는 [……] 망명자 정권이 본가인 오미 왕조 문명을 파괴하고 호반에 꽃피운 그 이국적인 ‘수도’를 폐허로 만든, 일본에서는 이례적이라 할 사태를 거친 후=흔적 위에서 그는 정치적 패배자의 혼이 머무는 땅을 향해 진혼의 기획을 내포한 주술적 언어를 바친다.” (33쪽)

“흥미로운 것은 지난날 번영했던 고도에 대한 중층적인 기억을 회상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일본 문학사에서 중요한 ‘감정 교육’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수도의 수난에 대한 «만엽집»의 예민함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헤이안쿄의 붕괴를 그린 «헤이케 이야기», 구마노라는 ‘중력의 도시’에 구애된 나카가미 겐지,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고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계승되었다.” (51쪽)

또 하나 중요한 테마는 ‘관객’입니다. 히토마로 시가에는 진혼의 노래 외에도 경승지의 풍경을 ‘청신’淸新하게 발견하는 ‘기려가’ 계열의 노래가 존재하며, 여기서 나타나는 ‘관객’의 시선이 근대 이후 ‘개인’에 갇힌 일본 문학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유산이 되기도 했습니다.

“수도에서 찾아온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환하고 영적인 경승지. 아카히토는 그 풍경을 매우 인상적으로 노래했고, [……] 히토마로의 장가는 오미와 아키노에 응어리진 불운한 정령들을 축복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히토마로와 아카히토의 기려가는 그러한 인간 역사에 오염되지 않은 청신한 영지를 발견해 낸다.” (59쪽)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종류의 리얼리즘이 후세의 일본 문학에서도 종종 반복적으로 다루어졌다는 점이다. 5장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예컨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에도가와 란포 등은 극장 도시의 ‘관객’을 출발점으로 삼아 문학적 미의 새로운 길을 보여 주었다.” (65쪽)

그런데 후쿠시마는 “와카가 절멸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길을 부흥하기 위해 재림하는 노래의 신”인 히토마로가 “일본 문학이 지닌 약점의 기원이기도 하다”고 덧붙입니다. 그렇다면 후쿠시마가 일본 문학에서 반복되어 왔다고 본 구조적 맹점은 무엇일까요? 이를 가시화하기 위해 그가 불러내는 인물이 다음에 살필 ‘히토마로와 정반대인 천재’, ‘미완의 천재’인 구카이입니다.

B 히토마로적인 것의 외부

«부흥 문화론» 1장 B편은 일본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맹점’의 기원을 찾습니다. 후쿠시마에 따르면 일본 문학에서 ‘패배자의 1인칭 말하기’는 좀처럼 목소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소설 전통이 있긴 하지만 정치적 패배자의 자기 변론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하고요.

“정령을 불러내는 히토마로의 ‹전후› 장가가 매력적일수록 정치가의 강인한 1인칭 문학에서는 점점 멀어진다. 단적으로 말해 진혼의 언어는 정치적 패자의 육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며, 나아가 이러한 문학적 경향이 지금까지도 면면히 흐르고 있다.” (69~70쪽)

이는 굴원의 «초사»나 사마천의 «사기» 같은 중국 고전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특히 3인칭적 역사 기술과 1인칭적 가창을 아우른 «사기»는 서양 역사서와 변별되는 “그 시대의 문학 선집” 역할을 하며 항우나 유방 같은 ‘정치가들의 자전自傳’을 후대에 전했습니다.

“항우와 유방의 낭송부터 진시황 암살을 시도한 형가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사마천은 드라마틱한 가창을 «사기» 안에 실로 적절하게 배치했다. 3인칭적=객관적인 역사 기술 속에 등장 인물의 1인칭적=주관적인 가창이 삽입될 때 «사기»의 문장은 매우 풍부한 색채를 띠게 된다. 사마천은 ‘바로 여기다’ 싶은 장면에서는 무대 뒤에 숨고 인물 자신에게 목소리의 주도권을 양도한다. 그 덕분에 독자는 역사의 클라이맥스를 마치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하는 한 장면인 것처럼 유사 체험할 수 있다.” (71쪽)

히토마로가 활동한 7세기 후반 일본은 중국식 율령제를 신속히 도입해 ‘하쿠호白鳳 문화’라는 문화적 융성기를 일구었습니다. 그러나 급조된 중앙 집권 체제하의 일본 사회는 결코 평온하지 않았고, 고도를 진혼하고 여행지 풍경을 예찬한 히토마로 자신조차 권력 암투에 휘말려 사망했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고대 일본은 결코 목가적인 사회가 아니었고, 가인 또한 말려들 수밖에 없는 처절한 권력 투쟁의 장이었다는 우메하라의 관점에 나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문제는 설령 히토마로의 생애가 비극적이었다고 해도 그의 노래 자체는 결코 원망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히토마로의 불운한 ‘영’ 같은 것이 있다 해도 그 육성은 한없이 희미해져서 역사의 내면 깊은 곳에 은닉되고 만다.” (67~68쪽)

하지만 그가 남긴 노래 가운데 정치적 패배자의 감정을 드러낸 사례를 찾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이런 생생한 1인칭 육성의 결여를 후쿠시마는 ‘히토마로적인 것의 맹점’으로 지목한 뒤 이 맹점을 보완한 일본 문학사상의 ‘예외적 천재’ 구카이를 불러냅니다.

“고대 일본 문학에서 자전적인 ‘나’가 전무했느냐면 꼭 그렇지도 않다. ‘천재’ 히토마로가 퇴장한 이후 어언 100년이 지난 9세기 초두, 이번에는 한 사람의 종교가가 왕정에 당당히 등장해 일본 문학사상 전무 후무한 파격을 선보이며 강렬한 자기 표현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 종교가가 바로 구카이다. 우리는 구카이의 문학적 업적으로부터 ‘히토마로적인 것’에서 배제된 많은 것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73쪽)

구카이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진언밀교를 도입한 종교가입니다. 그는 당대(간무 천황 이후의 정치적 혼란기인 9세기 초)를 불법佛法이 쇠퇴한 끝에 도래한 말세로 파악하고, ‘안사의 난’을 겪은 당나라에서 부흥 문화로 부상했던 밀교의 힘으로 국가적 부흥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나라 고도를 그리워한 헤이제이 상황의 문학적 환상이 속절없이 무너졌을 때 마치 그것을 대체하듯이 구카이가 정치의 본무대에 등장한다. 그는 ‘말세’의 재액이 끊이지 않았던 율령 국가의 중심부에서 일찍이 빛을 발한 불법의 질서를 부흥시키고자 한다. 그 부흥 사업에는 유교적 이념에 기초한 율령 국가의 시스템을 당시 세계 최첨단의 종교=밀교로 단숨에 덮어쓰려는 야심이 담겨 있었다.” (75쪽)

후쿠시마는 기존 통치 시스템이 인텔리와 민중을 불문한 집단적 정념의 팽창을 감당하는 데 실패했을 때 ‘제도 바깥의 천재’ 구카이가 (정치의 여백에 머물렀던 히토마로와 달리) 제도의 중심부로 거침없이 나아가 스스로를 미디어 삼아 부흥 사업을 벌였다고 해석합니다.

“율령 국가는 일본에 그 근원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특히 정념 처리 메커니즘만큼은 따로 조달해야 했다. [……] 미시마 유키오의 세련된 표현을 빌리면 불교는 “인텔리에게는 철학적 즐거움을, 민중에게는 공포와 도취를” 동시에 가져다주었고, 유교는 이러한 이국적 체험을 충분히 제공할 수 없었다. 요컨대 통치 시스템의 율령 국가화가 정념 처리 분야는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텔리와 민중을 불문하고 쾌락과 도취를 줄 수 있는 제도 바깥의 ‘천재’가 때때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77~78쪽)

또 구카이는 궁정을 떠나 고야산에 틀어박혀 일련의 산거시를 남기기도 했는데, 풍경으로 순화될 수 없는 험준한 자연을 직접 겪어 가며 문학화한 사례는 일본 문학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6장에서 만날 미야자키 하야오적 ‘자연의 회귀’가 이 사례의 격세유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카이의 산거시가 그린 고야산은 일본 고대 문학의 풍경 가운데서 이례적으로 살벌한 황야였다. [……] 한마디로 구카이는 풍경이 되지 않는 자연의 발견자로서 그 노골적인 자연 속에 살아가는 고유한 자기를 시를 통해 부각시켰다.” (82쪽)

구카이의 강인한 ‘자기’는 “율령 국가의 엘리트 코스에서 낙오”한 자신과 불교의 길을 변호하는 초기 소설 《농고지귀》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는 유교 이데올로기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픽션이라는 장르를 굳이 선택해 일본에 드문 강렬한 자기 표현의 문학을 전개했습니다.

“구카이는 근엄하고 올곧은 사람의 감각마저 뒤흔들고 우울한 독자를 재충전하는 데 픽션의 힘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 구카이는 그것들을 모범으로 삼지 않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지만, 그러한 부인은 바꾸어 말해 그가 이런 에로틱한 문학에 촉발되어 그 자극을 자신의 소설에 담고자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86~87쪽)

문학론에서는 흔히 전근대적 ‘이야기’에서 근대적 ‘소설’로, 다시 포스트모던적 ‘이야기’로 이어지는 발전 모델을 설정하는데, 후쿠시마는 «농고지귀»가 이 틀을 동요시키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구카이의 활동은 이후 계승자를 찾지 못한 채 예외로 남았다는 것이 그의 가설입니다.

“히토마로의 노래에 그토록 많은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구카이의 «농고지귀» 및 일련의 산거시는 지금도 일본 문학사의 고아며 어떤 후계자도 갖지 못한 것 같다. [……] 구카이는 여전히 ‘미완의 천재’며, 일본 문학의 결여를 은밀히 비추다가 언젠가 시간을 구부려 현실로 귀환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88~89쪽)

2장 <수도의 중력, 중력의 도시>

A 수도의 중력

«부흥 문화론»은 일본에서 공식적 역사 서술의 전통이 빈약했던 대신 지나간 사건을 회고적으로 돌아보는 이야기 문학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문명적 선택처럼 해석되기도 합니다. 즉 섬나라 일본에는 종합적 인간학으로서의 역사서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0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전통이 있음에도 일본인이 쓴 텍스트가 다른 나라에 영향을 준 적은 거의 없다(궁극의 갈라파고스!). 이는 보편적인 ‘종합적 인간학’으로서의 역사서를 만들어야 했던 대륙의 중국인과 달리 섬나라의 일본인은 문명의 가치를 광범위하게 선전할 필요에 쫓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94쪽)

이는 원본이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 문학으로 꼽히는 『겐지 이야기』(1008년)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가 중국 역사서의 ‘기전체’ 양식을 능숙히 활용해 이 작품을 써 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흥미롭게도 그녀가 중국의 역사 기술에 무관심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겐지 이야기』는 일본의 그 어떤 역사서보다도 능숙하게 «사기»의 기전체 스타일을 활용했다. [……] 현행 «겐지 이야기»에서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직선적이기보다는 곡선적이며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도 심천과 농담이 있는 것은 이 같은 계열의 이중화와 관련된다.” (95~96쪽)

«겐지 이야기»는 궁중으로 집중된 미적 자원이 아낌없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이야기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후쿠시마는 이런 문학에 ‘수도주의’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 융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 10세기 초 기노 쓰라유키의 «고금집»으로 대표되는 ‘문예 부흥’이었음을 짚습니다.

“이는 궁중에서 귀족의 최고 정점에 올라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빈민의 입장에 선 것도 아닌 어떤 비평적이고도 주술적인 ‘중류 문학’이 10세기 이후 일본에 출현했음을 시사한다. 여성성과 주술성을 동반한 중간층이 세련된 시적 언어를 길러 왕조 시대 일본 문학에 강력한 수도의 중력을 발생시켰다.” (108쪽)

기노 쓰라유키가 활동한 10세기 초 수도 헤이안쿄는 (1장에서 살핀 혼란기를 지나) 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축적된 문화적 역량으로 «만엽집»의 미학을 한층 더 갈고닦은 «고금집»을 거치며 훗날 일본 문학을 종종 ‘탐미적’이라 평가하게 한 경향성이 뿌리 내리게 됩니다.

“문학에서는 보통 언어로 복잡한 현실을 탐구하고 해명하려는 산문적 지향과 너저분한 현실을 떨쳐 내고 언어를 철저히 가상적인 것으로 다루려는 시적 지향이 맞부딪친다. 쓰라유키는 후자 측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103쪽)

이런 문학적 발전 과정을 후쿠시마는 정밀하고 입체적으로 분석하며 그 의의와 한계를 드러냅니다. 특히 기노 쓰라유키적 ‘서정가 모델 시학’에 내재된 ‘민주주의’를 읽어 낸 후, 그것을 “정치적 불평등을 문학적 평등으로 치환하는 영리한 속임수”였다는 날카로운 지적으로 이어가는 논리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누구나 정동=노래를 가지고 있으며 그때 사회적 귀천은 중요하지 않다는 이 단순한 원칙은 고대 일본에서 가장 명확하게 말해진 민주주의 사상의 하나기도 했다. [……] 원래 ‘권리’, ‘책임’, ‘주체’, ‘계약’ 등 밀수입된 기독교 개념에 의해 지탱되는 서양의 개인주의/민주주의는 일본인에게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그 이해의 수준 또한 낮다. 대신 일본에서는 예부터 노래와 연계된 개인주의 및 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있었다.” (105쪽)

또한 서정가 시학이 문학에서 연극성(신체성)을 제거하고 모더니즘적인 텍스트 유희의 세계로 나아간 사실의 양면성을 짚으며, 그 곁에서 배제된 연극적 상상력을 수용한 장르로서 이야기 문학이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쓰라유키의 ‘문예 부흥’(르네상스)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크고 또 광범위한 작용과 반작용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시학 바로 곁에서 연극적 상상력을 수용한 장르가 일본 문학에 배태되어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특수한 장르는 바로 ‘이야기’다.” (120쪽)

즉 이야기는 ‘수도 문명의 은총’을 받지 못한 인물이나 집단을 통해 전승되고 발달해 왔다는 것입니다. ‘여방’(궁녀) 문학 «겐지 이야기»조차 히카루 겐지의 부귀 영화만이 아니라 궁중의 그림자까지 그리려 했고, 이야기의 기원은 야마토 왕조에 복속을 맹세하는 피정복 부족의 ‘봉헌물’에 있습니다.

“오리구치 이래의 민속학적 관점에서 원초적인 이야기 문학(서사시)은 지방 백성들이 정치적 복속을 맹세함과 더불어 국토와 천황의 안녕을 기원할 때 발생하는 주술적=예능적 ‘봉헌물’로 다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일본의 이야기 문학과 역사 문학에는 야마토 왕조의 지배를 받던 예능 집단=정치적 예속자의 감정이 깊게 침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26쪽)

때문에 이야기는 서정가가 수용할 수 없었던 폭력의 기운을 맞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겐페이 전쟁’을 소재로 해 태어난 부흥 문학 «헤이케 이야기»가 그 대표 사례입니다. 후쿠시마에 따르면 이 작품은 “질서가 아니라 재난을 부흥”함으로써 그 “체험을 백신처럼 사람들에게 접종”했습니다.

“그것은 도리어 비정복자=정치적 예속자가 품은 불길한 슬픔을 암시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 불온함과 불길함의 예감이 현실적인 것이 될 때, 이야기 문학은 아름다운 수도를 습격한 ‘재액’을 기록하는 장치의 양상을 띤다.” (128쪽)

겐페이 전쟁은 한 일족이 섬멸당하는 잔인한 결말로 이어진 12세기 후반의 내전이었고, 이로써 빛나는 궁정 문명을 구가한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헤이케 이야기»는 이 문명 시대에 대한 진혼가로서 서정가와 이야기 전통을 종합한 성격도 가진다는 것이 후쿠시마의 평가입니다.

“«헤이케 이야기»는 존재를 섬멸당한 망자를 가타리모노 예능 속에 위치 짓고 기록으로 남겨 추모하고자 한 장대한 문학 프로젝트이자 ‹전후› 진혼 문학으로서의 성격을 농후하게 띤다.” (131쪽)

«헤이케 이야기»는 “문명의 시대에서 운명의 시대로”의 이행을 선언한 작품이지만, 이는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요청되는 정보적 세계의 도래를 알리는 의미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 역시 기록과 풍문을 아우르는 새로운 미디어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냈고요.

즉 «헤이케 이야기»는 문명의 위기를 호기로 움켜쥐는 “특례 조치”로서 ‘부흥 문학’의 효시라고 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위기에 각성하는 이야기의 힘이 드러난 현대적 사례를 살피기 위해, 후쿠시마는 20세기 후반의 이야기 작가 나카가미 겐지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무자비한 ‘운명’이 모습을 드러내고 무서운 원령이 떠다니는 ‹전후› 부흥기의 시공간은 포스트문명의 여러 모습을 한데 모으기 위한 절호의 시간대기도 했다. «헤이케 이야기»라는 ‘부흥 문화’가 예사롭지 않은 활력으로 가득한 것은 수도 문명의 종결과 생기 띤 현실의 시작을 동시에 기입하기 때문이다.” (144쪽)

B 중력의 도시

«부흥문화론» 2장 B편은 시대를 건너뛰어 20세기 후반을 살았던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의 작품 세계를 ‘중력의 도시’가 만들어 낸 문학으로 조명합니다. ‘중력의 도시’는 «고금집» 등 일본 왕조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수도의 중력’과 대비되는 표현입니다.

나카가미 겐지는 고향인 기슈 지역 ‘신구’新宮를 무대로 자신의 분신인 다케하라 아키유키를 중심에 둔 일련의 이야기saga를 발표했습니다. 원래 목재 산업이 발달했던 이 지역은 20세기 초 ‘천황 암살 계획’ 사건의 근거지로 지목되어 심한 차별을 받은 반역의 땅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기슈의 ‘도시’는 나라나 교토 같은 정치적 중심지가 아니었고 그런 수도들에 비하면 자투리 격이었다. 도시의 중력이 일본 왕조 문학의 원천이 되어 온 데 반해, 나카가미의 문학은 오히려 중력의 도시—그의 단편집 제목이다—로서 신구, 즉 목재가 집적되는 ‘구마노 삼사의 도시’를 들고 온다.” (149쪽)

나카가미는 흔히 “기슈의 토속적 세계를 무대로 삼은 순문학 작가”라고 평가받는데, 이런 평가는 ‘수도의 중력’에 도전하려 했던 나카가미 문학의 의의를 충분히 포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단적인 도시에서 수도 문학의 프로그램 자체를 바꿔 쓰려 한 작가=해커였기 때문입니다.

“지방 출신 작가가 아무리 열심히 토속적인 이야기를 쓴들 그것은 기껏해야 문학의 이권과 독자가 모이는 수도(도쿄)의 노리개가 될 뿐이다. [……] 일본 문학의 전통에 도전하려면 수도에 대항해 지방을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오히려 수도 문학의 프로그램 자체를 고쳐 써야 한다. [……] 신구라는 수도의 배후령(중력의 도시)을 불러내, 마치 고고학자처럼 이야기의 지층을 점검하고 일본 이야기의 주요 신화소인 빛과 성을 파헤쳐 그것들을 한층 과격화한 나카가미의 문학은 지방성 혹은 토속성을 상품화하는 부류의 작품과는 사실상 정반대에 위치한다.” (155쪽)

이 문학적 해킹 기술을 후쿠시마 료타가 어떻게 풀어내는지 책을 통해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왕조 문학 속에서 작동하던 ‘황실의 정치학’이 축출한 ‘불결한 피’를 재액의 기록과 함께 이야기 안으로 숨어들게 만든 «봉선화» 독해 일부를 인용합니다.

“«슌킨쇼»의 클라이맥스에서 하인 사스케는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여주인 슌킨을 보지 않기 위해 자기 눈을 바늘로 찌른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키유키의 눈은 피를 인식할 수 없다. 햇빛 아래서 수려한 자연을 보고 싶은 대로 판독해 온 일본 문학의 ‘눈’은 물질적인 피나 상처에 직면하는 순간 허겁지겁 어둠의 장막 속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에서조차 피는 일종의 터부다. 예를 들어 악과 폭력이라는 주제를 다룬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주인공은 물질적인 피를 보는 일이 없다. 그가 자신을 위협하는 폭력의 정체와 대결하려 할 때 피는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이처럼 부정한 피는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대상이므로 영상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무라카미의 문체는 기호적인 청결함을 느끼게 하는데, 이는 그가 상징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피를 쫓아낸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159~160쪽)

한편 나카가미의 기슈 사가는 고향을 덮친 산업의 쇠퇴, 전쟁과 공습, 지진과 해일, 그리고 토지 개발과 원자력 발전소 계획에 이르는 ‘재액’을 이야기에 새겨 넣음으로써 “재액의 기록 장치로서 이야기”의 본령을 보였던 «헤이케 이야기»를 뒤따릅니다.

“중력의 도시를 무대로 한 «봉선화»는 빛과 꽃으로 이루어진 왕조 문학풍의 미적 세계에 재액을 불러들인다. 게다가 그 물질적인 피로 채색된 불길한 공간에 이윽고 무시무시한 묵시록적 상황이 출현한다. 즉 «봉선화»의 구마노 신구는 «헤이케 이야기»의 헤이안쿄와 완전히 똑같이 이내 전쟁과 자연 재해를 끌어들이게 된다.” (161쪽)

후쿠시마는 “농밀한 피의 이야기”인 나카가미의 기슈 사가가 오늘날 시민 사회의 삶과 직접(‘리얼리티’를 체감할 수 있도록) 맞닿아 있지는 않다고 평가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이야기의 가치는 그것이 현실의 시간성과 다른 시간 감각을 되살리는 ‘위기의 미디어’라는 사실에 있음을 역설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가 기록하는 재액의 시간성은 더더욱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진보한 사회라 해도 재액의 가능성을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술 혁신이 이루어질수록 만에 하나 닥치는 재액이 한층 더 비참해진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말한 “문명 속의 불만”이 불식되는 일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야기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오로지 문명을 위협하는 재액의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167쪽)

그렇다면 코로나 창궐로 기존의 시간성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 이야기의 존재 의의가 더 빛을 발할 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후쿠시마는 2장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일본 이야기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대한 맹점”이 남음을 시사하며 중국 대륙을 무대로 삼는 3장을 예고합니다.

“일본의 이야기는 중국풍 ‘정사’의 여백에서 직조되어 왔다. 좋든 싫든 일본인은 여러 국가가 병렬된 «사기»같은 세계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는 일본에서는 문명의 소산을 구석구석 남김없이 기술해 후세에 건네려는 의지가 희박했음을 의미한다. 재액과 운명을 미리 알아차리는 일본의 문학적 예민함은 중국풍 ‘종합적 인간학’의 모태가 될 수 없었다.” (168쪽)

3장 <멸망이 만들어 낸 문화>

A 복고와 부흥

후쿠시마 료타는 «부흥 문화론» 2장을 “일본 부흥 문화사의 거대한 ‘사각’”의 존재를 시사하며 끝맺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사각은 일본 문학이 멸망 체험의 당사자(1인칭)로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듣는 이’의 입장을 견지하는 2인칭 스타일에서 발아했다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3장 <멸망이 만들어 낸 문화>는 숱한 멸망 체험을 통해 ‘섬나라’ 일본과 대조적으로 ‘품이 너른’ 문학적 토양을 일궈 낸 중국 문화의 탐색을 통해 이 사각에 접근합니다. 특히 전반부인 A편에서 중국의 부흥 문화가로서 호명되는 것은 춘추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 공자입니다.

지나간 시대의 국가인 은나라와 주나라를 마음에 둔 채, 정치적 혼란에 빠진 조국 노나라를 버리고 ‘사상의 구매자’를 찾아 떠돈 망명자 공자의 사상은 저잣거리의 평판부터 굶주림, 정적의 습격에 이르는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가다듬어졌습니다. 이 사실이 그의 언어에 독특한 긴장을 부여하기도 했고요.

“자신의 사상을 다른 나라의 담론 시장에 팔아넘기기를 택한 공자의 운명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망명 중에 공자가 받은 갖가지 치욕은 고대의 중국인에게도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사기»에는 정나라에서 제자들을 놓친 공자가 정나라 사람에게 “누추하기가 상갓집 개와 같소”라는 험담을 듣고도 그것을 흔연히 웃으며 받아들였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지나가는 사람이 공자를 비방하고 중상 모략하며 싫은 기색을 드러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장저와 걸닉 같은 은자, 혹은 삼태기를 짊어진 이름 없는 노인, 나아가 초나라의 광인 은자 접여가 길에서 공자와 그 제자를 우연히 만나 은근슬쩍 비판하거나 풍유적인 메시지를 보낸 것이 «논어»와 «사기»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공자는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쳐 논쟁한 적은 없지만(상대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길거리에 떠도는 자신의 평판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그때마다 반성의 재료로 삼거나 분개하곤 했다.” (180쪽)

이런 사상의 환경은 ‘관조’를 통해 “이해 득실을 떠난 앎 그 자체”에 다가가려 했던 그리스 철학과는 상반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조를 위한 여유를 확보해 주는 노예제와 시민 간의 논쟁을 가능하게 해 주는 폴리스의 존재 없이 그리스 철학은 성립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라는 망명자, 즉 국가 상실자의 철학은 길거리에서 이따금 나타났다 사라지는 빈정거리는 인간들과의 비관계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 기묘한 무대 설정은 고유명을 가진 인간 동료가 상호 소통의 관습에 따라 직접 대면해 논쟁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대화편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있다. 폴리스의 주민인 소크라테스의 논의 방식이 논쟁 상대에게도 승인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길거리의 장저나 걸닉, 광접여는 처음부터 공자와 같은 싸움판에 서려 하지 않았다. 도시 국가에 있을 수 없게 된 정치적 망명자 공자에게 그 사상의 시험장은 대면이 보증된 폴리스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끼리의 ‘엇갈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길거리였다.” (180~181쪽)

생명의 안전뿐 아니라 국가의 존립 자체가 수시로 흔들리는 시대의 사상가였던 공자에게는 “앎 그 자체”, 형이상학 사고가 사상적 과제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하, 은, 주라는 옛 문명의 ‘도’를 어떻게 당대에 ‘부흥’시킬 것인가가 그에게는 더 긴요한 과제였습니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동양은 철학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옆에 있다. 왜냐하면 동양인은 사유를 하더라도 ‘존재’를 사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라고 평한 것은 일단 옳다. 하지만 동양이 존재에 대한 사유를 키우지 않고 “철학의 옆”에 머문 까닭은 중국인에게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과는 별개로 더 긴요한 “사유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상가 모두 생존의 위기에 처했을 때 공자는 끝까지 일상 생활에 예를 심으려 했지 플라톤처럼 천상의 영원한 이데아를 갈망하지는 않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처럼 존재자 그 자체의 근거들에 관해 말하지도 않았다. 생명의 안전권이 주어지지 않으면 “‘존재’의 사유” 같은 것도 존재할 수 없다.” (187쪽)

이 부흥을 위해 공자는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전할 뿐 짓지 않는다)의 원칙에 따라 과거 왕조에서 ‘취사 선택한=편집한 전통’으로 예악 제도를 다듬어 갔습니다. 후쿠시마는 이런 공자를 “소통과 학습의 물질적 기반”을 닦으려 한 “편집자적 재능”의 소지자로서 적극적으로 평가합니다.

“이처럼 공자가 추상적 관념을 다루는 형이상학자이기보다는 소통과 학습의 물질적 기반을 정리하려 한 설계자였다는 점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일찍이 요시카와 고지로가 서술한 것처럼 지상의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는, 나중의 주자학까지 포함해,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수준(기)을 방기하지 않았다. 중국을 신비한 ‘정신 문명’이라고 하는 견해는 속설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구체적 감각을 중시한 ‘물질 문명’이라고 형용하는 편이 실정에 부합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190쪽)

춘추전국 시대는 대도시화가 진행된 번영의 시대기도 했답니다. 플라톤의 «법률»이 제시한 적절한 도시 국가의 규모가 “5,040명”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도시 인구가 50만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던 고대 중국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사상의 존재 방식에도 반영되었고요.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봐도 춘추전국 시대에는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일부에서는 대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제나라의 수도였던 임치의 전성기 인구는 놀랍게도 50만이 넘었다고 한다. «사기»에는 다양한 직종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회적 분업도 당연히 이에 상응하는 수의 주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실현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도시 국가는 이미 문화의 다양성과 기술의 전승이 가능한 인구 규모를 갖춘 상태였다. 플라톤의 «법률»이 전쟁과 계약, 상거래, 징세가 가능한 도시 국가에 최적화된 가구 수로 “5,040”이라는 수를 되풀이해 강조했음을 상기해 보면 고대 중국의 거대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3~194쪽)

일례로 «장자» 속 곤과 붕은 “인간의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엄청나게 거대한 힘”에 대한 고대 중국인의 의식을 드러냅니다. 또 공자는 역마보다 빠르게 인심에 전파되는 덕의 속도를 말했는데, 이런 힘과 속도의 동학에 대한 주목이 중국 철학에 서양 철학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활기를 가져왔습니다.

“<소요유> 편 서두에는 몇 천 리일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물고기 곤이 거대한 새인 붕으로 변신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더욱이 그 붕이 남쪽의 큰 바다 남명으로 비상할 때 바다가 삼천리나 파도치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솟구치자 구만리에 이르렀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이미지가 제시된다. 장자의 철학은 더 이상 인간의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엄청나게 거대한 힘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관’과 ‘명상’을 으뜸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적인 테오리아의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94~195쪽)

“민중이 유례없는 폭정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덕’은 굶주린 자가 먹을 것을 구하고 목마른 자가 마실 것을 구하듯이 확산된다. 그 속도는 “역마를 갈아타며” 명령을 전달하는 것보다도 빠르리라. 여기서 ‘덕’은 정치적인 명령 계통보다 재빨리 인심에 호소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맹자는 선진국이었던 제나라 사람 앞에서 덕의 통치술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보여 주는데, 이 대화가 드러내는 덕의 동적인 성격이 흥미롭다. 유교는 분명 과거 문명의 ‘부흥’을 지향했지만, 그것은 특별히 전통의 골동품적 가치를 애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속에서 힘과 속도를 인지했기 때문이다.” (195쪽)

기원전 3세기까지 이어진 춘추전국 시대에 원형이 구축된 중국 부흥 문화는 이후 중국사의 변천과 함께 성장해 갔습니다. 특히 10세기 이후 송나라의 출현과 함께 “멸망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이어지는 논의에서는 이 전환이 «수호전»이라는 이례적 작품의 분석을 중심으로 다뤄집니다.

“고대 중국은 국가의 멸망에 익숙한 망명자나 변론가 들이 유달리 빛을 발한 시대였다. 또한 이들의 사상이 파멸을 두려워해 숨어 버리는 퇴영적인 것이 아니며, 혼돈에 찬 다공질의 사회를 단숨에 관통하려는 힘과 속도를 감추고 있었음은 지금까지 확인한 그대로다. “수많은 멸망이 낳고 피멸망자에 의해 고안된 그들의 문화가 이른바 중국적 지혜를 얼마나 풍부하게 머금고 있는지 일본인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라고 말한 다케다 다이준의 통찰은 예리하다. 전국 시대가 일단 시황제에 의해 통일된 이후로도 국가의 멸망이라는 현실은 2,000년 이상에 걸쳐 끊임없이 중국을 엄습했다. 뒤집어 말하면 춘추전국 시대의 중국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끝없이 계속된 멸망 체험을 예습했던 것이다.” (199~200쪽)

B 유민 내셔널리즘

중국사의 마지막 대분열기로 평가되는 당나라 말기의 혼란은 10세기 송나라의 건국과 함께 해소되고, 과거제를 통해 확립된 엘리트적 지배 체제는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 ‘송학’으로 다시 부흥시키며 중국의 근세를 열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 멸망의 위협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전까지 한족 왕조 안에서 찬탈의 형태를 취했던 국가 멸망의 패턴이 송 이후에는 이민족의 위협에 따른 위기로 변하게 됩니다. 10세기 이후 중국사에서는 이민족 왕조인 요, 금, 원, 청의 존재가 두드러지는데, 때문에 ‘동양적 근세’를 ‘복수의 내셔널리즘’이 충돌한 시대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중국은 귀족과 무인 혹은 외척과 환관이 오만 방자해져 마침내 통치자의 지위를 찬탈한다는 패턴을 일관되게 반복했다. 그에 비해 중앙 집권화와 황제 독재가 진행된 근세 이후 중국의 최대 위협은 근린의 이민족 국가였다. 물론 중국의 한족 국가들이 고대 이래 오랫동안 흉노와 선비라는 외적의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근세 이전 이민족 정권은 대체로 단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0세기 이후에는 요, 금, 원 그리고 청 등의 이민족이 장기간 중국을 지배한 경우가 두드러진다. 한족 이외의 네이션(민족)이 중국 주변에서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한족 정권도 대등한 경쟁자와의 치열한 대항 관계에 말려들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뒤흔들린 ‘동양적 근세’를 미야자키는 복수의 내셔널리즘이 충돌한 시대로 파악한다.” (203쪽)

내셔널리즘의 각축은 애국주의적 국민 의식의 대두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송 멸망 후 신왕조에 대한 충성을 거부한 엘리트들은 ‘반체체 문인’인 유민 시인이 되어, 묵시록적 이미지를 자주 출현시키는 작풍을 통해 초월적 네이션으로서 한족 유민사를 상상하곤 했습니다.

“앎과 정치가 강하게 결합된 송은 중세의 야만을 극복한 합리주의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민족에 의해 몇 번이나 한족 왕조가 정복된 ‘동양적 근세’는 앎이 강제적으로 정치로부터 분리되고 그 부조리에서 유래한 원한이 지식인의 내면에 쌓여 간 시대기도 하다. 이 패배감은 유민이 애국주의적인 문학 활동을 향하게 했다.” (205쪽)

“멸망이 낳은 예술”은 시문에 한정되지 않고 시각 예술인 ‘문인화’의 영역을 개척하게 되는데, 후쿠시마는 여기서 표현된 “멸망의 비애”와 반체제성을 탁월하게 읽어 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문인화가 중 한 명인 예찬의 그림입니다.

ET6dMp4U0AAM65N

“원말 사대가의 한 명으로 이름 높은 화가이자 부호였던 예찬은 서화와 서책을 여기저기서 사 모으며 병적일 정도로 결벽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러한 기괴한 행동거지는 정치에서 소외된 데 대한 일종의 보상 행위와 같다. 예찬의 회화는 매우 살풍경하며 그 억제된 화면은 정숙의 공간을 연출한다. 보고 있으면 화가의 기벽에 가까운 청결함을 상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문인 산수화는 서예적 ‘선’에 기초한 예술이었고, 문인들은 소위 ‘준법’을 능숙히 이용하면서 대지의 습곡과 암석의 양감을 평면적인 화면에 재현하려 했는데, 이렇듯 기풍이 뛰어난 풍류에는 일종의 저항 의지가 잠복해 있었다.” (207~208쪽)

강인한 저항 의지는 종종 표현적 파격으로 이어져 ‘기기괴괴’를 거리끼지 않는 괴짜의 계보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기상奇想으로 불리는 이러한 예술 흐름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 문화 예술에도 깊이 침투했다 하고요(중국 내셔널리즘이 일본에 ‘이식’된 양상은 4장에서 다시 다뤄집니다).

그리고 조국의 멸망을 마주해 예술가들이 만들어 낸 파열음을 배경으로 16세기 중반 «수호전»이 출현합니다. 보통 부흥 문화가 멸망의 흔적을 ‘메우는’ 경향을 갖는다면 멸망의 예감 속에서 불온한 ‘힘’을 뽑아내는 길을 택한 이 소설을 후쿠시마는 “파천황적”, “괴물적” 같은 말로 수식합니다.

“귀족도 평민도 없는 잡탕은 정연한 질서로 도저히 수습되지 않아 자주 착란적인 상상력을 분출시켜야만 했다. 그 결과 문학 작품은 때로 근세적 네이션을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괴짜적인 것으로 새롭게 포착했다. 네이션의 이미지를 자기 해체로 이끌지도 모를 괴물 같은 소설, 그것이 바로 당시의 전위적인 문체였던 백화로 쓰인 «수호전»이다.” (212~213쪽)

사실 «수호전»은 오늘날 기준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도 많이 함유한 소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양산박이라는 호모소셜한 결속 바깥의 존재인 여성에 대한 혐오적 묘사입니다. 반교운, 반금련 등의 요부는 악의 연원으로 그려지며 하나같이 잔인한 처형으로 최후를 맞습니다.

“«수호전»에서 여자는 대체로 악의 연원이고, 따라서 노파들도 마지막에 이르러 경을 친다는 점에서 음부들과 다르지 않다. «수호전»은 남자(호걸)끼리의 동성사회적 결속이 승리하는 구도를 취하기 때문에 여자는 기본적으로 훼방꾼이다.” (216쪽)

그러나 남성 이상의 지혜를 갖고서 쉴 새 없이 떠들고 범죄를 조장하는 ‘나쁜 매개’인 여성들은 고스란히 «수호전»의 서사적 동력을 이루며, 나아가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문학 작품에서보다도 활기 넘치는 개성을 부여받게 됩니다.

“«수호전»의 지은이는 노골적으로 여성 혐오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명백히 그녀들의 부정이 유발하는 소란을 즐기고 있으며, 음부와 노파에게 남자를 능가하는 지혜와 언어를 넉넉히 부여한다. 여성 혐오를 전혀 감추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동서고금 어떤 문학 작품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활기차게 여성을 그려 낼 수 있었다.” (216쪽)

또 «수호전»의 거침없는 폭력성은 근대 중국 지식인(루쉰의 동생이기도 한 저우쭤런 등)들에게도 경계를 샀다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폭력성은 쾌활한 유머와 결합해 작품에 축제적 에너지를 충전합니다. 도시로 호송된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군중 틈에 잠입한 호걸들의 활극은 읽는 이에게 원형적인 쾌감을 선사합니다.

“호걸을 벌하는 도시의 형장도 카니발적 구경거리의 일종으로 연출된다. «수호전» 애독자라면 호걸들이 형장에 뛰어들어 처형 직전에 동료를 구출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 형장은 피를 보고 싶어 하는 구경꾼으로 들끓고 있다. 길에 잠복한 호걸들은 피비린내 나는 오락을 찾는 민중의 카니발적 소란스러움 속으로 녹아들고 그 수상한 시끌벅적함을 틈타 관군을 기습하고 동료를 구출한다(예를 들어 40회에서는 송강과 대종이 처형되는 날 1,000명 이상의 구경꾼이 모여들고, 그 소란에 편승해 걸인과 약장수로 분장한 호걸들이 마음껏 날뛴다). 도시의 카니발은 호걸과 민중을 밀착시켜 작중에서 가장 화려한 위법 행위를 불러들인다. 때로는 숲의 어두움을, 또 때로는 축제의 밝음을 동반하는 «수호전»의 범죄적 공간은 말하자면 유쾌하기 짝이 없는 지옥을 가리키고 있다.” (226~227쪽)

이런 활극은 드넓은 중국 대륙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펼쳐집니다. 리얼리티의 측면에서는 황당무계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설정이 빈번히 출현하지만, 이는 반대로 그런 황당무계로 치닫는 축제적 에너지가 “중국 대륙을 활주하는” ‘네이션’의 상상력을 낳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수호전»은 시민 사회의 실용주의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호송 관리, 카니발 관객, 한가한 사람)을 기점으로 예기치 않은 악행을 발생시키고, 그로써 중국이라는 광대한 네이션을 일종의 ‘범죄적 공간’으로 결합시킨다. 역으로 이는 온건한 시민적 양식으로는 중국 국토 전체를 온통 뒤덮는 ‘상상된 공동체’의 에너지가 도저히 생길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227쪽)

한편 후쿠시마는 «수호전»을 다루면서 자주 바흐친의 라블레론을 참조합니다. 바흐친은 르네상스기의 풍자 작가였던 라블레의 웃음에서 근대에는 사라진 어떤 긍정성을 발견했는데요. 후쿠시마는 «수호전»의 웃음 역시 마찬가지의 긍정성을 가졌다며 이를 현대 일본의 음습한 웃음에 대비시킵니다.

“바흐친이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부정적인 웃음밖에 모르는 근대의 풍자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웃음을 내포한 라블레의 카니발을 엄밀하게 구별한 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현대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축제’—특히 인터넷상의 그것—의 웃음은 울적한 감정을 투사할 표적을 찾아 매달아 놓은 부정적이고 원한적인 웃음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라블레의 웃음은 그러한 음습한 부정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라블레 웃음의 부정성은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222쪽)

이 같은 후쿠시마의 해석을 통해 «수호전»은 “시민 사회에 대한 불신임과 대지에 대한 신임”이라는 중국 문학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시한 카니발적 작품, 사회를 강조한 서구의 노블novel과 달리 운명과 대지를 부각하는 또 다른 문학적 “생물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세계의 덮개를 거두고 대지에 뿌리내린 인간의 생생한 신체를 폭로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은 그야말로 카니발적 범죄의 소산이었다. 요컨대 «수호전»은 시민 사회에 대한 불신임과 대지에 대한 신임이라는 중국 문학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시한 것이고, 이 프로그램은 20세기 들어서도 루쉰의 «새로 쓴 옛날이야기»부터 모옌과 위화 등의 마술적 리얼리즘 계통 작품에 이르도록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 동아시아 문학은 ‘운명’과 ‘대지’를 부각하는 데는 굉장한 솜씨를 발휘했지만 ‘사회’에는 그만큼 정열적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결함은 아니다. 문학 진화의 계통수에 있는 노블에는 속하지 않는 생물종이 존재한다는 것, 이는 세계의 다양성을 증명하는 더없이 기쁜 사실 아니겠는가?” (232~233쪽)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