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의 철학» 2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5장 <가족>

1부에서 관광객의 철학의 윤곽을 제시한 지은이는 2부에서 새로운 주체에게 필요한 ‘정체성’의 문제를 다룹니다. 글로벌리즘에는 개인이라는 정체성이, 내셔널리즘에는 국가(공동체)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과거 공산주의는 개인도 국가도 아닌 제3의 정체성으로 계급을 제시한 바 있고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연대란 동원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취미 동아리”처럼 해산하기도 쉬워 정치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지은이는 말합니다. 말하자면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론 등은 이렇다 할 정체성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약점이라는 관점입니다.

설혹 미완성이더라도 이 책에 관광객의 철학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에 관한 논의를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관광객의 철학은 다중이라는 기묘한 개념에 ‘우편적’ 같은 말을 덧붙였을 뿐인 말장난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11쪽

지은이는 “개인도 국가도 아니면서 자유 의지로 변경할 수 없고 정치적 연대에 활용할 수 있는 확장성을 갖춘 개념”으로 뜻밖에도 ‘가족’을 말합니다. 개인과 국가에 각각 뿌리를 둔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을 동시에 비판하기 위한 발판으로 가족을 재발견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가부장제나 혈연주의와 결부되는 전통적 가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족을 재구축 혹은 탈구축해 보수 이데올로기로부터 개념을 되찾아 올(중립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가족은 원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개념이다. 보수든 진보든 대개 가족이 있다. 그럼에도 ‘가족’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 특정 이데올로기에 속한 듯 보이는 것이 문제다. 이런 왜곡된 상황은 진보 진영이 처한 곤경을 상징한다. 일본의 진보 진영은 이 말을 되찾아 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아무튼 가족의 소중함 같은 말을 하는 사람치고 괜찮은 사람은 없다고 오늘날 좌익과 지식인은 상식처럼 여기고 있다. 이에 공감하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214~215쪽

가족이 쉽게 해산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은 대개 가족의 부정성과 연관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비판이 종종 ‘대안 가족’에 대한 상상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데서 알 수 있듯 우리 안에 ‘가족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뿌리 깊게 새겨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 이용하자는 발상입니다.

1부에서 ‘관광객의 철학’은 ‘개인-가족-시민-국민’의 경로를 전제하는 헤겔 패러다임의 성숙 서사를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을 다시 말하는 것은, 이미 시장과 국가에 포섭된 가족 개념을 “더 높은 차원에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가라타니의 말을 빌려 가족 자체가 아니라 가족을 ‘더 높은 차원에서 회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가족에 천착하는 것은 결코 사유의 후퇴가 아니다. 가족의 철학이라는 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자거나 아이를 낳자거나 형제자매끼리 사이 좋게 지내자는 식의 도덕적이고 따분한 논의를 상상한 독자가 있다면 그것이 오해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221쪽

가족 개념이 정치적 정체성으로 큰 가능성을 갖는 이유를 지은이는 세 가지 듭니다. 첫째는 (이미 언급했듯) 강제성입니다. 특히 그 강제성이 합리성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강한 감정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선택의 여지 없이 가입당해 쉽사리 벗어날 수도 없는 가족에 고통받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가족이라 느끼는 이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음도 택할 수 있는 게 인간이라는 점에서 가족은 정치의 강력한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이유는 가족의 우연성입니다. 특히 부모 입장에서 자신의 아이가 ‘이’ 아이여야 했을 필연성은 없습니다. 혈연주의는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우연성을 보완하고 은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가족이게 하는 본질적인 요인은 오히려 우연한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연민의 감정이라고 지은이는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셋째 이유인 (감정에 기반한) 확장성이 결합했을 때 지은이의 구상이 선명해집니다.

연민 혹은 애정의 감정은 한번 형성되면 쉽게 사라지지도 않고 개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강하게 묶는 효과를 갖습니다. 보통 사회과학에서는 가족의 틀이 성과 생식, 거주와 재산 등으로 규정된다고 보지만, 가족의 경계는 이와 같은 감정에 의해 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족 개념은 친밀성의 감각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우에노는 가족애가 환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환상을 우리가 계속 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두 개념을 분리하기 힘들다는 것을 증명한다). 누가 가족이고 누가 가족이 아닌지는 때때로 사적인 애정에 따라 정해진다. 그런 점에서 가족의 성원권은 국가의 성원권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 물론 가족이 항상 사적인 애정만으로 확장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애정은 때때로 원칙이나 절차를 뛰어넘는다. 229쪽

애정은 원칙이나 절차를 넘어 가족을 확장하거나 형성하곤 합니다. 때로는 종의 벽도 뛰어넘어 가족을 만듭니다(반려동물 같은). 이렇듯 가족 개념을 유연하고 확장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지은이가 말하는 개념의 중립화라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어지는 6장과 7장은 이렇게 얼개가 제시된 ‘가족의 철학’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힌트를 보여 줍니다. 1부와 달리 각 장이 긴밀히 맞물리기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발상이 많고 문학 비평의 성격이 짙어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해요.

6장 <섬뜩함>

이 장은 ‘사이버 스페이스’ 개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정보 사회와 관광객적(가족적) 주체의 관계를 고찰합니다. 특히 SF의 두 거장인 윌리엄 깁슨과 필립 K. 딕을 정보 기술과 관련해 대립되는 세계관을 그린 작가로 독해하는 시각에 눈길이 가는 장입니다.

1부에서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은이 아즈마 히로키는 경력 내내 정보 사회론에 관심을 두어 왔습니다. 특히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원래 이 책은 더 포괄적인 정보 사회론 기획의 ‘미학편’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정보 기술의 철학적 함의가 무엇인지를 논하려 했던 이 기획은 이론편, 기술편과 함께 한 권의 책을 이룰 예정이었으나 완료되지 못했고 각 편의 내용은 따로따로 단행본 혹은 논문으로 발표되었습니다. 6장은 기술편에 해당하는 논의를 ‘관광객의 철학’ 시점에서 업데이트한 것입니다.

1984년 «뉴로맨서»(윌리엄 깁슨)에서 처음 등장한 사이버 스페이스 개념은 현실과 가상으로 나뉜 세계 속에서 본체와 분신(아바타)으로 분열되는 주체를 묘사하는 작품들에 도입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분화된 세계와 주체 묘사는 지금도 정보 사회론에 대한 지배적 이미지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사이버 스페이스란 컴퓨터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하나의 ‘공간’(스페이스)으로 파악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이제는 고풍스러운 뉘앙스로 다가오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널리 보급되었으며 ‘전뇌 공간’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 표현이 널리 쓰이는 계기가 된 것 중 하나가 1984년 윌리엄 깁슨이 펴낸 소설 『뉴로맨서』다. 깁슨은 이 작품에서 네트워크 접속을 “몰입”jack in이라고 표현하고, 이를 통해 등장 인물의 의식이 물리적 신체에서 전자적 신체로 옮겨가는 것처럼 묘사했다. 239쪽

지은이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출현을 SF 장르사의 맥락에서 살피며 이 새로운 공간space에 대한 상상이 현대 정보 사회에 대한 오해를 부추기는 면을 가지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간단히 말해 주체는 그렇게 쉽게 두 세계로 분열되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깁슨이 묘사한 세계는 본계정과 뒷계정이 명확히 구별되는 세계인 셈이다. 본계정은 현실의 내가 운영하고 뒷계정은 전자적인 분신이 운영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 ‘몰입’하는 것은 바로 뒷계정에 로그인하는 것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비유에 경도되었던 1990년대의 정보 사회론은 뒷계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식으로 긍정적이고 해방적인 측면만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는 주체의 분열을 꿈꾸는 우리 시대에 부합하는 담론이기도 했다. 255쪽

논의는 사이버 스페이스론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전개되며 흥미를 더해 갑니다. 70년대부터 이어진 SF 장르의 전개는 포스트모던화 그리고 미국 정보 산업의 급격한 진보와 병행하는 현상이었습니다. 이런 ‘진보’를 배경으로 발달한 정신 문화가 바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입니다.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기술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기술적 낙관주의, 창업가의 경쟁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신자유주의,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반체제 지향,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애국주의가 섞여 탄생한 매우 기이한 이데올로기다. 보수 지향과 진보 지향이 비판 없이 뒤섞여 있기에 해커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부정하지 않은 채로 반자본주의적인 이상을 나이브하게 논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탐욕스러울 정도의 부를 향한 욕망을 가진 채로 욕심 없는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오픈, 셰어, 프리 등 반자본주의적인 유행어를 만들어 낸 미국인 상당수가 억만장자인데 그들은 이런 모순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249쪽

지은이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배경을 분석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개념에 내재된 보수성(혹은 경제주의)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런 공간적 비유에 기반한 상상력이 아니라 ‘섬뜩함’의 감각에 기반한 상상력을 펼친 작가로서 (뉴웨이브로도 분류되는) 필립 K. 딕을 높이 평가합니다.

여기서 ‘섬뜩함’은 프로이트의 유명한 ‘운하임리히’unheimlich 개념을 번역한 것으로, ‘친근했던 대상이 갑자기 두렵고 낯선 대상으로 바뀌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지은이는 정보 기술의 진정한 함의는 개척할 신세계가 아니라 섬뜩함의 체험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정보 기술이 개방한 네트워크의 세계를 유토피아로 상상하는 한 악몽적 현실(예컨대 혐오 발언과 가짜 뉴스의 범람)에 대처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정보 사회의 태동기에 그 부정성을 간파했던 필립 K. 딕의 작품에서 사이버 스페이스론과 다른 정보 사회론의 실마리를 찾는 이유입니다.

나는 딕 소설의 이와 같은 특징이 새로운 정보 사회론을 구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등장 인물은 현실에서 분신을 만들어 사이버 스페이스=다른 세계로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섬뜩한 것에 시달리다가 현실과 사이버 스페이스=다른 세계의 경계 감각을 잃게 된다. 즉 깁슨이 현실인 여기와 사이버 스페이스인 저기가 명확히 구분된 세계를 묘사한 반면, 딕은 여기와 저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이 현대 사회의 본질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는 딕을 이렇게 읽어 냄으로써 네트워크를 새 프런티어=다른 세계로 여기지 않는, 진정 새로운 정보 사회론의 기초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254쪽

딕은 감시 사회를 예견하는 등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도 유명합니다. 예컨대 1974년작 «발리스»의 주인공은 현실에서의 실패로 망상에 빠져 이중 인격(분신)을 갖게 된 인물입니다. 이 소설 전체는 그의 악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악몽에 끝을 고하는 존재는 아이의 모습을 한 신의 대변자 소피아입니다. 지은이는 이 인물이 바로 섬뜩함을 구현하고 있다고 해석하며, 정보 사회의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한 원리(‘분신에서 섬뜩함으로’)를 이 섬뜩함의 감각으로부터 구축하려 합니다.

지은이의 구상은 작품 분석만이 아니라 정신분석 이론의 재구성을 경유해 점점 더 밀도를 높여 갑니다. 포스트모던 정보 혁명기에 다시 돌아온 ‘거대 담론’이 사이버 스페이스론이며, 관광객의 철학은 거대 담론의 쇠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정보 사회론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보 사회론, 정신분석, SF 장르를 가로지르는 이와 같은 역사를 조망하면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개념이 거대 담론이 사라진 세계에서 그 결여를 메우는 ‘새로운 거대 담론’으로 역할해 왔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말을 살던 사람들은 현실 세계가 급격히 포스트모던화해 ‘이제 누구도 예전처럼 큰 꿈(우주나 미래를 믿는 꿈)을 갖지 못하게 됐지만 유일하게 사이버 스페이스에는 꿈이 남아 있다’는 식으로 믿으려 했다. 이 환상은 여전하다. 정보 사회론 분야에서는 가까운 미래에 ‘특이점’singularity이 도래한다거나 새로운 기술의 힘으로 인간의 모습과 사회 형태가 근본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20세기는커녕 19세기 공상적 사회주의자나 믿었을 법한 ‘거대 담론’이 여전히 통용된다. 264쪽

지은이가 2부를 시작하며 말했듯 이 논의는 시론적 성격이 짙습니다. 후문에 따르면 지은이는 이 6장과 ‘관광객의 철학’의 연결고리를 보완한 «관광객의 철학» 증보판을 계획하고 있다고도 하고요. 아직 쓰이지 않은 연결고리를 각자 상상해 보는 것도 숨은 재미 아닐까요.

7장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주체>

<관광객의 철학>은 현대 세계가 봉착한 문제 하나로 테러리즘을 듭니다. 멀게는 분쟁 지역에서 벌어지는 테러 활동부터 가깝게는 각종 혐오 범죄까지가 이에 포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7장은 테러의 시대를 넘어설 길을 도스토옙스키 문학 독해를 경유해 모색합니다.

왜 도스토옙스키인가? 지금이 테러의 시대기 때문이다. 1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관광객의 시대는 테러리스트의 시대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이 테러리스트를 다루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신앙과 정의를 잃은 시대에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만을 고민했던 소설가다. 273쪽

그 자신 내란음모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사면으로 살아남은 도스토옙스키는 평생에 걸쳐 테러리스트(혹은 테러리즘에 다가간 인물)를 그린 작가입니다. 또한 테러리스트의 내면에서 출발해 구원에 이르는 도정을 그린 작가기도 합니다.

1864년에 발표한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인생에 실패한 남자(요즘 말로 루저남)의 굴절된 심리를 우울하게 적어 간 소설이다. 1866년의 『죄와 벌』은 노파 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상한 이론을 끝없이 늘어놓는 젊은이의 이야기다. 이들은 세상을 향해 부조리한 분노를 터트리며 안온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묘사에서 현대 미국이나 유럽의, 조직도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자생적 테러리스트의 심리를 바로 연상할 수 있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만약 속편이 쓰였다면 테러리스트를 주인공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스토옙스키는 죽을 때까지 테러리스트를 묘사했다. 274쪽

이 장은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전개를 따라가며 그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변증법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즉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악령』으로 이어지는 전개 속에서 이상주의자가 지하 생활자로 변신하고, 급기야는 테러리스트로 변신하게 되는 논리를 살피게 됩니다.

지은이는 『지하 생활자의 수기』가 동시대에 발표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가진다고 말합니다. 풍요로운 미래를 공상하며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청년들을 그린 이 작품을 논박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런던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고, 1장에서 보았듯 대중 관광객과 아케이드 산책자들이 등장했습니다. 박람회 건물인 ‘수정궁’은 도래할 이상 사회를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정궁은 1851년 런던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때 건설된 거대한 유리 건축물의 이름이다. 체르니솁스키는 이 수정궁의 이미지를 미래 사회의 풍요에 대한 상징으로 활용했다. 그는 벨라의 꿈을 모두가 유리 건축물에 거주하며 노동에서 해방되어 풍요롭게 살아가는 미래 사회로 묘사한다. 280쪽

즉 수정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기술과 소비가 이상 사회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유토피아론의 상징이었다. ‘지하 생활자’는 이 이상에 침을 뱉는다. 281쪽

6장에서 다뤘던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의 미래상, IT와 쇼핑몰이 실현할 이상 사회는 현대의 수정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지하 생활자가 수정궁에 침을 뱉었듯 오늘의 테러리스트는 글로벌리즘이 제시하는 유토피아상을 저주합니다.

1871년 발표된 『악령』은 지하 생활자를 방불케 하는 인물들을 조종해 목적 없는 테러 활동을 벌이는 초인 스타브로긴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는 신념도 동기도 없는 허무주의적 사디스트인 그가 ‘지하 생활자’에서 이행한 인물이라는 설정을 부여했습니다.

사회주의자에서 지하 생활자로, 그리고 초인으로. 유토피아주의자에서 테러리스트로, 그리고 허무주의적인 엘리트로. 사회 개혁의 이상에 불타던 인간이 과격파 운동가를 거쳐 어느새 허무주의자가 되고 마는 이 희비극을 지금의 일본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 문학은 누구나 아는 이 심리의 변증법을 어떤 철학서보다 치밀하게 묘사해 냈다. 295쪽

『악령』 이후 도스토옙스키는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미성년』을 발표한 후 마지막이자 미완의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남기고 타계했습니다. 즉 그의 변증법은 일견 스타브로긴에서 멈춘 듯이도 보입니다. 7장 후반부는 쓰이지 못한 변증법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추론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지은이는 몇 가지 기존 도스토옙스키 연구를 참고하는데, 주요하게는 가메야마 이쿠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편을 공상하다』에서 제시한 가상(!)의 후속작 『카라마조프가의 아이들』이 논의의 중심이 됩니다.

얼핏 작가가 쓰지도 않은 속편을 논한다는 게 얼핏 이상하기도 하지만, 앞서 추출한 변증법적 구조, 현존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복선 등을 종합하며 전개하는 추론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추리극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이 추론 속에서 드러나는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주체’가 어떻게 관광객=가족적 주체와 만나는지, 지금까지의 테마를 어떻게 통합하는지는 생략하려 합니다. 소개는 맛보기 인용문으로 마치니, 이제 직접 이 ‘관광객의 길’을 걷고 그 끝의 진한 감흥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체르니솁스키의 위선을 극복하고 지하 생활자가 빠진 쾌락의 덫을 피한 다음, 어떻게 스타브로긴의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불능적 아버지가 됨으로써’라고 답하겠다. 자유주의의 위선을 극복하고 내셔널리즘이 주는 쾌락의 덫을 피한 다음, 글로벌리즘의 허무주의에서 벗어나 우리는 최종적으로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불능적 주체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관광객적 주체다. 309쪽

아이로 죽는 데 그치지 말고 부모로서도 살아가라. 2부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한마디로 이것이다. 물론 여기서 부모는 생물학적 부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징적 또는 문화적 부모도 존재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런 부모가 내가 말하는 부모 개념에 가깝다. 왜냐하면 부모가 된다는 것은 오배를 일으킨다는 것이고 우연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가능한 한 많은 우연의 아이를 만들어 미래의 철학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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