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의 철학» 디자인 후기

원고지 1200매라는 분량을 듣고 이 책의 판형은 128×200으로 해야겠다 싶었다. 리시올/플레이타임에서 펴낸 책들의 판형은 세 종류(122×190, 128×200, 138×210)다. 190부터 세로가 10mm씩 늘어난 세 가지 판형이다. 꼭 10mm씩 간격을 두자고 결심한 건 아니었고, 얇고 가벼운 책들을 먼저 내고 점차 무게 있는 책들도 출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렇게 정했다. 각각의 판형 모두 많이 고민한 뒤 결정했고 판형만으로도 여전히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새여서, 앞으로의 책들도 대부분 이 세 판형을 기준으로 삼게 될 것 같다. «관광객의 철학»은 적당한 분량의 인문서이므로 둘째 크기의 판형인 128×200으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관광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이 책의 출간이 가시화되었을 때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됐는데, 관광이 더 이상 일상적인 선택지가 될 수 없는 시기에 이 책을 펴내게 된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했고 오히려 기회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고를 읽어 보니 관광 자체를 다룬 책보다는 관광객이라는 형상을 강조한 철학책에 가까웠다. 루소와 볼테르, 슈미트와 아렌트, 네그리와 로티 등 철학자들 사유의 특징을 아주 쉽게 설명하면서 논의를 발전시키는데, 관심은 늘 있었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철학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큰 재미를 느꼈다(그리고 설명을 정말 쉬운 언어로 잘해 준다). 아즈마 히로키는 책에서 관광객론이란 결국 다르게 표현한 타자론이라고 말하는데, 이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현재 상황에 아주 잘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관광객이라는 형상, 타자를 이야기하는 철학책이라니, 책 자체가 엄청 흥미진진한 것과는 별개로 표지 디자인하기엔 무척 까다롭겠다고 느꼈다.

이 책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가 ‘오배’다. 오배는 잘못 발송된 우편을 뜻하는 말로 이 세계의 우연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기왕에 제목이 ‘관광객의 철학’이니 진짜 관광지 모습들로 표지를 채우자고 마음먹었고, 오배 개념에 착안해 약간의 우연성이나 어긋남을 표현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관광객의 철학» 원서 표지 하단에는 사진과 일러스트 등이 어우러지지 않은 채로 나열되어 있는데 이 모습에서 힌트를 얻기도 했다. 우리 편집자는 «관광객의 철학» 표지가 기존 리시올/플레이타임 책들의 간결하고 도형적인 느낌과 많이 달라도 좋을 것 같다면서 사진으로 전체를 뒤덮은 표지면 어떻겠냐고 얘기하기도 했는데 그 의견도 크게 작용했다(우리 책 디자인에는 늘 편집자의 의견이 아주 많이 반영되어 있고, 편집자와의 협업이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점점 강하게 확신하게 된다).

«관광객의 철학» 한국어판 표지와 원서 표지

이런 식으로 전체적인 방향을 결정하긴 했지만 완성된 모습을 미리 구상하거나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실사 이미지들을 사용하되 오브젝트들의 배치를 통해 자연스러우면서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전제를 가지고, 여러 관광지의 모습이 빈 표지 위에서 단지 우연히 만나게 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러다 보니 중간중간 이게 맞는 건지 혹은 이래도 되는 건지 걱정이 일기도 했는데, 이런 시도가 가져올 오배의 우연성을 믿어 보자는 마음으로 (약간은) 대담하게 작업을 이어 나갔고, 리시올/플레이타임 역사상(!) 가장 화려한 표지가 나왔다(>ㅁ<).

앞표지가 이미지들로 와글와글하게 채워진 상태에서 책등이나 뒤표지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도 고민이 됐는데, 앞표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꾸미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하얀 배경에 이미지를 전혀 넣지 않고 최소한의 텍스트만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이렇게 기존과는 꽤나 다른 구성과 과정으로 «관광객의 철학» 표지 디자인을 작업했고 결과물도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게 나왔다. 앞표지뿐 아니라 책등과 뒤표지도, 그리고 각각의 면들이 만나는 부분도 무척 사랑스럽다(개인적으로 뿌듯한 건 제목을 곡선으로 배치하기로 한 아이디어다). 책이 어딘가에 놓여 화사한 앞표지와 하얀 책등이 함께 보일 때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어판 표지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저자를 만나면 기분이 무척 좋은데, 아즈마 히로키도 한국어판 표지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외 표지에 관해 좋은 반응을 보여 준 몇몇 독자들의 말도 늘 기억에 남는다. 책이 재밌다는 후기보다 표지가 마음에 든다는 후기가 더 좋아서는 안 되겠지만 늘 그러고 만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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