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출간한 조기현 선생님의 «커밍 업 쇼트» 독후감을 공유합니다. «커밍 업 쇼트»를 읽은 걸 계기로 지난날 다른 청년들을 만나 벽을 느낀 경험을 돌아보는 글이에요.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오늘날 청년의 단면들을 살짝 소묘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우리’라는 감각을 확보한 상태로 벽을 허물려면 우선 이 벽의 정체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한국에서도 노동 계급 청년들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방식이 급속해 변해 왔을 뿐 아니라 이들이 성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번 서평을 경유해 «커밍 업 쇼트»가 이 변화를 파악하는 첫 걸음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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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지만 우리가 되지 못하는 우리가 ‘우리’라는 감각을 지니려면
조기현
어떤 책은 소개만 읽으면 익숙한 얘기를 하겠구나 싶다. «커밍 업 쇼트»가 그렇다. 책은 신자유주의적 전환 속에서 나고 자란 미국 노동 계급 청년들의 성장, 친밀, 가족, 일, 존엄 등을 다룬다. 귀가 닳도록 들었던 N포 세대론이 떠오르기도 하고, 청년들이 타인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생존에만 몰두한다고 말할 것 같기도 하다. 청년에 대한 기존의 무수한 말들은 어떤 삶들의 단면이나 결과만 요약하고 전시한다. 청년들이 어떤 마음으로 연애, 인간 관계, 꿈, 희망 등과 멀어져 가는지, 어떤 감정으로 생존을 느끼고 받아들이는지 등은 잘 말해지지 않는다. «커밍 업 쇼트»는 잘 말해지지 않는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은 섣부르게 요약하기에는 방대한 삶을 깊게 다룬다. 지은이 제니퍼 M. 실바는 미국 노동 계급 청년 100명을 만났다. 무엇보다 그 100명은 수치화된 노동 계급 청년 세대 ‘인구’가 아니라 일일이 대면한 사람이다. 실바는 100명의 주관을 모아 신자유주의적 전환 속에서 불확실과 미래 없음을 견디는 감정의 구조를 생생하게 그려 낸다.
실바는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동시에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지난날 내가 실바처럼 적극적으로 이해와 비판을 개진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이제부터 내가 살면서 부딪혔던 네 가지 벽에 관해 써 보려고 한다. 같은 청년으로 분류됐지만, 세대라는 공통점 말고는 쉽사리 연결되지 못한 타인들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 사이에 왜 벽이 놓여 있는 것일까?
내가 벽을 느낀 이들과 «커밍 업 쇼트»를 함께 읽고 싶다. 실바가 미국 노동 계급 청년의 감정 양상과 사회적 조건을 엮어 가며 제시한 개념들(치료 서사, 무드 경제, 리스크의 사유화, 경계선 긋기, 경직된 자아 등)이 내가 느꼈던 벽을 허물고 그들과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벽 1. 청년과 ‘청년’
청년은 한동안 사회에서 호명하는 ‘청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학자금 대출을 받고 대학을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격증을 따고 취업을 준비하는 삶은 그가 살던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아홉 살 때부터 공장, 시설 관리, 예식장, 호텔, 주차장, 패스트푸드점, 노량진 학원가 촬영, 건설 일용직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다시 말해 열아홉 살 때부터 일을 쉬어 본 적이 없고, 스무 살 때부터는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부양과 돌봄 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소위 ‘청년’으로 호명되는 사회적 고통은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아니 도대체 부모님이 아프지도 않고, 대학도 나오고, 앉아서 준비만 하면 되는데 왜 힘들지? 여느 꼰대처럼 자동적으로 이 생각부터 들었다.
그에게 ‘일’이란 원래 부당한 것이고 몸이 부서질 듯 힘든 게 당연했다. 모욕적인 일상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임금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배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비전이 있는 건 없었고, 단지 돈을 조금 더 주는 일을 선택했다.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몸으로 배운 교훈이었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일’이란 미래의 안정을 가늠하는 척도였고, 자신의 위치를 결정짓는 표식이기도 했다. ‘청년’이 삶에 들인 노력과 그가 삶에 들인 노력은 다른 듯 보였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싫어도 꾸역꾸역 입시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마음을 그는 몰랐다. 통과만 하면 뭔가 될 것 같은 입구가 보이지만,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아무나 통과하지 못하는 입구 앞에서 절망을 반복하는 생활. 그는 사회가 호명하는 ‘청년’과 자신의 차이를 그런 생활에서 발견했다.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벽 2. 굵은 경계선
대학 방학 기간에는 건설 일용직도 경쟁이 붙는다. 대학생들이 친구끼리 모여 인력 사무소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오다가 줄어든다. 진짜 치열하다.
한 현장에서 같이 일했다가 다른 현장에서 다시 만나면 괜히 반갑다. 그렇게 인력 사무소에서 만나 친해진 몇몇 대학생이 있다. 그중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청년이 있었다. 점심 시간마다 다들 쪽잠을 잘 때 그와 나는 대화하느라 바빴다. 대개는 정치 예능인 <썰전>을 본 얘기나 팟캐스트를 듣는 얘기, 그가 학생 운동에 참여한 경험 등을 들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할 때 자신이 사회의 책임을 고민하는 ‘진보’인 줄 알았는데, 막상 졸업할 때가 되니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보수’가 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스스로 경직돼 가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나는 왜 경직되는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는 옆에서 박스를 깔고 잠들어 있는 아저씨들을 가리키며 답했다.
“이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요.”
그가 노가다 아저씨들을 가리키며 굵은 경계선을 그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벽 3. 창조적 에너지
그를 만난 건 청년들끼리 문화 생활을 즐기는 모임에서였다. 각자 자신이 즐기는 책이나 영화를 소개하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론다 번이라는 사람의 «시크릿»이라는 책을 탐독한다고 했다. 벌써 다섯 번쯤 읽었단다.
그는 그 책을 읽기 전에는 세상을 원망했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꾸준하게 일하지 못하고 자주 실직했다. 자신은 운동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구하기 쉬운 택배 상하차 알바도 못했다. 이런 인생이 계속 반복될 것 같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살 것 같아서 우울감에 몇 개월을 보냈다. 하지만 «시크릿»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느꼈다. 지금 상황도 잘 이겨 내면 나중에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책과 삶을 연동해 자신의 고통을 승화했다. 나는 그의 고통의 원인처럼 말해지는 가족사에 관심이 쏠렸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리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살피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이혼했고, 아버지가 아프면서 일을 못 했고, 내가 혼자 돈을 벌면서 돌보았다고 내 얘기를 전했다.
“기현 님도 내면에 창조적 에너지가 많으실 텐데, 발견하실 수 있기를 바라요!”
어쩐지 더 얘기를 이어 가기 민망했다. 왜 가족 이야기가 창조적 에너지로 귀결되는 걸까? 애초에 나는 가족 이야기를 나누는 게 우리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공유하고 말해지지 않는 고통을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족을 둘러싼 불안정한 상황이 왜 벌어지는지 말해 볼 새도 없이 가족 이야기는 치료 단계로 넘어가 버렸다. 가족 이야기는 하나의 공식 속에 있는 듯했다. 가족 → 불행 → 극복 → 창조적 에너지. 나는 창조적 에너지를 왜 발견해야 하냐고 되물었다.
“창조적 에너지가 있으면 어떤 역경도 견딜 수 있어요.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짚어 볼 수 있는 힘도 생기고요. 힘들지 않다는 건 아닌데 힘들어도 잘 이겨 낼 수 있는 거죠.”
벽 4. 세계를 축약해서 이해하기
오랫동안 취업을 하지 못하면 취업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어울릴 때 돈을 써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취업 준비와 회사 생활은 완전히 다른 생활 세계여서 서로 말이 통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취업 준비생은 하등한 존재로 평가받는다. 그럴수록 타인이나 세상과 연결되려 노력하기보다 빨리 취업자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얻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투여한다. 생활비는 빠듯하고 따야 할 자격증과 봐야 할 시험도 수두룩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취업과 관련 없이 오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독서를 하는 이들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어디 대학원 다니는 연구자나 운동하는 활동가가 아닌데도 그런 주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청년들을 마주한 적이 있다. 오랫동안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부족한 생계비를 쪼개서 교양이나 정치사회 분야 독서를 즐기는 이들이었다. 나도 생계비가 쪼들려도 그런 독서를 놓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렇게 몇몇 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들의 묘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세계를 설명해주는 가장 확실하고 명확한 답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았다. 우리의 대화는 늘 사회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파악하기보다, 한 정치인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거나 인간의 모든 걸 다 설명해 주는 빅 히스토리가 최고라고 말하는 식으로 끝맺어졌다.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빅 히스토리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그들이 정치인이나 빅 히스토리에 다다르는 논리가 꼭 신이라는 명확한 설명을 쥐고 있는 종교적 태도와 비슷해 보였다. 어쩐지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수위로 세계를 축약하는 것 같았다. 많고 많은 이해관계를 이해할 만하게 축약하는 걸 극우주의나 포퓰리즘이 가장 잘하지 않나? 나는 괜히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힘이 그쪽으로 향할까 봐 두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사람은 극우적인 유튜브 가짜 뉴스에 깊이 빠져들었다. 거기에 가치 판단을 하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방향은 아니었다. 그와 나는 함께할 수 있을까? 나는 우선 그가 이 세계에 품었던 믿음과 배신을 찬찬히 되짚어 보기로 했다.
벽을 허물 수 있는 비책
“이들은 구조에 뿌리를 둔 비슷한 문제들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우리’라는 감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고통을 명명하는 방식을 통한 집단적 정치화는 더 넓은 지배 구조에 포섭되기 쉽다. 왜냐하면 분투하고 있는 타자들을 같은 고통을 감내하는 동료가 아니라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261).
벽들을 허물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라는 감각을 지닐 수 있을까. 내가 느꼈던 벽이 생긴 원인은 무엇이며 벽을 허물 수 있는 비책은 또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커밍 업 쇼트»를 읽으니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있는지 이해하고, 그 감각을 만들어 내는 구조를 향한 비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겠다. 이해와 비판, 둘 중 하나만 비대해지면 벽은 허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벽을 느낀 이들과 함께 발맞춰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걷는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