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 업 쇼트» 디자인 후기

‘또 하나의 세대론이 추가되는 걸까, 그래 뭐 의미 있는 일이니까. 이 책은 청년들을 호되게 비판하려나 아니면 감정적으로 위로하려나?’
출력해 둔 원고를 읽으려 책상 앞에 앉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청년이라고 하기 애매한 나이 때문인지 요즘은 청년 관련 담론을 접하면 거기 등장하는 청년 세대 대부분이 나와 거리가 있다고 느낀다. 책의 주인공인 청년보다 청년들에 관해 진단을 내리고 있는 저자 세대에 더 가깝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니,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고, 나는 그사이에 끼어 있는 제삼자라고 둘러대며 내 앞가림이나 신경 쓰는 게 속 편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요즘 세대가 좀 그렇긴 해’,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삶이긴 하겠지’같이 남 얘기하듯 얄미운 목소리나 보태는 무신경한 관조자였다. 그런데 «커밍 업 쇼트»에서 만난 청년들은 생계에 노심초사하거나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가는 ‘노동 계급’이었고, 그런 탓인지 이들과 거리를 유지하거나 나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읽으면서 하나 둘 내 얘기인 것 같은 부분이 늘어났는데, 청년들이 가진 유일한 자원이자 리스크가 자기 자신이며, 또한 고통의 주범을 가족과 부모에서 찾고 거기에서 해방되려 애쓰며, 과거 중심의 치료 서사를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한다는 대목에 가서는 마음속으로 처절하게 울부짖고 말았다. 나를 고스란히 옮겨다 무자비하게 파헤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내적 상해를 입은(…) 상태로 한 사람의 청년,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작업자로서 디자인 작업에 들어갔다. «커밍 업 쇼트» 디자인 작업은 결국 다른 무언가가 아닌 나와 내 상태를 표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와 청년들을 포위한 무시무시하고도 공기처럼 가벼운 신자유주의, 불투명한 미래, 주기적으로 외적/내적 발목을 잡는 가족 관계, 삶의 암담함이 엄습할 때마다 느끼는 심적 불안과 갈등… 구조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우리의 상태를 표지에 담아 보자고 결심했고, 출구 없는 미로나 엉켜 버린 실타래 따위를 떠올리며 구상을 시작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 끝에 어린 시절 미술 시간에 배운 크레파스 스크래치가 떠올랐다. 스크래치 기법은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알록달록한 색깔을 칠하고 그 위를 검정색으로 가득 메워 덮은 뒤 날카로운 물체로 긁으면 알록달록한 밑색이 드러나는 걸 이용한 방법이다. 이 층위를 드러내는 방식이 실제 청년들의 발화를 토대로 구조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이 책과 의미상으로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표지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실제로 «커밍 업 쇼트» 표지를 보고 크레파스 스크래치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두우면서도 밝게 연출된 표지의 분위기만으로도 꽤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다. 종종 직접 쓴 손글씨를 표지에 활용할 때 그렇듯 표지 상단에 배치한 원제 부분 덕에 괜히 더 기분 좋기도 하고.

판형은 «관광객의 철학» 디자인 후기에서 얘기한 적 있는 128×200이다. 본문 용지는 우리가 좋아하는 백색 모조지로 결정했다(분량 문제로 120g 대신 100g 사용). 면지는 밝다고 하기엔 어두운, 어둡다고 하기엔 밝은 주황색으로 골랐다. 표지의 제목과 본문 장 제목에 사용한 서체는 언제부턴가 마음속으로 철 지난(?) 스타일로 분류했던 것인데 «커밍 업 쇼트»와는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약간은 과감하게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막상 써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우러져 서체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실감했고, 편견에 사로잡혀있던 것을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마지막으로 내지에서 자랑하고픈 부분은 고심해서 고른 쪽번호 서체다.^^

우리는 원제를 한글로 옮겨 적은 ‘커밍 업 쇼트’를 제목으로 정했다. (노력해도) 수준 미달에 머무른다는 ‘come up short’라는 숙어를 성인이 된다는 뜻의 ‘coming of age’와 대비시킨 이 제목을 번역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목만으로는 책의 주제나 대상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는 거였는데, 구상한 표지 컨셉마저 내용을 전달하고 있지 않아 독자들이 표지를 보고 어리둥절하거나 무관심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부제가 정보를 많이 담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사람이나 상황, 장소 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출간 후 얼마간 마음을 졸이며 반응을 살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 디자인 과정에서 활용한 스크래치 기법 등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디자인이 좋다고, 이 책의 문제 의식과 메시지에 어울린다고 느낀 독자가 있다면, 완성된 결과물 자체를 통해 우리의 구상이 (완전히 의식적이진 않더라도) 독자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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