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빅 실버

«살림 비용»의 첫 장 <빅 실버>를 공유합니다. 앞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 누구를 위해 쓸 건지에 관한 데버라 리비의 다짐을 엿볼 수 있는 챕터예요.

«살림 비용»은 길지 않은 열한 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중 특히 짤막한 이 장에서 리비는 묘하게도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자신이 목격한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요.

리비의 글로 전해진 이 일화는 «살림 비용» 전체의 무대를 설정하는 한편 몇몇 단어와 착상(폭풍과 보트, 빅 실버로 불리는 남성, 밝히지 않은 상처 등)은 반복되는 모티프로 활용되어 뒤에서도 거듭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장의 배치가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책을 읽어 갈수록 여기에 던져진 말들이 잔상처럼 남아 계속 곱씹게 돼요. 그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무척 강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특별한 장이 «살림 비용»이라는 책의 내부를 궁금해하고 상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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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실버

오슨 웰스가 일러 주었듯 해피 엔딩인지 아닌지는 어디서 이야기를 끊느냐에 달려 있다. 어느 해 1월 나는 콜롬비아에서 카리브 해안가의 바에 앉아 생선과 코코넛 라이스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내 옆자리엔 미국 남자가 앉아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문신을 새긴 40대 후반의 남자로 팔근육은 우락부락하고 상투 머리를 한 은발 사이로는 핀이 엿보였다. 남자는 젊은 영국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열아홉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는 좀 전까지 혼자 책을 읽으며 앉아 있다가 자기와 합석하겠느냐는 남자의 물음에 주저하며 망설인 끝에 결국 응한 참이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대화를 장악했다. 그러나 얼마 후 여자가 남자의 말을 끊었다.
여자가 꺼낸 이야기는 강렬하고 기묘해 관심을 붙들었다. 멕시코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나갔다 폭풍과 맞닥뜨린 이야기였다. 20분가량 잠영하다가 수면으로 올라와 보니 그새 폭풍이 들이닥쳐 있었다고 했다. 그는 거센 풍랑에 보트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두려웠다고 토로했다. 바닷속을 누비다 고개를 내밀었더니 날씨가 급변해 있더라는 요지의 이야기였고, 밝히지 않은 자기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는 몇 가지 단서를 흘리며(자기를 구조하러 와야 할 사람이 보트에 타고 있었다) 남자에게 이 사실을 암시했고, 자신이 폭풍을 연막 삼아 정작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상대가 알아차리는지 곁눈질로 재차 확인했다. 남자는 이야기에 별 흥미가 가지 않는지 무릎만 들썩이다가 기어이 여자가 식탁 한쪽에 치워 둔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남자가 말했다. “원래 말이 많은 편인가 봐요?”
여자는 돌길 중앙의 광장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시가와 축구 셔츠를 팔고 있는 두 10대 소년에게 눈을 돌리고는 손가락으로 머리칼 끝을 빗질하며 이 말을 곱씹었다. 남자는 여자보다 어지간히 나이가 많았고, 그런 그에게 이 세상이 남자인 그뿐 아니라 여자인 그의 세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전달하기란 만만찮은 일이었다. 합석을 제안함으로써 남자는 모험을 감수한 셈이었다. 어쨌거나 여자란 여자 딴의 삶과 성욕을 장착하고 오기 마련이니까. 남자는 미처 깨닫지 못한 거다. 여자가 스스로를 조연으로 치부해 가면서까지 남자인 그를 주연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여자인 그는 안정돼 보이던 경계를 뒤흔들고 사회적 위계 질서를 와해시키며 통상적인 관습에 등을 돌린 셈이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지금 토르티야 칩으로 떠먹고 있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다. 라임즙에 절인 날생선 요리 세비체였다. 단 영어 메뉴에는 ‘섹스비체’로 철자가 잘못 적혔다면서 남자는 이걸 시키면 사이드 메뉴로 콘돔이 나온다는 농담을 했다. 여자는 미소로 답했고, 그 순간 나는 그가 실제보다 용감해지려 애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혼자서 자유로이 여행할 줄 알고 늦은 저녁에 홀로 바에 앉아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 모르는 이와 지나치게 복잡한 대화를 시도하거나 그럴 엄두를 내는 사람이 되어 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그는 세비체를 맛보겠냐는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외져서 한산한 해변이 있는 곳을 안다며 이따 같이 밤 수영을 가지 않겠냐는 제안은 용케 외면했다. 남자 딴엔 그를 안심시킨답시고 “바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이라 덧붙이기까지 했다.
잠시 후에 남자가 말했다. “난 스쿠버 다이빙에는 관심이 없어요. 금단지라도 건질 거라면 모를까, 굳이 그 깊숙한 데까지 내려갈 필요 있나요.”
“하, 신기하네요. 안 그래도 당신 별명으로 ‘빅 실버’가 딱이라고 생각하던 참인데.”
“왜 빅 실버예요?”
“다이빙하러 갔을 때 탄 보트 이름이 빅 실버였거든요.”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더니 여자의 가슴에 머물던 시선을 돌려 ‘출구’라고 적힌 네온 사인을 쳐다봤다. 여자는 다시 미소를 지었지만 진심은 아녔다. 멕시코에서부터 콜롬비아까지 짊어지고 온 자기 내면의 소용돌이를 진정시켜야만 한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었을 터. 그는 방금 한 말을 취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실은 머리 색과 눈썹 피어싱 때문에 빅 실버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난 떠돌이예요. 여기저기 떠돌며 살아왔죠.”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자기가 주문한 음식값을 계산하곤 바닥에 떨어뜨린 책을 주워 달라고 남자에게 말했고, 이에 남자는 별수 없이 식탁 아래로 몸을 굽히고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어 대더니 발끝으로 겨우 책을 끄집어당겼다. 상당한 시간이 걸려 그가 책을 손에 쥐고 식탁 위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을 때, 여자는 감사해하지도 그렇다고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다. “고마워요”라고 짧게 말했을 뿐이다.
종업원이 식탁을 돌며 꽃게 다리와 생선 뼈가 수북이 쌓인 그릇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만 자기 자신을 받아들여요. 다른 사람은 이미 다 임자가 있으니까.” 이 여자에게 딱 맞아떨어지는 말은 아니었다. 이이는 빅 실버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를 동등하게 누리기는커녕, 자유를 누릴 ‘자기’부터 확보하려 고군분투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반면에 빅 실버는 자기 자신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거리낌도 품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원래 말이 많은 편인가 봐요?
느끼는 대로 삶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자유이지만 우리는 대개 이 자유를 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내가 엿본 여자의 내면은 하고 싶은 말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불가사의하게 다가오는 말들로 살아 생동하고 있었다.

그날 밤 늦게 호텔 발코니에 나와 앉아 글을 쓰면서 나는 그가 떠돌이 빅 실버에게 은연중에 내민 손, 내막을 밝히지 않은 상처의 행간을 읽어 보라며 남자에게 건넨 무언의 초대를 다시 떠올렸다. 폭풍이 닥쳐온 순간 직전에 이야기를 끊을 수도 있었다. 깊고 잔잔한 바닷속에서 목격한 경이로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었다. 해피 엔딩으로 맺을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대신 빅 실버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날 나는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에게 버림받은 걸까요? 빅 실버는 그의 이야기에 알맞은 독자가 아니었지만, 그라면 내 이야기에 딱 맞는 독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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