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게 하기’란 ‘돌보기’와 같은 것
야규 신고(원예가)
저는 어린 시절에 식물과 만나고 원예에 뜻을 품어 지금은 야쓰타케 구락부라는 곳에서 매일 식물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오래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은 식물이란 꽃을 피울 때만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싹 틀 때도 좋고 꽃이 진 다음도 좋습니다. 벌레가 잎사귀를 갉아먹어도, 그러다 급기야 시들어도 그렇습니다. 결코 화사할 때의 볼거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식물과 함께하는 삶은 마음이 덜컥 움직이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그 매력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원예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이어 가던 중에 원예에 두 갈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꽃을 ‘잘 키우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있는 원예 책의 99%가 그런 내용을 다루는 이른바 ‘하우 투’How to 책입니다. 또 하나 다른 접근법이 있는데 그것이 제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그것은 식물과 더불어 일희일비하는 것입니다. “앗, 시들었잖아!”라거나 “늘어났다!”라거나 “말라죽었어!”같이, 또한 “벌레다!”나 “열매가 열렸어!”같이 말이죠. 식물과 함께 우왕좌왕하고 싶습니다. 딱히 멋은 없지만 비길 데 없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미디어를 활용해 그런 우왕좌왕의 즐거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원예계에는 그런 입장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원예가는 식물을 ‘잘 키우는 것’, ‘크게 키우는 것’에 집중합니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그래서 조금 외로웠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토 씨라는 친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이토 씨는 저보다 훨씬 우왕좌왕합니다(웃음). 이토 씨의 전작인 『보태니컬 라이프』를 처음 읽었을 때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승사자의 흙”이라니, 재밌는 사람이다 싶었죠. 이토 씨는 식물과 가까이 어울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드문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는 꽤나 노하우가 쌓여서 수험 공부하듯 공부하면 육성법은 쉬이 숙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토 씨는 결코 그쪽으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생명으로서 식물의 기척이 희박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물화라고나 할까요. 또 능숙해지면 우왕좌왕도 없어지죠. 식물을 장악하고 있다는 감각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아니죠. 오히려 인간이 식물의 손아귀에 잡혀 우왕좌왕하는 게 사실일 겁니다.
인간이 자연계나 식물을 뜻대로 조종한다는 게 터무니없는 착각이라는 사실을 이토 씨도 마음속으로부터 깨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무턱대고 공부하지 않는 것이겠죠. 얼굴을 맞대고 식물의 안색을 살피고 스스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실패합니다. 그리고 돌보지요.
보통 ‘시들게 했다’는 건 크나큰 실패입니다. 따라서 다음에 넘어서야 할 도전이 됩니다. 하지만 저나 이토 씨에게는 시들게 하는 게 실패가 아닙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죽지 않는 반려 동물이 없듯 시들지 않는 식물도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애저녁에 반려 동물이나 원예는 금지되었을 터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건 ‘죽어 가는 것을 돌보기’가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지혜가 이어져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작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추억이 있으니 이별이 사무칩니다. ‘잘 키워서’가 아니라 ‘함께 우왕좌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앞서도 말했듯 야쓰타케 구락부 숲에서 식물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지냅니다만 이토 씨 같은 도시 베란다파를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란다 쪽이 대상과 거리가 가깝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숲속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뿌리의 상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베란다의 화분이라면 뿌리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베란다라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식물의 다면적이고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거리가 가깝고 크기가 작다는 것. 여기에 베란다라서 배울 수 있는 원예의 어떤 극치가 있습니다.
또 베란다가 꽃을 키우기 더 어렵습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독립해 자라는 식물이 없습니다. 모두 땅속에서 이어져 있는 모아 심기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베란다에서는 화분 하나에 한 식물이 자라죠. 그들 사이에는 경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급우가 많은 교실에서 혼자 구석에 틀어박히고 공부는 과외에만 의존한다면 사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베란다에서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실력이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 씨와 저는 함께 ‘플랜트 워크’라는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식물을 보면 거리와 사람을 알 수 있다’는 테마로 느긋하게 식물을 보며 한눈팔기를 즐기는 겁니다. 2012년에는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지였던 미나미산리쿠에서 ‘플랜트 워크’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접근법이라는 생각으로, 그곳의 식물들이 무언가를 말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그리고 그것이 이토 씨가 오랜만에 쓴 소설 『상상 라디오』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말이지요. 그때 이토 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불완전한 것 가운데서 식물은 변함없이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완전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구원을 느끼는 것 아닐까요.”
인간이 만들어 낸 거의 모든 것이 대지진 때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식물만큼은 봄이 오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식물의 강인함으로부터 용기를 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토 씨는 ‘이 꽃은 꽃잎이 몇 장이고……’ 따위의 관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와 이야기하다 보면 왜 꽃 모양은 이런 형태고 색은 이 색인지, 왜 봄에 노란 꽃이 많은지 같은 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토 씨, 그건요” 답하기 시작하면 흥미에 찬 얼굴로 귀를 기울입니다.
이토 씨도 저도, 그리고 카렐 차페크Karel Čapek[1]씨나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郞[2]씨 같은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우린 아무튼 식물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듯합니다. 사랑하면 남에게 전하고 싶어지지요. 맛있는 레스토랑을 발견하면 남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처럼요.
이토 씨는 식물을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기에 ‘시들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어쩌면 발명입니다.
[1] 1890~1938. ‘로봇’이라는 단어를 창안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체코의 작가. 『원예가의 열두 달』The Gardener’s Year이라는 에세이집을 낸 바 있다.
[2] 1862~1957. 독학으로 식물 분류학을 공부해 최초로 일본 식물에 학명을 붙인 식물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