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전희경 선생님의 «언다잉» 추천의 글인 <‘아프다’는 것, 쓴다는 것>을 공유합니다. ‘아픈 사람의, 돌보는 사람의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선생님이라면 앤 보이어의 모험에 동참해 주시리라 기대하며 추천사를 부탁드렸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을 뿐 아니라 매우 감동적인 추천사를 보내 주셨어요.
이 글은 «언다잉»을 ‘투병의 의미를 바꾸는 글’로 정의합니다. 흔히 투병은 질병과의 싸움으로 이해되지만, «언다잉»은 아픈 사람들이 질병과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겪으며 살아가기 위해 싸운다는 진실을 드러내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진단명으로 축소될 수 없는 고유한 삶을 필사적인 글쓰기로 드러내는 것, 세상이 아픈 사람으로부터 듣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아픈 몸을 가로지는 “젠더, 계급, 인종 차별, 의료 제도, 자본에 대해 쓰는 것”, 이것이 ‘병은 당신을 무기로 변모시킨다’(64)는 말의 의미일 거예요.
전희경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보이어가 «언다잉»에서 보여 준 ‘쓰기’를 통한 ‘살기’의 길이란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쓰고자 했던 분투의 결과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보이어가 그렇게 했듯 이제 우리도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쓰기’로 나아가길 권하는 이 글을 함께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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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는 것, 쓴다는 것
전희경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으레 그렇듯 이 책이 커서가 무심히 반짝이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쓰였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고통과 투병에 대한 글조차 건강한 신체의 평온한 일상 속에서 쓰였으리라 가정하는 습관적 무심함. 그러나 아니었다. 이 책은 병상에서, 암 환자와 보호자로 가득 찬 약물 투여실에서, 소란한 대기실에서, 치료 직후 달려가야 했던 일터에서 쓰였다. 모아 둔 돈 없이 홀로 딸을 키우는 비혼모, 병가를 다 써 버린 노동자, 유방암 중에서도 예후가 특히 나쁜 ‘삼중 음성 유방암’을 겪으며 사는 40대 여성 시인의 책. 그래서일 것이다. 『언다잉』은 편안한 자세로 느긋하게 읽을 수 없는 책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어떤 다른 ‘읽기’를, 나아가 다른 사유를 말이다.
«언다잉»은 매우 긴 제목을 가진 책이다. 부제로 열거된 열한 개나 되는 단어를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암을 겪으며 산다는 것에 대해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알아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알지 못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고통, 취약성, 필멸성, 의학, 예술, 시간, 꿈, 데이터, 소진, 암, 그리고 돌봄. 이 단어들은 전혀 가지런하지 않다. 어쩌면 당연하다. 누구의 삶도 가지런하지 않으며, 건강 중심 사회에서 아프며 사는 삶, 성 차별 사회에서 ‘여성 암’을 겪는 삶은 더 그럴 것이다.
투병의 의미를 바꾸는 분투
투병은 흔히 질병과의 싸움으로 이해된다. ‘꼭 승리하세요!’라는 격려에서부터 ‘암 정복’이라는 현대 의학의 깃발에 이르기까지, 질병은 제거의 대상이자 정복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인생의 한가운데서 느닷없이 ‘질병과의 싸움’을 시작하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씩씩하게 싸울게요!’라고 정답을 말해야 할까? 그러나 암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말을 들은 후 CT나 MRI 촬영을 위해 대형 병원의 기계 안에 누워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삶이 얼마나 순식간에 ‘진단명’으로 축소될 수 있는지. 아프지 않은 다른 신체 부위가 얼마나 빨리 무의미해지는지. 최신 과학 기술이 몸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동안 어떻게 삶의 고유함, 굴곡, 불가사의들이 숨겨지는지.
위중한 병의 환자가 된다는 것은 환자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동하는 환자’나 ‘타인을 돌보고 있는 환자’ 같은 표현은 이상하게 들린다. 특히 유방암처럼 이미 의학적으로 확립되어 있는 질병은, 병을 겪기도 전에 이미 병자가 할 이야기를 정해 버린다. ‘병을 이겨 낸’ 승리담이거나, 아니면 ‘병마에 시달리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사연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지금은 나을 생각만 해.” 이 말은 당연히 선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선의’는, 아픈 사람들로부터 듣고자 하는 이야기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건강을 의무로 만드는 사회는 아픈 사람에게 삶의 중단을 판결한다. “니 몸만 생각해.” 그러나 이 책은 ‘내 몸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젠더와 계급을, 빈곤을, 인종 차별을, 의료와 돌봄을, 자본주의를 생각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병이 내 몸의 일부일 때, 병과 싸우는 것은 어느 지점에선가 자기 자신과 싸우는 비문非文이 된다. 이 책은 ‘투병’의 의미를 바꾼다. 아픈 사람들은 ‘질병과’ 싸운다기보다, 질병을 겪으며 살아가기 위해 싸운다.
외로운 곳,
나를 멈추게 하는 문장들로부터
“구글에 내 병을 검색해 본 나는 그 결과가 너무나 방대한 나머지 초현실적인 외로움을 느낀다”(35). 병원에 갈 때마다 진단명, 주사 이름, 약의 부작용을 검색하곤 하는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멈춘다. 어쩌면…… 지은이가 쓴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픈 사람들은 각자의 외로운 장소, 자신의 몸을 살아간다. 그 삶은 쓰여야 하고,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 외로움, 이 ‘쓰기’의 필사적인 충동을 이해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언다잉』. 암 환자를 ‘죽어 가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체제에 대한 경고다. ‘죽어 가는’ 중이 아닌 사람은 없다. ‘살아가지’ 않는 환자도 없다. 아프다고 쓰는 것. 진짜 아프다고 쓰는 것. 아프며 사는 경험을 가로지르는 젠더, 계급, 인종 차별, 의료 제도, 자본에 대해 쓰는 것. 병상을 바라보는 것과 병상에서 세상을 보는 것의 차이에 대해 쓰는 것. 그리고 돌봄과 사랑과 상심에 대해 쓰는 것. 이 책은 ‘쓰기’가 ‘살기’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쓸 수 없는 것을 쓰고자 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이해 가능하도록 각색하고 번역하는 방법과 번역 불가능성을 감수하고 더 진실한 표현을 찾아 시적 언어를 벼려 내는 방법. 전자의 방법이 어떤 긴장을 포기할 때, 제약 회사의 이익, 시장화된 의료, 건강 식품의 판매량과 빠르게 만나 매끈한 ‘극복’의 미담이 된다. “환자분이 느끼는 통증에 1점부터 10점 사이의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인가요?”(68)라는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힐 때, 우리는 시적 언어 쪽으로 좀 더 몸을 기울여야 한다.
유방암 경험자이기도 했던 흑인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는 “시는 사치가 아니다”라고 썼다. 지은이는 오드리 로드를, 그리고 유방암을 겪은 또 다른 많은 여성 작가, 운동가, 비평가를 불러내 그들과 함께 쓴다.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쓰고자 했던 분투의 결과물인 이 책을, 많은 독자가 읽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약 이 책의 어느 구절에서 멈추고 밑줄을 긋게 된다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또 자신의 이야기를 써 가면 좋겠다.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