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후기

전희경 선생님의 <추천의 글>에 이어 오늘은 옮긴이 양미래 선생님의 «언다잉» <후기>를 공유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앤 보이어는 «언다잉»이 많은 독자에게 가닿기를 바라며 편집자의 제안을 많이 받아들였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적 충동으로 가득한 그의 산문은 독자를 종종 낯선 곳으로 데려갈 거예요. 번역된 글로 읽는 우리는 길을 잃을 위험이 한층 더 크고요.

하지만 «언다잉»은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장담합니다).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옮긴이 양미래 선생님의 끈기와 노력 덕분이에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책을 펼쳐 드는 순간 바로 실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만큼 <옮긴이 후기>도 «언다잉»의 의의를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하고 있어요. “소음의 장벽을 세우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향해 고통의 근원을 되묻는” 이 책에서 형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드러내고, “고통을 통한 혁명”을 제안하고 촉구하는 보이어의 급진적 면모를 밝혀 주는 글이에요.

양미래 선생님의 <옮긴이 후기>는 «언다잉»이라는 ‘눈물 사원’에 들어서는 데 요긴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글입니다. 그러니 이 글 꼭 읽어 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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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후기

«행복한 노동자들의 로맨스»The Romance of Happy Workers, 2008, «여성에 반하는 의복»Garments Against Women, 2015, «어긋난 운명 안내서»A Handbook of Disappointed Fate, 2018 등을 비롯한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하면서 우리가 아는 언어를 재발명하고 우리가 아는 세상을 재상상해 이 세상을 규정하는 범주를 확장했다는 평을 받아 온 미국의 시인 앤 보이어는 얼핏 암 수기로 보이는 최근작 «언다잉»을 통해 ‘암 수기’라는 장르 또한 비틀고 허물고 재구축한다. «언다잉»은 내용 면에서나 형식 면에서나 보통의 암 수기 같지 않은 글이지만 그럼에도 보이어가 암을 앓은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그는 이 책에서 암을 앓기 전과 후의 드라마틱한 변화나 깨달음을 전달하는 보여 주기showing 방식을 따르는 대신, 현재에 병든 사람이건 미래에 병들 사람이건 모든 사람의 몸속에 드나드는 공기를 온몸으로 감각하도록 만드는 말하기telling를 한다.

보통의 투병기에서 질병은 삶의 의미를 찾는 기회이자 삶의 속도를 늦추는 휴식으로 그려질 때가 많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질병에서 그런 기회와 휴식의 의미를 읽어 내는 일은 어쩌면 생사의 기로를 끈질기게 눈앞에 들이대는 질병의 치명성에 저항하려는 불가피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일종의 투병기를 쓰는 동안 보이어는 삶의 의미를 찾는 대신 “계속 살아 있기 위해 진 빚을 이 세상에”(107) 갚고자 하며, 삶의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계속해서 쓰고, 가르치고, 말하고”(35) 치료받고 돌보며 숨 가쁜 일상을 살아간다. 가발과 화장의 힘을 빌려 건강을 가장한 다음 곧장 일터로 향해야 하는, 사회에서 내쳐지지 않고 생계를 지속해 나가기 위해 고통을 덮어 두고 활력을 꾸며 내야 하는, 치명적인 암이 들이닥쳤지만 멈춰 서지도 속도를 늦추지도 못한 채 고통을 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그의 글에는 개인의 영웅적인 승리 혹은 비극의 서사가 없다.

여러 치명적인 질병 중에서도 유독 젠더화된 질병에 속하는 유방암을 앓은 보이어는 수전 손택, 레이철 카슨, 재클린 수전, 샬럿 퍼킨스 길먼, 오드리 로드, 패니 버니, 캐시 애커,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 엘런 레오폴드 등 유방암을 앓은 여성 작가들의 죽음을 생각하며 서두를 연다. 유방암이 유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라 할지라도 세즈윅이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여자네”(17)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에 허를 찔린 기분을 느끼지 않기가 쉽지 않은 만큼, 여자로서 유방암을 앓고 이 질병의 이데올로기적인 체제를 드러내고자 한 보이어가 ‘여자의 죽음’, ‘자매의 죽음’을 떠올린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이어는 손택과도, 로드와도 다른 글을 쓴다. 손택이 ‘나’와 ‘암’을 한 문장에 병치하지 않은 글을, 로드가 이 두 단어를 한 문장에 병치한 글을 썼다면, 보이어는 “2014년 나는 마흔하나의 나이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18)라는 문장에서 출발해 손택이 의도적으로 삭제한 사적인 내용과 유방암이라는 젠더화된 질병에 결부된 공적인 내용을 결합한다. 그는 이 두 차원을 때론 철학적 사유를 통해, 때론 일기 같은 기록을 통해, 때론 통계 자료를 통해, 때론 영화와 그림 등 예술을 통해 전면에 드러내되, ‘나’와 ‘암’을 병치한 문장들을 순차적으로 잇는 대신 ‘나’와 ‘암’의 관계를 씨실과 날실을 엮듯 겹겹이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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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직조한 글이 수기이기는 하지만 수기라고 하기는 어렵고, 시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시적인 특색을 지니게 된 데는 보이어의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 모로 보나 관습적이지 않은 ‘형식’이 큰 몫을 한다. «언다잉» 출간 후 여러 매체에서 형식과 관련된 질문을 받은 보이어는 <커먼플레이스>Commonplace 팟캐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작가에게 주어진 과제는……형식을 만들어 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고 이 세상과 세상의 다면성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시 재단Poetry Foundation과의 인터뷰에서는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때때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다는 심정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형식적 숙명론’formal fatalism에 맞서고자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숙명론적 속성을 지닌 형식 안에서는 새로운 말하기가 불가능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언어적・철학적 재현의 한계와 그 한계들로 인해 현대 세계의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이 은폐될 가능성”에 주목하며 서구의 비평적 사고 관습을 거부하고자 했고 자신의 사상을 단순히 난해한 글로 비난하는 목소리에 ‘평이한 글에 속임수가 있다’고 응수했다면,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을 설명하고자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빚어냈다면, 보이어는 묵살당한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고 “암의 근원이 우리가 공유하는 이 세상 곳곳에 퍼져 있을 수도 있다는 다른 한쪽의 조용한 추정”(38)을 들려주기 위해 기존의 숙명론적 속성에 갇히지 않은 새로운 형식으로 “좆같은 백인 지상주의적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파멸적인 발암권”(99)에 저항한다.

그런 형식을 택했기에 보이어는 유방암 환자로서만 말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로서 암의 ‘이데올로기적 체제’를 드러내고자 하는 보이어는 암이라는 질병을 집단적・정치적 차원에서 집요하게 독해하며, 병든 자들이 각자만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써 보도록 독려하는 대신 내 세계가 타인의 세계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게 한다. 병든 자들을 동정하거나 연민하게 만드는 대신 “이런 식으로 지속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런 식으로 지속되고”(270) 있는 이 공유된 세상을 직시하게 한다. 로드가 유방암을 둘러싼 침묵을 말하기로 변모하고자 했다면, 보이어는 침묵이 아닌 소음의 장벽을 세우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향해 고통의 근원을 되묻는다.

그런 되물음 속에서 보이어는 무엇보다 “아파요”라는 말을 정확하게 발화한다. 아프다는 말이 자신에게 아픔을 주는 사람에게 가닿지 않고 튕겨 나오면 “진짜 아프다니까요”라고 거듭 말한다. 그러면 보이어 옆에서 비슷한 고통을 받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이 “당신 말이 맞아요”라고 동조하고, 곧이어 모두가 “정말 아파요”라고 입 모아 외친다. 그로써 정말 아프다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순간, 각자가 느낀 사적인 고통이 병든 자들은 물론이고 아직 병들지 않은 자들 사이에서까지 소통되는 순간, 보이어의 저항은 사적인 분투에 그치지 않고 고통을 통한 혁명으로 확대된다.

전작들 출간 때와 달리 «언다잉»을 펴낸 후 여러 형태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보이어는 이 책이 가급적 많은 이에게 닿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덜 외롭기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공유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이런 소망은 불멸도 생존도 아닌, ‘죽지 않는’ 상태 혹은 ‘죽지 않는’ 존재들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 ‘언다잉’The Undying에도 깃들어 있다. 이 세상을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는 일종의 스포츠 게임으로 만드는 듯한 생존과 생존자라는 용어를 답습하는 대신 ‘죽지 않는’ 과정에 대해 말함으로써 보이어는 “살아 있는 사후 상태”(296)를 환기한다. 그리고 그로써 이 책이 “건강하고 온전한 이들”(293)은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라도 암의 물리적・이데올로기적 조건을 형성하는 자본주의 세계 속 모두를 향하게 만든다.

보이어는 이 책을 써야 했던 이유가 두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는 인종 차별주의, 여성 혐오, (병든 자와 병든 자가 앓는 질병을 통해 이윤을 얻고는 병든 자에게 죽음에 대한 책임까지 묻는) 자본주의 세계를 비롯해 삶을 쪼그라뜨리는 모든 것을 향한 원한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원한보다 훨씬 더 커다란, 암의 “완강함을 누그러뜨릴 창의적인 형태의 사랑”(302)을 보내 줌으로써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해 주고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 모든 존재와 이 세상을 향한 감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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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번역하고 교정하고 보이어의 글과 음성을 찾아보는 동안 번번이 마음속에 떠오른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문자 위에서 헤맬 때마다 기꺼이 섬세한 고민을 나눠 주고 내가 불시에 아픔을 토로할 때마다 귀 기울여 들어 준 승경, 인휘, 현수 언니, 나를 믿음과 존중으로 대하며 그간 아무렇지 않게 박탈되곤 했던 내 권리를 아무렇지 않게 쥐여 준 것에 더해 보이어의 글을 조금이라도 더 마땅한 형태로 내보일 수 있도록 내 부족함을 메워 준 플레이타임 출판사 편집부, 그리고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나를 실감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엄마. 그래서인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감사함의 빚을 글쓰기를 통해 갚고자 했다는 보이어의 말을 감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보이어가 고통과 저항과 혁명을 품고 직조해 낸 «언다잉»이 내게는 읽으면 읽을수록 “개별적이면서도 공통적인 슬픔이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공간, 고통을 공유된 무언가로 마음 편히 드러낼 수 있는 동시에 슬픔에 적대적인 반발은 막아 주는 보호막이 제공되는 공간”(229), 즉 우리 모두를 위한 ‘눈물 사원’을 자처하는 듯했다. 책이라는 형태를 빌려 눈물 사원을 지어 준 보이어에게 감사하며, 나 아닌 다른 이들도 이 책을 통해 그런 공간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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