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다잉» 디자인 후기

디자인 작업에 들어가면 매번 ‘이번 책이 제일 어렵다’며 절규하지만, 그래서 양치기 소년이 된 감이 있지만 «언다잉»은 진짜 제일 어려웠다(믿어줘요,,). 좋은 책이라 느낄수록 ‘내가 감히?’라는 생각이 들면서 위축되고 엄두도 안 나고 무력감만 키우곤 한다. «언다잉»은 놀랍도록 훌륭한 책이어서 우리가 이 책을 펴낸다는 사실에 기쁘고 충만함을 느꼈지만 디자이너로서 나는 점점 쪼그라들어 내 능력과 한계와 적성을 되돌아보는 데 작업 중 꽤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부담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어려움도 컸다. «언다잉»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는 암 수기, 문학이기를 바라는 증언이다. 이 책은 복수의 서사, 복수의 목소리, 복수의 형식을 담고 있고 무엇보다 시적이다. 이 모든 걸 전부 표지에 담아야 할까? 아니면 일부만? 그렇다면 무엇을? 다행스럽게도 지은이 앤 보이어는 이 책에 “유방암은 형식을 흐트러뜨리는 질문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질병이다”라는 문장을 새겨 놓았다. 고민이 좀 걷힌 뒤 우리는 이 문장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고, 구상할 때뿐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난항을 겪을 때도 이 문장이 나를 붙들어 안내해 준 것 같다.

«언다잉» 15쪽

유방암 하면 ‘핑크 리본’이 자동으로 떠오르는데, 원래는 가족 중 할머니와 언니와 딸이 모두 유방암을 앓았던 운동가 샬럿 헤일리가 1990년 미국 국립 암 연구소 연간 예산의 극히 일부만 암 예방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로 처음 리본을 배포했다고 한다. 입소문만으로 운동이 확산되자 «셀프» 매거진과 화장품 기업 에스티 로더가 마케팅 파트너십을 제안했지만 헤일리는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에 에스티 로더는 피치 핑크였던 헤일리의 리본 색깔을 클래식 핑크로 바꾸고는 핑크 리본 관련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유방암이 기업의 기부가 쏟아지는 ‘핫’한 분야로 꼽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내가 즐겨하던 게임 오버워치에서도 핑크 리본을 내세워 유료로만 판매하는 ‘핑크 메르시’ 캐릭터 스킨을 출시했던 게 기억난다.

오버워치 ‘핑크 메르시’ 스킨 출시 이벤트 안내 화면

표지에 들어간 이미지는 이 일화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다. 변질된 핑크 리본으로 대표되는 매끈한 핫핑크 영역이 위로 올라갈수록 흐트러지면서 형태에 균열이 일어나고, 색상도 (원래의 피치 핑크를 포함해) 여러 색으로 변형되도록 구성했다. 유방암 초음파 사진을 활용했고, 흐트러지는 모습은 디지털 화면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표현했다. 책의 시작 부분에서 지은이가 검사실 화면에 떠 있는 “빛과 그림자로 빚어진” 자기 종양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표현 방법을 고민할 때 이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다.

“의료 기사가 검사실 밖으로 나간다. 나는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려 거기에 보이는 신생물과 신경망, 내 병리나 내 미래나 내 미래의 최후가 적혀 있을지도 모를 조그마한 글자를 해석한다. 생전 처음 본 종양의 모습은 화면 위에 떠 있는 어둠, 기다랗고 뼈마디가 울퉁불퉁한 손가락 같은 뭔가가 툭 튀어나와 있는 동그란 어둠이었다. 나는 검사대에서 아이폰 카메라로 그 화면을 찍었다. 그 종양은 내 것이었다.”

이 책은 유방암에서 시작해 부제인 ‘고통, 취약성, 필멸성, 의학, 예술, 시간, 꿈, 데이터, 소진, 암, 돌봄’으로 가지를 뻗는다. 부제를 보다 보면 ‘꿈’이 약간은 이질적이거나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원고를 읽고 난 뒤 꿈이 이 책을 관통하는 아주 주요한 키워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데이터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진단받고 아파하는 동안 꿈의 자리가 점점 더 사라진다는 것이 보이어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시적인 부분들이 꿈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꿈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지는 않더라도 꿈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분위기가 표지 전반에 풍길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핑크 배경이 흐트러지는 방향을 아래에서 위를 향하도록 하고, 부제에서 쉼표로 나열된 키워드들이 순서 없이 둥둥 떠다니는 듯이 보이도록 배치했다. 우리 딴에는 매끈한 핑크색에 키워드들이 난입해 균열을 일으킨다는 줄거리를 짠 것이기도 한데, 독자 여러분에게 온전히 전달될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 꽤 마음에 드는 스토리다. 표지 시안을 옮긴이 선생님에게 공유했을 땐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의 머리 위에서 공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과도한 상상이 펼쳐진다는 내용이 떠올랐고, 보이어가 새로이 뭔가를 구축해 냈다는 게 시각화된 것 같다’는 답신을 받기도 했는데, 전형적으로 꿈보다 해몽이 좋은 사례이긴 하지만…(^^*) 서로 연결되거나 통하는 지점이 있다는 걸 확인한 것 같아 감동적이었다.

«언다잉» 114~115쪽

이 책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리시올/플레이타임 책 중 처음으로 후가공을 추가했다는 점이다. 제목과 부제, 지은이와 옮긴이 성명, 출판사 로고 등 앞표지에 표기되는 모든 요소를 배경의 분홍색과 완전히 상반되는 색상으로 배치해 강조하고 싶었다. 그동안 펴낸 책들에서는 후가공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고 또 화려함을 위해 불필요하게 후가공을 추가한 듯한 책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경계하는 마음이 컸는데, 이 책에는 청색 박이 너무나 꼭 맞게 어울릴 것 같아 아무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언다잉» 후가공 모습

표지에 사용한 서체는 픽셀화된 명조체다. 매끈함에 균열을 내는 배경 이미지와도 어우러지고, 부제 키워드 중 하나인 ‘데이터’와도 연결되는 느낌이라 사용했다. 정말로 마음에 들고 이 서체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스스로를 아주 칭찬하고 싶다. 한 가지 덧붙이면 제목과 부제를 서로 엇비슷한 크기로, 또 지은이와 옮긴이 이름도 그에 비해 작지 않은 크기로 배치했다. 각 요소가 서로 우열을 가리지 않고 펼쳐져 있는 모양새를 내고 싶어 그렇게 한 것인데, 부제로 나열된 키워드들이 각각 의미를 발휘하듯 «언다잉» 한국어판의 구성 요소도 모두 함께한다는 의미를 새기고 싶었다.

완성된 표지 시안을 원저작권사에 보낸 뒤 ‘지은이가 표지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한 것 같다’는 답장을 받았다. 리시올/플레이타임에서 일하는 동안 표지에 대한 (외서) 지은이의 반응을 의외로 여러 번 전해 들었다. 아주 먼 곳에 있고 말도 안 통하는 사이지만, 표지 이미지 한 장으로 우리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으며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소개하고픈지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병상에서, 암 파빌리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이 책을 직접 쓴 앤 보이어가 한국어판 표지를 보며 어떤 것들을 느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이 되진 않지만 마음에 들어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어깨가 막 으쓱해지는데 이 기쁨을 숨길 수가 없다…( ͡° ͜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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