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출 만한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찾으세요

앤 보이어가 저널 «더 엔드 오브 더 월드 리뷰»(The End of the World Review) 지면에서 샘 재피 골드스틴(Sam Jaffe Goldstein)과 나눈 인터뷰를 공유합니다. «언다잉» 출간 1년 후인 2020년 9월의 인터뷰로 팬데믹 이후의 세상과 문학에 대한 생각을 선명한 언어로 밝히고 있어요.

특히 이 인터뷰에서는 «언다잉»에서도 중요한 키워드였던 데이터라는 주제가 부각됩니다. 보이어는 ‘데이터로 환원되는 자기(self)를 되찾으려 반항’하는 작가지만 현대 사회의 모순을 몇 가지 키워드로 단순화하고 손쉬운 비관을 말하는 사람은 아님이 이 인터뷰에 잘 드러납니다.

지배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문학 하는 남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포문을 연 보이어는 팬데믹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평등의 심화를 짚고, “공적 애도”가 부재하는 현실을 통탄하며,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존엄에 대한 투쟁(과 낙관)을 말하며 혁명적인 작가들을 인용합니다.

«언다잉»에서 “계속 살아 있기 위해 진 빚을 이 세상에 갚으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책을 써야 하는 걸까?”라는 말로 생존자의 부채감을 토로했던 보이어가 얼마나 놀라운 활력과 지성으로 빚을 갚아 나가고 있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인터뷰예요.

이 인터뷰도 번역가 양미래 선생님이 옮겨 주셨고 저작권자인 샘 재피 골드스틴과 «더 엔드 오브 더 월드 리뷰»의 허락을 받아 번역 게재합니다. 앤 보이어의 변함 없는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포괄적인 쟁점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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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출 만한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찾으세요
앤 보이어와의 인터뷰

샘 재피 골드스틴
양미래 옮김

우리의 취약성에 대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취약성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요.”

요즘 같은 시절에는 누구나 자기 존재가 데이터 포인트[1]로 축소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그 결과를 둘러싼 논의가 검사와 추적, 후행 지수[2], 검사 양성률, 실업자 수, 셧다운, 그리고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용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런 용어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 역시 여느 테크노크라시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무수한 것들의 의미를 왜곡하고 만다. 그동안 무엇을 놓쳤는지, 무엇을 놓칠 위기에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되찾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줄 사람이 있다면, 바로 시인이 적임자 아닐까?

<잡동사니 – 브라마 씨의 특허 자물쇠, 로웬트리 씨의 특허 자물쇠 / … 위임, 조각가 로리>,
윌슨 로리, 조각가, 1814.

이번에는 앤 보이어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보이어의 저서 «언다잉»이 암 투병 경험을 담은 수기일 뿐만 아니라 데이터 포인트에 가려진 자기self를 되찾으려는 반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은 보이어의 모든 작품, 특히 최근에 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관한 에세이들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보이어는 더 나은 미래를—이른바 ‘가망’이 없더라도—희구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낙관주의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낙관주의는 사실상 그리 낙관적이지도 않다. 보이어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라고, 현 상황을 아주 조금이나마 견딜 만하게 만드는 일에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했다. 팬데믹에 대한 보이어의 첫 반응을 묻는 것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팬데믹 이후 현재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째서 아무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에 관한 논의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언과 꿈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앤 보이어의 «언다잉»은 2020년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으며 현재 페이퍼백으로 출간되어 있다.

샘 재피 골드스틴 팬데믹 초기에 쓰신 아주 희망적이고 짧은 에세이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은 하나로 합치는 동시에 몸은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는 이상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래도 우리는 할 수 있다. 나는 우리 내면의 선함이 겹겹으로 쌓인 숨 막히는 혐오의 헛소리를 거침없이 뛰어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미셸 우엘벡은 한 라디오 방송을 위해 작성한 에세이에서 앞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악화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저는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는 상태인데요, 에세이를 쓰고 5개월이 지난 현재는 팬데믹 상황과 미셸 우엘벡의 견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앤 보이어 저는 ‘앞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악화할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악화할 것 같은 느낌 ’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라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전통적으로 문학 하는 남자들은 진부한 상황이 불변하는 것 같다는 자신의 느낌을 하나의 사실로 단언해 왔습니다. 최소 솔로몬 때부터 말이죠. 우엘벡이나 솔로몬 등등은 사실상 변화 가능성을 몸소 체화해 보여 줄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조건을 형성하는 일종의 수행적 아이러니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이고 단지 악화할 뿐입니다. 참 헛된 일이죠’라고 그들이 투덜대면, 우리는 각자의 소임을 다해 시인의 그런 거짓말에 담긴 오류를 입증해야 한다는, 그동안 숨 쉬듯 무심코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것들을 비판적인 태도로 문제 삼아야 한다는 신호를 받으니까요. 이 남자들은 상황이 변할 수 없다거나 변하더라도 악화하기만 할 것이라는 지배 계급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함으로써 우리가 ‘아니오’라는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만듭니다. 그런 식으로 선의를 행하는 셈이고요. 지배 계급은 모든 것이 엉망인 파괴적인 사회 질서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임을 인정해 버렸다간 치명적인 손해를 입기 때문에 무역사적 동일성(sameness)을 동원해 현상을 유지하려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지배가 하늘에 떠 있는 해처럼 자연스럽고 불변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지만, 사실 그들의 지배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변적이죠.

팬데믹은 이런 것을—체화의 법칙도, 시인의 아이러니도, 지배 계급의 기만도—진정으로 바꾸지는 못하지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명확한 증거만큼은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지속하리라고만 알고 있던 것이 2020년에 들어 깨지기 쉽고 실체도 없는 것임이 증명된 것이죠.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고, 바뀔 것이며, 지금도 바뀌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그런 상투적인 문장에서 ‘악화할 것’이라는 말은 숙고해 볼 만은 해도 확신할 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게 되죠. 누구를 위해 하는 말이지?

샘 재피 골드스틴 지금 바이러스에 노출돼 있는 우리는 이런 취약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앤 보이어 ‘악화할 것’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취약성입니다. 현재 초부유층(ultra-rich)은 초유부층답게 행동하면서 미래의 것들을 마구잡이로 써 버리고, 연준이 ‘양적 완화’ 조치로 찍어 낸 수십조 달러를 휩쓸어 담고, 추후에 받게 될 임대료에 눈독을 들이며 부동산을 모조리 사들이는 것에 더해, 긴급 구제 자금을 이용해 주식 환매를 하면서 지난 3월부터 거의 상상도 못 할 만큼의 부를 꾸준히 축적하고 있습니다. 팬데믹은 경제 구조 조정도 가속화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이로 인해 서비스 산업도 변화하면서 적어도 미국 내에서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배달업자로 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매업자들은 도매업자가 되고 있고요. 우체국은 비용 절감 조치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요, 그렇게 되면 이미 방치된 빈곤한 시골 지역은 더욱더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현재 우체국 업무는 노조도 없이 박봉으로 일하는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수행하고 있는데 경기 침체로 고용까지 줄어들면 이런 일자리라도 얻은 노동자들이 그나마 ‘운 좋은’ 축에 속하게 될 테죠. 고등 교육과 예술 관련 단체들 또한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때 예술 작품을 만들곤 했던 저 같은 사람들은 이제 우리의 일정에서 수일을 빼앗고 우리의 시간에서 수분을 빼앗는 바로 그 초부유층 소유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넘어갈 ‘콘텐츠’를 제작해야 한다는 압박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애통하게도 지금은 상류층이 겉만 번지르르한 방식으로 피상적인 형평성만 인정하고 있고 더 많은 다양성을 누리는 집단이 다수를 짓밟는 과업을 맡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기 때문에 젠더와 인종에 근거한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 수 있습니다. 현재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영구적 위기 그 자체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이고 바이러스마저도 위기에 직면해 있죠. 결론적으로 우리의 취약성에 대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취약성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급 전쟁이 심화되는 상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고요. 올여름의 길거리는 반격을 위한 훈련장이었습니다. 지금은 트윗이 아닌 숫돌이 맹렬하게 퍼붓는 계절이고요.

샘 재피 골드스틴 캔자스시티 상황은 어떻습니까? 캔자스주가 마스크 의무 착용 여부를 각 카운티에서 결정하도록 허용했다고 들었는데요. 마스크 착용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을 일상에서 목격하신 적 있나요?

앤 보이어 캔자스시티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일단 살인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있고요. 부유한 사람들은 안전한 집에 머물면서 줌 영상 통화를 하고 음식을 배달해 먹고 팬데믹 이후 상황에 대비하고 있네요. 그동안 캔자스시티가 밟아 온 역사를 뒤따르듯,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인종에 따라 각기 다른 수준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취약 계층은 도시 중심부에서 멀찍이 떨어진 오지의 교도소와 양로원, 육가공 공장 등지에 숨겨진 채 병들어 죽어 가고 있죠. 정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이지만, 지금은 부유한 사람들조차도 앞마당에 사회 정의를 촉구하는 팻말을 꽂아 두고 있습니다. 팬데믹 초기에는 시위가 벌어지면 경찰과 주 방위군이 무릎을 꿇은 시민들을 향해 최루 가스를 퍼붓고 아이들에게 후추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등 마구잡이로 폭력적인 대응을 하기도 했거든요. 젊은이들은 인종 차별주의자의 동상에 스프레이로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썼다가 연방 정부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캔자스시티 정부는 줄곧 양다리를 걸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요, 팬데믹 대응에서도 거의 똑같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처음에는 팬데믹 거부론자들처럼 바이러스를 과소평가하고 마스크에 대한 비방을 서슴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애초에 정부에서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을 비난했습니다. 팬데믹 발생 직후에 ‘독감’ 운운하며 늘어놓은 헛소리는 아예 한 적이 없었다는 듯 말이죠. 제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갇힌 채 마스크를 쓰며 생활하고 행동도 어느 정도는 조심하고 있는 것 같지만, 대체로 알디[3]나 시위 현장을 방문할 때만 외출한 제가 다들 규칙에 얼마나 순응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입장은 아닌 듯합니다.

게다가 저는 캔자스 시골 지역에 머물기도 했는데요. 시골은 아무래도 도시와 상황이 달라서 달러 제너럴(Dollar General)처럼 마스크 의무화 조치를 시행하는 전국 규모의 체인점을 제외하면 아무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 않습니다. 어쩌면 비순응(non-compliance) 행위는 최근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자기 행동의 결과와 유리된 채 살아가고 있음을, 살고 죽는 일에 대해 뭐라 말할 권리가 있다는 확신도 없이 몹시 음울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제 추측일 뿐이지만, 고함을 치며 자유를 부르짖는 행위가 절망을 감추기 위한 방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샘 재피 골드스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관한 정보의 홍수에 빠진 우리가 어떤 데이터를 믿을 수 있는지를 두고 지난 몇 달간 논쟁이 이어졌는데요. 혹시 데이터를 향한 이런 집착이 팬데믹 상황에 대한 말하기를 방해하고 있는 걸까요?

앤 보이어 뭔가가 잘못된 건 분명하지만 그게 데이터를 향한 집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수치에 대한 신뢰가 더는 대다수가 공유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점에서 보면, 데이터가 우리를 사물화하고 파편화하는 방식이 점점 가시적인 차원에서 모순을 야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 갈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무엇보다 저를 낙심하게 만드는 건 집단 차원의 공적 애도가 결여된 현실, 추모와 의식과 인정과 분노가 부재하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터가 우리를 위해 뭔가를 해 줘야 한다면 그건 우리가 가진 상실의 크기를 개념화하는 것일 테죠. 어쩌면 이제 데이터가 너무 값싼 것이 돼 버린 바람에 데이터로 표현되는 것의 귀중함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의 죽음은 결코 다이애너 왕세자비라든가 여느 유명 인사의 죽음처럼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아요. 새 묘비를 한가득 세울 빈 땅은 있는데, 다 같이 모여 추모할 시간이나 공간은 좀처럼 공유할 수가 없고요.

샘 재피 골드스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데이터에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데이터를 통제하는 이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되찾는 일을 가치 있는 정치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도 모순이 존재합니다.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게 가능할까요?

앤 보이어 시도해 보고도 실패하기 전까지는 가능하리라고 간주해야 합니다. 데이터의 회수 혹은 구체적인 명칭이 뭐가 됐건—데이터의 죽지 않은 편파성에 대항한 삶과 죽음의 ‘복원’이든—그런 일은 실제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미 그런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중일 수도 있고요. 변화의 출발점은 메타데이터라는 형식 자체를, 그리고 우리의 자기 인식과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을 통제한 메타데이터의 지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있을 겁니다. 또 다른 출발점이 있다면 ‘데이터’의 물성을 이해하고 데이터가 발하는 불멸성의 아우라를 부정하는 것일 테고요. 우리는 데이터 센터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누가 소유하는지, 소유자는 어디서 어떤 식으로 권력을 얻는지,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누가 유지해 나가고 있는지, 누가 지키고 있는지, 언젠가 어떤 식으로 부패하거나 붕괴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샘 재피 골드스틴 최근에 꿈을 꾸셨나요? 꾸셨다면 어떤 꿈이었나요?

앤 보이어 방울뱀 한 마리가 제 반려 동물로 나와서 저와 함께 엽총을 들고 교외 길거리를 순찰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방울뱀을 보고 독사라고 하길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우기다가 결국엔 수긍했고, 어쩔 수 없이 샐리 뷰티 서플라이의 주차장에 남겨 두고 떠나는 꿈이었어요. 꿈에 나오는 뱀이 대부분 그렇듯 그 방울뱀도 말을 할 줄 알았는데요, 언제는 다른 꿈에도 나타나더니 자기가 막 잡아먹으려던 쥐 한 마리와 함께 저를 향해—한 마리는 먹는 행위를 변호하면서, 다른 한 마리는 먹잇감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변호하면서—연설을 늘어놓더라고요. 그리고 특정 인종을 상대로 한 대학살, 내전, 포화 속 전쟁터, 암살 현장 등이 나오는 꿈들도 꾸었어요. 하나같이 붉은색 일색이고 파괴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꿈이었죠.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제가 신탁을 전하는 고대 사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게 돼요. 그랬다간 수많은 사람이 사지를 바들바들 떨면서 신전을 떠났을 테니까요. 또 어떤 꿈에서는 창작을 업으로 삼기 위해 끝도 없이 구직 면접을 봐야 하는 저주에 걸린 친구가 나왔는데, 마치 그 친구가 커다란 바위에 묶여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때 창작이라는 독수리가 그 친구의 간을 쪼아 먹는 듯했어요.

샘 재피 골드스틴 캔자스시티에 거주하는 한 집주인이 세입자를 쫓아내는 영상이 사람들 사이에서 꽤 퍼지고 있더군요. 곧 미국 전역의 수백만 가구에서도 벌어질 일인 것 같은데, 혹시 지금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상황과 관련해 문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앤 보이어 집단적 저항을 구체적인 사례로 설명하고자 할 때, 광택이 나는 빨간 트럭 옆에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런 어리석은 집주인이 세입자를 쫓아내는 사례만큼 효과적인 건 없습니다. 저는 내년에 거주권 문제를 중심으로 치열한 단결 활동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하고, 그런 움직임이 작가 집단으로도 확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특히 집주인들이 늘 유별난 적으로 간주해 왔던 시인들에게도요. 향후 몇 년 사이에 집주인의 눈물로 쓰인 첫 소설이 나온다 해도 저는 놀라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는 노동자의 투쟁보다 세입자의 투쟁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마련이니까요. 존엄에 대한 요구가 노동 문제로만 국한되면 수많은 사람(아이, 무급 간병인, 노인, 장애인?)을 배제하게 되지만—하나의 보편적 필요인—주거를 중점적으로 다루면 투쟁은 확대됩니다. 게다가 일종의 투쟁 현장이—보호할 집이—생기고 도덕상의 문제도 단순해지죠. 거처는—그리고 존엄은—취업 여부나 소득 수준에 따라 좌지우지되면 안 됩니다. 매년 저는 사회는 필요를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마땅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요. 올해는 그런 외침이 합창을 이루면서 증폭되고 있고 저도 거기에 제 작은 목소리를 더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저는 투쟁의 이런 측면은 낙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샘 재피 골드스틴 문인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여쭤 보고 싶은데요. 문인들이 지금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서 너무나도 유리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단지 돈이 있고 안전해서 그러는 걸까요? 문인들이 현재 이 시기를 설명하고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은 꽤 자명한 듯한데, 아무도 대비할 수 없었던 시기인 만큼 이런 규정은 좀 불공평한 걸까요? 아니면 예술과 문학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고유한 문제가 있는 걸까요?

앤 보이어 저는 현대 문학과 현대 문학에 관한 대담을 샅샅이 뒤지면서 우리 시대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사실의 증거를 찾아볼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물질적 사실이란 이를테면 살고자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삶의 시간을 일터에 팔아야만 한다는 것이죠. 그 외에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이 점유된 상태이며 점유된 거의 모든 것은 (사람 그리고 무언가에 의해) 구축된 것임을 보여 주는 증거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공동 주택인 지구를 완전히 고갈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도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 매매가 이루어지는 시대 속에서, 만든 사람의 존재를 우리가 인정하지는 않으나 여하간 만들어진 결과물인 하나의 세상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위협적인 무단 침입이 벌어지는 공간 배치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뽑아내고 마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건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아낌없이 칭송받는 문학 작품 상당수는 이런 사실을 하나의 비밀처럼 작품 속에 꽁꽁 감춰 두고 있죠. 현실의 구조는 우리가 읽는 책 속에서도 점점 비밀의 방처럼 감춰지고 있어서 ‘그런데 누가 이 세상을 만든 거지?’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열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 자체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좀처럼 없는 듯하고요.

예컨대 저는 급진적인 시인들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기름이 필요하고 기름을 얻으려면 석유 산업이 필요하고 석유 산업이 존재하려면 제국주의 전쟁이 필요하다는 식의 언급을 하는 문학 작품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설명이 있기는커녕, 보통 책 속에 그려지는 인물들은 그 인물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수단일 뿐인 기계에 몸을 싣고 보이지 않는 연료를 통해 움직입니다. 마치 포드 피에스타가 하나의 물질적 사실이 아니라 전기(傳記)라는 기름으로 이동하는 자기성(selfhood)의 상징일 뿐인 것처럼 말이죠.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현대 소설 한 권을 읽게 된 어떤 외계 독자가 우리의 시간과 장소에 속한 우리 종족의 모든 것이 감정, 자기 동일시, 자기 이익, 자기 실현, 자기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상상, 그리고 인간은 겉을 안으로 뒤집는 방식이 아닌 안을 겉으로 뒤집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존재이며 사물과는 오로지 그것을 큐레이션하는 방식으로만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하는 상상을요.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 발생 이전에도 상황이 이러했다면 팬데믹 초기에 유아론적 사고의 초대유행(superpandemic)이 벌어진 것처럼 보였대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한동안 저는 작가들이 쓴 글을 찾아 읽는 걸 애써 관두기도 했었는데요. 그것보다 좋은 글을 써 주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작가들이 서명한,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자유는 주창하되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충만하고 구체적인 비자유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은 «하퍼스»의 공동 서한도 나왔지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트위터상에서 시도해 보려는 움직임에 마음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소셜 미디어가 하는 약속은 이런 것이니까요. 당신은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우리가 그거 말고 다른 것도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우리는 억만장자들이 제시한 양식을 채우느라 각자의 인생과 재능을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정신이 멀쩡한 상태라면, 어딘가 미심쩍더라도 아무튼 지각 있는 포유 동물과 마주한 상황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서로를 망가뜨리려 들게 만드는 알고리즘의 조종하에서 말이죠. 그런데 저는 다른 작가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적어도 노엄 촘스키만큼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충분한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도, 개개인이 인터넷상에서 정정 가능한 형편없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라, 자유가 ‘자유’ 시장이라는 도착적인 비자유의 형태를 취하고 우리의 감정이 돈벌이용 데이터로 수집되며 우리의 시간이 불안과 노동에 잡아먹히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샘 재피 골드스틴 애덤 커티스 감독의 (그리 훌륭하지는 않은) 다큐멘터리 「과잉 정상화」(Hypernormalization)는 패티 스미스가 맨해튼 시내를 걷는 장면을 초반부에 배치함으로써 현재 좌파들이 여러 붕괴 상황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붕괴를 멈추기 위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애초에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 부딪히는 아름다운 빛을 포착하겠다고 그저 천진난만하게 감각만 재조정하는 식의 행동을 작가들은 어떻게 지양합니까?

앤 보이어 혁명 시인 로케 달톤이 감옥에 수감된 채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의 감방 벽면이 지진으로 인해 붕괴한 일이 있었습니다. 달톤은 단순히 붕괴를 경험하거나 붕괴를 멈추려 시도하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감방이 붕괴하는 상황에 대한 달톤의 반응은 구멍이 생긴 부분을 인지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감방 벽면을 이루고 있던 것들로 문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중력을 따르는 것들은 당연히 붕괴하니까요.

샘 재피 골드스틴 작가님의 작품 중 상당수는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한 감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감출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해 주실 조언이 있습니까?

앤 보이어 감출 것이 전혀 없는 분에게는 감출 만한 것을 가능한 한 빨리 찾으시라고 권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비밀은 가급적 많이 확보해 두어야 해요. 스핑크스와 19세기 무정부주의자들처럼 말이죠. 수수께끼(enigma)라는 명사와 은밀한(clandestine)이라는 형용사의 매혹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 보면 최근에 제가 즐기고 있는 취미를, 뭔가를 망각함으로써 나 자신으로부터 감추는 취미를 갖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샘 재피 골드스틴 하늘에 있는 눈(eyes)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어요?

앤 보이어 빅토르 세르주의 일기에서 그가 친구에게 한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나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가만히 응시할 때 무한한 사랑을 느낀다고, 내게 그건 일종의 욕구인 동시에 기쁨이라고, 그리고 그런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별 하나가 갑자기 팽창해서 폭발하기라도 할 것처럼—거대한 별 하나가 공중으로 떠올라 밤하늘을 불꽃 같은 광휘로 꽉 채우기라도 할 것처럼—어떤 우주적 사건이나 대재난이 벌어지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도 덧붙였어. 내가 느끼기에 그런 일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고요함과 하늘의 평온함과 별자리의 부동 상태는 자연스럽지 않거나 여하간 어떤 경우에든 고정불변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샘 재피 골드스틴 «여성에 반하는 의복»에 수록된 ‘감사의 말’에 “우리에게 반하지 않는 문학의 가능성”이라는 구절을 쓰셨는데요. 우리를 위한 문학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앤 보이어 모르겠네요. 사람이 어떤 쓰레기 조각처럼 버려지고 부모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하기도 하는 치명적인 힘이 다른 쓰레기 조각을(즉 재산을, 모든 재산은 미래에 쓰레기가 되니까)을 보호하는 상황에서는 주체가 객체가 되고 객체가 주체가 되는데, 이는 그야말로 좆된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물이 점차 사람을 닮아 가고 자기만의 삶을—심지어는 권리까지—취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니까요.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은 어딘가 부러지고, 부상을 입고, 소모되고, 낭비되고, 착취당하고, 낙인이 찍히고, 자기 착취를 하고, 자기 낙인을 행하며, 내던져진다는 점에서 사물을 닮을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혹은 우리는—일과 지배와 경쟁 등의 도구로서—사물 같은 삶을 살지만 사물과 달리 감정에 압도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물보다도 더 비참한 뭔가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울을 느끼는 사물, 상상력을 가진 사물, 분노를 품은 사물처럼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이 아닙니다. 총체적이고 완전한 무언가가 되기 위한 전 과정은 영혼 없는 세상에서나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없는 세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되었건 깜빡 잊고 팔지 못한 것, 소비되거나 폄하될 수 없는 것, 어디론가 숨어 버린 것, 메타 데이터의 조각처럼 잘게 분쇄해 팔아넘길 수는 없는 것, 이익 관계와 상반되는 사랑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 낙인을 거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영혼이요 곧 거부의 장기(臟器)입니다.

현재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은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이게 우리가 가진 전부라고 아무리 고집스레 우긴대도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좆된 세상이 좆되지 않은 문학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안간힘 쓰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바로 ‘아니오’가 품고 있는 능력,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으며 가능한 문학과 가능한 세상 등 가능한 것들의 원료를 담고 있는 영혼이라는 것 그 자체 때문입니다.

샘 재피 골드스틴 (20대 후반인) 제 친구가 최근 결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혹시 제가 친구와 나눠야 할 말이 있을까요?

앤 보이어 골드스틴 씨에게 무엇보다 드리고 싶은 말은 암과 암 치료가 익명화라는 특유의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해도 친구분이 그 자체로 매우 구체적인 존재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주변 사람이 어떤 위기에 처해 있건 누구나 염두에 두어야 할 그저 좋은 조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암 투병 시기에 필요한 지혜로운 말들’을 전하는 데 형편없는 이유도 사실 그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개별적인 존재고, 각자 다른 필요와 우선 순위를 갖고 있으며, 저를 위로해 준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영화 「데이지즈」를 반복해서 보라고 조언할 수도 있지만 이게 상대방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거든요. 제가 골드스틴 씨와 나눌 수 있는 말, 골드스틴 씨가 친구분과 나눌 의미 있는 말은 지금 같은 시기에 필요한 단어인 ‘연대’뿐이네요.

샘 재피 골드스틴은 브루클린의 한 서점에서 일하고 있다. 트위터 계정은 @sgiraffe666이다.


[1] [옮긴이] 한 가지 사실 혹은 정보를 가리키는 단위.
[2] [옮긴이] 경기 변동을 예측하는 데 활용되는 선행 지수와 달리, 후행 지수는 경기 변동을 사후에 확인할 때 활용된다.
[3] [옮긴이] 식료품과 생활 용품 등을 판매하는 독일의 저가형 슈퍼마켓 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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