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에 대한 성찰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출간과 더불어 시몬 베유의 짧은 글 하나를 공유합니다.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집필과 비슷한 시기인 1939년 작성한 미완성 원고인 <야만에 대한 성찰들>(Réflexions sur la barbarie)입니다.

정치 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시몬 베유와 한나 아렌트의 정치 사상을 대조하는 책 «정치적인 것의 기원»(L’Origine della politica, 1996)에서 이 글이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와 가장 긴밀하게 엮인 전주곡이라고 지칭한 바 있습니다. 이 글에서 베유가 과거에 대한 향수에도, 진보에 대한 믿음에도 반대하며 ‘힘’을 “인간 본성의 보편적인 상수이자 불변항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베유는 “힘 개념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인간 관계들을 명료하게 사고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이자 베유 철학의 무게 중심입니다. 그리고 문명화와 진보가 위험한 까닭은 야만이 종식되었다는 환상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후 전개된 상황을 통해 극단적인 문명화가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이후의 현대사는 이를 교훈 삼아 힘을 쫓아내려 애써 온 역사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음을 날마다 확인하고 있고, 베유의 독특한 입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이처럼 이 글은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로 진입하는 통로로 기능하는 한편 당대 정치적 상황에 대한 베유의 우려도 명확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베유의 저술들이 동시에 번역되어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독자분이라면 이 글부터 읽으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야만에 대한 성찰>은 베유의 «전집»(Œuvres complètes) II-3권(Gallimard, 1989), 222~225쪽에 실렸고, «선집»(Œuvres, Gallimard, 1999), 503~507쪽에도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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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에 대한 성찰들

시몬 베유
리시올 출판사‧이종영 옮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시대가 다소 민감한 기질의 사람들에게 숨 막힐 정도로 지나치게 부과하는 온갖 종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렇게 믿습니다. 테크놀로지의 엄청난 위력의 효과로, 또는 도덕적 퇴폐의 효과로, 또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우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야만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고.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호메로스, 카이사르, 플루타르코스 같은 고대의 아무 텍스트나 펼쳐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학살은 보통 수만 명을 아우릅니다. 카이사르의 이야기들에선 하루 동안 어떤 도시의 거주자 사만 명이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몰살된 것이 예외적인 일이 아닙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노예군을 이끌고 로마 거리를 산책하곤 했습니다. 노예군은 마리우스에게 인사했지만 답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 곧바로 도살했지요. 원로원에서 누구를 죽이고 싶은지 최소한 알려 주기는 하라는 간청을 받은 술라는 지금은 마음속에 아무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떠오르면 그때마다 그 이름을 공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에 남겨진 그 어떤 지난 세기에도 잔혹한 사건들은 넘쳐납니다. 그러므로 무기들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량 학살에는 단순한 칼이, 청동으로 만든 것이더라도, 비행기보다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서 1914년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반대의 믿음, 즉 이른바 문명화된 인류에게서 야만성이 많이 사라졌다는 믿음은, 제가 보기엔, 마찬가지로 틀린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환상을 품으면 위험합니다. 소멸할 것이라고 믿고선 그것을 없애려 애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14년에는 전쟁을 손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미개함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이니 미개할 리가 없다고 믿어서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너무 선하다고 거듭 말하는 사람들은 계기가 주어지면 가장 차갑고 확고한 잔혹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문명의 담지자로 믿는 어떤 집단은, 바로 이 믿음으로 인해, 계기가 주어지자마자 야만적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종, 민족, 사회 계급, 당에 대한 신앙보다 위험한 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진보에 품었던 순진한 믿음을 더는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세계를 핏빛으로 물들이는 야만의 원인을 우리의 세계 바깥에서, 우리에게 낯설거나 그렇다고 확신하는 인간 집단에서 찾습니다. 저는 제안하고 싶습니다. 야만을 인간 본성의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으로 여겨야 한다고. 이 속성은 상황이 계기를 부여하는 정도에 따라 많거나 적게 펼쳐집니다.

이런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표방한 유물론과 완벽히 합치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자체에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메시아적 믿음을 가진 마르크스주의는 미리 정해진 특정한 사회 계급이 문명의 담지자, 유일한 담지자라고 믿으니까요. 마르크스주의는 계급 개념이 역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열쇠를 실제로 이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이 열쇠는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저는 믿습니다. 힘 개념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인간 관계들을 명료하게 사고할 수 없다고. 관계 개념이 수학에서 중심을 차지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관계 개념과 마찬가지로 힘 개념도 해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기꺼이 다음 공리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약자에 대해 야만적이라는 것. 혹은 적어도 미덕의 힘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으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천재성만큼 드문 관대하려는 노력의 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약자에 대해 야만적이라는 것. 한 사회에 얼마나 많은 야만이 퍼져 있는지는 힘들의 분배에 달려 있습니다. 이 관점은, 만일 우리가 그것에 명료한 내용을 부여할 만큼 충분히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안정적이건 일시적이건 모든 사회 구조를 적어도 원리적으론 가치들의 위계 속에 배치할 겁니다. 야만을 악으로, 야만의 부재를 선으로 여긴다는 조건하에서 말입니다. 이 제한은 필수적입니다. 야만에 너무나 잘 적응한 나머지 야만을 대수롭지 않은 세부나 유용한 도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적 문화를 배타적이고 귀족주의적으로 숭배하거나, 야심 가득하거나, 역사의 전개나 이상적인 미래를 우상 숭배하거나, 마음의 완고함을 무감각과 혼동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겠지요.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이 잡지의 독자들도 그렇지 않겠지요.[1]

한 사회 체계 속 힘들의 지형도와 야만의 크기 사이의 그런 관계를 엿보려면 야만 개념을 대중들과는 조금 달리 바라봐야 합니다. 공공적인 감성은 […] 감동받지 않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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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야만인이 아닙니다. 그가 야만인이라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겠지요. 야만인은 피해를 입히지만 제한된 정도를 넘어서까지 해를 끼치진 않습니다. 자연 재해처럼 이들은 파괴를 통해 인간사의 불안정성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야만인의 잔인함과 신뢰할 수 없는 행위들은 충직하고도 너그러운 행위들과 뒤섞여 있고, 변화와 변덕에 의해 완화됩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그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직 극단적으로 문명화되었으면서도,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로마처럼 저열하게 문명화된 국가만이 자신이 위협하고 굴복시킨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해체합니다. 그래서 유효한 저항에 대한 모든 희망을 꺾고, 정신적 삶의 연속성을 과격하고도 결정적으로 끊어 버립니다. 정신적 삶을 보잘것없는 정복자들에 대한 빈약한 모방으로 대체하면서 말입니다. 오직 지성적으로 조직된 국가만이 적들의 저항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지배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즉 잔혹한 메커니즘이 상상력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우월성을 차지하려 할 땐 인간의 허약함으로도 미덕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지배력, 그리고 그런 목적을 위해선 거짓말이나 진실, 협정에 대한 거짓된 존중이나 공공연한 무시를 무차별적으로 이용하는 지배력이 그것입니다. 지금 유럽의 상황은 문명인들이 야만인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독립국들이 식민화의 위협에 직면한 훨씬 까다롭고 위협적인 것입니다. 이에 걸맞은 방법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 위험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을 것입니다.


[1] 시몬 베유는 이 글을 «누보 카이에»나 «에스프리»에 투고하려 했다고 합니다.
[2] La sensibilité publique ne s’émeut…로 문장이 끊겨 있습니다. ‘[…]로부터 감동을 받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쓰려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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