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오늘은 앤 보이어의 에세이 한 편을 공유합니다. «언다잉»의 전작인 에세이 모음집 «어긋난 운명 안내서»A Handbook of Disappointed Fate 첫 글로 수록된 <아니요>No입니다. 보이어가 무엇을 쓰고자 하며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글이에요. ‘아니요’라는 부정이 “내 예술의 논리를 이끄는 주축”이라 선언하는 보이어는 자본주의적 ‘예’를 거스르는 ‘아니요’에서 부정과 긍정의 가능성을 동시에 끄집어 내며, 시에 이 가능성이 새겨져 있다고, 아니 새겨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아직 앤 보이어라는 시인이 낯설게 느껴질 한국의 독자에게 단호하고 진실하면서도 불명료함의 여지를 남기고자 하는 그의 문학을 조명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해 저작권자 앤 보이어의 허락을 받아 번역해 게재합니다. 이 글을 통해 회고록 집필자가 아닌 시인 앤 보이어의 면모를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이 글과 «언다잉»에서 서로의 메아리를 확인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언다잉»이 어떤 정신에 입각해 쓰인 작품인지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아니요

«언다잉» 디자인 후기

디자인 작업에 들어가면 매번 ‘이번 책이 제일 어렵다’며 절규하지만, 그래서 양치기 소년이 된 감이 있지만 «언다잉»은 진짜 제일 어려웠다(믿어줘요,,). 좋은 책이라 느낄수록 ‘내가 감히?’라는 생각이 들면서 위축되고 엄두도 안 나고 무력감만 키우곤 한다. «언다잉»은 놀랍도록 훌륭한 책이어서 우리가 이 책을 펴낸다는 사실에 기쁘고 충만함을 느꼈지만 디자이너로서 나는 점점 쪼그라들어 내 능력과 한계와 적성을 되돌아보는 데 작업 중 꽤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부담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어려움도 컸다. «언다잉»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는 암 수기, 문학이기를 바라는 증언이다. 이 책은 복수의 서사, 복수의 목소리, 복수의 형식을 담고 있고 무엇보다 시적이다. 이 모든 걸 전부 표지에 담아야 할까? 아니면 일부만? 그렇다면 무엇을? 다행스럽게도 지은이 앤 보이어는 이 책에 “유방암은 형식을 흐트러뜨리는 질문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질병이다”라는 문장을 새겨 놓았다. 고민이 좀 걷힌 뒤 우리는 이 문장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고, 구상할 때뿐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난항을 겪을 때도 이 문장이 나를 붙들어 안내해 준 것 같다.

«언다잉» 디자인 후기

옮긴이 후기

전희경 선생님의 <추천의 글>에 이어 오늘은 옮긴이 양미래 선생님의 «언다잉» <후기>를 공유합니다.

한 인터뷰에서 앤 보이어는 «언다잉»이 많은 독자에게 가닿기를 바라며 편집자의 제안을 많이 받아들였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적 충동으로 가득한 그의 산문은 독자를 종종 낯선 곳으로 데려갈 거예요. 번역된 글로 읽는 우리는 길을 잃을 위험이 한층 더 크고요.

하지만 «언다잉»은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장담합니다).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옮긴이 양미래 선생님의 끈기와 노력 덕분이에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책을 펼쳐 드는 순간 바로 실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만큼 <옮긴이 후기>도 «언다잉»의 의의를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하고 있어요. “소음의 장벽을 세우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향해 고통의 근원을 되묻는” 이 책에서 형식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드러내고, “고통을 통한 혁명”을 제안하고 촉구하는 보이어의 급진적 면모를 밝혀 주는 글이에요.

양미래 선생님의 <옮긴이 후기>는 «언다잉»이라는 ‘눈물 사원’에 들어서는 데 요긴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글입니다. 그러니 이 글 꼭 읽어 봐 주세요.

옮긴이 후기

‘아프다’는 것, 쓴다는 것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전희경 선생님의 «언다잉» 추천의 글인 <‘아프다’는 것, 쓴다는 것>을 공유합니다. ‘아픈 사람의, 돌보는 사람의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선생님이라면 앤 보이어의 모험에 동참해 주시리라 기대하며 추천사를 부탁드렸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을 뿐 아니라 매우 감동적인 추천사를 보내 주셨어요.

이 글은 «언다잉»을 ‘투병의 의미를 바꾸는 글’로 정의합니다. 흔히 투병은 질병과의 싸움으로 이해되지만, «언다잉»은 아픈 사람들이 질병과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겪으며 살아가기 위해 싸운다는 진실을 드러내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진단명으로 축소될 수 없는 고유한 삶을 필사적인 글쓰기로 드러내는 것, 세상이 아픈 사람으로부터 듣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아픈 몸을 가로지는 “젠더, 계급, 인종 차별, 의료 제도, 자본에 대해 쓰는 것”, 이것이 ‘병은 당신을 무기로 변모시킨다’(64)는 말의 의미일 거예요.

전희경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보이어가 «언다잉»에서 보여 준 ‘쓰기’를 통한 ‘살기’의 길이란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쓰고자 했던 분투의 결과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보이어가 그렇게 했듯 이제 우리도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쓰기’로 나아가길 권하는 이 글을 함께 읽어요.

‘아프다’는 것, 쓴다는 것

막을 올리며

앤 보이어는 «언다잉»의 <막을 올리며>에서 유방암에 걸린 뒤 그 사실을 어떤 형태로든 기록한 여성 작가들을 소개합니다. 이는 이들과 동행하겠다는 의지 표명인 동시에 이 작가들이 직면했던 문제 하나가 자신의 기획에도 출몰해 있다는 사실 확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가요.

사회는 암 환자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갖추라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싸워 이기라고, 유방암처럼 젠더화된 암의 경우 여성성을 유지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맞추어 생산된 수많은 승리 서사가 소음을 이루며 진실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을 쓰고자 하지만 그 진실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유방암은 형식을 흐트러뜨리는 질문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질병”이며, 오늘날의 과제는 “툭하면 우리 삶의 이야기를 묵살해 버리는 소음에 맞서 저항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처럼 <막을 올리며>는 이 책 전체의 문제 의식과 목표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지만, «언다잉»의 매력은 그 방향마저 흐트러뜨리고 수많은 가지를 치면서 예상치 못한 형식으로 뻗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낯선 여정에 여러분도 동행해 주세요.

막을 올리며

«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 디자인 후기

나도 몇 종류의 식물과 함께 살고 있다.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이 어울리게 된 건(식물이 죽어가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하지만 죽어가고 있는 식물도 있다……) 최근 몇 년의 짧은 기간뿐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15년 전쯤부터 간간이 식물을 구입해 온 것 같다. 봄이 되면 대개 꽃집 앞 인도에 넘쳐흐르듯 꽃 화분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광경을 보면 늘 주변에서 발길이 멈췄고, 주머니를 뒤적이면 나오는 이삼천 원으로 뿌리까지 달린 꽃이나 좋아하는 모양의 이파리를 가진 관엽 식물을 살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뽐내던 식물들은 언제나 우리 집에만 데려오면 곧장 안색이 어두워지며 죽고 말았다. 꽃집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일주일에 한 번만 물을 듬뿍 줬더니 시들었고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뒀더니 흙에서 웬 버섯이 올라왔다. 죽으면 버렸고 이듬해 예쁜 화분이 보이면 또 샀다…….

«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 디자인 후기

‘시들게 하기’란 ‘돌보기’와 같은 것

‘시들게 하기’란 ‘돌보기’와 같은 것

야규 신고(원예가)

저는 어린 시절에 식물과 만나고 원예에 뜻을 품어 지금은 야쓰타케 구락부라는 곳에서 매일 식물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오래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것은 식물이란 꽃을 피울 때만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싹 틀 때도 좋고 꽃이 진 다음도 좋습니다. 벌레가 잎사귀를 갉아먹어도, 그러다 급기야 시들어도 그렇습니다. 결코 화사할 때의 볼거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식물과 함께하는 삶은 마음이 덜컥 움직이는 시간의 연속입니다.

그 매력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원예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이어 가던 중에 원예에 두 갈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꽃을 ‘잘 키우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와 있는 원예 책의 99%가 그런 내용을 다루는 이른바 ‘하우 투’How to 책입니다. 또 하나 다른 접근법이 있는데 그것이 제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그것은 식물과 더불어 일희일비하는 것입니다. “앗, 시들었잖아!”라거나 “늘어났다!”라거나 “말라죽었어!”같이, 또한 “벌레다!”나 “열매가 열렸어!”같이 말이죠. 식물과 함께 우왕좌왕하고 싶습니다. 딱히 멋은 없지만 비길 데 없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미디어를 활용해 그런 우왕좌왕의 즐거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시들게 하기’란 ‘돌보기’와 같은 것

비평의 위기와 ‘모던 걸’

«현대비평» 2020년 겨울호에 발표되었던 문학평론가 안지영 선생님의 «관광객의 철학» 서평을 공유합니다. ‘일본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한 가라타니 고진에 의해 발탁되어 «관광객의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아즈마 히로키의 행보를 일본 비평사에 등장한 ‘비평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하고, “아즈마가 미처 발화하지 못한 우글우글대는 무수한 가능성”에도 눈길을 주는 글입니다. 이 글과 함께 «관광객의 철학»이 더 많은 ‘오배’를 불러오기를 바랍니다.

비평의 위기와 ‘모던 걸’

1 빅 실버

«살림 비용»의 첫 장 <빅 실버>를 공유합니다. 앞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 누구를 위해 쓸 건지에 관한 데버라 리비의 다짐을 엿볼 수 있는 챕터예요.

«살림 비용»은 길지 않은 열한 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중 특히 짤막한 이 장에서 리비는 묘하게도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자신이 목격한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어요.

리비의 글로 전해진 이 일화는 «살림 비용» 전체의 무대를 설정하는 한편 몇몇 단어와 착상(폭풍과 보트, 빅 실버로 불리는 남성, 밝히지 않은 상처 등)은 반복되는 모티프로 활용되어 뒤에서도 거듭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장의 배치가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책을 읽어 갈수록 여기에 던져진 말들이 잔상처럼 남아 계속 곱씹게 돼요. 그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무척 강렬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특별한 장이 «살림 비용»이라는 책의 내부를 궁금해하고 상상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 봅니다.

1 빅 실버

«살림 비용» 추천의 글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감명 깊게 읽은 분들이라면 책 말미에 수록되어 그의 글이 가진 섬세한 결을 서로 다른 조명으로 밝혀 보였던 세 편의 ‘추천의 글’도 여러 번 곱씹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혹은 쓰기 시작하려는 여성, 그러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여성을 위한 책인 «살림 비용»을 준비하면서 이번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여성 등장 인물을 창조하며 한국 문학을 갱신하고 있는 세 작가께 추천의 글을 받았습니다.

항상 새로운 문체로 치열하게 여성 서사를 개척해 온 강영숙 선생님은 «살림 비용»의 요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추천사를 기고해 주셨고, 독립적인 여성이 마주하는 이 사회의 속내를 단단한 문장으로 그려 온 강화길 선생님은 리비의 문장을 통해 위 세대 여성 작가들을 다시 만나며 다진 각오를, 여러 작품을 통해 뭉클한 여성 연대로 독자들을 초대했던 최은미 선생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공동의 장에서 맞닿”는 언어의 기쁨을 담은 추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 여기에 발 딛고 활발한 창작을 이어 가고 있는 작가들의 문장이 이 책에 불어넣은 생생한 숨결을 느껴 보세요.

«살림 비용» 추천의 글

«커밍 업 쇼트» 디자인 후기

‘또 하나의 세대론이 추가되는 걸까, 그래 뭐 의미 있는 일이니까. 이 책은 청년들을 호되게 비판하려나 아니면 감정적으로 위로하려나?’
출력해 둔 원고를 읽으려 책상 앞에 앉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청년이라고 하기 애매한 나이 때문인지 요즘은 청년 관련 담론을 접하면 거기 등장하는 청년 세대 대부분이 나와 거리가 있다고 느낀다. 책의 주인공인 청년보다 청년들에 관해 진단을 내리고 있는 저자 세대에 더 가깝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니,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고, 나는 그사이에 끼어 있는 제삼자라고 둘러대며 내 앞가림이나 신경 쓰는 게 속 편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요즘 세대가 좀 그렇긴 해’,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삶이긴 하겠지’같이 남 얘기하듯 얄미운 목소리나 보태는 무신경한 관조자였다. 그런데 «커밍 업 쇼트»에서 만난 청년들은 생계에 노심초사하거나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가는 ‘노동 계급’이었고, 그런 탓인지 이들과 거리를 유지하거나 나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읽으면서 하나 둘 내 얘기인 것 같은 부분이 늘어났는데, 청년들이 가진 유일한 자원이자 리스크가 자기 자신이며, 또한 고통의 주범을 가족과 부모에서 찾고 거기에서 해방되려 애쓰며, 과거 중심의 치료 서사를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한다는 대목에 가서는 마음속으로 처절하게 울부짖고 말았다. 나를 고스란히 옮겨다 무자비하게 파헤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커밍 업 쇼트» 디자인 후기

반-치료

오늘은 마크 피셔의 글 <반-치료>를 공유합니다.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에 대한 일종의 서평이자 조금 더 확장된 논의를 펼치는 글이기도 해요. 번역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옮김 박진철 선생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마크 피셔는 현실의 기저에 있는 ‘실재’들을 환기하는 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전략일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 ‘정신 건강’이라는 쟁점을 그런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로 설정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무드 경제와 치료 담론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커밍 업 쇼트»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커밍 업 쇼트»가 출간된 후 이 책을 소재로 몇 편의 글을 쓰거나 대담을 나누었으니까요. 오늘 번역해 블로그에 올리는 이 글도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반-치료>는 2015년에 진행한 한 대담을 전사한 것으로, 생전에는 출간된 적 없고 피셔의 유고집인 «K-Punk»에 수록되어 (영어로) 처음 공개된 글입니다. 여러 책에 대한 논평 형식을 취하는 이 글에서 피셔는 영국과 미국에서 감정 정치가 부상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이 현상이 초래한 두 가지 문화적 곤란을 ‘치료적 상상계의 이율 배반’으로 진단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 이율 배반을 넘어 대항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합니다.

미국과 영국에 만연한 (하지만 한국도 예외가 아닌) 치료 문화에 대한 «커밍 업 쇼트»의 분석을 조금 더 폭넓은 문화 정치/이론 맥락에 두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피셔의 «K-Punk»를 박진철 선생님의 번역으로 2021년 하반기에는 출간하고자 준비 중이에요. 그의 더 많은 글을 기다리는 독자들께 이 글이 갈증을 조금 해소시켜 주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반-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