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도의 정치적 우위

미셸 페어가 2019년에 «퍼블릭 북스»Public Books에 기고한 짧은 글 <신용도의 정치적 우위>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미셸 페어와 «퍼블릭 북스»의 허락을 얻어 번역문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원문 링크: The Political Ascendancy of Creditworthiness

이 글은 기업 영역뿐 아니라 선거 정치 영역에서도 ‘신용도’를 둘러싼 싸움이 결정적인 내기물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일견 앞뒤가 맞아 보이지 않는 포퓰리즘 우파의 급부상이에요.

포퓰리스트들은 글로벌 엘리트에 대한 인민의 분노를 이용한 덕분에 정권을 잡았다고 이해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포퓰리스트들은 이 엘리트들의 든든한 우군이에요. 그럼에도 지지자들은 이들에 대한 충성을 거두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페어는 ‘신용도’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포퓰리스트들이 지지층의 ‘포트폴리오’(피부색, 젠더 규범, 문화 전통 등) 가치를 상승시키겠다고 약속하며 집권에 성공했다고 강조합니다.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보호하면서도 러스트 벨트의 원한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이런 포퓰리즘에 대항하려면 “자산 평가에 대한 이들의 독점과 경합하고자 분투”해야 한다는 것이 페어의 논지입니다. 그러면서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미투’,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 같은 운동들을 “자신만의 등급 평가 체계를 생산하고 유통”하고자 한 시도로 보자고 제안해요.

“이들의 목적은 제도적 특권, 구조적 인종주의, 젠더 규범, 강력한 로비가 비호해 온 프로젝트나 관행의 신용도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이런 기획과 관행이 평가 절하하는 생명들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이다.” 바로 정치 영역에서 벌어지는 대항 투기인 것이죠.

신용도의 정치적 우위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

미셸 페어가 2021년 초 벌어진 ‘게임스탑 사태’를 다룬 글인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이 글은 인류학자이자 «피투자자의 시간» 출간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신 이승철 선생님께서 옮겨 주셨어요. 이 글은 시드니 대학에 기반을 둔 ‘정치 경제학의 진보'(Progress in Political Economy, PPE)에 게재되었고, 미셸 페어와 PPE의 허락을 얻어 번역문을 블로그에 올립니다.
원문 링크: Another Speculation is Possible: The Political Lesson of r/WallStreetBets

게임스탑 사태(본문에 세부 정황이 나와 있어요)는 레딧에 모인 아마추어 투자자들이 대형 헤지 펀드와 플랫폼을 한 방 먹인 통쾌한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지노 자본주의의 위험과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사례 이상으로 해석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반면 미셸 페어는 투기의 동학을 이제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이 사태가 증언하고 있다 말합니다. 그러곤 물어요. “콘솔 비디오 게임과 구식 휴대 전화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행해진 이 같은 실천들을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

«피투자자의 시간»에서도 강조하듯 페어는 약탈적인 기업과 금융 기관에 불리한 방향으로 대항 투기를 벌이려면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도박 공동체들’과 대안적인 ‘평가 기관들’[신용 평가사]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플랫폼의 발달 덕분에 힘 없는 이들이 금융의 “자기 실현적 예언” 게임에 참가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수월해졌다고 말하면서 “이제 또 다른 투기가 가능해졌다”고 주장해요.

게임스탑 사태는 금융 자본주의에 의식적으로 도전한 사례는 아닐지라도 이런 전략들의 활용 가능성을 드러내 준 사건이라 할 만해요.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다 보면 우리의 관심사도 어떤 액티비즘이 ‘정치적으로 순수하냐’에서 ‘다른 목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느냐’로 옮겨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게임스탑 사태에서 일반 투자자들이 “금융시장의 자기참조적 구조”를 간파해 활용했고, 이 ‘운동’이 포퓰리즘적 요소를 포함했음을 분석하는 이승철 선생님의 논문 <금융의 프랑스 혁명?: 게임스탑 사태와 투자자 포퓰리즘의 등장>(«문화연구» 10.1, 2022)도 함께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오픈 액세스라 무료로 다운받아 볼 수 있어요).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

«피투자자의 시간»

«피투자자의 시간: 금융 자본주의 시대 새로운 주체성과 대항 투기»
미셸 페어 지음 | 조민서 옮김 | 364쪽 | 21,000원

2008년 금융 위기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뒤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더 공고해졌으며, 특히 금융은 사회 전 분야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한 위력을 자랑한다. 이 책은 과거의 저항 방식을 고수하거나 ‘대안 없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금융 ‘내부’에서 금융에 맞서 도전을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금융화가 생산한 ‘피투자자’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전유해 벌이는 ‘대항 투기’들에 주목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과 정책은 개개인을 기업가적 주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 실제로 도래한 체제는 금융화였고, 막상 금융 권력이 헤게모니를 쥐고 나자 우리 대다수는 투자를 받기 위해 경제적, 비경제적 신용도를 끌어올리려 분투하는 피투자자가 되었다. 이 책은 우리가 피투자자라는 정체성을 전유해 반격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기업 경영, 국가 통치, 개인 품행이라는 세 영역에 초점을 맞춰 피투자자 액티비즘이 신용이라는 무기를 활용할 방안을 제시한다.

좌파가 현재 우울에 빠져 있는 것은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와 금융화의 공세에 패배를 거듭한 탓이다. 이 책은 우울을 우파 쪽으로 되돌리려면 익숙한 과거로 돌아가려 애쓰는 대신 현재의 조건을 포착하고 그 조건 안에 거주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이 자기 실현적 예언 게임에 참가하는 것, 즉 주주와 채권자의 권력을 표적으로 삼아 신용이 할당되는 조건을 두고 당당하게 대항 투기를 벌이는 것이다.

«피투자자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