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디자인 후기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서발턴에 관한 글을 썼다는 것과(이렇게 말하지만 서발턴에 대해선 내가 또 뭘 알겠나..) 아주 박식한 사람들마저 진저리를 칠 만큼 어려워한다는 것 정도? 그렇지만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사진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로도 예감할 수 있듯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도. 그래서 벵골 출신의 이 노장 여성 학자의 책을 우리가 출간하기로 결정했을 때, 근거 없는 자부심이 나를 감쌌다. 스피박이라니! 하지만 스피박을 오랫동안 좋아한 옮긴이 선생님이 번역 원고를 보내시고 그와 함께 스피박을 오랫동안 흠모한 편집자가 1교, 2교를 거치며 교정지에 얼굴을 파묻고는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머리칼을 쥐어뜯는 걸 지켜보면서, 자부심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불안이 나를 휩쌌다.

«읽기» 디자인 후기

«언다잉» 디자인 후기

디자인 작업에 들어가면 매번 ‘이번 책이 제일 어렵다’며 절규하지만, 그래서 양치기 소년이 된 감이 있지만 «언다잉»은 진짜 제일 어려웠다(믿어줘요,,). 좋은 책이라 느낄수록 ‘내가 감히?’라는 생각이 들면서 위축되고 엄두도 안 나고 무력감만 키우곤 한다. «언다잉»은 놀랍도록 훌륭한 책이어서 우리가 이 책을 펴낸다는 사실에 기쁘고 충만함을 느꼈지만 디자이너로서 나는 점점 쪼그라들어 내 능력과 한계와 적성을 되돌아보는 데 작업 중 꽤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부담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어려움도 컸다. «언다잉»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는 암 수기, 문학이기를 바라는 증언이다. 이 책은 복수의 서사, 복수의 목소리, 복수의 형식을 담고 있고 무엇보다 시적이다. 이 모든 걸 전부 표지에 담아야 할까? 아니면 일부만? 그렇다면 무엇을? 다행스럽게도 지은이 앤 보이어는 이 책에 “유방암은 형식을 흐트러뜨리는 질문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질병이다”라는 문장을 새겨 놓았다. 고민이 좀 걷힌 뒤 우리는 이 문장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고, 구상할 때뿐 아니라 작업 과정에서 난항을 겪을 때도 이 문장이 나를 붙들어 안내해 준 것 같다.

«언다잉» 디자인 후기

«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 디자인 후기

나도 몇 종류의 식물과 함께 살고 있다.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이 어울리게 된 건(식물이 죽어가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하지만 죽어가고 있는 식물도 있다……) 최근 몇 년의 짧은 기간뿐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15년 전쯤부터 간간이 식물을 구입해 온 것 같다. 봄이 되면 대개 꽃집 앞 인도에 넘쳐흐르듯 꽃 화분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광경을 보면 늘 주변에서 발길이 멈췄고, 주머니를 뒤적이면 나오는 이삼천 원으로 뿌리까지 달린 꽃이나 좋아하는 모양의 이파리를 가진 관엽 식물을 살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뽐내던 식물들은 언제나 우리 집에만 데려오면 곧장 안색이 어두워지며 죽고 말았다. 꽃집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일주일에 한 번만 물을 듬뿍 줬더니 시들었고 해가 잘 드는 창가에 뒀더니 흙에서 웬 버섯이 올라왔다. 죽으면 버렸고 이듬해 예쁜 화분이 보이면 또 샀다…….

«내 맘대로 베란다 원예» 디자인 후기

«커밍 업 쇼트» 디자인 후기

‘또 하나의 세대론이 추가되는 걸까, 그래 뭐 의미 있는 일이니까. 이 책은 청년들을 호되게 비판하려나 아니면 감정적으로 위로하려나?’
출력해 둔 원고를 읽으려 책상 앞에 앉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청년이라고 하기 애매한 나이 때문인지 요즘은 청년 관련 담론을 접하면 거기 등장하는 청년 세대 대부분이 나와 거리가 있다고 느낀다. 책의 주인공인 청년보다 청년들에 관해 진단을 내리고 있는 저자 세대에 더 가깝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니,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고, 나는 그사이에 끼어 있는 제삼자라고 둘러대며 내 앞가림이나 신경 쓰는 게 속 편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요즘 세대가 좀 그렇긴 해’,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삶이긴 하겠지’같이 남 얘기하듯 얄미운 목소리나 보태는 무신경한 관조자였다. 그런데 «커밍 업 쇼트»에서 만난 청년들은 생계에 노심초사하거나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가는 ‘노동 계급’이었고, 그런 탓인지 이들과 거리를 유지하거나 나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읽으면서 하나 둘 내 얘기인 것 같은 부분이 늘어났는데, 청년들이 가진 유일한 자원이자 리스크가 자기 자신이며, 또한 고통의 주범을 가족과 부모에서 찾고 거기에서 해방되려 애쓰며, 과거 중심의 치료 서사를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한다는 대목에 가서는 마음속으로 처절하게 울부짖고 말았다. 나를 고스란히 옮겨다 무자비하게 파헤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커밍 업 쇼트» 디자인 후기

«관광객의 철학» 디자인 후기

원고지 1200매라는 분량을 듣고 이 책의 판형은 128×200으로 해야겠다 싶었다. 리시올/플레이타임에서 펴낸 책들의 판형은 세 종류(122×190, 128×200, 138×210)다. 190부터 세로가 10mm씩 늘어난 세 가지 판형이다. 꼭 10mm씩 간격을 두자고 결심한 건 아니었고, 얇고 가벼운 책들을 먼저 내고 점차 무게 있는 책들도 출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렇게 정했다. 각각의 판형 모두 많이 고민한 뒤 결정했고 판형만으로도 여전히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새여서, 앞으로의 책들도 대부분 이 세 판형을 기준으로 삼게 될 것 같다. «관광객의 철학»은 적당한 분량의 인문서이므로 둘째 크기의 판형인 128×200으로 결정했다.

«관광객의 철학» 디자인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