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밈

«k-펑크» 1권을 여는 글 중 하나인 <책 밈>을 공유합니다. 이 글에서 피셔는 책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에 답하며 자신에게 가장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책들을 소개합니다.

그는 카프카를 가장 내밀하고 지속적인 동반자로 꼽은 뒤 10대의 우정에 담긴 잔인함을 분석한 애트우드의 차가운 합리주의를 언급하고, 스피노자의 탁월함을 ‘비디오드롬’에 빗대는가 하면 밸러드, 그레일 마커스와의 계시에 가까운 마주침을 들려줍니다.

«k-펑크» 작업을 시작할 때는 피셔가 이 책들을 자신의 만신전에 올려놓은 것이 조금은 (어떤 책은 매우) 의외였습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 책들의 두터운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주제의 측면만이 아니라 피셔의 시선과 정신을 육성했다는 측면에서도요.

지난한 작업 끝에 «k-펑크» 1권을 출간하면서 먼저 이 글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 «k-펑크» 전체의 입구라 할 만하거든요. 수치심, 부적합하다는 감각, 주체성에 대한 관심, 계급 이동 경험, 모더니즘에 대한 애정과 펑크에 대한 충실성 등 거의 모든 실마리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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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밈

적어도 두 명에게 이걸 해 달라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마침내―해 본다.

1) 가지고 있는 책이 얼마나 되나요?
알 도리가 없네요.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건 분명하고 셀 방법도 없어요.

2) 제일 최근에 산 책은 무엇인가요?
마리오 페르니올라의 «비유기체의 섹스 어필»입니다.

3) 제일 최근에 읽은 책은 무엇인가요?
다 읽은 책은 마이클 브레이스웰의 «잉글랜드는 내 것»England is Mine, 2005이에요. 실망스럽고 불만족스러웠어요. 통찰이 번득이는 대목도 있지만 장 구성이 들쭉날쭉해요. 어느 부분에선 서사가 역사적이지만 다음 부분에선 주제 중심이고 그런 다음에는 또 지역을 다루는 식으로요. 단순히 사건들이 벌어진 시간에 접근하고 있거나 그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책이에요. 브레이스웰이 소재에 더 초점을 맞췄다면 나았겠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네요. 그래서 올해 출간될 그의 록시 뮤직 책을 여전히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고요(그리고 이 책은 잉글랜드 문학에 너무 과하게 관심을 쏟고 있어요. 반면에 저는 예컨대 W. H. 보덤에게 계속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할 거고요).
거의 다 읽어 가는 책은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1998예요. 과연 지젝이 좋아할 만한 책이더군요. 황량한 히피 쾌락주의와 그것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유산인 뉴 에이지의 선 운운하는 헛소리를 이보다 무참히 난도질한 작품이 있을까요?

4) 각별한 책 다섯 권을 뽑아 주세요.
(저는 가장 최근의 것을 제일 윗자리에 올려놓는 최고의 영화/책/음반 설문을 싫어해요. 그래서 적어도 10년 이상 제게 의미 있었던 책만 골라 봤습니다.)

# 카프카: «소송»과 «성»
열넷에서 열일곱 살 사이에 접했던 책과 앨범, 영화가 미친 충격을 커서 온전히 다시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요? 성인이 되고 가장 슬펐던 때는 청소년기에 조이스, 도스토옙스키, 버로스, 베케트, 셀비의 책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한 충실성을 잃은 시절이었어요. 이들 중 누구를 골라도 이상하지 않지만 카프카를 택하겠어요. 카프카야말로 가장 내밀하고 지속적인 동반자였거든요.
펭귄 출판사에서 낸 선집인 «프란츠 카프카 소설집»으로 그를 처음 접했어요. 문학에 문외한이던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 주셨죠. “네 취향일 것 같아서”라고 하셨는데 정말로 그랬어요.
카프카의 텍스트를 처음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기억하기가 어렵네요. 애초부터 즐겁게 읽었는지 아니면 불만족스러웠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카프카는 훅 치고 들어오는 작가가 아니니까요. 그는 미묘하게, 서서히 침입하죠. 당시에 저는 실존주의적인 소외를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원하고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카프카에게는 그런 면이 거의 없었죠. 형이상학적 과시의 세계가 아니라 지저분하고 좁아터진 굴 같았어요. 그곳의 주된 정동은 영웅적인 소외가 아니라 스멀스멀한 당혹감이고요. 카프카의 허구에서 물리력은 거의 아무 역할도 맡지 않아요. 구불구불 전개되는 그의 비플롯을 움직이는 동력은 바로 사회적으로 수치를 겪을 항구적인 가능성이죠.
딱한 상황을 연출하는 «소송» 장면들을 떠올려 볼까요. K는 한 사무실 건물에 도착합니다. 법원으로 쓰이는 방을 찾고자 방마다 문을 두드리며 애처롭게 “여기에 목수가 살고 있나요?”라고 핑계를 대죠. 카프카가 천재적인 까닭은 이 상황의 부조리함을 평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에요. 놀랍게도 우리의 모든 예상을 깨고 K의 심리가 정말로 건물의 한 방에서 열리니까요. 아무렴요. 그리고 그는 왜 〔심리에〕 지각하는 걸까요? 사태가 부조리하다고 K가 생각할수록 법원이나 성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당혹감도 커집니다. 그에게 복잡하게 뒤엉킨 관료주의는 터무니없고 좌절만 안기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는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성»을 여는 희극적인 장면들을 살펴봅시다. 전체주의보다는 콜 센터를 예견하는 이 대목에서 K는 전화기들이 “악기처럼 쓰인다”는 말을 들어요. 얼마나 멍청하길래 그들 자리에 전화를 걸면 받을 거라고 기대하는 걸까요? 얼마나 물정 모르는 풋내기길래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당혹감의 계관 시인인 앨런 베넷이 괜히 열렬한 카프카 찬미자인 게 아니에요. 지배 계급의 의례, 억양, 의복이 아무리 부조리해 보이더라도 그걸로 이 계급을 당혹감에 빠뜨릴 순 없다는 걸 베넷과 카프카 모두 이해하고 있어요. 이 계급만이 이해하는 특별한 코드가 있어서가 아니에요(확실히 해 두자면 코드 따위는 없습니다). 이들이 뭘 하든 괜찮기 때문이죠. 이들이 하는 거니까요. 역으로 ‘특권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면 당신은 뭘 해도 결코 괜찮지 않아요. 선험적으로 유죄니까요.

# 애트우드: «고양이 눈»
얼마 전에 루크가 제게 ‘차가운 합리주의’cold rationalism 문학의 사례 하나만 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차가움으로 명성 자자한 애트우드가 확실한 정답입니다. 물론 모든 문학이 어느 정도는 차가운 합리주의 성격을 띠죠. 왜 그럴까요? 문학 덕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과 사슬로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얼마간 자유에 이르게 되니까요(스피노자를 숭배한 워즈워스도 시란 “평정 속에서 회상한 감정”이라고 묘사했어요. 일종의 디오니소스적 사정射精 속에서 표현된 날것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죠).
«고양이 눈»1988이 제일 좋아하는 애트우드 소설은 아니에요. 비할 바 없이 황량한 «떠오름»1972이 으뜸이겠죠. 하지만 제게 가장 의미 있는 소설은 «고양이 눈»입니다. 사실 플롯도 완전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10대의 ‘우정’에 담긴 냉혹한 홉스적 잔인함을 애트우드가 소름 끼칠 만큼 생생하게 묘사한 건 앞으로도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그 애들은 당신 뒤를 졸졸 따라다니죠. 당신이 신은 신발을, 당신의 걸음걸이를 품평하려고요… 당신에게 이 아이들은 최악의 적보다 더 최악이에요. 길고 긴 하루하루, 아침 토스트를 베어 물었는데 그게 판지로 바꿔치기되어 있고, 극심한 불안이 끝없이 이어진 나머지 불안하다는 사실을 잊고 더는 의식조차 못 하는 나날.
당신의 가장 중요한 형성기는 유년기나 10대 초반이었나요? 20대 초에 «고양이 눈»을 읽은 경험이 제겐 일종의 자기 정신 분석이었어요. 덕분에 10대 시절의 유산이었던 인간 혐오, 억누른 분노, 내가 어디에도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우주적인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얼음장 같은 애트우드의 분석은 저 시절에 느낀 굴욕감들이 10대가 맺는 관계의 구조적 효과임을 아름답게 증명해 주었어요. 저만의 유별난 경험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요.

# 스피노자: «윤리학»
스피노자는 모든 것을, 단 점진적으로, 변화시켜요. 스피노자주의에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따위의 회심은 없어요. 최초 가정들이 꾸준히, 하지만 엄격히 삭제될 따름이죠. 최고로 탁월한 철학이라면 응당 그렇듯 «윤리학» 읽기는 비디오드롬 테이프를 틀어 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그걸 플레이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결국 그것이 당신을 플레이하니까요. 당신이 생각하고 지각하는 방식을 점진적으로 변형하면서요.
학부생 시절부터 스피노자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제대로 읽은 건 워릭 대학에 들어간 뒤였어요. 들뢰즈의 영향이었죠. 우린 읽기 모임을 조직해 1년 넘게 «윤리학»에 빠져 살았어요. 무시무시하게 추상적인 동시에 곧바로 실천적인 철학이 거기 있었습니다. 상상 가능한 한에서 가장 포괄적인 우주적 범위와 정신의 가장 미세한 세부 양자를 아우르는 철학이었어요. 구조 분석과 실존주의를 잇는 ‘불가능한’ 가교라 할까요.

# 밸러드: «잔혹 행위 전시회»
스피노자와 카프카가 서서히 효과를 발휘했다면 밸러드의 충격은 즉각적이었습니다. 그는 미디어 신호로 포화 상태인 어떤 무의식에 매개 없이 접속한 인물이에요.
밸러드가 제게 각별한 건 그의 작품을 실제로 읽기 오래전에 그와 마주친 경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조이 디비전(사실 대부분의 가사보다는 해넷의 사운드 덕분이었죠. 비통하게 애원하는 노래 <잔혹 행위 전시회>는 밸러드의 무감정한 냉정함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요)을 통해, 울트라복스와 〔이 밴드의 보컬리스트였던〕 존 폭스를 통해, 카바레 볼테르를 통해, 매거진을 통해서요.
그의 재난 소설 중 최고는 «물에 잠긴 세계»1962예요. 침수된 런던을 문자 그대로 초현실주의 풍경으로 묘사하죠. 콘래드가 환생하기라도 한 듯이 냉담하게요. 하지만 불가결한 작품은 «잔혹 행위 전시회»1970입니다. «잔혹 행위 전시회»는 20세기의 자원들을 조립해 그 세기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이고 방법론적인 레퍼토리를 제공해 주었어요. 더 유명한 «크래시»1973보다 훨씬 많이요. 엄격하게 모더니즘적인 이 작품은 플롯이나 캐릭터에 거의 아무 자리도 내주지 않아요. 이야기보단 허구적인 조각물에,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일련의 패턴에 가깝죠.
맞아요, 밸러드는 신문에 서평이 실리는 작가가 되었고 존경받는 원로가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의 배경이 옥스브리지의 표준적인 문필가들과 얼마나 다른지 잊지 맙시다. 밸러드는 영국을 영문학에서, ‘품위 있는’ 휴머니즘적 확신과 하품만 나오는 주말판 신문 부록에서 구출한 인물이에요.

# 그레일 마커스: «립스틱 자국들»
이 책이 제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지난번에도 쓴 적이 있어요. 학부 졸업 직후에 읽었죠. 계획이라곤 없었고, 대처주의의 경제적 현실 원칙에 저 자신을 끼워 맞춰야 하는―실패할 게 뻔한―암울한 미래만 남겨져 있었어요. 그때 마커스의 방대한 연결망이 탈출로를 열어 주었습니다. 이 책은 역사를 횡단하는 하나의 사건을, 재세례파, 상황주의자,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 펑크를 아우르는 어떤 돌발을 기술하고 있어요. 그와 같은 사건은 80년대의 대형 스펙터클들과, 즉 각본에 따라 연출되고 조직된 비사건들―그 진앙인 라이브 에이드를 필두로 전 세계 텔레비전에 방영된―과 정확히 대척점을 이루고 있었고요. 순간적이고 은밀했죠. (필연적으로) 엄청나게 집단적이었을 때조차도요. «립스틱 자국들»1989은 팝이 ‘그저 음악’이기를 그칠 때, 팝이 자본주의적 의회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정치 및 학계와 아무 관계도 없는 철학과 공명할 때, 바로 그럴 때만 여하한 의의를 가질 수 있음을 입증해 주었어요.
«립스틱 자국들»을 읽는 최선의 방법은 펑크가 불러일으킨 충격을 그보다 10여 년 뒤에 기록하고자 시도한 텍스트적 리좀의 일부로 이 책을 이해하는 거예요. 여기에는 잡지 «베이그»Vague(CCRU식 사이버펑크 이론의 가장 강력한 기폭제 중 하나가 마크 다우넘의 «베이그» 기고문들입니다)와 존 새비지의 «잉글랜드의 꿈»England’s Dreaming도 포함되고요(물론 이 조합은 «찢어 버리고 다시 시작해»Rip It Up and Start Aagin 출간으로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5) 다섯 명을 태그해 주세요.
제가 아는 블로거는 이미 이걸 다 해 버려서 누굴 태그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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