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크 피셔의 생애과 생각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사이먼 해먼드(Simon Hammond)의 <k-펑크 전반>(k-punk At Large)이라는 글을 번역해 공유합니다. «뉴 레프트 리뷰» 118호(2019년 7/8월)에 게재된 글로, 지은이와 «뉴 레프트 리뷰»는 무료로 번역을 허락해 주었어요. 이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Copyright © 2019 New Left Review, Simon Hammond)
원문 링크: https://newleftreview.org/issues/ii118/articles/k-punk-at-large
피셔가 사망한 후 그를 기리는 글이 여러 편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밟아 온 지적, 개인적 궤적을 사회문화적 변동과 연결한 작업은 아직 드문 편인데요. 해먼드의 이 글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해먼드는 한 편의 글이라는 한계 안에서 피셔의 삶과 작업을 돌아봅니다. 특히 앞선 세대의 주요 문화 이론가였던 스튜어트 홀과 피셔를 비교하면서 대처리즘하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신노동당 집권기에 지적 경력을 시작한 피셔가 이전 세대와 얼마나 상이한 조건에서 활동했는지 드러냅니다.
피셔는 사적인 경험과 기억을 역사적 이행과 연결하는 감각이 비상한 비평가였습니다. 또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 및 문화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때로는 뚜렷이 낙관적이고 또 때로는 비애감이 두드러집니다), 역으로 그의 글 상당수는 사회 변화나 사건에 개입하려는 시도였어요.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의 맥락을 밝혀 주는 문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 글이 마크 피셔의 사고가 어떻게 빚어지고 변화해 왔는지 궁금했던 분들에게 유용한 동행이 되지 않을까 해요. 열심히 작업했고 여러분과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k-펑크»와 함께 즐겁게 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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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펑크 전반[1]
사이먼 해먼드
리시올/플레이타임 편집부, 박진철 옮김
잉글랜드 출신 작가이자 문화 비평가인 마크 피셔는 통렬한 첫 책인 «자본주의 리얼리즘»(2009)으로 여전히 가장 유명할 것이다. 한 반체제 출판사의 초기작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출간 후 뜻밖의 성공을 거두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신자유주의 아래 잔뜩 쪼그라든 상상 지평에 이 책이 가한 맹비난―피셔가 컬트 블로그인 k-펑크에서 예행 연습을 거쳐 발전시킨―은 호황이었던 시장 승리주의 기간에 정식화된 것이지만 책 자체는 극적으로 상이한 맥락, 즉 금융 위기로 세계가 휘청거리던 시점에 출간되었다. 때맞춰 나온 책이었다. 피셔가 위기를 진단하며 강조했듯 이 위기의 효과는 양면적이었다. 위기로 인해 시스템이 의심에 휩싸였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당] 정부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이 의심을 증폭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 영국에서는 상황이 심화되었다. 이듬해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다시 잡았고, 이들이 단행한 긴축 조치가 곧 새로운 반정부 물결을 유발한 것이다. 피셔―일차적으로는 문화 이론가였던―는 이 새로운 정세에서 갑자기 활기를 띤 [정치] 환경의 일부가 되었고, 한층 격동하는 분위기를 타고 주류 영국 좌파 바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후 의회 좌파가 재기한 뒤 피셔는 말을 줄였고 곧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이어 둘째 책인 «내 삶의 유령들»이 2014년에, 셋째 책인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은 피셔가 2017년 1월에 마흔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나왔다. 그의 죽음은 타이밍 때문에 한층 비극으로 보일지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부정기적인 강사 일자리와 불안정성에서 벗어나 마침내 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리를 확보해 사랑하는 동반자와 아들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고[하지만 사망으로 인해 그럴 수 없었고], 정치적으로는 정신 질환 때문에 자신이 갈망해 온 격변에 참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해[2017년] 여름의 조기 총선에서 코빈주의가 급부상한 현상을 목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한 후 친구와 동지 들은 개인이자 작가로서 피셔를 회고한 글을 발표해 감동적이고 종종 계발적인 초상을 그려 주었다.[2] 반면 그의 작업을 문화 비평이라는 더 포괄적인 맥락 속에 배치하려는 일관된 시도는 아직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피셔의 짧은 글―블로그 게시물, 기사, 에세이 등―을 광범위하게 모은 사후 선집인 «k-펑크»의 출간은 그가 거둔 성취를 조망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3]
이전 세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 이론가 중 한 명인 스튜어트 홀과 피셔의 생각을 비교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재능 넘치는 좌파 작가였던 두 사람 모두 가장 넓은 의미의 영국 문화와 그것의 가능 조건을 심층적으로 진단했다: 홀은 영국 자본주의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덕분에 대처가 헤게모니를 확보했다고 분석했으며, 피셔는 신노동당 정권이 대처주의를 강화한 결과로 탄생한 풍경의 지도를 그렸다. 두 사람 모두 피셔가 “다른 가능성들의 흔적”이라고, 다른 세계들의 흔적이라고 묘사한 것을 대중 문화―홀의 용어로는 “대중 예술들”―에서 읽어 냈다. 홀은 대중 문화 작품에 면밀한 비평 절차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진정으로 우수한 작품을 겉치레뿐이거나 모조품에 불과한 것과 구별했으며, 동시대 음악에 대한 피셔의 글에서도 가치의 구별이 결정적이었다.[4] 걸어온 길은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아웃사이더였다. 홀은 자메이카 출신으로 가사 노동자를 둔 상층 중간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가 로즈 장학생이 되어 영국으로 건너온 1950년대는 하숙집 창문에 ‘흑인 사절’이라 쓰여 있던 시절이었다. 잉글랜드 이스트 미들랜즈 지역의 노동 계급 출신인 피셔도 아웃사이더 위치에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메트로폴리스에 가까웠지만 [계급적] 배경은 훨씬 본능적이고 오랫동안 유지된 소외와 주변성의 감각을 그에게 부여했다. 두 사람 모두 교육을 좌파 문화에 대한 개입과 결합했다: 홀에게는 «유니버시티즈 앤드 레프트 리뷰», «뉴 레프트 리뷰», «마르크시즘 투데이», «사운딩즈»가, 피셔에게는 블로고스피어, 타리크 고더드를 비롯해 여러 친구와 설립한 독립 출판사 제로 북스, 제로 북스의 분신이자 이후에 새로 설립한 리피터 북스, 그보다는 덜 긴밀했던 «뮤트», «와이어», 컴퍼스[노동당 좌파와 연계된 싱크 탱크]가 있었다.
두 사람의 주된 차이들은 이들의 공통 주제이기도 했던 문화의 궤적과 관련되어 있다. 1932년생인 홀은 낙관이 우세하고 좌파의 가능성이 확장되던 시기에 성인이 되었다. 영국 경제는 전후 성장의 정점을 찍었고, 복지 국가는 여전히 새롭고도 한창때였으며, 노동 조합의 권력도 절정에 달해 있었다. 영국 노동 계급 출신의 대중 음악―비틀즈, 스톤즈, 후―이 거둔 어마어마한 국제적 성공 덕분에 당대의 문화가 활황을 맞이했고, 싹트기 시작하던 동류의 청년 문화 중 실험적인 작업들이 드라마, 텔레비전, 영화에서 개척되었다. 그리하여 대학, 폴리테크닉, 예술 학교가 확대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던 50년대 말에 홀은 헨리 제임스를 다룬 논문을 포기하고 좌파 잡지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런던의 한 남중등 현대 학교(boy’s secondary-modern school)(계급적으로 정의된 체계의 밑단인)에서 영어를, 그 뒤에는 첼시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영화를 가르쳤다.[5] 1964년에 리처드 호가트는 «대중 예술들»(The Popular Arts)―영화와 재즈를 수업 커리큘럼에 포함하려는 시도로 패디 워널과 공저한 책―을 참작해 홀을 신설된 버밍엄 현대 문화 연구소(Centre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의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호가트가 유네스코에서 일하기 위해 연구소를 떠난 뒤 홀은 소장을 맡아 오픈 유니버시티 사회학과 학과장으로 취임한 1979년까지 해당 직을 역임했다. 그는 일관된 제도적 지원의 도움을 받았고, 텔레비전 시대의 공적 지식인으로 국민적 토론에 자주 참여했다.
1968년에 태어난 피셔는 자신이 긴축과 소멸로 설득력 있게 특징지은 시기에 성장했다. 그의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이었던 시절은 청소년기[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였다. 한 시대가 저물고 다음 시대가 시작된 당시에 세계 경제는 장기 호황에서 장기 침체로 접어들었고 전후 합의도 위기에 처했다. 그가 제시한 시기 구분들의 정확한 척도는 종종 바뀌곤 했지만 분기점은 거의 언제나 날카로웠다: 그는 포스트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의 우울한 사운드를 다룬 에세이에서 이렇게 쓴다. “1979~1980년은 하나의 문턱이 된 순간이었다―하나의 세계(사회 민주주의적, 포드주의적, 공업적) 전체가 구식이 되고 새로운 세계(신자유주의적, 소비주의적, 정보적)가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순간.”[6] 대처주의가 경제를 쥐어짠 결과 실업률이 치솟고 불안이 가중되었다. 노동 조합이 매몰되었고, 긴축과 시장화가 영구적인 조건이 되었으며, 대학은 혹독한 압력에 종속되었다. 점점 더 상업화되고 독점화된 대중 문화 풍경이 계급과 문화의 연계가 거의 단절된 파편화된 하위 문화 신을 지배했다. 홀과 대조적으로 피셔는 제도와의 관계에서, 청중의 유형에서, 자신이 택한 형식에서, 자신이 논한 다수의 문화 현상 측면에서 하위 문화 형상이었다. 그는 불안정한 고용 상태 때문에 한동안 등한시하던 글쓰기를 인터넷 덕분에 재개할 수 있었고, 주로 학계 바깥에서, 주류 저널리즘 레이더망 아래에서 명성을 획득했다. 또 그의 작업은 그것이 미친 감정적 영향이라는 차원에서도 전형적으로 하위 문화적이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비평 근거지를 구성한 포스트펑크나 일렉트로니카에 친숙한 지지자들을 고무했다.
신자유주의적 복고의 상이한 시점에 활동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정치 현실이라는 문제에 에너지를 쏟았다. 신자유주의의 등장, 양상, 효과, 유지력에 대한 이들 각자의 특유한 고찰에서 분석 도구이자 판독 대상으로 우세한 지위를 차지한 것은 문화였다. 더욱 두드러지는 건 이들이 현대화를 분명한 근거로 삼아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는 것이다―이들은 변화 중인 시대에 적응할 필요성에 주목했으며, 당대의 성격을 이해하고 적절한 대응 방안을 발전시키지 못한 좌파의 실패라고 자신이 규정한 것을 비판했다. 왼편에서 노동당을 비판한 두 사람 모두 노동당이 야당인 시절―홀은 보수당이 지배한 80~90년대에, 피셔는 그다음 보수당 집권기인 2010년부터 현재까지―에 당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피셔가 가장 명시적으로 홀의 작업을 언급한 것도 홀과 마찬가지로 의회 정치에, 그리고 정치적 변화의 실행 가능성에 관여하던 시기였다. 이때 피셔는 홀에게 경의를 표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진단과 처방이 여전히 의의를 지닌다며 지지 의견을 밝혔다. 피셔는 문화 연구의 적대자로 지적 삶을 시작했고 홀과는 거리가 있는 궤적을 밟았지만,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에는 이 선배와 공통된 대의를 발견했다.
미들랜즈 출신의 소년
피셔의 정확한 출생지는 레스터셔다. 레스터에서 태어나 작은 준산업 도시인 러프버러에서 자랐다. 지역 기업의 기술자인 아버지와 미화원인 어머니가 꾸린 적당히 보수적인 가정의 아들인 피셔는 지역의 종합 중등 학교(comprehensive school)를 다녔다(그가 회상한바 “어정쩡하게 음울했”던 정규 교육). 그는 노동당이 완패한 1983년 선거 때 느낀 “총체적인 실존적 패배라는 쓰라린 감각”을 형성기의 정치적 경험 중 하나로 언급한 적이 있으며, 2년 뒤 광원 파업이 분쇄된 날을 “눈물 없이는” 떠올릴 수가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7]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초기에 문화 영역은 [아직] 대처의 맹습에서 자유로웠고, 덕분에 피셔의 10대 시절 영국에서는 음악 잡지가 번창했다. 독학자 지식인이었던 이언 펜먼과 폴 몰리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태도로 음악 문화에 관한 글―피셔에게 초기 본보기였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을 «NME»에 기고하면서 대륙 이론과 철학을 열렬하고도 잡다하게 활용해 명성을 쌓았다. 훗날 피셔는 “감상에 젖고 싶지는 않지만 저 같은 출신에게는 그런 관심을 가질 다른 경로가 거의 없었어요”라고 반추했다.[8]
이 짜릿한 음악 저술들과 더불어 당시는 영국 텔레비전이 마지막으로 만개한 시기로, 대안적인 방송을 목적으로 설립된 BBC 2와 채널 4가 우위를 놓고 다퉜다. 피셔는 이 채널들이 심야에 방영한 유럽 아트 하우스 영화를 접했던 기억을 회상한 바 있으며, 이렇게 최초의 마주침들이 발휘한 힘을 글에서 언급하곤 했다. “열넷에서 열일곱 살 사이에 접했던 책과 앨범, 영화가 미친 충격을 커서 온전히 다시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요?”[9] 또 그는 자신의 역량을 북돋아 주었다고 생각한 문화적 하구 구조―훗날의 기획들은 그것을 재생하려는 하위 문화적 시도였다―의 상실을,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 사회적, 정치적 퇴보와 연결되어 있었던 문화적 퇴보를 애석해하며 주기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가 1986~1989년에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헐 대학은 엘리트 교육의 보루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피셔―뜻이 맞는 친구들과 관심사를 발전시키고, 클럽 나이트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굴리며, 대학 예술 잡지에 글을 기고하면서―는 리처드 호가트가 «교양의 효용»에서 분석한 것으로 유명한 사회적 위치 이동을 얼마간 경험했다. 훗날 블로그 게시물에서 그는 이 경험이 유발한 “불안과 소외”를 묘사했는데 그가 보기에 이는 이중의 위치 이동, 사회적 변화와 경제적 변화 탓에 더욱 복잡해진 이동이었다: “내가 고향에 머물렀더라도 ‘굳건한 노동 계급 세계’에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가 더는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10] 이 시기를 환기하는 2014년의 한 에세이에서는 고향을 떠난 뒤 이스트 미들랜즈 억양이 점차 사라진 경험을, “양가성과 수치심으로 가득한” 성취를 묘사하면서 운을 뗀다.[11] 그가 제도와 맺어 온 관계를 빚은 것은 뿌리 뽑힘이라는 끈질긴 감정이었다.
헐 대학을 졸업한 뒤 피셔는 잠시 맨체스터에 머물며 임시직 일자리와 밴드 활동,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수험 공부를 오갔다. 그러다 1992년에 세이디 플랜트의 강의(플랜트의 기억에 따르면 캐시 애커가 주제였다)를 들으면서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플랜트는 불과 스물여덟 나이에 버밍엄의 재구조화된 문화 연구 학과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피셔는 그곳에서 플랜트의 지도로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버밍엄에서 홀이 정년을 보장받았던 영광스러운 시절은 막을 내린 지 오래였다. 1990년대에 [현대 문화] 연구소는 지적 활기를 잃은 채 행정 책임에 허덕이는 부서로 바뀌어 있었다. 연구소가 개척한 폭넓은 학제는 비판적 날카로움을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고, 어떤 경우에는 시장 다양성을 단순하게 찬미하는 쪽으로 빠져들기도 했다.[12] 플랜트의 첫 책―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혁명적 상황주의의 개념들을 혐오했음에도 이 개념들과 얽혀 있음을 밝힌 비판적 지성사―도, 사이버네틱스와 급진적 미래성에 대한 그의 우상 파괴적인 새 작업도 당시의 문화 연구와는 공통점이 딱히 없었다.[13] 1995년에 플랜트는 워릭 대학의 선임 연구원으로 임용되었고, 여러 대학원생과 함께 피셔도 그리로 학교를 옮겼다. 피셔가 나중에 설명한 바에 따르면 역겨움을 느끼며 탈출한 셈이었다. 새 환경에서 ‘컬트 연구’[문화 연구](cultstuds)는 무기력한 지적 기득권층으로 폄하되곤 했다.
가속주의자들 사이에서
워릭 대학에서 플랜트는 닉 랜드―친구이자 동료로 젊은 나이에 철학과 강사로 있던―를 중심으로 뭉친 일종의 분견대와 함께 사이버네틱 문화 연구회(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 CCRU)를 발족했다. 피셔가 과거를 회고하며 “우리의 니체”라 묘사한 랜드는 «무화를 향한 갈증: 조르주 바타유와 악성 니힐리즘»(1992)을 출간한 뒤였다. 플랜트와 달리 그에겐 좌파에 충성을 바친 역사가 없었다. 피셔는 다양한 기회를 빌려 랜드와의 “탈구를 일으키는 마주침”에 관해, 고루하기 짝이 없는 수많은 학술 작업과 대비되는 그의 글과 발상이 가져다준 전율에 관해, 영화와 소설을 이론 및 철학과 엮는 그의 솜씨가 불어넣은 영감에 관해 썼다. 또 2012년의 한 에세이에서는 랜드가 이 시기에 생산했던 “비범한 반마르크스주의 텍스트들”로, 생산적인 적대를 거듭 제공하는 “이론-허구적 도발들”로 돌아가기도 했다.[14] 리오타르의 «리비도 경제»와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뿐만 아니라 정글 음악과 사이버펑크 허구에 기댄 CCRU의 격앙된 저술들은 자본주의의 역동적이고 급진적인 에너지를 가속주의적으로 수용했고, 훗날 피셔는 이들의 “생기 넘치는 반정치”를 언급한 바 있다.[15] 워릭에서 CCRU는 문화 연구의 순응과 학술 포스트모더니즘의 패셔너블한 뒤틀림뿐 아니라 길 잃은 좌파의 패러다임 및 경건함과도 대립하는 식으로 진영을 구축했다.[16]
1997년에 플랜트가 프리랜서 작가의 삶을 꾸리기 위해 떠난 뒤에는 랜드가 CCRU 책임자가 되어 이 집단을 통솔했다. 그의 감독하에 CCRU는 한층 비밀스러워졌고, 수학, 과학, 신비주의적이고 오컬트적인 생각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모두는 SF식으로 굴절된 찬사를 기꺼이 시장에 바치기 위해서였다)을 역사의 진정한 행위자로서의 자본과 통합했다. “따라서 기계 혁명은 사회주의적 조절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회적 장을 해체하는 과정들이 시종 제약받지 않고 시장화되도록 압박을 가하기.”[17] CCRU의 정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그것이 수반하는 문화 형태들의 쇄도뿐 아니라 포스트냉전, 테크 버블의 비합리적 과열, 복지 국가와 노동 운동의 해체로 이루어진 정세였다. 이런 상황에서 피셔에게는 쇠퇴와 몰락의 서사보다는 미래에 대한 들뜬 포용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형성기의 상실들을 달래 주었을 것이다. 중요한 사이버펑크 작품들을 반휴머니즘 철학에 대한 기여로 분석한 그의 박사 논문 «평탄선 구축물들: 고딕 유물론과 사이버네틱 이론-허구»는 CCRU의 관심사를 모범적으로 드러낸 작업이었다.
CCRU가 설립된 당시는 피셔가 인쇄 매체에 처음 진출한 시기이기도 하다. 매체 기고문들에서 그는 이 집단의 미래주의적 문화 정치―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뿐 아니라 영국 전자 음악의 최신 변이들이 준 영감을 흡수한―를 한층 분명하게 전달했다. «뉴 스테이츠먼»에 실린 한 기사에서는 브릿팝(이 운동의 주도자들이 얼마 후 다우닝가[영국 총리의 관저가 있는 거리]에서 토니 블레어와 함께 함박웃음을 터뜨릴 터였다)을 “인디 반동분자”로 비난하고, 미래 지향적인 전자 음악 신이 부재하는 현재에 대한 비관주의를 브릿팝 밴드들의 작업에서 발견했다. «와이어드»에 게재된 글에서는 후자[전자 음악 신]가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기업 구조 저편에서 움직임을 전개하고 있다고 치사하면서 이 변동을 “사이버펑크 임계점”의 진화로 묘사했다.[18] 그리고 «뉴 스테이츠먼»에 기고한 더 긴 글에서는 이 말의 정치적 함의를 한층 명시적으로 밝히면서 “어두운 시대를 위한 어휘”를 찾고자 “다크 사이드” 서브 장르가 “과잉 활동적인 비트, 으스스한 샘플, 불길한 전자음을 공격적인 프롤레타리아적 방식으로 콜라주”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전형적인 CCRU식 전용(détournement)의 논리를 펴며 피셔는 이 음울함이 미래를 비춘다고 찬미했다. 1990년대에 일어난 변화들이 “무조건 부정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 모두가 여전히 퍼뜨리고 있는 낡은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공포는 낡은 질서가 단말마에 느끼는 고통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새로운 것이 생겨날 수 있을지.”[19]
일부 측면에서 CCRU와 홀과 호가트의 초기 CCCS 사이에는 공통점―교수와 대학원생으로 구성된 집단으로, 학제적이고 협력적인 정신에 입각해 작업하고, 여러 대륙 이론과 새로운 문화 조류에 고무되었으며, 급속한 변화의 감각을 지향했다는―이 있었지만 워릭 집단은 버밍엄 센터와 정반대 궤적을 밟았다. 플랜트가 떠난 뒤 철학과와 무관해진 CCRU는 1997년에 사실상 워릭에서 절연되었고, 3년 후 해산할 때까지 레밍턴 스파[워릭셔주의 온천 도시]의 바디샵 매장 위층에 공간을 두었다.[20] CCCS는 “복지 국가가 지원하는 문화 확산 모델” 아래 대학이 성장한 시기, 제도들이 확대되고 리버럴 교육 체제가 확립된 시기에 설립되었다.[21] 이 모두가 1980년대에 대처가 개시한 공격으로 중단되었다. 대학들은 급격한 지출 축소에 직면했고, 재정 지원은 목표 과제와 개혁에 종속되었으며, ‘연구 업적 평가’가 강제 사항이 되었다. 시장의 규율과 지식의 제도화가 당대의 질서였다. 이 적대적인 환경에서 의도적으로 비의적인 집단을 지향한 CCRU(학계를 죽이는 제약이라고 자신들이 이해한 것에 대항해 세운)는 단명할 운명이었다. 랜드는 학계를 떠나 상하이에 자리를 잡았고, 거기서 그의 니힐리즘적 반휴머니즘은 온라인 극우의 가장 과격한 분파와 융합되었다.
미래의 커브
정치적으로 피셔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가 CCRU 시절부터 무엇보다 간직해 온 것은 자본주의가 현재의 피할 수 없는 리얼리티라는 이해 방식으로, 그에게 이 이해는 미래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과 결합해 있었다. 훗날 이는 좌파가 현대성의 책임을 탈환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에 포획된 미래를 해방해야 한다는 의지의 형태를 취했다. 2010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앞을 내다보려면 포스트포드주의를 완전히 통과해 나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일 때는요.”[22]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특유의 감수성은 이 같은 미래주의와 뚜렷한 상실감―청년기의 감정 구조를, 자신이 단말마의 고통을 지켜본 사회 민주주의 문화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감각―의 결합을 통해 연마되었다.
여기서 같은 시기에 홀이 벌인 활동과의 근원적인 공통성이 드러난다. 그도 ‘새로운 시대’에 대한 추측들을 통해 낡은 사고를 일소하고자 했으니 말이다. «대처리즘의 문화 정치»에 수록된 예지적인 분석들에서 홀은 대처리즘을 “우파가 개시한 새로운 정치 기획―새로운 의제의 구축”으로 정의했는데, 이로써 좌파에 한층 원대한 현대화를 요구한 셈이었다.[23] 홀에게 당시는 1917~1924년의 혁명 물결이 분쇄된 후에 그람시가 전개한 생각으로 돌아갈 시점이었고, 이는 “우리를 위해 그가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갱신된 좌파가 고심해야 할 바로 그 문제들을 그람시가 제기했고 “답을 구하지 못할지라도 이 순간의 구체적이고 차별화된 점들에 우리의 관심을 확고하게 집중시키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세력이 어떻게 정세적으로 결합해 하나의 상이한 정치가 형성될 수 있는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 내게 되는가?”[24] 물론 홀은 역사에 마음을 두고―알튀세르의 영향에도 불구하고―휴머니즘적인 견해를 피력했지만 피셔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CCRU는 역사의 전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주로 반휴머니즘 철학을 부상하던 사이버 문화와 결합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 새로운 것이라는 문제에 깊이 관여했고, 이 문제를 더욱 파고들면서 피셔―그의 영역은 정치적 장보다는 일차적으로 대중 문화, 특히 음악이었다―는 점점 더 역사적 변화라는 질문들에 개입했다.
매체를 찾아
박사 논문을 완성한 뒤 피셔는 런던으로 이사해 남쪽 끝단에 정착했다. 피셔가 자본의 변두리들에서 살고 작업했던 데는 보유한 자원뿐 아니라 기질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메트로폴리스 너머에 자리한 영토들의, 교외와 지방에서 구축된 혁신들의 문화적 의의는 장차 그의 비평에서 두드러지는 테마가 될 터였다. 낭만화하지 않은 채―오히려 반대되는 태도로―그는 데이비드 보위뿐 아니라 수지 앤드 더 밴시스도 런던 남부의 브롬리 교외 지역 출신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피셔의 또 다른 정전 가운데 하나인 재팬은 캣퍼드에서 결성되었다. k-펑크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출연자로 “외곽 지역이야말로 미래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곳”이라는 유명한 주장을 펼친 밸러드는 훨씬 멀리 떨어진 셰퍼턴에 살았다.
우울증을 겪던 시기인 2003년에 피셔는 블로그 k-펑크를 개설했다. 우울증이라는 “해로운 유령”은 10대 때부터 그를 괴롭혔고, 이 무렵에 덮친 우울은 삶을 “견디기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정도로 심각했다. 그때 블로그가 “세계와의 유일한 접속처”를 제공해 주었다.[25] k-펑크의 타이틀이자 페르소나로 기능한 k는 그리스어로 ‘사이버’를 뜻하는 퀴베르에서 가져온 것으로, 포괄적인 의미―하나의 장르일 뿐 아니라 새로운 테크놀로지들 덕분에 촉진된 폭넓은 사회적, 문화적 경향이라는―를 환기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갖가지 발상과 문화에 대한 성찰은 정곡을 찌르며 곧 열렬한 지지자를 끌어모았다. CCRU 특유의 대항 정신을, 또 고급 이론과 대중 문화를 이어 붙인 이 집단의 표현 양식을 간직하고 있었음에도 피셔는 “은어들이 휘몰아치는 비타협적인 눈보라”라고 나중에 지칭한 것을 포기했다.[26] 또한 그의 정치학이 진화함에 따라 더욱 눈에 띄는 변화도 수반되었다. 개인적인 것에서 집단적인 것으로 이동하려는, 원자화 시대에 연대를 다시 불붙이려는 욕망이 점점 더 그의 생각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새로운 선집[«k-펑크»]에 수록되어 출간된 최초의 게시물들에는 CCRU식의 신랄함이 남긴 잔여물이 드러나 있으며, 또한 더 오래되고 [갈수록] 덜 두드러지는 비유들의 자취도 남아 있다. 예들 들면 이데올로기, 계급, 사회 변화의 기능 작용을 닉 랜드 특유의 시적 방종으로 연출한 SF적인 어조가 그렇다. 반면 동시대의 속도에 피셔가 느낀 흥분은 사막같이 황량했던 신노동당 시절에 꾸준히 사그라들었고, 그리하여 그는 문화적, 정치적 정체 상태라는 문제에 갈수록 골몰했다.
k-펑크를 운영하면서 피셔는 불안정한 처지의 청년 지식인들로 구성된 온라인 반음영 지대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블로그는 즉흥적이고 종종 실험적으로 쓰고 생각하는 데 적합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들의 블로그 네트워크는 음악, 영화, 이론, 철학, 정치에 관한 토론을 활성화하는 일종의 포럼을 제공해 주었다. 피셔에게 블로그는 어린 시절에 만발했던 저널리즘적 하구 구조의 새롭고도 언더그라운드적인 재-예시를 표상했다. 새 선집에 <서문>을 쓴 사이먼 레이놀즈는 블로그를 “망명지의 음악 잡지”로 묘사하기도 했다.[27] «NME»나 «멜로디 메이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는 글을 기고하기에 너무 어렸던 피셔는 적대적인 환경에서 지식인으로 성인이 되었고 어떤 면에선 자신의 시대와 어긋나는 인물이었다. 그가 첫 기사들을 기고했던 «뉴 스테이츠먼» 체제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갈이된 것이 아마도 이 시대의 성격을 극명하게 예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새로운 편집진의 주도하에 이 신문은 사실상 신노동당 기관지가 되었고, 블로그에서 피셔는 “매우 낡은 미디어”를 상대해야 했던 짜증 나는 경험을 이따금 소재로 삼았다. 반면 편집진의 통제가 없는 블로그에서 그는 버로스부터 스피노자, 런던 테러, 포르노그래피에 이르기까지 직접 선택한 다방면의 주제를 고심할 수 있었다.[28] 정치적으로 그는 홀보다 훨씬 흉포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2005년 선거에서 블레어에게 투표할 필요성에 반대하며 그는 물었다. “그런데 마이클 하워드의 보수당이 제기하는 위협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인신 보호 영장을 유예할까? 그럴 수 없다. 토니 블레어 일파가 이미 그렇게 했으니까. 보수당이 수치스럽게도, 또 수치를 모르고 우파 입맛에 맞는 이민 정책을 취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커 같은 히스테릭한 얼굴의 블레어가 이미 하고 있는 짓일 뿐이다.”[29] 음악적으로 그의 범위는 신작부터 60년대 이후의 혁신 계보까지―글램, 펑크, 포스트펑크, 뉴 로맨티시즘, 고스부터 레이브와 더불어 시작되어 정글과 투스텝으로 이어진 전자 댄스 음악의 ‘하드코어 연속체’까지―아울렀다. 그는 탐욕스럽게 읽었다: 보드리야르, 밸러드, 제임슨, 사르트르, 후쿠야마, 베블런, 칸트, 지젝이 특별한 관심사였고, CCRU 시절과 동일한 개념적 소재들에 의지했지만 관점은 좌파적이었다. «뮤트»에 기고한 2004년의 한 서평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을 다룬 지젝의 책들을 두고 “가장 긴급한 지정학 쟁점들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자 “이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멋지게 알린 저작”이라는 호평을 보냈다.[30]
이 시기에 피셔는 간헐적으로 연장 교육 대학에서 일했다. 제일 오래 가르친 곳은 또 다른 런던 외곽 교외지인 오핑턴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도 피셔의 경험은 이전의 좌파 지식인들과 선명한 세대 차이를 보였다. 이들은 형성기에 성인 교육 기관에서 일했고 대학 체계에 바깥에서도 활동을 벌였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파머 톰슨과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가외 시간에 역사적으로 노동 운동과 연계되었던 노동자 교육 협회(Workers’ Education Association)에 참여했다. 피셔는 국가 체계의 저층부에 속하는 곳에서 16~19세의 청소년을 가르쳤다. 의욕을 잃은 학생들은 몇 문장 읽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책상에 엎드려 있기만 했다. k-펑크 초기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까다롭고 도전적인 과제”임을 인정했지만 자신의 위치가 “고유한” 학계의 위치보다 종속적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31] 이 경험은 그를 급진화했고 나중에는 이를 자신의 정치적 방향을 바꾼 계기로 묘사하기도 했다. 당시 이 부문에서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단행되고 있었다. 그는 블로그에 “점점 증가하는 비정규직 채용, 징벌적인 새로운 병가 정책, 해고되어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강사들,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며 한층 무의미한 보여 주기식 서류 작업을 초래하는 목표 과제와 ‘불합리한 성과 지표’ 도입”의 분위기를 성찰하는 게시물을 올리곤 했고, 자신과 배경이 비슷한 이들에게 대안 교육을 제공했던 과거 제도들의 쇠퇴를 안타까워했다.[32]
새로운 선언문
이런 부침들이 이후 발표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논의에서 중심을 차지했다. k-펑크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 용어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으로 정의된다.[33] 이 전망 안에서 미래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창출하지 못한다. 이 책의 독특한 특징 하나는 설득력 있는 용어들―제목 자체부터 새로이 고안하거나 용도 변경한 갖가지 용어(비즈니스 존재론, 시장 스탈린주의, 스트레스의 개인화)에 이르는―의 사용이다. 또 다른 특징은 대중 문화를 증거이자 범례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필리스 도러시 제임스의 디스토피아 소설을 각색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파국적인 사건이 발발해 대다수 사람이 불임이 되었고, 앞으로는 새 세대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설정을 배경으로 한)을 대담하게 해설하며 시작한다. 피셔는 이를 은유적으로, 다른 종류의 불안이 전치된 것으로 읽는다: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T. S. 엘리엇―불임은 «황무지»의 테마이기도 하다―이 보기에 새로운 것이 결여되면 우리의 미래도 강탈당한다: 전통이 더 이상 논쟁되거나 변경되지 않을 때 그 전통은 아무 쓸모도 없어진다.
피셔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라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구상(마찬가지로 미래의 실패를 강조하는)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포함될 수도 있음을 인지했다. 그렇지만 그는 한 세대가 지나면서 제임슨이 분석한 과정들이 너무나 심화되어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한다. 피셔는 특히 세 가지 차이를 식별한다. 80년대 중반에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쓸 때는 정치적 대안들―소비에트 블록, 조직된 노동―이 명목상으로나마 실존했다. 반면 21세기 들어서는 문화적, 정치적 불모성이라는 감각이 훨씬 깊고 만연해졌다. 둘째, 제임슨이 기술한 모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과 ‘복수성’이라는 이름 아래 여전히 모더니즘과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2008년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승리한 지 오래였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더 이상 모더니즘과의 이러한 대면을 무대에 올리지 않는다.” 셋째, 자본주의에 ‘외부’가 없는 상황에서 욕망과 열망은 자본주의에 병합되는 것이 아니라 ‘사전 병합’된다. 선제적으로 구성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대안’과 ‘독립’ 같은 용어는 더 이상 주류 문화 바깥의 무언가를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들은 주류 문화의 지배적인 양식이다.[34]
1980년대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예술에 대비되는 미국 광고의 시각 세계를 가리키기 위해 아이러니하게 사용된 개념이었다. 피셔에게 이 개념은 “어떤 만연한 분위기에 더 가까운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에 맞서 싸울 것인가? 피셔는 대안 지구화 운동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이 운동이 G7 회담장 앞에서 벌인 시위들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일종의 카니발적인 배경 잡음을 형성”했고 스스로도 실제로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요구들을 소리 높여 외쳤다는 이유로―다른 한편 신자유주의 개혁을 막으려던 프랑스 학생들의 방어적인 ‘안전 지향’(immobilism)은 앞으로 나아갈 방도를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피셔가 보기에] 실효성 있는 도전은 자본주의의 표면적인 ‘리얼리즘’이 리얼리즘과 아무 관계도 없음을 보여 주면서 시작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지젝과 알렌카 주판치치가 전개한 이데올로기 이론에 의지한다. 주판치치는 “‘현실 원칙’은 이데올로기의 최고 형태를 구성한다. 즉 자신을 경험적 사실[…]로 제시한다”고 쓴 바 있다. 달리 말해 현실 원칙은 정확히 우리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다고 여기곤 하는 ‘상식’을 구성한다. 피셔가 덧붙이길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저 자신을 자연화함으로써 지배적인 것이 되며, 따라서 특수한 이해 관계와 가치의 표현이 아니라 확립된 사실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윤리적 가치라는 범주 자체를 제거하고 ‘비즈니스 존재론’을 정착시키려 했는데, 이 존재론에 따르면 교육과 보건을 포함한 모든 것이 기업처럼 운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급진 정치의 목표는 ‘비즈니스’가 취하는 자연적 질서라는 외관이 감추는 우연성들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의 전략―피셔가 지젝의 라캉 읽기에서 도움을 얻은―은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현실’[리얼리티]의 기저에 있는 ‘실재들’을 환기하는 것이다(라캉에게 실재는 모든 ‘현실’이 억압해야 하는 것이다).[35]
피셔는 기저에 있는 세 가지 실재를 언급한다. 첫째는 환경 재앙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 재앙을 자신의 마케팅에 얼마간 통합했지만, 그것의 실제 함의들은 체계로선 인정할 수 없을 만큼 트라우마적이다. 둘째는 광범위하게 퍼진 정신적 고통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더욱 악화된 이 고통에 개인화로 대처하려 한다. 즉 정신 건강을 개인의 문제로, “좋은 느낌을 주고 좋아 보이는 것”이라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적 명령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실패로 만들려는 것이다. 셋째는 신자유주의가 종식하겠다고 약속한 관료제의 증식이다. 그의 책은 특히 뒤의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는데 환경 위기와 달리 정신 건강과 관료제는 아직 정치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피셔가 얼마간 경험한 문화 영역, 즉 교육 분야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오핑턴 학생들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모든 것에 무관심(apathy)해 보이는 이들의 태도를 “반성적 무기력”(reflexive impotence)―자신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학생들의 감정이 하나의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되는―으로 규정한다. 피셔는 “우울증적 쾌락”(depressive hedonia)―쾌락을 경험하지 못하는 무능(통상 우울증과 결부되는)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의 한 형태를 진단한다. 학생들은 “무언가가 빠져 있다”고 느끼지만, 오직 쾌락 원칙 너머에서만 이것에 접근할 수 있음은 이해하지 못한 채 “쾌락적 나른함”에 빠져들곤 한다. 피셔는 널리 퍼진 난독 문제가 포스트렉시아의 증상일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10대 청소년들은 독해할 필요 없이 자본의 이미지 기반 데이터를 아주 효율적으로 다룬다. 표어만 인식하더라도 스크린 평면에서 길을 헤쳐 나가기엔 충분하기 때문이다. 포스트포드주의 경제가 양친 모두 장시간 일하도록 압력을 가해 가족이 일그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교사는 훈육 체제(시간 엄수, 시험 통과)의 요구와 후기 자본주의 소비자들의 포스트문해력 주체성을 매개하는 임무를 떠맡게 된다.[36]
피셔는 가족의 삶이 의존하던 가치들―의무, 신뢰, 헌신―이 포스트포드주의 체제하에서 철 지난 것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가족을 침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가족을 요구한다. 한숨 돌리는 장소로, 정신적 상처의 치료제로, 노동력이 매일매일 재생되는 공간으로. 부부에게 정서적 위안의 배타적인 원천이라는 과도한 짐을 지우며,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만든다. 그와 동시에 포스트포드주의에서 계급 적대는 내부화되어 정신적 고통으로 나타난다. 피셔는 «이기적 자본가»에서 올리버 제임스가 제시한 증거를 인용한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이래 영어권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전염병처럼 심리적 장애가 확산되었다. 정신 질환 수준이 높아지는 현상과 노동자를 평가하는 새로운 패턴―이는 들뢰즈가 통제 사회라 부른 것의 핵심을 차지하는 집요한 관료주의적 압력으로, 목표 목록을 만들고 결과를 도표화하며 임무를 진술할 것을 요구한다―사이에는 어떤 상응 관계가 있는가? 다시 한번 라캉에 대한 지젝의 정교화를 빌려 와 피셔는 이런 데이터들의 암묵적인 수신자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대타자’라고 주장한다. 이 대타자는 홍보와 선전의 상상된 소비자로, 실제로 존재하는 개인들(소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이 아니라 사회적 장에 의해 제안된 집단적 허구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교사들은 관료주의적이고 감시적인 요구들―평가 절차, 연간 보고서, 연구 평가―에 순응할 영구적인 필요에 직면해 있으며, 그리하여 이들 자신도 학생들과 비슷한 반성적 무기력에 빠져든다.
피셔는 2008년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약화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은행 구제 금융은 ‘대안 없음’을 대규모로 단언했을 뿐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신용을 잃었고 확신에 찬 추진력을 상실했다. 위기는 정신적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당대의 정치적 풍경은 “이데올로기적 잔해”로 어질러져 있으며, 새로운 반자본주의가 출현할 빈공간, “회귀가 아니라 갱신”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과제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었으나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욕망들―예를 들면 관료제 축소라는 갈망―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피셔는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의 핵심인 각종 감사(audit)에 대한 거부를 중심 요구로 삼는다. 교사와 강사가 자기 감시 기계에서, 관리주의의 재생산에서 물러나는 파업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정신 건강 문제를 유효한 적대로 전환하고 불만의 방향을 외부로 돌려 진정한 원인인 자본을 겨냥하자고 제안하며, 나아가 새로운 배급(rationing) 체제가 환경 위기와 소비주의 문화라는 이중의 질병에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단호한 낙관을 담은 지적으로 마무리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대항의 희미한 기미만 보여도 거대한 파급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 온 그 반동의 회색 장막에 구멍을 낼 수 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37]
한 운동의 시작?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독특한 까닭은 폭넓은 분석을 제시할 뿐 아니라(이것이 강력한 특징이긴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정동적 영향들에 맞서 논쟁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설득력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한 집단은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성인이 된 이들, 피셔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의 지평을 빈틈없이 장악한” 이후의 세대였다.[38] 나중에 제로 북스에서 협력 관계를 맺은 어느 젊은 작가에게 이 책은 “무장하라는 정신적 요청”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를 진단하고 계시와도 같은 힘으로 사회주의적 해법을 재상상”했으며, 수년간 만연했던 “포스트모던한 회피”를 넘어서서 행동의 토대와 희망의 근거를 제공했다. 이 작가는 오랫동안 잠복해 있던 “그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분을 느꼈다”고 회고한다.[39]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제임슨과 지젝의 주제들을 참조하고 발전시켰지만, 두 사람의 글에는 부재하는 날것의 감정적 흥분을 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 책은 동시대의 병폐를 깊이 체감하고 있다는―학생들의 경험이나 “끔찍하게 불안정한 포스트포드주의 상황”에 굴복해 능력 상실 급여를 받는 이들의 경험 등을 통해―인상을 주었다. 지젝 자신도 “우리에게 닥친 곤경에 대한 최고의 진단”이라며 지지 의견을 밝혔다.[40]
이 책이 출간되고 1년여 후에 자민당-보수당 연정 내각이 시행한 수업료 인상에 맞선 학생 시위가 영국 전역에 분출했다. 갑작스러운 개화에 들뜬 피셔는 점거들이 “뜻밖의 야생화처럼 모든 곳에서 싹트고 있다”고 묘사했다.[41] 시위에 합류한 그는 k-펑크에 “현 상황을 깊은 우울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고 썼다. 이것이 당시 영국 정치를 뒤흔든 일련의 사건(거리의 무질서, 상류 계급의 추문) 중 첫 번째였다. 피셔는 정치 기류가 바뀌길 희망하며 이 사건들을 면밀히 조사했고, 그러는 내내 신자유주의의 끈질긴 생명력을 성찰했다(그것은 “좀비처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닌다. 하지만 좀비 영화 마니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때로는 산 사람보다 좀비를 죽이기가 더 어렵다”).[42] 이 시기에 피셔는 열정적으로 집필하고 여러 회의와 사건에서 발언함으로써 저항 활동을 갱신하는 데 기여했고, 다양한 각도에서―저항 운동의 운명과 전략, 긴축과 복지와 보수당의 지배, 소통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같은―정치를 주제로 블로그 게시물과 기사를 생산했다.
예기치 못한 성공 덕분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타리크 고더드의 새로운 출판사인 제로 북스의 대표 저작이 되었고, 블로고스피어 출신의 다른 좌파 지식인들이 연이어 출간한 책들(리처드 시모어의 «데이비드 캐머런의 의미», 니나 파워의 «도둑맞은 페미니즘», 오언 해설리의 «투사적 모더니즘»)의 선례가 되었다. 출판 프로젝트에 긴밀히 관여한 피셔의 결의는 출판사의 선언문에 단호한 언어로 담겨 있다. 이 글에서 그는 “크레틴병에 걸린 반지성주의”와 동시대 문화의 “진부한 순응”을 비난하고 제로 북스가 “아카데믹하지 않으면서 지성적이고 포퓰리즘적이지 않으면서 대중적인” 작업에 전념할 것이라고 공언한다. 목표는 “이론과 대중 문화 사이에서, 사이버 공간과 대학 사이에서 유사 공간(para-space)”을 수립하는 것이었다.[43]
다시 한번 피셔는 활기 넘치는 지적 성좌의 일부가 되었고, 이번에는 한층 명시적으로 정치적이었다. 이는 [영국과] 비슷하게 금융 위기 이후의 시위들에 자극을 받아 같은 시기에 브루클린에서 분출한 좌파 하위 문화와 통하는 데가 있었다. 양쪽 사례 모두에서 새로운 지식인 세대는 기존 저널리즘, 출판, 학계에 가용한 공간이 없다고 느끼며 반기를 들었고, 자신만의 제도를 발전시킬 필요에 이끌렸다. 차이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런던에서 벌어진 [저항의] 반복이 한층 곤궁했다는 것이다. 30년에 걸쳐 시장화와 긴축이 대학과 문화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탓이었다. 그리하여 런던에서는 고급 저널리즘보다 블로그, 팸플릿에 가까운 책, 나중에는 팟캐스트와 비디오가 선호되었다.
이행들
2010년에 피셔는 CCRU 시절 이래 밟아 온 궤적을 논하면서 “블레어주의 영국의 공공 부문에서 일한 경험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가속주의 모델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가짜 시장화는 관료제를 생성하고 있었다. 교사와 노조 활동가 경험은 지젝과의 뒤늦은 마주침과 결합해 “다른 정치적 입장으로 저를 몰아댔습니다”.[44] 이듬해―이제는 결혼해 아들까지 생긴―에는 점거 운동들이 지속적인 파장을 일으키려 했다면 “긍정적인 의제를 보유한” “견고한 조직”으로 변모해야 했다고 논했다.[45] 피셔 자신은 당시 야당으로 에드워드 밀리밴드가 대표로 있던 노동당에 가입했지만, 그와 동시에 의회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강고한 세력을 의회 바깥에 구축할 필요도 역설했다. 정치적 교착 상태에 대한 진단가로서 그는 단호하게 [노동당 내의] 좌파가 전면에 서야 하며 [수동적인] 대응을 [능동적인] 제안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1년에 그는 노동당 좌파의 싱크 탱크인 컴퍼스(Compass)에 발표할 글의 초안을 친구이자 동맹인 제러미 길버트와 작성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민주적 갱신을 강령으로 삼아 현대성을 되찾자고 당―포스트신노동당 방향으로 막 걸음을 뗀―에 요청했다. 이 글은 3년 후에 팸플릿 형태로 출간되었다.[46]
«현대성 되찾기»의 중심 테제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 2권을 위한 주석처럼 읽힌다. 캘러핸과 대처 정부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기획을 강화한 블레어주의의 “재앙에 가까운 전략”을 비판하면서 피셔와 길버트는 이 전략이 관료제의 증식을 초래했으며 문화적 혁신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두 사람이 보기에 고전 자유주의와 달리 신자유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경쟁 관계를 강화하는 과제를 떠맡아 강요와 침해라는 억압적인 감각을 생산했다. 이는 노동 관행들이 본성상 협력적인 보건과 교육 같은 활동 영역에서 특히 만연해 있다. 좌파가 “그 결과로 생겨난 반관료주의적 감성을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포획해 이용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역사적 기회를 놓치게” 될 터였다. 노동당은 “실천적으로나 논쟁적으로나 결정적인 행보를 취해 동시대 자본주의 문화의 이 비대중적이고 비생산적인 특징에 맞서야” 한다.[47]
좌파는 협동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제도들을 구축해 신자유주의 모델을 대체해야 하며, 이 제도들이 특유의 방식으로 효율성과 산출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기나긴 혁명»을 참조해 피셔와 길버트는 교육이 집단적인 의사 결정을 실제로 연습하는 과정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공 부문 기관은 책임성을 갖춰야 하며, 관료주의의 요구들에서 자유로운 한편 약탈적인 기업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48] 영국 음악 문화의 운명―한때 혁신의 세계적 중심지였지만 이제는 정체 상태에 빠져 있는―은 자본이 집단 창조성의 일반적 매트릭스를 이윤 창출 기계로 탈바꿈시켜 동질적이고 보수적인 문화 형태들―다른 곳에서 생성된 새로운 형태들에 기생하는―을 조장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49] 그 이전 수십 년간 음악적 혁신들이 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민주주의 국가가 보편 급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한 덕분이었다. 이는 여러 부문, 특히 ‘지식 경제’의 사회적 창조성의 가능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모델이다. “인터넷이 탄탄한 사회적 급부와 공존하는 문화가 어떤 모습을 취할지 누가 알겠는가?”[50]
이 시기의 정치 활동에서 피셔가 펼친 주장들은 그 이전 보수당 집권기에 홀이 시도한 서명과도 같은 개입들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피셔는 좌파가 낡은 지형에서 싸우기를 멈춰야 하고, 새로운 사회적, 계급적 구성들에 적응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추동하는 욕망과 좌절을 고심해야 하고, 문화의 명령들에 접속해야 하며, 관리주의와 국가 관료주의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고, 자유와 다원주의와 무엇보다 현대성을 우파에 양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두 사상가 모두 국제 상황과 대외 정책은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들은 담론과 이데올로기, 미디어의 재현과 상식의 창조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피셔의 정치적 저술은 방법론적 지반을 오랫동안 홀과 공유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수의 결론에서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었다. 홀과는 다른 시점에 대조되는 감수성으로 펼쳐진 피셔의 논의들을 타협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홀은 때때로 그러했지만 말이다. 피셔는 생리적으로 기성 상태를 증오했다. 2013년에 복지 수당 삭감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그는 노동당에 침투한 “시체 같은 무감정한 퇴폐”의 분위기를 주저 없이 책망했다. 노동당은 “애초에 선거를 이기고자 했던 이유를 망각한 지 오래다”.[51]
지적인 성향과 정치적 상황이 상호 작용해 피셔는 일부 측면에서 독특하고 비정통적인 인물, 자신이 자연 상속인인 전통들에서 상대적으로 단절되어 작업한 인물이 되었다. 좌파가 혼란과 분열을 겪은 시기에 등장했고 처음에는 음악 저널리즘과 프랑스 이론을 본보기로 삼은 그는 광범위한 대상에 준거했는데, 대부분은 개인적인 열정의 만신전에 모셔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마지막 몇 년간 처음으로 갱신의 실현 가능성에 주목함에 따라 그는 과거들, 특히 자신과 홀이 수렴하는 지점에 새로이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관여를 자극한 계기 하나는 감독 존 아캄프라가 홀과 그의 유산에 바친 두 편의 작업인 «미완의 대화»(2012)와 «스튜어트 홀 프로젝트»(2013)였다. 피셔는 후자의 상영회들에 연사로 발언했고, DVD로 발매되었을 때는 홀에게 존경을 표하는 에세이를 수록하기도 했다.
피셔의 에세이 <스트레스의 개인화>는 «사운딩즈»―홀이 마이클 러스틴, 도린 매시와 공동 창간한―의 한 호에 홀의 마지막 정치적 에세이 <신자유주의 혁명>과 나란히 실렸다.[52] 오랫동안 병마와 싸워 온 홀은 2014년 2월에 사망했고, 두 사람이 실제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피셔의 작업에서 홀은 중요한 대화 상대자가 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피셔는 [신자유주의가 파괴한 것들을] 애도하는 시선으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대했지만, 이후에는 어떻게 했어야 자신이 겪어 온 정치사가 달라질 수 있었겠느냐는 문제에 점점 더 골몰했다. 여기서도 그를 고무한 것은 홀이었다. 피셔는 2014년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향수를 피하려면 잃어버린 가능성들을 모든 시대에서 발견해야 하며, 홀의 작업―쿨 재즈와 콜린 매킨즈를 다룬 1950년대 말의 초기 글부터 80년대 막바지에 «뉴 타임즈»에 발표한 에세이들까지―은 좌익 정치와 대중 문화의 연결을 확립하지 못한 거듭된 실패에 대한 경고다”라고 썼다. 피셔는 사회주의가 재즈, 새로운 대항 문화, 펑크에서 발원한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데 무능했고 “포스트포드주의적 자본주의의 리비도적 장에서 아무런 매력도 발산하지 못한 과거 지향적인 전통주의”에 붙들려 있었다는 홀의 견해에 동의를 표했다.[53]
2011년에 피셔는 «현대성 되찾기» 초안을 작성하는 한편 2006년 이래 ‘유령론’과 잃어버린 미래들에 관해 쓴 글들을 모은 둘째 책을 출간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갖가지 긴급함이 이어져 2014년에야 «내 삶의 유령들»이 나왔다. 이 책 <서문>에서 설명한 대로 피셔는 2003년에 시작된 이 10년이 1950년대 이래 영국 대중 문화가 맞이한 최악의 시기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들의 흔적도 존재했고 «내 삶의 유령들»은 그중 일부에 관여하려 한 시도다. 음악, 텔레비전, 문학, 영화에 관한 그의 가장 뛰어난 글 일부를 모으고 증보한 이 책의 이질적인 [세] 부는 물질화되지 않았던 어떤 미래를 위한 진혼곡을 형성한다. 다방면을 아우르는 이 글들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미래의 느린 말소”―프랑코 베라르디의 작업에서 가져온 구절―라는 감각을 중심으로 배열되었다.[54]
책 제목에 함축되어 있듯 피셔의 이야기에는 자서전적 인장이 찍혀 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미래의 느린 말소]이 동반한 문화적 둔화가 가장 뚜렷이 드러난 분야는 대중 음악이었다. 대중 음악의 ‘감속’은 블로고스피어 중 그가 활동한 영역에서 거듭 논쟁 대상이 된 주제였다. 한때 “그토록 맹렬히 창의적”이었던 전자 음악은 다른 곳에 만연한 엔트로피 조건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럼에도 피셔는 여러 동시대 뮤지션―베리얼, 더 케어테이커, 윌리엄 배신스키 등등―에 열광했고 이들의 작업에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가하는 제약들에 대한 거부를 감지했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어제의 내일(yesterday’s tomorrow)의 유령적 현전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유령론이라는 관념을 새로운 목적에 맞추어 변경한 그는 «내 삶의 유령들»에서 양식보다 충동에 의해 더 많이 정의되는 어떤 동시대 장르를 기술하고자 이 용어를 사용한다. 치지직거리는 루프, 에코, 샘플의 멜랑콜리한 질감 속에서 피셔는 한층 희망찬 시대의 잃어버린 미래들을 들었다.
괴롭힘
«내 삶의 유령들»이 인쇄에 들어간 시점에 피셔의 온라인 정치 참여는 고통스러운 변곡점에 도달해 있었다. 학생 운동과 긴축 반대 운동이 추진력을 잃자 일부 활동가 진영은 에너지의 방향을 내부로 돌렸다. 피셔는 온라인 고발(call-out) 문화를 비판한 <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올여름 나는 모든 정치 참여에서 물러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과로로 탈진해 생산적 활동을 할 여력이 없었던 나는 어느새 소셜 네트워크를 표류하고 있었고, 그 탓에 우울과 탈진이 더욱 심해졌다.” 그해 초만 해도 그는 특정 인물들이 ‘고발’당하고 비난받은 좌파 트위터 폭풍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인물들의 언행이 때로 무례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들을 인격적으로 비난하고 괴롭힌 방식은 끔찍한 잔여물을 남겼다.” “이런 사건 중 그 어느 것에도 말을 얹지 않은 것은, 이렇게 말하게 되어 수치스럽지만, 두려움 때문이었다. 불량배들은 운동장의 다른 편에 있었다. 나는 그들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다.” 기민한 잉글랜드 코미디언으로 <뉴스나이트> 진행자인 제러미 팩스먼과 논쟁을 벌인 러셀 브랜드를 향한 ‘좌파’의 공격이 그의 마음을 바꾸었다. 격분해 이 공격에 응수한 피셔는 이처럼 “의욕을 꺾는 단계”를 초래한 “리비도-담론 형성들”을 분석한다. “이들은 좌익을 자임한다. 하지만 브랜드 사례가 명백히 드러내듯 여러 면에서 이들은 계급 투쟁의 행위자로 정의되는 좌파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징후다.” 정체성 정치의 유독한 반복이 새로운 고발 문화를 정당화했다. 계급을 언급하기만 해도 자동으로 인종과 젠더의 중요성을 격하하려는 시도인 것마냥 취급되었다. ‘정체성 중심주의’에 맞서 피셔는 아캄프라의 작업을 언급하며 홀의 문화 연구 전통을 환기했다. 이 전통의 중요성은 부분적으로 “정체성 중심적 본질주의”에 저항했다는 데, “정체성이란 없으며 욕망, 이해 관계, 정체화만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데” 있다. “요는 어떤 접합이든 잠정적이고 가소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55]
전형적으로 희화화된 혹은 오해된 이 에세이는 온라인에서 가혹한 반응에 직면했고, 아이러니하게도 피셔가 분석하고자 했던 종류의 행동을 유발했다. 논변에 어떤 한계가 있었건―무엇보다 이 글은 우울증 기간에 쓰였다―이를 훌쩍 뛰어넘어 이 문화의 잔인함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에는 용기와 예지력이 있었다. CCRU 시절 이래 들뜸의 원천이었던 온라인 세계는 오랫동안 그에게 피난처와 재능을 펼칠 장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이 병리 상태에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리고 그로부터 망명해야겠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그 뒤 그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고 블로그 활동도 뜸해졌다―그로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으리라.
선집
피셔의 저작들에서 접하게 되는 테마와 집착 들이 새로운 선집[«k-펑크»]에 라이프모티프로 등장한다. 800쪽이 넘는 이 책은 피셔가 [저서들에 수록한 글들을 제외하고] 이 시기에 생산한 글 대부분을 모았으며, k-펑크의 시작부터 2016년 말에 쓴 마지막 글들에 이르는 영토를 기록하고 있다(그리고 2004년 이전 글들은 별도의 책으로 나올 것이라는 약속이 제시되고 있다). 140여 편 중 절반이 훨씬 넘는 글이 k-펑크 블로그 자체의 텍스트며, 그 외에 각종 매체(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미술, 음악, 정치 저널과 잡지) 기고문, 이 시기 전체에 걸쳐 피셔가 나눈 대담, 그리고 사망할 때까지 완성하지 못한 «애시드 공산주의»의 미완성 <서문>을 포함해 몇몇 희귀한 글이 있다. 피셔의 글을 남김없이 담고 있지는 않지만 포괄적이다. 한편 철학적, 정치적 관심사에 기초한 글(«뮤트»에 기고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변증법의 원자가들» 서평을 포함해)과 음악 저널에 기고한 일부 긴 글 등은 누락되어 있다. 이런 누락은 명시되지 않은 편집상의 선호에 따른 유감스러운 결과지만, 최상의 통찰과 논평 다수가 일시적이기 십상인 성찰들에 흩어져 있는 피셔의 작업을 배치하기란 지극히 까다롭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해할 수 없게도 찾아보기를 싣지 않았고, 길 찾기를 돕기 위해 주제별로 부를 구분했지만 이는 약점에 가깝다. 영화, 음악, 자전적 경험, 이론, 정치, 사회를 함께 묶어 읽는 피셔의 성향에 다소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 시간 순서를 [완전히] 따르지 않아 그의 생각이 운동해 온 방향을 추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피셔의 글과 같은 결합체는 시놉시스에 저항한다. 이 글들은 문화적 가치 평가와 비판, 이데올로기와 정치 전략에 대한 성찰, 미디어 풍경과 정부 정책에 대한 철저한 검토, 동시대 경험의 짜임새들에 대한 숙고를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선집도 다양한 형식을 수용하고 있다. 그의 블로그 게시물은 자연히 한층 비공식적이다. 스치고 지나가는 것, 즉 피셔가 보고 읽고 들은 것, 자신이 머물렀던 온라인 환경 내부에서 토의되던 것에 대한 응답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는 그의 성찰을 꼼꼼히 살피면서 우리는 발상들이 발전 중임을 목격하며, 독특하고 너그러운 지성이 거쳐 온 긴 여정을 뒤따르게 된다. 우세한 어조는 비애지만 희열의 섬광들도 있다. 신자유주의 영국이라는 슬픈 열대의 연대기를 가슴 아프게 기록하는 피셔는 또한 가능성의 틈을 찾아내는 데, 척박한 시절에 새로운 사고를 꿈꾸는 데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문화적 확신들을 열렬히 신봉했지만, 발견의 짜릿함을 기록한 많은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 뜻밖의 장소들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것에도 열린 태도를 취했다. [발견의 짜릿함을 묘사한] 그의 글 자체도 짜릿함을 불러일으키곤 했는데, 동시대적인 것의 코드를 해독한 이 글들은 일상적인 삶의 잔해들에 의미와 의의를 봉헌함으로써 거의 신비스러운 성질을 획득했다.
이 선집은 글쓰기 안에서 영위된 어떤 삶의 정점과 저점―지적이고 정치적인, 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고 재정적인―을 차근차근 기록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후 피셔는 점점 더 많은 청탁을 받았다. 새로운 분위기는 그의 글에 한층 수용적이었다. 그는 여전히 주변적인 인물이었지만 문화를 중심에 둔 다양한 좌파 성향 발행물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재단장한 «뉴 스테이츠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프리랜서 삶이 덜 불안정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미친 듯이 일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묘사했고,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을 다룬 게시물에서는 “단속적이고 단편적으로만 시간을 운용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장기 프로젝트”에 관여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56] 그런 장기 프로젝트 대신 피셔가 생산한 것 다수는 문화 비평이었다. 이 선집에 담긴 비평들의 광범위함은 대중적이고 펄프적인 형식과 장르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 준다. 시금석은 밸러드, 러브크래프트, 린치, 크로넨버그였다. 매체를 막론하고 리얼리즘은 그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다. 영화를 제외하면 그는 주로 영국 문화에 몰두했다. 현재의 텔레비전과 대중 음악 다수를 혹독히 비판했지만―문화 비판(Kulturkritik) 전통을 이어받은 타락한 동시대 문화 비판―그러면서도 고급 문화 취향에, “겸양 떠는 척하지만 실은 우월감을 표명하는 센트럴 런던”(2009년에 밸러드가 사망했을 때 발표된 한 부고를 비판하면서 사용한 구절)에 맞서 대립각을 세웠다.[57] 이념을 혐오하는 소박한 경험주의를 격하한 그는 대륙 철학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이론적 정전들을 육성했다.
가장 중요한 문화적 충성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포스트펑크다. 전후 합의(post-war consensus) 문화를 찬미했지만 피셔는 이 문화가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에 한층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펑크의 최초 충격을 경험하기엔 너무 어렸던 그는 그 대신 펑크의 여파로 생산된 형식 파괴적 일탈들을 사운드 트랙으로 삼아 성인이 되었고, 팝이 “기분 좋은 여흥” 이상의 무언가라는 믿음을 줄곧 유지했다. 한 블로그 게시물에서는 “어찌 보면 내가 쓰거나 관여한 거의 모든 것은 포스트펑크라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한다.[58] 전설적인 포스트펑크 밴드 더 폴을 다룬 2005~2006년의 3부작은 이 사건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님을 시사한다. 피셔는 실험주의와 정교화가 노동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관념에 대한 더 폴의 반박을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이들의 작업이 자신에게 끼친 현저한 브레히트적 효과에 경의를 표한다. 이런 효과는 그의 작업 다수가 상기시키고자 한 것이자 당연히 그 자신이 재현한 것―일부 측면에서 그는 동료 좌파 작가들보다 자신이 흠모한 예술가들과 더 가까웠다―이기도 하다. 그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천명한 것처럼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자연적 질서’의 외양을 파괴해야 하며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제시되는 것이 그저 우연적일 뿐임을 폭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것을 성취 가능한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 한다”.[59]
포스트펑크는 문화가 대중적인 것인 동시에 그것을 새로이 만드는 데 전념하는 것이라는 피셔의 이상을, 그가 처음에는 펄프 모더니즘이라고, 나중에는 대중 모더니즘이라고 부른 조합을 구현한 장르였다. 이 같은 종합이 전후에 모더니즘 형식과 충동의 문화적, 사회적, 지리적 확산과 더불어 번창했으며 이 확산을 촉진한 주된 요인은 증대하던 평등주의와 탄탄한 복지 국가였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달리 말하면 어린 시절 그의 문화적 이정표들과 하부 구조를 특징지은 것이 바로 이런 조건이었다. 반대로 동시대 풍경은 공영 방송의 쇠퇴와 계급에 따른 문화의 재계층화에 길들어 있었고, 신자유주의 포퓰리즘의 지옥 같은 논리에 통치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지성적이라는 듯이 대하는 태도가 ‘엘리트주의적’이며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듯이 대하는 태도는 ‘민주주의적’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60] 채널 4의 타락―탁월했던 초기를 거쳐 “이제는 속속들이 창피할 정도로 장사꾼 같고 겁쟁이 같은 얄팍함으로 퇴보해 패러디할 가치조차 상실”한―은 이런 변화를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었다.[61] 처음에 그를 고무했던 음악 저널리스트들의 작업은 관습적인 고급 문화만큼이나 최상의 대중 음악에서도 정교함을 발견했으며, 이는 이 책에 수록된 여러 범례적인 글에서 피셔 자신이 한 무언가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동시대 정신은 정반대로 그 무엇도 진지하게 대할 필요가 없음을 함축하는 문화적 하향 평준화를 조장했다.
문화와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이 선집은 대부분의 경우 [피셔가 애초 견지했던 입장의] 정교화와 강화를 보여 준다. 반면 주된 발전을 이룬 것은 정치적인 측면이다. 본질적으로 이 발전은 당대 영국 좌파의 폭넓은 역사―신노동당 출범과 테러와의 전쟁 개시부터 경제 위기와 긴축을 거쳐 가능성의 재점화와 일시적인 르네상스로 이어진―와 동기화된 것이었다. 피셔는 원칙으로 삼았던 이탈 입장(“투표하지 말자, 그들을 독려하지 말자”)을 보수당이 자민당과 연합해 2010년에 권력을 수복했을 때 포기했고, 일상적인 정치에 점점 더 꾸준히 관여했다.[62] [보수당이 승리한] 2015년 총선으로 희망이 꺾였지만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코빈이 승리한 뒤에는 활력을 되찾았다. 미완의 마지막 블로그 게시물에서 그는 트럼프와 브렉시트가 “이상화된 과거를 향한 갈망, 그리고 현재의 복합성과 당혹감에 대한 부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묘사한다.[63]
이 마지막 몇 년간 피셔가 쓴 글은 그의 희망이 동요를 겪었으며―주기적인 과대 평가는 의도적인 변화처럼 보인다―이런 동요가 그의 안녕과 위험하게 얽혀 있었음을 드러내 준다. 2015년 총선 직전에 쓴 블로그 게시물에서 그는 지난 몇 년간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이견 분출의 첫 희열” 이후 “절망의 매캐한 연기”가 점진적으로 나라 전체에 드리웠다고 느꼈다. 또한 급작스러운 들뜸을 기록하면서 변화가 부분적으로 시리자, 포데모스,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쓰기도 했다. 더 포괄적인 분위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의 우울증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이는 구절들에서 그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가로막았던 정신적 봉쇄가 해제되고 있음”을 감지한다고 쓴다. 보수당이 [2010년에 이어] 다시 한번 승리한 뒤 올린 후속 게시물에서 그는 여전히 단호한 태도를 취하며 독자들에게 절망에 맞서자고 제언한다. 국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격변이 “비참과 범속함에 맹공격당한 잉글랜드에 아직 당도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는 역설한다.[64]
마지막 유토피아
이 시기에 피셔는 런던을 벗어나 부인과 어린 아들과 함께 서퍽의 해안가 도시인 펠릭스토에 살았다. 그의 삶을 빚은 역사적 과정들이 그곳 풍경에 나타나 있었다. 도시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컨테이너항의 기중기들, 그에게 H. G. 웰스의 «우주 전쟁»에 등장하는 마션 트라이포드처럼 보인 그것들은 “지난 40년간 벌어진 자본과 노동의 이동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 준다”. 피셔가 목숨을 끊기 한 달 전인 2016년 말에 출판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 나오는 성찰이다. 그는 런던 남동부에 소재한 골드스미스 대학의 시각 문화학과에서 강사로 일하던 시절에 이 책을 썼다. 제목에 제시된 미적 양식들에 대한 설명은 그의 가장 우아한 글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반면 처음에는 정치적 긴급함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친숙한 경향을 알아볼 수 있다. ‘기이한 것’이 “우리가 기존에 차용하고 있던 개념과 사고 틀이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는” 것을 가리키는 경향이 있다면 “으스스한 것”은 “통상 리얼리티라고 간주되는 것이 가하는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표시한다. 이 말년의 작품에서 [지금과] 다를 수 있었던 어느 세계에 대한 피셔의 꿈꾸기는 한층 예지적이고 비세속적인 형식을 취해 “표준적인 지각, 인지, 경험 너머에 있는 것”을 향한다.[65] 이 경향은 그가 마지막까지 집필한 글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의 넷째 책이 될 예정이었던 «애시드 공산주의»의 <서문>이 바로 그 글이다. 이 글은 선집 말미에 결론 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이 글 사이에서 이루어진 사고의 전환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일차원적 인간»과 피셔가 준거하는 «에로스와 문명» 사이에 감행한 전환과 비슷하다. 여기서 피셔의 중심 주장은 그가 홀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표면화된 주장과 동일하다. 60년대와 70년대 초에 좌파는 대항 문화의 “집단 희열”과 접속하는 데 실패했으며, 우파가 자유와 쾌락에 대한 대항 문화의 수용을 식민화했다는 것이다.[66] 애시드 공산주의는 이 불발된 수렴의 ‘유령’이다. 그는 이 명칭을 “하나의 도발이자 약속 … 일종의 농담, 하지만 목적은 매우 진지한”이라고 묘사한다. 한때 히피 운동을 무시했던 피셔는 여기서 노역(drudgery)에서 탈출하기를 꿈꾼 문화의 등장을 소묘한다. 감동적인 문단에서 그는 신자유주의의 반혁명 에너지가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울 수도 있었던 어느 사회의 유령이 가하는 위협의 규모를 증언”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67] 이는 제러미 길버트 및 자율주의 그룹인 플랜 C와의 토론에서 싹튼 발상이다. 이 글에서도 홀이 마지막으로,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을 들으며 느낀 것들에 관여할 수 있는 사회주의를 꿈꾼 인물로 등장한다.
여기서 피셔가 착수한 과제는 그의 관점이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나 얼마간 바뀌었음을 표상한다. 그의 시야가 포스트펑크 이전으로 연장되었고, 또 처음으로 영국 너머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73년의 피노체트 쿠데타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정초한 순간으로 언급된다. 그는 대항 문화를 ‘아이콘’이 된 이미지들과 ‘클래식’이 된 음악으로 환원하면 당시에 폭발했던 진정한 가능성들―무엇보다 민권 운동, 계급 투쟁, 사회주의-페미니즘 조직화, 의식 변화에 대한 발상들이 융합될 가능성―을 중화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전 글들에서는 그때그때 문화와 정치의 관계를 달리 설정했지만―때로는 문화가 행동을 위한 상상적 가능성들을 규정하고 조율한다고 묘사했고, 또 때로는 정치적 변화에 의해 소멸할 수 있다고 간주하기도 했다―여기서 그는 이 둘을 수렴할 하나의 시각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자신의 경험을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예술 작품의 변형력에 대한 증거로 제시한 피셔는 비틀즈와 템테이션즈의 노래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 이 힘을 장대하리만치 팽창시킨다. 몹시 고단했던 시기에 집필한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이제껏 보인 것 중 가장 유토피아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인간성, 새로운 시야, 새로운 사고, 새로운 사랑”의 변함없는 약속을 강조한다.[68]
이 선집에 수록된 이전 글들도 그렇지만 지금 시점에 이런 구절들을 읽는 건 [정서적으로] 힘든 일이다. 2014년에 발표한 개인적인 에세이에서 피셔는 자신의 우울증이 사회적 위계에 대한 경험(자신이 느낀 무가치함이 자신을 양육했다는 감각을 중심에 둔) 및 계급들 사이에 낀 존재로 느끼는 고통과 얽혀 있음을 묘사한다. 이 경험과 고통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감각을 자신에게 남겨 놓았다고 그는 쓴다.[69] 이 감각의 흔적을 그의 문화 비평에서, 또 “분노, 혼란, 당혹감”과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고통스러운 드라마”에 대한 묘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70] 사회, 정치 문제들이 개인적인 병리 현상으로 환원되는 방식을 설득력 있게 비판한 피셔는 우울을 덜 개인화된 차원에서 파악한 덕분에 자신의 우울을 관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71] 또한 그는 그 덕분에 자신의 고통을 외부화하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진단에서 우리의 동시대는 본질적으로 우울하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기가 꺾인 것도 사실이지만, 좌파의 상태, 긴축에 대한 대중의 수락, 국민의 상태 역시 우울하기 때문이다. 2015년의 잉글랜드는 “‘어쩌면 지구상에 실존하는 가장 우울한 나라’일 것”이라고 그는 썼다.[72] 그럼에도 그가 굴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미발표로 남은 마지막 블로그 게시물에서 발견한다. 2016년의 정치적 소란들은 우파가 “현대성에 대한 자신의 권리 주장에서 물러났음”을 입증했으며 이를 계기로 “좌파가 현대성을 되찾을 한층 더 강한 추진력”을 얻었다는 말에서.[73]
[1] 피셔의 생애를 꿰어 맞출 수 있도록 도와준 앵거스 칼라일, 페데리코 캄파냐, 윌리엄 데이비스, 제러미 길버트, 타리크 고더드, 오언 해설리, 세이디 플랜트, 니나 파워에게 감사드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오류는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2] 특히 Alex Niven, “Mark Fisher, 1968~2017”, Jacobin, 19 January 2017; Owen Hatherley, “Writing of a sort that wasn’t supposed to exist anymore”, Ceasefire, 17 January 2017; Jeremy Gilbert, “My Friend Mark”, posted 11 March 2017 on the blog, jeremygilbertwriting을 보라.
[3] Mark Fisher, K-Punk: The Collected and Unpublished Writings of Mark Fisher (2004~2016), ed. Darren Ambrose, London 2018, 앞으로는 kp로 표기.
[4] Mark Fisher, Ghosts of My Life: Writings on Depression, Hauntology and Lost Futures, London 2014, p.29; Stuart Hall and Paddy Whannel, The Popular Arts, London 1964, pp.22, 37~44.
[5] 홀은 중등 현대 학교의 수업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 경험”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공식 교육의 규범 및 기대와 아이나 청년이 거주하는 현실 세계의 복잡성이 빚는 갈등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버밍엄에서 그가 총괄한 10대 하위 문화 연구도 이 경험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Hall and Whannel, The Popular Arts, p.13.
[6] Fisher, Ghosts of My Life, p.50.
[7] Blog, ‘Don’t Vote, Don’t Encourage Them’, 4 May 2005, kp, p.429; ‘Test Dept: Where Leftist Idealism and Popular Modernism Collide’, Frieze, 25 September 2015, kp, p.416.
[8] Blog, ‘Why K?’, 16 April 2005, kp, p.31[<왜 k인가?>, «k-펑크» 1권, 박진철, 임경수 옮김, 리시올, 2023, 42쪽].
[9] Blog, ‘Book Meme’, 28 June 2005, kp, p.38[<책 밈>, «k-펑크» 1권, 49쪽]. 그는 홀을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도 언급한 적이 있다: “나 같은 누군가―1968년에 태어났고 공영 방송 덕분에, 데리다와 보드리야르를 인용하는 독학자 음악 비평가 덕분에, 미술과 문학과 실험 영화를 다수 참조한 포스트펑크 덕분에 이론 쪽으로 유혹당한―에게 홀이 BBC의 얼굴이자 목소리라라는 점에는 특별할 게 전혀 없었다”―그렇지만 “그가 주류 미디어에서 자리를 차지하도록 해 준 문화를 제거하게 될 세력들이 이미 진군 중이었다”. Fisher, The Stuart Hall Project, bif 2014, pp.1~2
[10] Blog, ‘Can’t Stay Long’, 10 February 2008(kp에 수록되지 않은 게시물).
[11] ‘Review: Sleaford Mods’ Divide and Exit and Chubbed Up: The Singles Collection’, Wire, April 2014, kp, p.411.
[12] 홀 자신은 1990년대에 이 추세를 경고하면서 대중 문화가 “상품화의 탁월한 장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후임자들에게 상기시켰다. Stuart Hall, ‘What Is this “Black” in Black Popular Culture?’, in David Morley and Kuan-Hsing Chen, eds, Stuart Hall: Critical Dialogues in Cultural Studies, London 1996, p.469.
[13] Sadie Plant, The Most Radical Gesture: The Situationist International in a Postmodern Age, London 1992. 또한 플랜트는 사이보그-페미니즘을 표방한 저작 Zeros and Ones를 1997년에 출간했다.
[14] Fisher, ‘Nick Land: Mind Games’, Dazed and Confused, May 2011; Fisher, ‘Post-Capitalist Desire’, in Federico Campagna and Emanuele Campiglio, eds, What We Are Fighting For: A Radical Collective Manifesto, London 2012, p.132.
[15] ‘They Can Be Different in the Future Too: Interviewed by Rowan Wilson for Ready Steady Book(2010)’, kp, p.629.
[16] 플랜트와 랜드는 1995년에 이렇게 썼다. “소외는 자신과 소원해진 어느 인구 집단을 진단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여전히 회복을 약속하는 예후를 제공했다.” “저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는 우리 모두 이방인이고, 소외된 것이 아니라 에일리언이며, 단순히 속아 넘어가 엔트로피 전통에 바스러지는 충성을 바치고 있을 따름이다.” ‘Cyberpositive’, in Robin Mackay and Armen Avanessian, eds, #Accelerate: The Accelerationist Reader, Falmouth 2014, p.308.
[17] Nick Land, ‘Machinic Desire’, Textual Practice, vol.7, no.3, 1993, p.480.
[18] Fisher, ‘Indie reactionaries’, New Statesman, 7 July 1995; Fisher, ‘Beyond the Face’, Wired, June 1995.
[19] Fisher, ‘Hello darkness, our new friend’, New Statesman, 11 March 1994.
[20] CCRU가 해산하기 전인 1999년 음악 저널리스트 사이먼 레이놀즈는 «링구아 프랑카»의 의뢰로 이 집단의 초상을 생생하게 묘사한 바 있다. 이 글에 피셔가 잠시 등장한다. “손을 휘저으며 복음주의적인 긴급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말쑥한 청년.” 이 글은 사이먼 레이놀즈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다. ‘Renegade Academia: The 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 Energy Flash, 3 November 2009.
[21] Stefan Collini, What Are Universities For?, London 2012, pp.33, 22를 보라.
[22] Interview with Rowan Wilson, kp, pp.633~634.
[23] 홀은 대처리즘의 기획이 “국가 장치의 지휘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실제로 초기에 대처리즘은 국가에 대립하며 조직되었다. 대처의 관점에서는 국가가 케인스주의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회를 재구조화하기 위해 국가를 변형시키고자” 했다고 썼다. Stuart Hall, ‘Gramsci and Us’, The Hard Road to Renewal: Thatcherism and the Crisis of the Left, London and New York 1988, p.163[<그람시와 우리>, «대처리즘의 문화 정치», 임영호 옮김, 한나래, 320~321쪽].
[24] Stuart Hall, ‘Gramsci and Us’, pp.162~163[<그람시와 우리>, «대처리즘의 문화 정치», 319~321쪽].
[25] Ghosts of My Life, p.28; Blog, ‘One Year Later . . .’, 17 May 2004, kp, p.693.
[26] Interview with Rowan Wilson, kp, p.629.
[27] Simon Reynolds, ‘Foreword’, kp, p.16.
[28] Blog, ‘Choose Your Weapons’, 12 August 2007, kp, p.354.
[29] ‘Don’t Vote, Don’t Encourage Them’, kp, p.429.
[30] Fisher, ‘The Big Other & “Unknown Knowns”’, Mute, 22 July 2004, reviewing Žižek’s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and Iraq: The Borrowed Kettle.
[31] Blog, ‘Why K?’, kp, p.32[<왜 k인가?>, «k-펑크» 1권, 44~45쪽].
[32] Blog, ‘Spectres of Marker and the Reality of the Third Way’, 18 February 2006, kp, p.163[<마커의 유령들과 제3의 길이라는 현실>, «k-펑크» 1권, 243쪽].
[33] Mark Fisher, Capitalist Realism: Is There No Alternative?, London 2009, p.2[«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13쪽].
[34] Capitalist Realism, pp.7~9[«자본주의 리얼리즘», 21~25쪽].
[35] Capitalist Realism, pp.16, 14, 17~18[«자본주의 리얼리즘», 36~37, 32~33, 38~40쪽].
[36] Capitalist Realism, pp.21~22, 25~26[«자본주의 리얼리즘» 44~46, 51~53쪽]. 피셔는 스코세이지와 코폴라의 갱 영화와 마이클 만의 «히트»를 대비하면서 포드주의―자기 회사에서 생산한 차를 자신에게 고용된 노동자들이 살 수 있을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기로 한 헨리 포드의 결정에 의해 신화적으로 정의된―와 포스트포드주의를 구분한다.
[37] Capitalist Realism, p.81[«자본주의 리얼리즘», 135쪽].
[38] Capitalist Realism, p.8[«자본주의 리얼리즘», 23쪽].
[39] Niven, ‘Mark Fisher, 1968–2017’.
[40] Capitalist Realism, p.37[«자본주의 리얼리즘», 69쪽]. 지젝의 말은 뒤표지에 실려 있다.
[41] Blog, ‘Winter of Discontent 2.0: Notes on a Month of Militancy’, 13 December 2010, kp, p.476.
[42] ‘How to Kill a Zombie: Strategizing the End of Neoliberalism’, openDemocracy, 18 July 2013, kp, p.539.
[43] ‘Zer0 Books Statement’, 2009, kp, p.103[<제로 북스 설립문>, «k-펑크» 1권, 152~153쪽]; Interview with Rowan Wilson, kp, p.630.
[44] Interview with Rowan Wilson, kp, pp.629~630.
[45] ‘Capitalism Realism: Interviewed by Richard Capes (2011)’, kp, p.653.
[46] Mark Fisher and Jeremy Gilbert, Reclaim Modernity: Beyond Markets, Beyond Machines, London 2014; 또 interview with Richard Capes, kp, pp.658, 656도 보라.
[47] Fisher and Gilbert, Reclaim Modernity, pp.12~13, 25.
[48] Fisher and Gilbert, Reclaim Modernity, p.25.
[49] 피셔와 길버트는 현재 ‘황금기’를 맞은 미국 텔레비전의 일부 생산물이 형식 면에서나 장르 면에서나 스릴러, 시트콤, 액션 어드벤처의 관습을 능가해 왔다고 주장한다. 세계는 21세기의 진정한 실험이 어떤 모습일지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p.20).
[50] Fisher and Gilbert, Reclaim Modernity, p.16.
[51] Blog, ‘The Happiness of Margaret Thatcher’, 8 April 2013, kp, p.532.
[52] 두 에세이 모두 Soundings, no.48, Summer 2011에 발표되었다.
[53] Gavin Butt, Kodwo Eshun and Mark Fisher eds, Post-Punk Then and Now, London 2016, pp.101, 110.
[54] Ghosts of My Life, p.6.
[55] Fisher, ‘Exiting the Vampire Castle’, The North Star, 22 November 2013, kp, pp.737, 740~741, 744.
[56] Interview with Rowan Wilson, kp, p.636; blog, ‘Precarity and Paternalism’, 11 February 2010, kp, p.203[<불안정성과 부성주의>, «k-펑크» 1권, 303쪽].
[57] ‘The Assassination of J. G. Ballard’, Ballardian, 28 April 2009, kp, p.73[, «k-펑크» 1권, 104쪽].
[58] Blog, ‘The Outside of Everything Now’, 1 May 2005, kp, p.298.
[59] Fisher, Capitalist Realism, p.17[«자본주의 리얼리즘», 37~38쪽].
[60] Blog, ‘Precarity and Paternalism’, 11 February 2010, kp, p.200[<불안정성과 부성주의>, «k-펑크» 1권, 297쪽].
[61] ‘Classless Broadcasting: Benefits Street’, New Humanist, 17 February 2014, kp, p.238[<계급이 사라진 방송>, «k-펑크» 1권, 354쪽].
[62] ‘Don’t Vote, Don’t Encourage Them’, kp, p.429.
[63] Blog, ‘Mannequin Challenge’, 15 November 2016, kp, p.618.
[64] Blog, ‘Pain Now’, 7 May 2015, kp, pp.569, 571; blog, ‘Abandon Hope (Summer is Coming)’, 11 May 2015, kp, p.584.
[65] Mark Fisher, The Weird and the Eerie, London 2017, pp.77, 13, 8[«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안현주 옮김, 구픽, 2019, 122, 15~16, 8쪽].
[66] No Romance Without Finance’, Bamn: An Unofficial Magazine of Plan C, 9 November 2015, kp, p.424.
[67] ‘Acid Communism (Unfinished Introduction)’, kp, pp.758–9.
[68] ‘Acid Communism’, kp, pp.754, 767.
[69] ‘Good For Nothing’, Occupied Times, 19 March 2014, kp, p.747.
[70] Blog, ‘Stand Up, Nigel Barton’, 13 June 2004, kp, p.116[<자리에서 일어서, 나이절 바턴>, «k-펑크» 1권, 169쪽]; Blog, ‘Ripley’s Glam’, 1 July 2006, kp, p.84[<리플리의 글램>, «k-펑크» 1권, 123쪽].
[71] 피셔의 사인 규명이 이루어진 후 아내 조이 피셔는 시장-관료주의화된 국민 보건 서비스NHS가 어떻게 피셔를 돌보는 데 실패했는지를 가슴 아프게 설명한 바 있다. Adam Howlett, ‘Renowned writer and K-Punk blogger Mark Fisher’, Ipswich Star, 18 July 2017.
[72] Blog, ‘Democracy is Joy’, 13 July 2015, kp, p.609.
[73] Blog, ‘Mannequin Challenge’, kp, p. 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