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k-펑크» 표지를 디자인하는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말이 800쪽이지 원서가 너무 빽빽해서 이걸 한국어판으로 만들면 1,500쪽은 너끈히 나올 텐데, 이번 생엔 못 내지 않을까? ㅎㅎ 게다가 피셔의 압축적인 논리와 현란한 문체에 옮긴이 선생님들과 편집자 모두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ㅎㅎㅎㅎ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그사이 우리는 이 책을 네 권으로 분권해 하나씩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첫 권 번역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부턴 «k-펑크» 표지를 디자인하는 날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전작인 «자본주의 리얼리즘»보다 멋진 표지를 만들기가 불가능해 보였고, 우리보다 먼저 번역본을 낸 스페인어판과 이탈리아어판이 내 기를 죽이며 엄청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기에… 거기다 분권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한 번에 네 권을 디자인해야 했다. 각각이 독립적으로 시선을 붙들면서도 일관성을 담아낼 수 있도록. 무엇보다 나는 피셔가 이 책에서 논의한 책과 영화 중 본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갓반인이라고!


편집자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하나는 70년대 말 이래의 펑크 팬진처럼 이미지들이 와글와글하고 삐죽빼죽하게 들어찬 구성이었다. 피셔는 자신의 블로그를 설명하면서 펑크에서는 팬진들이 음악보다 유의미했다고 말했다. 일방적인 매스 미디어가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민주적 네트워크. 크… 그런데 펑크가 뭐지? 인터넷으로 팬진 이미지들을 찾아봤는데 뭘 어째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내 디자인 스타일과 꽤 달랐고 솔직히 이 책과 아주 잘 어울리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리고 2~4권도 이렇게 디자인한다면 과거를 답습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편집자는 둘째 방향이 피셔에게도, 이 책에도 더 부합할 것 같다는 의견을 주었다. 그 방향이란 포스트펑크의 ‘차가운 금속성 반복’을 이 책에 맞게 구현하는 것이었다. 포스트펑크는 또 뭐야? 그래도 이 방향은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갑고 반복적인 패턴으로 이루어진 네 권의 책, 피셔가 매혹되었던 유령 같은 분위기와 당시 블로그 네트워크의 영롱한 반짝임이 어우러지는.
피셔와 가까워지려고 «k-펑크»에 언급되는 영화를 거의 다 봤다. 제일 먼저 본 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였다. 호기롭게 «파편들»(1975)을 틀었는데, 영화가 끝난 뒤 갓반인의 솔직한 감상은 “마크 피셔 나랑 안 맞는 거 같애;;”였다. 이후 «비디오드롬»(1983), «엑시스텐즈»(1999)를 보면서는 조금 덜 미간을 찌푸릴 수 있게 되었고, «폭력의 역사»(2005), «스파이더»(2002)는 불안한 아름다움을 발하기까지 했다. 1부의 주인공이라 할 만한 J. G. 밸러드 원작의 영화 «하이-라이즈»(2016)도 봤는데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이상한 영화로 꼽을 만했다(하지만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이 영화를 보시길).

피셔의 글을 읽으며 이 영화들 상당수가 가상에 의해 현실이 침입받거나 지배받는 ‘현실 번짐’reality bleed이라는 테마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배웠고, 이 번짐을 표지에 형상화하면 그럴듯하겠다는 생각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막연할지언정 몇 가지 아이디어가 수중에 들어온 셈이었고 운빨을 기대하며 작업에 들어갔다. 주된 오브젝트는 ‘모니터’였다. 이 모든 게 모니터 안에서 시작되었고 모니터를 매개로 번져 나갔으니까. «비디오드롬»에서 텔레비전이 인물을 집어삼키고 폭발하듯 모니터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피셔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고 외로운 와중에 어떻게든 이 도구를 이용하려 했다. 나는 이 표지가 그런 분위기를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모니터 형태를 도형으로도 그려 보고 선으로도 그려 보고 실사 이미지 누끼도 따 보고 스크린을 지글지글 화면 조정 시간으로도 만들어 보고 활활 타는 불구덩이로도 만들어 보고 이걸로도 채워 보고 저걸로도 채워 보고 세웠다가 눕혔다가 별의별 삽질을 많이도 했다. 광기에 휩쓸린 예술가처럼 이건 아니야! 다 틀렸다고!!! 하면서 침대에 엎어져 쿨쿨 잠도 잤다.
그런데 모르겠다. 아직 잘 모르겠는데. 여전히 모르겠는데 어쩔건데. 이러면서 뭔가를 조금씩 감지하기 시작했던 것인지. 어느 순간 지금껏 만들어 놓은 갖가지 스타일의 허접한 모니터들을 싹 치우고 하얀색 직사각형을 그렸다. 그런 뒤 나머지는 손이 가는 대로.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k-펑크» 1권 표지다. 돌이켜 보면 편집자의 의견, 피셔의 추천을 받아 하루에 한 편씩 본 영화, 끊임없이 메신저로 전달된 무수한 앨범 커버가 머릿속에 새겨졌고, 그것들이 손을 움직인 것 같다.
어떤 공간에 한 면이 흰색인 초록색 물체들이 있는데 이게 뭔지는 알 수 없다. 상/하단의 배경 톤 차이로 3차원의 어느 장소처럼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은 상태. 단순하며 강렬하지만 모호한 형태가 주는 감각이 좋았다. 흰 면을 빛이 나는 것처럼 표현해 마치 스크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구현했는데, 이때 바로 이 방향이라는 확신을 느꼈던 것 같다.
하얀 스크린 외에도 배치된 모든 오브젝트에 빛 번짐 효과를 넣었는데, 발광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쨍함이나 반들거림과는 달리 안개 낀 새벽이나 습기를 머금은 종이처럼 느껴지는 의외성(얻어 걸린 성과)도 마음에 들었다. 이걸 한층 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어 벨벳 코팅을 결심했는데 처음 시도해 보는 후가공이라 걱정도 컸지만 의도한 것 이상으로 어울리는 결과물이 나왔다.

블로그 글들임을 상기하고 팬진들을 떠올리며 본문 디자인도 캐주얼한 방향으로 크게 변화를 주겠다고 결심했다. 우선 리시올/플레이타임 책들은 대체로 일관된 본문 서체를 사용해 왔는데 이번에는 기존에 사용한 적 없는 서체를 사용했다. 기존 책들도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많은 편이지만 이 책은 분량을 감안해 행장을 넓히고 좀 더 빽빽하게 채웠다. 그러면서 답답함을 덜기 위해 최초로 왼끝 맞춤을 적용했다.
이 표지의 가장 두드러진 이점 하나는 배리에이션이 비교적 간편하다는 것이다. 2~4권은 내년과 내후년에 내겠지만 표지는 미리 작업해 두어야 해서 부담이 컸는데, 1권 표지를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나머지 권들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곤 표지가 완성되면 늘 보여 주는 주변 몇몇 사람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표지를 전송했다. 그 어느 때보다 반응이 좋았고, 왜 그리 좋아 보이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의 평가를 무턱대고 신뢰하고 싶었던 나는 마음을 놓기로 했다.
표지 작업을 마치고 출간하기 전까지의 시간이 또 다른 고비다. 짧은 만족의 시간에 이어 긴 의심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불안이 유난히 기승을 부렸고 돌이킬 수도 없어 계속 마음이 요동쳤다. 게다가 표지에 사용한 빛 번짐 효과가 실물 표지에서 제대로 구현될지도 불확실했다. 관록 있는 제작처 담당자 분도 이런 번짐 효과를 준 데이터는 처음이고 인쇄기를 돌려 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고 얘기해 한동안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곤 감리 당일. 인쇄소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서부터 초록색 기운이 느껴졌다. 인쇄기 앞 스크린에 누가 봐도 «k-펑크» 1권 표지인 초록 화면이, 그 밑 데스크에는 초록색 교정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이 너무나 두근거렸는데 가까이 다가가 교정지를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이거면 됐다 싶었다. 내가 디자인한 표지에 확신을 느끼는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인쇄기 앞에서 그렇게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완성해 놓은 2~4권 표지도 1권과 함께 공개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나중에 각 권이 나올 때 독자 분들을 놀래키고 싶어 우리 모두 온 힘을 다해 참았다. 얼른 나머지 권들을 실물로 보고 싶고 네 권을 모아 놓고 사진도 찍고 싶다. 다음 권들이 무사히, 늦지 않게 나올 수 있도록 여러분도 응원해 주세요. 그리고 «k-펑크» 1권 많이 사랑해 주세요…!
마크 피셔는 블로그를 시작하고 1년 후에 “블로그 덕분에 수많은 것에 대한 열정에 다시 불을 지필 수 있었고 과거에는 결코 주의를 기울인 적 없는 것들에도 열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썼다. 나는 피셔 덕에 굉장히 오랜만에 영화에 열정을 느끼게 되었다. 피셔의 글을 읽으며 잘 봐야 한다는 부담을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었고, 이제껏 미뤄 놓았던 수많은 영화 속에서 행복하게 허우적거리고 있다.
피셔가 세간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써 내려간 애정 어린(때로는 파괴 충동에 이끌린) 비평을 읽으며 나도 편견과 부담은 덜어내고 호기심은 키우게 된 것 아닌가 싶다. 피셔는 자신의 대상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인 것 같다. 어쩌면 이 책으로 가장 크게 덕을 본 사람은 내가 아닐까? 몇 달 후에는 피셔의 안내를 받아 새로운 음악들에 열정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출간 후 많은 독자께서 «k-펑크» 표지 디자인을 좋게 봐 주셨다. ‘트윈 픽스적’이라거나 ‘밤의 자동차 극장’, ‘허연 두 개의 화면’, ‘앨범 커버’, ‘새벽 1시쯤의 TV’, ‘책의 눈’처럼 나는 생각지도 못한 언어로 표지에 대한 감상을 나누어 준 분들도 계셨는데 이 말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정말 감사합니다…T^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