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연성 희망

오랫동안 준비한 번역문 하나를 올립니다. 2019년 문화 비평가 토드 B. 그루얼이 «k-펑크» 엮은이 대런 앰브로즈와 «k-펑크» <서문>을 쓴 사이먼 레이놀즈를 각각 인터뷰한 <가연성 희망>이라는 글이에요. 번역 및 게재를 허락해 준 온라인 잡지 «팝매터즈»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원문 링크: https://www.popmatters.com/mark-fisher-simon-reynolds-darren-ambrose

앰브로즈와 레이놀즈는 «k-펑크»의 <엮은이 서문>과 <서문>으로 마크 피셔에 대한 자신들의 기억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인터뷰는 그 글들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라 할 수 있어요. «k-펑크»를 작업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자료라 독자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서문>들보다 조금 더 비공식적인 이 인터뷰는 마크 피셔가 어떤 개성을 보유한 비평가였고 그의 사고가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잘 드러내 줍니다. 특히 사이먼 레이놀즈는 피셔뿐 아니라 여러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도 해요.

이 인터뷰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k-펑크»를 읽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이 인터뷰(그리고 블로그에 올린 다른 여러 글)를 동행인 삼아 2024년에도 «k-펑크»와 최근 2판이 출간된 «자본주의 리얼리즘» 많이들 읽고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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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마크 피셔는 결코 대중을 추수하지 않았다. 또 학계라는 베개의 속을 채우려 하지도 않았다. 이 인터뷰에서 동료였던 사이먼 레이놀즈와 대런 앰브로즈는 피셔 사후에 출간된 «k-펑크»와 그의 흥미로운 유산에 대한 통찰을 전해 준다.

토드 B. 그루얼 / 2019년 9월 9일
박진철, 리시올 편집부 옮김

마크 피셔는 누구였던가? 이 질문을 던지는 당신이 누구냐에 달렸다. 영국 블로거, 저자, 문화 이론가, 교사, 제로 북스 공동 설립자 등 피셔는 많은 사람에게 많은 의미로 다가온 인물이다. 사후 출간된 «k-펑크: 마크 피셔 선집(2004~2016)»은 그가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기획으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 슬프지만 피셔는 이제 독자들을 매혹시킬 수 없다. 우울에 맞서 고투해 오다 2017년 1월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서 피셔가 애정의 대상이든 아니든―우뚝 솟은 돌기둥이든 짓궂은 수수께끼든, 과격한 좌파 논쟁가든 이지적인 음악 저널리스트든―그의 작업은 앞으로도 강한 흥미의 원천으로 남을 것이다.

글쓰기가 숨쉬기처럼 자연스러운 누군가의 유산을 요약하는 것은 야심이 필요한 도전이다. <편집자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피셔의 역동적인 작업들을 정리하기 위해 음악 저널리스트 대런 앰브로즈는 “내용의 전방위성, 이론적 복수성, 무엇보다 현저한 일관성을 반영하는” k-펑크 게시물을 선별하고자 애썼다. 그리하여 그는 최대한 포괄적인 한 권의 책으로 이 선집을 편집했다. 주제에 따라 일곱 개의 부로 나눈―피셔의 블로그인 k-펑크 게시물, 기사, 리뷰, 인터뷰 등을 포함한―«k-펑크»는 [블로그 게시물 외에] 프리랜서로 쓴 글과 «와이어», «가디언», «프리즈», «뉴 휴머니스트» 같은 발행물에 기고한 글까지 아우른다.

경력 내내 피셔는 우려스러운 정치적 사건들을 성토하는 한편 대중 문화의 현 상태를 정찰했다. 잉글랜드 축구, 글램 록, 헝거 게임 3부작 등의 의의를 밝히면서 그는 미학보다 더 심부에 위치한 원칙들을 고심했다. 피셔는 결코 대중을 추수하지 않았다. 또 학계라는 베개의 속을 채우려 하지도 않았다. 프랑스 혁명기에 빛나던 기요틴처럼 그는 전통이나 권위의 폭정이 떠받치는 그 무엇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속에 그린 미래는 인공 날개를 달거나 의사의 처방을 받아 도착하지 않았다. 그의 희망은 한층… 가연성combustible이었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령에 위임받은 그의 사회-인식적인 글쓰기 페르소나는 풀이 무성한 들판 한복판에서 발사된 때 아닌 폭죽처럼 타오른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k-펑크» <서문>에서 “마크는 통찰력과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이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존재”라고 묘사한다. “신선한 지각력과 독창적인 접합, 잊을 수 없는 금언과 예리한 경구가 차고 넘쳤으니까.” 800쪽에 달하는 «k-펑크»는 온갖 주제로 뻗어 나가지만, 불씨를 지피는 도화선이 되는 것은 하나의 테제다: 인간의 믿음이 사회적 실천을 정당화하며, 종국에는 우리의 경제 체계, 심리, 예술로―종종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폭발적으로 퍼져 나간다는 것.

우리 시대를 위한 투쟁들을 증언하기 위해 더 후의 앙코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때 권태라는 악덕이 군림했다면 21세기에는 불안이 그 자리를 차지해 왔다. 우리 모두의 상호 작용은 일종의 거래가, 우리의 시간은 상품화 가능한 것이 되었다. 피셔가 진단하듯 신자유주의의 ‘관료주의적 비참’은 마이크 저지의 1999년 풍자 영화인 «사무실»과 닮아 있다. 일터에서 피고용인은 끝없이 직업적 발전을 추구하며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감사audit한다. 노동 공간에 대한 비즈니스 주도의 망상은 퇴근 후에도 중단되지 않는다. 우리의 개인적인 시간조차도 생산성이라는 만족을 모르는 신의 노예가 되어 피로의 징후를 나타낸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분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비즈니스라는 창문에 벽돌을 던지는 대신 피셔는 훨씬 단단하고 내구성이 높은 지각의 입구들을, 즉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소외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장벽들을 깨부수는 편을 선호한다. 피셔의 혁명은 우리 내부 세계와 우리 바깥 세계의 연결을 구축한다. 연대는 함께 작용하는 공동체들―특히 중앙 집중화된 위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목적을 공유하는 동시에 다양성을 높이 평가하는 공동체들―의 시너지를 통해 번창한다. 따라서 인터넷. 따라서 우리의 집단적인 사회-정치적 동물원들의 시간 외 출입증을 얻은 개성 강한 좌파 블로거로서 컬트의 지위를 확보한 피셔의 부상.

그렇지만 모든 문화적 창조물이 동일하게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물갈퀴 달린 발로 뒤뚱뒤뚱 걷고 일부는 그늘 속에서 두 갈래 혀를 날름거린다. 문화의 정비원 정신을 지닌 피셔는 우리의 집단 의식에 둘러쳐진 울타리를 침범하는 뱀들을 참지 못했고 이 뱀들이 자신의 침대에 올라오는 건 더더욱 그랬다. 자본주의의 코브라들을 견딜 수 있는 수행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을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늘상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을 들이고 시트 아래 자리를 내준다. 사람들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다른 믿음을 품은 피셔는 유독한 이데올로기라는 뱀을 잡으러 나갈 태세를 갖춘다. 우리의 저항 의지를 꺾는 위해는 피부에 입은 상처보다 훨씬 나쁘다고 그는 경고한다. 이 뱀들은 미래를 위한 우리의 희망에 독을 풀어 넣는다. 그중 최악은 상상력 결여에, 우익의 승리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지 못하는 무능에 물리는 것이라고 피셔는 강조한다. 정치적 성격은 제쳐 두더라도 우리의 민주주의 도구들은 비즈니스 이해 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를 설계하는 것은 피셔가 “자본의 리비도 기술자들”이라고 일컬은 자들이다. 아마존, 페이스북, 유튜브: 욕망은 더 이상 만끽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소비되는 무언가다. 정보는 새로운 종교요 소셜 미디어는 제단이다.

하지만 피셔는 반동적인 비평가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영화, 음악, 책, 당대의 사건을 탐사했다. 이 모두는 우리 시대의 태도와 가치를 전달하는 그릇으로 기능한다. 특별히 흥미롭거나 문제투성이인 그릇을 접하면 그는 자기 숙주의 DNA를 이용해 더욱 깊이 파고들었고, 경제적 계급 투쟁과 정신 건강의 본성에 관한 자신의 성찰들과 연결하곤 했다. 그는 비가시적인 정치적 힘에 봉사하는 숨겨진 의제를, 이면의 동기들에 따른 메시지를 능숙히 폭로했다. 다행스럽게도 피셔가 발전시킨 바이러스성 글쓰기 스타일은 삶의 긍정을 목표로 삼는다. 백신은 선택 사항이다. 앰브로즈가 밝히듯 피셔의 글은 “디스토피아적인 현재에 대한 대안을 계속 희망할” 근거를 마련해 준다.

피셔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였고 이 복잡성은―제대로 이해될 때―모순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는 1960년대 히피 운동의 멍한 이상주의를 조롱했지만 그 역시 자신만의 의식화 수단을 갈구했다. 그의 철학적 사색들은 날카로운 추론에 기반하는 동시에 앞선 세대들의 비판 이론에 크게 의존해 있었다. 그는 문화 연구 영역과 거리를 두었지만 그 자신도 유사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피셔는 설탕보다는 쓴 알약을, 숲이 우거진 동화보다는 가공할 진실을 선호했다. 물론 아이러니한 복잡성 속에서 그는 또 프란츠 카프카나 루이스 캐럴의 명료한 환상 세계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이상화하기도 했다. 아이들이라는 증인이 “권위가 이성을 통해 방어될 수 없는 한 아무것도 아님”을 통찰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피셔는 바지를 잡아 내리는 아이의 호기심을 구현했다: 이유에 대한 끝없는 탐구,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기쁨. 이 복잡성들은 그의 유산을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그의 성격 내부에 숨겨진 깊이를 밝혀 준다. 사기꾼 같은 증권 중개인과 커리어에만 치중하는 정치인 수중에 쥐어진 세계에서 분별력을 변호하고자 하는 k-펑크는 전염성 강한 반대의 목소리와 더불어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피셔는 거기서 우리를 기다린다: 자신의 독특한 희망으로 또 다른 주체를 감염시킬 준비를 마치고. 그리고 우리 또한 부지불식간에 활성화된다.

아래의 인터뷰는 2019년 1월에 준비를 시작해 2019년 봄에 진행되었다. 처음에 나는 피셔의 작업이 미친 문화적 영향을 조사하고자 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방향을 틀어 그의 손을 떠난 발상들을 분석한 학술 논문을 쓰는 대신 그의 휴머니티 자체에 대한 통찰을 찾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는 «k-펑크» 출간에 관여한 두 명의 동료, 즉 연구자 출신의 프리랜서 작가인 대런 앰브로즈와 음악 저널리스트인 사이먼 레이놀즈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적절해 보였다. 나는 각자가 택한 수단을 이용해―대런 앰브로즈와는 5월에 이메일로, 사이먼 레이놀즈와는 스카이프로―이들을 따로 인터뷰했다.

장황함을 피하기 위해 레이놀즈와 두 시간 동안 나눈 스카이프 대화를 세 가지 질문으로 축약해 편집했다. 반대로 앰브로즈에게는 이메일을 통해 열 가지 질문을 던졌고 그는 자유롭게 두 가지 질문을 택해 답해 주었다. 인터뷰에 응해 준 두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크 피셔를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알고 지냈던 이들에게 따뜻한 조의를 표하고 싶다. 세계는 놀랍도록 독창적인 정신을 잃었다.

제 이름은 대런 앰브로즈입니다. 지금은 프리랜서 편집자, 작가, 화가로 일하고 있어요. 세 살이 안 된 두 아이의 아빠기도 하고요. 저는 뉴캐슬에 인접한 잉글랜드 북동부 해안 지역인 휘틀리 베이에서 살고 있어요. 과거에는 헤겔 이후 유럽 철학을 연구했고, 워릭 대학, 버밍엄 시립 대학, 캔터베리 그리스도교 대학을 비롯해 여러 기관에서 강의했습니다. 1998년부터 워릭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해 2002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요. 그 시기에 마크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 전 몇 년간 그가 워릭 대학의 CCRU에서 벌인 활동은 잘 알고 있었어요. 저는 초기부터 k-펑크의 독자였어요. 블로그를 하지는 않았지만요.

k-펑크를 접하면서 제가 받은 인상은 마크가 어마어마하게 지적이고 통찰력이 넘치며 명료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어요. 또 저와 동일한 문화적 시금석과 강박―조이 디비전, 더 폴, 재팬, 더 큐어, «닥터 후», 데니스 포터, J. G. 밸러드, 윌리엄 버로스, 보드리야르, 해머 영화사의 호러 영화, M. R. 제임스, «마크 스튜어트 앤드 더 마피아»―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블로그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분명하게 느낀 사실은 CCRU 시절 이후의 블로그 게시물이 이전 글보다 모호하지 않고 훨씬 명확하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저는 제가 20년 넘게 듣고 보고 읽은 것들을 그가 전적으로 독창적이고 신선한 통찰력으로 꿰뚫어 본 방식에 매혹되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짜릿하고 생기를 되찾는 기분이 들었어요.

저는 파트너(지금은 제 아내인)의 소개로 2005년경에 드디어 마크를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제 파트너가 k-펑크 초기에 그와 함께 작업하고 의견을 나눈 블로거 집단의 일원이었거든요. 파트너의 블로그는 글루부트Glueboot였어요(지금은 비활성 상태입니다). 마크의 첫인상은 블로그를 읽으면서 상상한 모습 그대로라는 거였어요. 그뿐 아니라 수줍고 초조하며 비관적이기도 했고요.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당시의 대중 음악이 절대적으로 공허하다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음악 자체는 그렇지 않겠지만 현재의 대중 문화는 진정한 새로움, 낯섦, 대안적 표현을 결여하고 있다고요. (동갑인) 우리 두 사람이 어렸던 시절에는 그런 시금석들이 존재했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대단히 낯선 대안들이 메인스트림의 일부가 되기도 했어요. 우리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그런 일들의 가능 조건을 약화하고 제거했는지를 두고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마크는 음악뿐 아니라 어느 방면에서든 ‘대안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강박적으로 몰두했고 미래를 진정 비관적으로 바라봤어요. 이것이 제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마크는 정녕 경이롭고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저와 마찬가지로 많은 불안, 걱정, 강박에도 시달리고 있었어요. 나중에 깨달은 바지만 물론 마크의 깊은 비관주의를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이상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비범한 역량이었습니다. 이 또한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제가 이 역량을 늘 공유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가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우리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서퍽으로 이사 온 뒤에는 그와 아내인 조이, 어린 아들인 조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요. 우리가 진지하게 정치적이거나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는 걸 말해 둘 필요가 있겠네요. 많은 사안에서 분명 같은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요. 우리는 주로 둘 모두가 사랑하는 영화, 음악, 문학,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관해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퍽에서 그의 집에 처음 놀러 갔을 때가 기억나네요. 그가 소장한 재팬의 앨범들을 듣고 이 밴드에 관해 오랫동안 대화했어요. 재팬은 학창 시절에 제가 굉장히 좋아한 팀이에요. 그때는 저 빼곤 주변 누구도 이 팀에 관심이 없었죠. 또 우리는 «닥터 후»의 빈티지 에피소드들(패트릭 트로턴과 존 퍼트위 시절)이나 몇몇 호러 영화(«오멘»과 «나이트 데몬»)도 같이 봤어요. 이렇게 함께 공유한 열정들이 이후 우리가 이어 온 관계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로선 공감할 수 없었던 열정도 있었어요. 마블 영화에 그가 보인 애정이 그랬죠. 그리고 마크가 종종 엄청나게 재밌는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언급하고 싶어요. 우리를 둘러싼 진창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두고 농담하며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죠. 우리 둘 다 «젠틀맨 리그», 앨런 파트리지, 크리스 모리스를 좋아했는데, 이 모두가 부조리, 어두운 유머, 어리석음에 대한 마크의 사랑을 얼마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합니다.

선집인 «k-펑크»를 편집하게 된 건 원래 편집을 맡았던 트리스트럼 비비언 애덤스가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뗀 뒤였어요. 마크가 사망한 당시 트리스트럼은 마크가 재직하던 골드스미스 대학의 박사 과정생이었어요. 지도 교수가 마크였죠. 둘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어요. 마크가 죽기 직전에 트리스트럼은 첫 책인 «사이코패스 공장: 자본주의는 어떻게 공감을 조직하는가»를 리피터 북스에서 출간했고, 당시에 그는 마크의 사후 선집을 편집하는 데 딱 맞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렇게 예비 조사로 몇 주를 보냈는데, 마크가 사망한 지 1년 남짓 지난 시점에 그의 작업들을 다시 살펴보려니 기억이 너무 생생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집에 참여하기 어렵겠다는 의견을 밝혔어요. 리피터 북스의 대표인 타리크 고더드와 마크의 아내인 조이가 누가 이 일을 맡으면 좋을지 논의한 끝에 제게 제안하기로 결정했죠.

편집을 제안받은 뒤 며칠간 고민도 하고 아내와 상의도 했어요. 트리스트럼이 그랬듯 제게도 마크의 작업을 다시 들여다보는 건 극도로 힘겨운 일일 게 뻔했거든요. 그가 사망한 시점부터 그때까지는 그의 글을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어요. 뭐라도 읽으려 하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하물며 과거부터 최근까지 그가 쓴 글 대부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도 선집을 편집하기로 결정했고, 이 글들을 한데 모아 출간하면 그가 사망한 후 느껴 왔던 절망감과 무력감의 거대한 구멍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희망이 개인적인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마크의 유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의 작업에 몰입하고, 익숙하지 않고 잘 알려지지 않은, 혹은 발표된 적 없는 그의 글을 모으려 애쓰다 보면 그의 지적, 정치적, 문화적 삶에 걸맞은 기념물을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의 사망에 이은 끔찍한 공허와 절망을 이용해 괜찮고 긍정적인 무언가를 할 행운이 제게 주어진 셈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선집을 편집하기로 결정하고 얼마 후 이 기획의 범위가 확정되었습니다. 타리크가 염두에 두었던 선집의 유형을 두고 초반에 그와 토론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그걸 음악에서 그레이티스트 히츠 장르와 비슷한 세 가지 선택이라고 불렀는데요. 첫째는 크게 히트 친 싱글들을 모은 단일한 그레이티스트 히츠 앨범, 둘째는 B-사이드와 다소 덜 알려진 싱글을 포함한 두 장짜리 그레이티스트 히츠 앨범, 셋째는 히트한 싱글, B-사이드, 데모, 미발표 트랙, 아웃테이크 등을 아우른 포괄적인 박스 세트입니다. 우리 둘 모두 마지막이 최상의 선택지라는 데 동의했어요. 그때만 해도 이 선집이 얼마나 방대해질지는 상상도 못 한 채로요.

마크의 삶과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번의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들을 열 개의 중요한 마디로 간략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요(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변화를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1) 초기에 가장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한 것 중 하나는 1990년대에 워릭 대학에서 CCRU에 관여하고 협업한 경험입니다. 이를 통해 그가 이론과 실천 차원에서 처음으로 해방을 맛봤다고 생각해요. 대단히 생산적인 협업 형태로 작업한 형성적 사례기도 하고요.

2)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마크는 연장 교육 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이 경험은 그를 한층 정치화했습니다. 마크가 가르치기 시작하던 시기에 연장 교육 학교는 신자유주의 교육 이데올로기, 그리고 모니터링과 평가와 프로그램 관리로 이루어진 새로운 관료주의 체제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죠. 이런 변화가 그의 첫 책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분석 다수에 배경을 제공했고요. 연장 교육 학교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최전선이었고 마크는 그 안에 완전히 몸을 담그고 있었어요. 이 경험은 그에게 강력하고 궁극에는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고, 결국에는 그를 쫓아냈죠.

3) 블로그와 온라인 토론 포럼의 발견 및 k-펑크의 시작. 블로그 활동은 마크에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미쳤습니다. 새로운 미디어 형태는, 특히 초기에는, 대단히 해방적이었어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선하고 강력한 플랫폼을 제공해 주었고, 이를 통해 다종다양한 열정 및 이해 관계와 결부된 새로운 형태의 이론적 표현과 참여를 탐색할 수 있었죠. 그리고 이런 표현과 참여 들은 지속적인 협업적 모험들을 위한 놀라운 잠재력을 담고 있었고요. 마크의 글쓰기 방식도 변해 CCRU 시절의 의도적으로 불투명한 스타일에서 소통 행위, 긴급한 도발, 한층 폭넓은 청중에게 도달하고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훨씬 명료한 활동으로 옮겨 갔습니다.

4) 연장 교육 학교를 그만둔 뒤 마크는 서퍽의 우드브리지로 이사했고 나중에 아내가 되는 조이를 만났습니다. 런던 바깥으로의 이주 역시 마크의 삶에서 중요한 변화였어요. 서퍽의 풍경은 마크에게 토템과도 같았습니다. 그곳 해변에서 자주 휴가를 보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곤 했고, M. R. 제임스의 유령 풍경(앨른위크)을 새로이 상상하게 되기도 했어요. 또 이곳에는 핵 시대의 잔해들이 우묵한 흔적―핵 발전소, 공군 기지, 초기의 경고 기지, 감시 시설―을 남기고 있기도 하고요. 마크는 이 풍경에 푹 빠져 거의 의도적인 환각 체험을 했습니다. 언젠가 타리크 고더드는 이런 생애상의 결정을 마크의 “M. R. 제임스 프로젝트”라고 일컫기도 했어요. 제가 보기에 서퍽으로의 이주와 그것이 마크의 정신, 글, 관점에 미친 영향을 과소 평가해선 안 됩니다.

5) «자본주의 리얼리즘» 출간과 비평적 성공.

6) 결혼과 아들 조지의 출생.

7) 마크는 오랜 시간을 실업 상태로 보냈습니다. 프리랜서로 «와이어» 같은 간행물에 기고하면서 가족을 지원했죠. 다방면에 걸친 주제로 다양한 매체에 글을 써야 하는 고난이 오히려 그의 글쓰기를 한층 정련하는 기회가 되었어요.

8) 실업으로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마크는 타리크 고더드와 함께 제로 북스를, 나중에는 리피터 북스를 설립했어요.

9) 이후 골드스미스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그 덕분에 경제적 안전을 확보했지만 그 대신 그가 ‘시간 빈곤’이라 부른 것을 대가로 치러야 했어요.

10) ‘소셜 미디어’의 부상. 그는 소셜 미디어를 받아들였지만 결국에는 떠났습니다. k-펑크는 협업적인 토론과 실천의 도구보다 마크가 이따금 자신이 쓴 글을 올리는 플랫폼 성격이 짙어졌고요. 관련 쟁점들은 ‘뱀파이어 성’에 관한 글에 대강 설명되어 있어요. 이 문제는 마크에게 진지하고 지속적인 관심사이자 진정한 투쟁과 좌절의 원천이었어요.

이런 마디들 외에도 마크가 저와 알고 지낸 동안 발견했던 몇몇 중요한 것이 기억나요. 이 중 일부에 관해서는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명료하게 밝히는 글을 쓰기도 했죠. 다른 일부는 언급한 적이 없지만요. 이런 발견에는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데이비드 피스, 베리얼, 슬리퍼드 모즈, 데이비드 스메일, 앤디 베킷, «콜롬보»(텔레비전 시리즈), «헝거 게임»(영화 시리즈), 러셀 브랜드 등이 포함됩니다. 이 발견들은 어린 시절에 영향을 미친 많은 것―조이 디비전, 더 폴, 버로스, 밸러드, 스크리티 폴리티 같은―과 동일한 촉매 기능을 수행했던 것 같아요.

우리의 관계는 평등한 협력 관계였습니다. 마크와 제가 공동으로 작업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제가 블리스블로그에 뭔가를 올리면 그는 종종 제 글에 응답했어요. 마크가 k-펑크에 뭔가를 올리면 저도 거기에 응답하곤 했고요. 많은 경우 우리는 상대방의 논점에 기초해 각자의 논의를 구축했습니다. 때로는 의견 차이도 빚었죠. 언제나 서로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어요.

피셔의 글을 한 권에 묶어 편집하는 작업은 전적으로 대런이 책임졌어요. 그런 다음 한층 전통적인 학계 스타일의 <엮은이 서문>을 붙였죠. <엮은이 서문>은 선집의 내용, 포함 기준, 작가로서 마크의 발상이 진화한 과정 등을 담고 있어요. 저는 리피터 북스의 발행인인 타리크 고더드의 청탁으로 그보다 나중에 <서문>을 쓰게 됐습니다. 제가 쓴 <서문>은 사적인 성격이 훨씬 짙고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는 편향돼 있어요.

저는 철학에 대한 마크의 관심, 그의 정치적 사고와 글을 거의 다루지 않았어요. 이와 관련해서는 미건 데이가 «자코뱅»에 쓴 글이 유익합니다. 미국 좌파 작가가 마크의 작업을 다룬 글이에요. 이곳에서는 많은 청중이 k-펑크 블로그보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통해 그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있고요.

저는 90년대 말에 처음으로 CCRU라 불리던 사이버네틱 문화 연구회를 접했어요. 이들에게 매혹되었고 이들이 구사한 산문, 특히 마크의 글에 도취되었죠. 이들의 관점―말하자면 흥분 상태의 아나코-자유 지상주의적 반정치로 지금은 가속주의라 불리는―은 고삐 풀린 시장의 힘을 파괴를 위한 힘으로, 자본을 진정한 혁명적 힘으로 이해했어요. 반면 저는 언제나 훨씬 전통적인 좌파에 가까웠어요. 실용주의적 사회주의자라 할까요. 영국에서 늘 노동당에 투표하는 사람요. 그 시절에 저는 마크보다 실용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이었어요.

생애 말미에 마크는 실용주의적인 음조를 띠기 시작했어요. 기존 제도들, 특히 노동당을 활용하는 방안을 이야기했죠. 저는 잘 몰랐어요. 그가 말년에는 침묵을 지켰고 공개된 글도 많이 쓰지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제러미 코빈이나 모멘텀Momentum과 더불어 전개된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가 흥분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급진주의자와 청년 세대가 노동당을 장악한 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젊었던 90년대 CCRU 시절의 마크였다면 노동당이 변화의 여하한 도구일 수 있다는 생각을 경멸했을 거예요.

1998년에 «링구아 프랑카»에 기고한 글인 <학계의 배교자들: 사이버네틱 문화 연구회>에서 저는 제 의심을 표면에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주디스 윌리엄슨을 인용해 이런 시각을 내비쳤습니다. 윌리엄슨은 좌익 이론가이자 논평가로 CCRU가 신다윈주의적이라고 비판한 인물이에요.

학계에서는 다양한 이유로―이런 경향들의 계보를 완전히 꿰고 있지는 않아요. 일부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일부는 푸코에게서, 일부는 데리다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온 것이겠죠―휴머니즘이라는 발상이 저평가되고 있습니다. 생기론도 마찬가지죠. 여러 유형의 철학자가 이것들에 빠져들었다는 비난을 받아요. 들뢰즈와 가타리조차도 누군가에게는―기계라는 이미지 밑면에서―비밀스러운 생기론자이자 벽장에 숨은 낭만주의자일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욕망과 흐름의 찬양도 D. H. 로런스만큼이나 나쁘다는 거예요!

이런 종류의 글―마크가 몸담았던 특수한 철학 세계―을 읽으면 이 같은 틱을 알아보게 되죠: 모욕하는 말들, 높이 평가하는 말들, 파괴와 묵시록의 고딕적인 힘을 칭송하는 전반적인 경향. 사물들은 찢겨 나갑니다. 어둠과 붕괴의 에로틱화가 펼쳐지죠. 이런 언어와 이미지의 연원을 바타유와 니체에게서, 또 보들레르나 로트레아몽 같은 19세기의 데카당스와 원형적 초현실주의 저술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20세기 후반에는 업데이트가 이루어져 사이버 문화적 뒤틀림이 가해졌죠: 기계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 혹은 포스트인간적인 것에 대한 칭송 같은 것들이요.

이런 것들은 도취시키죠―테크노에 찬사를 바칠 때는 저도 이런 스타일로 썼어요. 이처럼 몰인격적이고 가차 없고 기계주의적인 견지에서 전자 댄스 음악을 특징짓는 건 논리적이기도 하고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특정 유형의 테크노 음악은 황홀하고도 묵시록적인 분위기 속에서 탈인간화의 느낌을 실제로 만들어 내기도 하고요.

마크에 글에서도 반생기론에 대한 이런 숭배를 확인할 수 있어요. 이런저런 음악 형식에 찬사를 바칠 때 그렇죠. 비생명unlife이라는 용어를 써서요. 관습적인 음악 저널리스트라면 에너지와 생명력을 칭찬할 텐데 그는 정반대인 거죠. 마크의 글쓰기 스타일에서는 전통적인 가치 체계가 뒤집힙니다. 이런 글을 쓰거나 읽는 건 매우 짜릿한 일이고요.

k-펑크에는 이 반생기론을 논리적으로 연장해 반출생주의―재생산에 반대하는―를 논하는 글도 있어요. 이 사고 과정을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했지만, 대문자 자연에 대한, 따라서 재생산에 대한 어떤 칭송도 파시즘적 잠재성과 이어져 있다고 여기지 않았나 싶어요. 나치 같은 파시즘 체제는 인구를 늘리길 원했고 그래서 여성들에게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권장했으니까요. 이 지점까지 가면 논의가 좀 이상해지죠. 제 생각에 마크는 리 에덜먼의 «미래 없음: 퀴어 이론과 죽음 충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어요. 유기체적인 것, 자연적인 것, 재생산적인 것 모두에 대한 불신이 있었던 거죠. 심지어는 생물학적인 것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 뒤 마크는 결혼했고 아이도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반출생주의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나 합니다! 또 그는 잉글랜드 동부 해안가의 서퍽으로 이사했고, 텅 비어 있고 조금은 으스스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 지역을 많이 걸었어요. 마크가 블로그에 대문자 자연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반영한 글을 올렸던 게 기억나네요. 비록 여전히 포스트CCRU 용어로 표현하기는 했지만요. “새들은 경이로운 작은 기계다” 같은 식으로 말했어요. 저는 이것이 워즈워스와 키츠로 돌아가는 재밌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고요!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돌아갔지만 여전히 매우 90년대적인 사이버네틱 관점을 매개로 그런 것이죠. 그를 놀리고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저는 나라면 차라리 기계를 잘못된 동물들로, 자연의 창조물들에 대한 패러디로 보겠다고 블로그에 쓰기도 했어요.

마크의 생애 말미에 제러드 맨리 홉킨스를 주제로 이메일을 주고받은 적이 있어요. 홉킨스는 잉글랜드 전원 지역을 소재로 삼았던 위대한 19세기 시인이에요. 물총새와 황조롱이를 주제로 황홀한 시를 짓기도 했죠.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인 동시에 자연 숭배자였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낭만주의적 범신론자였죠. 그때 우리는 둘 다 제러드 맨리 홉킨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두고 애정 어린 의견을 교환했어요.

‘애시드 공산주의’라는 발상의 요체 하나는 아이의 시각을 회복한다는 1960년대적 관념의 재활성화였어요. 그는 “흘러 넘치는 충만함”Exorbitant Sufficiency이라는 개념에 관해 썼죠. 이는 아이와도 같은 은총의 상태예요. 모든 것이 경이롭고 찬란하며 모든 것이 축복받은 상태죠. 현재 속의 환희라 할까요.

약간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 같네요. 다른 질문을 주세요. 제가 준비하지 않았을 만한 질문을요.

제가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은 애초에 좌파 문화에서 유래했습니다. 사고가 너무 경직된 동지를 놀리는 표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러니 처음에는 좌익 담론 내부에서 뭐든 바로잡으려 하는 습관에 가까웠던 것이죠. 그 뒤 이 표현은 이리저리 표류하다 우파가 좌파를 패는―언어와 품행상의 예의와 자각을 폄하하기 위한―곤봉 비슷한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구분되는 층위들이 있는 셈이에요. 한편으로 저는 정치적 올바름을 옹호하고 싶어요. 우파 쪽에서 PC라고 폄하하는 것들은 사실 언어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진지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이려는 시도니까요.

다른 한편으로―마크가 <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라는 논쟁적인 에세이에서 분석했듯―정치적 올바름은 사고에 바람직한 환경을 창출하지 않는 일종의 자기 치안이 되었습니다. 비난받거나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발상들과 유희하고 그것들이 자유롭게 퍼져 나가도록 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생각들은 억눌리게 되죠. 그리고 특정한 심리 메커니즘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진짜 적보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훨씬 격렬하게 공격하게 되고요. 이는 연대에 불리하게 작용해요. 구제 불능이라며 사람들을 내쫓는 것보다는 그들과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편이 훨씬 나아요. 낡은 의견이나 헐겁게 표현된 발상 혹은 충분히 숙고하지 않은 생각을 이유로 사람들을 파문하려는 이런 충동은 반생산적이죠.

이는 몬티 파이선 그룹의 «브라이언의 삶»과 흡사합니다. 이 영화에서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여러 집단은 늘 분열돼 있어요. 유대 인민 전선, 유대의 인민 전선, 유대 대중 전선 등등으로요. 좌파 내부에는 언제나 이런 종파주의가 있었고 그 탓에 좌파는 여러 분파로 쪼개지곤 했습니다. 제 생각에 이건 무력함에 대한 반응이기도 해요. 정책 변화를 이끌거나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언어와 품행을 두고 격앙된 싸움을 벌이는 정도겠죠. 사람들을 취소하다 보면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요.

이와 관련해 일반적인 규칙을 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숙청이 발휘하는 흉포함에는 걱정스러운 면이 있어요. 사태가 얼마나 악화할 수 있는지, 풍문이 얼마나 자주 사태에 기름을 붓는지를 감안하면요.

물론 <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는 마크가 분석한 바로 그 메커니즘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했죠. 그는 트위터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쫓겨났어요.

훌륭한 비유네요!

음, 감염과 바이러스라는 발상을 이어 가면, 저는 오염을 제거하려는 충동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절대적인 순수함이나 고결함에 이르려는 충동이죠. 가장 덜 억압적인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이요. 당연히 누가 억압적인 사람이 되고 싶겠어요. 하지만 우린 모두 억압적인 체계라는 그물망에 걸린 신세예요. 손을 더럽히지 않을 방도가 없어요. 미국에서 사는 것만으로도요. 세금을 내든 가게에서 물건을 사든 우리는 자동으로 이 모든 것에 얽혀 들어가게 돼요.

마크의 정치적 사고를 살펴보면 90년대의 CCRU 시기―시장의 힘을 칭송하고, 자본주의가 해방적이지는 않더라도 창조적으로 파괴적인 힘이라고 보는―와 공산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발상들을 옹호한 k-펑크와 «자본주의 리얼리즘» 시기 사이에서 뚜렷한 전환을 확인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변화 와중에도 일관되게 간직한 집착이나 사고의 흔적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몰인격성impersonality에 대한 믿음이에요. 가속주의적 비전에서 시장의 힘은 속박에서 풀려나 각종 장벽과 경계를 허물어뜨리죠. 이 탈영토화하는 독성이 공동체와 전통을 해체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힘은 몰인격적이에요. 반대로 훗날 사회주의적 발상들을 전개할 때 마크는 집단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어요. 그런데 이 또한 몰인격적이기는 마찬가지죠. 개인주의와의 단절을 뜻하니까요.

k-펑크를 운영하던 시절에 마크는 네트워크라는 발상에 흠뻑 빠져 있었어요. 그는 블로그 회로가 하나의 네트워크며, k-펑크가 음악과 대중 문화 블로그 회로의 마디일 뿐 아니라 그와는 별개인 이론 및 철학 블로그 회로의 마디라는 생각에 애착을 느꼈습니다. 우울하고 비생산적인 시기를 겪던 그는 [블로그를 시작하며] 생산물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조증에 가까운 낙관이 가득한 글을 쉼 없이 써냈어요.

저 국면에 그는 이 블로그들 전체가 일종의 집단적인 정신적 유기체를, 하나의 분산형 지능을 형성 중이라고 상상했을 거예요. 그는 collective의 c를 k로 바꿔 kollective라고 부르곤 했어요. 그가 어째서 k라는 단어를 즐겨 썼는지 정확히는 몰라요. 사이버네틱스의 그리스어 표현인 퀴베르네테스에서 가져온 것이긴 하죠. 하지만 마르크스의 저작인 «자본»의 독일어 제목 Kapital도 있어요. 또 k를 사용하면 약간은 고딕스러운 분위기를 풍기죠. magic 대신 magick를 쓸 때처럼요.

어쨌거나 그는 집단성the kollective과 집단주의kollectivism라는 발상에 몰두했습니다. 그가 k-펑크의 댓글난을 채웠던 공동의 에너지에 기초해 워봇의 매슈 잉그럼과 온라인 포럼 디센서스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죠. 수많은 사람이 참여해 장문의 토론을 수없이 주고받았어요. 그렇지만 그는 인터넷의 몰인격성도 좋아했어요. k-펑크나 인피니트 소트 같은 예명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블로그의 누군가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흑인인지 백인인지, 사회 계급으로는 어디에 위치하는지, 지리적으로는 어디 출신인지 등을 반드시 알 필요가 없었죠. 그는 신체를 제쳐 둔 익명성과 몰인격성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는 ‘비대면화’라는 말도 사용했어요. 긍정적인 개념으로요.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종류의 익명적 집단성은 집단주의 정치와 연계돼 있었습니다. 사실 90년대의 CCRU도 이런 연계를 구현하고 있었죠―갱단이나 코뮌 같았고 강도 높은 밀접함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는 집단과 네트워크라는 발상에 깊이 빠져 있었어요. 많은 블로거처럼 그도 외로웠을 거라고, 공동체를 찾아 기뻤을 거라고 생각해요.

개인주의와 대비되는 몰인격성과 집단성에 대한 이런 칭송이 데이비드 스메일의 ‘마법적 자발성’과 연결됩니다. 마법적 자발성은 개개인이 의지를 통해 운명을 통제한다는 우파적 믿음을 비판하는 개념이죠. 이건 마크의 전형적인 방식이었어요. 철학을 비롯한 전문적인 사고 영역에서 상당히 모호한 발상을 가져와 활성화함으로써 널리 퍼뜨리고 새로운 역량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요.

아마 k-펑크 블로그 독자 가운데 데이비스 스메일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예요. 심리 치료라는 전문적인 영역에서 활동했거든요. ‘마법적 자발성’과 스메일의 사고가 마크에게 호소력을 발휘한 이유 하나는 우울과 불안을 개인적 실패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을 방법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었어요. 더 포괄적인 힘들이 이런 개인화된 결과의 원인이라는 것이죠. 우울한 개인들은 자신의 결점이 원인이라고 느끼지만, 스메일을 따라 마크가 개진한 논의는 이런 형태의 우울과 불안이 신자유주의의 결과라는 거예요.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불안과 우울을 겪거나 자살하는 사람의 비율이 점점 치솟고 있는 건 분명해 보여요. 그리고 사람들은 치료받고 있거나 자가 치료를 시도하고 있죠. 이는 불안정, 유연한 노동, 나아가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문화의 정신적 비용과 관계가 있어요.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 문화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각자를 고립시키죠. 정신 질환이라는 유행병 배후에 더 큰 힘이 있는 건 확실해요. 하지만 많은 사례는 개인적인 이유와도 결부돼 있어요. 질환에 대한 책임이 그 사람에게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저 일련의 상이한 요인이 있다는 것이죠. 가족이나 양육 같은 요인이요. 이 요인들도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자살이나 정신적 고통의 이야기들 배후에는 각각의 특수한 원인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마크에게 데이비드 스메일의 발상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나아가 자신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어요. 사회를 고치지 않으면 치유도 없다는 것이죠. 스메일은 부분적으로 자조 문화―긍정적인 사고, 동기 부여 훈련, 인간 잠재력 등등―에 맞서 논의를 전개했어요. 이런 자조 문화를 ‘마법적 자발성’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했고요. 마법적 자발성은 어떤 개인이든 의지력과 긍정적인 관점만 갖추면 삶을 뒤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합니다.

‘자조’라는 단어는 19세기에 경제학적인 의미에서 사용된 자조와 관계가 있어요. 애덤 스미스나 아인 랜드 유형의 발상이에요. 모든 사람이 혼자 힘으로 삶을 꾸려 나가야 하고, 각자가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식이죠. 치료적 의미의 자조 문헌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조 사이에는 연관 관계가 있어요. 사회 따위는 없고 각자의 힘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단정한다는 점에서요.

긍정적인 사고는 사실상 프로테스탄티즘의 변이형입니다. 칼뱅주의와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에 대한 베버의 발상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죠. 칼뱅주의는 돈벌이가 선이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신이 선택한 사람은 삶에서 가장 큰 성공을 이룬 이들이거든요. 반면 즐거운 일에 돈을 써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암울한 삶이죠!

긍정적인 사고는 19세기 말에 등장했습니다. 경쟁적인 생활 양식이 초래하는 고통과 심리적 부담에 대한 반응이었죠. 그러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 신이 실제로 우리가 온갖 욕망을 갖기를 원하며, 그것들을 획득하려면 마음속에 그려 보아야 한다는 식이 되었어요. 긍정적인 생각을 강조하는 모든 책은 동일한 착상에 기반해 있어요. 1950년대에 노먼 빈센트 필이 쓴 «긍정적 사고의 힘»이든 오프라 윈프리가 좋아하는 «시크릿» 같은 최근 책이든 다 똑같아요. 이런 책들은 마법적 사고 방식을 압축한 핵심적인 금언에 기반하죠: 원하고 마음속에 그린다면 그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미신.

이런 정신 나간 발상을 드러내는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번영prosperity이라는 복음입니다. 저 모든 대형 교회에서 목사들은 다음과 같이 설교해요. 신은 당신이 큰 집, 자가용 다섯 대, 요트 한 대를 소유하기를 정말로, 정말로 바란다고요. 조엘 오스틴 같은 사람이 진행하는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 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당신의 사회 집단 구성원 중 불평분자나 비관적인 삶의 관점―실제로는 리얼리즘적인 관점일 텐데―을 피력하는 누구와도 관계를 끊고 번영이라는 이 거품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번영 복음 공동체를 이루면서요.

이런 발상들은 언제나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책임이 전적으로 내게 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시작하든, 어떤 핸디캡이나 역경이 있든 나를 만드는 건 나 자신이라는 것이죠. 이는 반사회주의적이고 반복지적인 믿음입니다. 자조 도서 판매량이 한없이 치솟는 때는 언제나 경기 침체기예요. 일자리를 잃고 우울에 빠진 사람들이 이런 책을 강박적으로 사기 시작하니까요. 이들이 이런 책을 사들이는 까닭은 공적인 힘(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다운 사이징과 긴축 같은)이 아니라 개인적인 실패가 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기 때문이고요.

그런데 저는 긍정적인 사고에 얼마간 힘이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하겠어요. 세계관과 마음가짐이 현실과 상호 작용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의 증거 중 하나는 우울한 사고가 부인할 수 없는 힘을 갖는다는 것이죠. 악순환을 이루면서 우울이 심해지곤 하니까요.

제 생각에 관건은 양자 택일이 아니에요. 개인은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지만 그런 시도는 언제나 더 큰 힘에 제약되죠. 산업화를 멈추지 않아 해수면이 상승할 때 특정 개인이 뭘 할 수 있겠어요. 더 높은 지대로 옮겨 무기와 식량을 쌓아 둘 수는 있겠죠. 개인이 하는 일을 제약하는 더 큰 힘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역 내부에서 우리는 어느 선까지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어요.

마크의 작업은 대체로 비판적이죠. 기성 상태를 산산조각 내니까요.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저는 마크의 자세도 이러했다고 생각합니다. 지성적으로 그는 사태를 해부하고 작용 중인 온갖 유해한 힘을 꿰뚫어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의 저술 전체를 훑어보면, 특히 그가 조증이었던 기간의 글들을 살펴보면 사태들―주로 문화적 사태지만 때로는 정치적 사태도―에 맞닥뜨려 희열에 가까운 들뜸을 발산한 경우도 확인할 수 있어요. 새로운 것의 전조를, 생겨나고 있는 무언가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의 전조를 느꼈을 때 그랬죠.

당신이 언급한 글[<희망을 버려라(여름이 오고 있다)>]도 그렇습니다. 노동당이 부진했던 잉글랜드 총선 이후에 쓴 글이에요. 그 전만 해도 보수당은 자유당과의 연정을 통해서만 집권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2015년에는 자유당의 지원 없이도 집권하기에 충분한 의석을 확보했죠. 보수당의 입지가 유리해졌고 노동당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약체가 되었어요. 더 나빴던 것은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이 보수당의 유럽 연합 회의파에 내건 약속을 지키면서 국민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결과가 브렉시트였죠. 그런 만큼 이 총선은 정말이지 재난의 시작이었어요.

하지만 총선 직후에 쓴 글에서 마크는 포기하지 말자고 말했어요. 그리고 당시의 다양한 정치적 잠재성을 탐색했죠. 또 그는 문화의 역할이 중요함을 언급하면서 ‘간접 행동’이라는 발상을 내세웠어요. 데모, 시위, 정치 참여 같은 직접 행동은 당연히 결정적이죠. 하지만 문화적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간접 행동도 마찬가지예요. 이를 통해 새로운 서사, 새로운 인지 공간, 새로운 감정 구조를 창출할 수 있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변화가 가능하다는 감각에 이바지하죠.

이 또한 그람시의 사고 방식과 아주 비슷합니다. 헤게모니라는 개념과 유사하죠. 이것도 급진주의가 권력을 차지하기 전에 우선 문화의 지형―태도와 가치의 영역―에서 싸워야 한다는 발상이거든요. 우선 문화적 전투에서, 그런 다음 정치적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것이죠. 이 특정한 선거에서 좌파가 패배 혹은 실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마크는 낙관적으로 남을 이유와 해야 할 일을 찾았습니다.

생애 막바지에 그가 관여했던 것 중 하나는 플랜 C라는 조직이에요. 근본적으로 의식화 활동 단체죠. 이들은 정치, 개인적 삶, 정신 건강, 감정, 일상을 잇는 결합체를 탐색하고자 했습니다. 이 충동은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탐구되었던 것들을 많이 상기시키죠. 제 기억에 언젠가 마크는 “70년대 초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집단들, 그들은 모든 것을 알아냈다. 그들은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의 의식화는 두 전선에서 동시에 이루어졌어요. 한편에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가 있었습니다. 사적인 삶과 행동을 이데올로기의 발현으로 보는 미시 정치 영역이죠. 다른 한편에는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이다’가 있었고요. 거대한 정치적 사건이나 경제적 힘이 행복과 번영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능력에,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예요.

또 마크는 «애시드 공산주의»에서, 그리고 플랜 C와 함께 60~70년대 반정신 의학의 발상들을, 급진적인 정신 분석가인 데이비드 쿠퍼와 R. D. 랭의 작업을 조사했어요. 핵가족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방식과 관련된 발상들이었죠. 이런 발상들은 소외에 주목한 상황주의와도 접점이 있었고, 원자화된 개인들이 아니라 인구 전체 수준에서 집단적인 심리 치료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언급한 것들을 고려할 때 «애시드 공산주의»는 의식, 개인의 웰빙, 정신 건강과 관련된 이런 발상들을 업데이트하고 재가동한 작업이라 할 수 있어요. 정치의 목표는 사람들이 번영하고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발상이죠. 생활 수준이 아니라 삶의 질이 핵심이에요. 그래서 상당히 긍정적이고 또 상당히 건설적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에 관해, 또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으니까요.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는 많은 사람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실험했어요. 이런 공동체에서 성원들은 핵가족으로 개별화되지 않았고 양육은 집단적으로 실시되었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고 한층 전통적인 구조가 귀환했어요.

그리고 그곳 어딘가에는 사이키델릭도 있었죠―그래서 ‘애시드 공산주의’일 테고요.

이건 꽤나 재밌는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한창 k-펑크를 운영하던 시절에 마크는 60년대를 멸시하는 태도를 종종 내비쳤거든요. 그는 글램과 록시 뮤직을 좋아했고 이들이 히피보다 예리하고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야외 페스티벌에서 진흙에 구르는 냄새 나는 히피들에 대해 얘기한 적도 있어요. 우리가 블로그에서 교류할 때 저는 그의 의견에 반대했어요. 60년대는 매우 흥미로운 시기였다고 말했죠. 실험 음악, 예술과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인터페이스, 온갖 종류의 문화적 실험과 관련된 많은 것이 진행 중이었어요. 우드스톡과 벌거벗은 히피들만 있었던 건 아닌 거죠.

마크는 60년대를 다시 보게 됐던 것 같아요. 친구이자 동료인 제러미 길버트가 그에게 영향을 미쳤죠. 길버트는 2010년대에 마크와 시간을 많이 보낸 사람이고 제가 알기로는 심지어 그레이트풀 데드를 좋아해요. 후기의 k-펑크 프로그램에는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희망찬 요소가 분명 포함돼 있었어요. 길버트와 함께 그는 일종의 선언문인 «현대성 되찾기: 시장을 넘어, 기계를 넘어»를 집필했습니다. 노동당의 갱신을 위한 제안을 담고 있는 글이었어요. 아마 2014년에 발표했을 거예요.

이전에 마크는 갱신이라는 관념 자체를 평범하고 따분한 것으로 여겼어요. 90년대에는 현존 제도를 부숴 버리자는 아나키즘적 사고 방식에 더 물들어 있었죠. 카오스가 창조적이고 바람직하다고 봤고요. 그런데 나중에는 냉철한 정책 문서를 집필해 좌파 일반과 특히 노동당이 전망과 전략을 현대화할 방안들을 제시했어요. 그리고 제러미 코빈과 모멘텀이 전혀 예기치 못하게 부상한 덕분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코빈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것, 이것은 노동당의 급진적 회춘이에요. 당원이 50만 명으로 늘었고 온갖 창조적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가 사용되었죠.

마크의 글을 읽어 본다면 그가 전적으로 비관적이라는 인상을 날려 버릴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사태를 산산조각 내는 데 매우 능했고, 그의 가차 없는 비평은 레이저 광선과도 같은 지성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봤어요. 하지만 비판하는 동시에 그는 현실 정치에 참여했고, 교사 같은 건설적인 과제에도 관여했어요. 그를 흠모한 학생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교사로서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실했고, 많은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쏟았어요. 학생들만이 아니라 그를 멘토로 삼았던 다른 이들에게도요. 이들은 그에게 다가가 지침을 구하거나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얻었죠. 그는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사람이었어요. 조증 기간에 그는 스스로에게 할당한 이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층 우울한 상태에 빠졌을 땐 이것들 때문에 녹초가 되고 말았죠.

그의 마지막 몇 년이 어땠는지, 그 시기에 그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들은 바로는 사태에 대한 흥분과 에너지가 가득한 순간과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기분에 빠져든 시기를 오갔다고 합니다.

그와 마지막으로 대화한 건 페이스북에서였어요. 그때 그는 우울증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고, 새 책을 써야 하는데 첫 장만 마쳤다고 얘기했어요. 그는 그 글을 제게 보여 주었어요. «k-펑크»에 실린 게 바로 이 글[<애시드 공산주의>]이죠. 저는 이 장이 매우 뛰어나다고, 책을 꼭 마무리해야 한다고 썼어요. 하지만 답은 받지 못했습니다. 우울증에 깊이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독려가 아무 효과도 없을 때가 있어요. 오히려 생산성을 저해할 수도 있죠.

마크의 사망은 끔찍한 상실이에요. 그가 여전히 이곳에 있으면서 이 순간에 벌어지는 모든 것에 관해 놀라운 통찰을 전해 주면 얼마나 좋을지 자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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