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대한 시몬 베유의 단편들

시몬 베유가 2차 대전 발발 초기인 1938과 1939년에 쓴 아주 짧은 단편 두 편을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

이 글들에서 베유는 유럽의 정치적인 파국을 정신적인 위기와 엮어 사고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추구하는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선 정반대되는 원칙, 즉 정의의 원칙이 인민의 정신에 스며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어요.

≪쿠튀리에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록한 마지막 두 글에 ‘이 전쟁은 종교 전쟁입니다’와 ‘우리는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을까요?’라는 제목이 달린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유의 진단과 제안을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분은 이 두 글을 꼭 읽어 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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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당혹감, 불안,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기다림이 역사상 최초로 지배적인 정서가 된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외적인 운명을 마주하게 될 세대로서 고통스러운 특권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흘러갔고 책 속에만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 모든 시대가 평화로웠다는 환상에 쉽게 빠져듭니다. 스무 살에 접어든 이들이 으레 자신이 처음으로 청년의 불안을 겪는다고 믿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과장도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세계를 지배해 온 유럽 한 귀퉁이의 인간들이 깊고도 심각한 위기를 통과하고 있다고. 17세기부터 이어진 큰 기대들, 그리고 19세기에 생겨난 계몽의 점진적 확산, 일반화된 복지, 민주주의, 평화 같은 희망들이 급속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환멸이 몇몇 지식인 그룹이나 정치사회적 문제에 집중적으로 몰두하는 집단에서만 생겨났다면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혹감이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행위와 기대와 행복의 모든 원천을 파고들어 부패시키는 조건들 속에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사적인 삶은 점점 더 공적인 삶과 분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말입니다. 이미 역사 속에 그런 시점들이 있었습니다. 집합적인 큰 도약들이 행해져, 사적인 삶을 일시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시킨 시점들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일상적인 삶에서 정치사회적인 상황과는 독립된 도덕적인 자원들을 찾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우리 실존의 한결같은 조건입니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깊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게 절대적으로 악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사람에게 안전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안전하다는 느낌은,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위험한 환상이 됩니다. 이 환상은 모든 걸 왜곡합니다. 정신을 편협하고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어리석은 만족감에 빠뜨립니다. 우리는 그런 사태를 이른바 번영기에 충분히 봤습니다. 또 안전 지대에 있다고 믿는 몇몇 사회 집단에서 여전히 보고 있지요. 하지만 안전의 전적인 부재는 영혼의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두려워해야 할 파국의 규모가 지성, 행위, 용기를 보장해 줄 자원들을 압도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경제 위기가 여러 강대국의 청년 세대 전체에게서 사회적 틀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리라는 희망을 앗아 갔음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도 머지않아 새로운 젊은이들이 똑같은 곤경에 처하는 걸 보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생산 조건이 노화老化를 지어내는 것을 보았고 또 보고 있습니다. 즉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노년기가 일정한 직업군에선 마흔 살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두려움, 그 무엇도 이전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전쟁의 두려움은 더 이상 강연이나 팸플릿의 주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주된 근심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시민의 삶이 전쟁 준비에 종속됨에 따라 모든 곳에서 점점 더 일상적인 것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문, 라디오, 영화 같은 현대적 매체들은 인민 전체의 신경을 뒤흔들 만큼 강력합니다. 물론 삶은 언제나 스스로를 지켜 냅니다. 본능을 통해, 그리고 무의식의 일정한 층위를 통해 말입니다. 하지만 해일이나 지진처럼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집합적 파국에 대한 두려움이 미래를 향한 개개인의 감각에 더욱더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제 다양한 형태의 노동은, 일반적으로,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길 멈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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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적으로 남아 있는 두 강대국이 전체주의 지배하의 한 체제에 맞서는 투쟁을 견지하려면, 시간이 이 투쟁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건 간에, 무엇보다 올바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처럼 믿어선 안 됩니다. 우리가 상대보다 덜 잔인하고 덜 폭력적이고 덜 비인간적이니 승리할 것이라고. 잔인함, 폭력, 비인간성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교과서는 아이들에게 감추고 성인들은 시인하지 않지만 모두가 이 사실을 경험합니다. 정반대되는 미덕들이 똑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지속적이고 실효성 있는 방식으로 실천돼야 합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처럼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이지 않을 뿐 정반대되는 미덕들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내적인 힘과 영향력 모두에서 이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맞설 수 없습니다.

물론 프랑스 사람 거의 대부분이, 민족적인 관점에서, 무척 올바른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의식을 지니는 여러 방식이 있지요. 삶의 현실에 무지한 채 만족감을 느끼는 부르주아도 무척이나 올바른 의식을 지닙니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올바른 의식을 지닙니다. 대개 그의 의식은 덜 올바릅니다. 하지만 그는 부르주아가 지니지 못한 빛나는 역능, 인력引力을 지닙니다. 거의 모든 프랑스 사람은 일반적으로 프랑스가 해 왔고 하고 있으며 장차 하게 될 일들이, 중요치 않은 드문 예외들을 제외하면,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추상적입니다. 거의 언제나 많은 무지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믿음은 내적인 힘의 원천을 이루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외국 사람 눈에는 프랑스라는 이름이 정의와 인류애라는 커다란 원칙과 결합해 있습니다. 프랑스가 너무도 자주 그렇게 자처하니까요. 하지만 이런 연상 작용은 익숙함이나 통념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즉 거부할 수 없는 인력을 행사하는 원칙에 따른 것은 아니지요. 전체주의적인 나라의 영토에서 빠져나와 프랑스 땅에 최근 건너온 사람은 과거엔 질식할 것 같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다음처럼 말할 순 없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이상理想이 가득하게 스민 공기를 프랑스 땅에서 호흡하고 있다고. 잘 싸우려면, 전제정專制政의 부재를 방어하는 것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전제정과 정반대되는 길을 걷는 것이 모든 활동의 초점이 되는 환경 속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것일 선전宣傳은 말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선전은, 효력을 지니려면, 생생한 현실들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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