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를 가속하라

≪자본주의 리얼리즘≫ 2판 2쇄를 찍은 기념으로 마크 피셔의 글 한 편을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을 기반으로 한 예술 비평 저널인 ≪파스≫Parse(https://parsejournal.com/) 5호(2017년 봄)에 실린 <관리를 가속하라>Accelerate Management라는 글입니다. 번역 및 게재를 허락해 준 ≪파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가속주의accelerationism는 좌우 정치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느슨한 사고 운동이고, 여러 전선에서 논쟁과 비판을 초래했습니다. 기계적인 으스스함 때문인지 때로는 곡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요. 이 글에서 피셔는 가속주의의 세 물결을 구분하고 최근 흐름인 좌파 가속주의 입장 편에 섭니다.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서르닉, 그리고 이들이 쓴 <#가속하라: 가속주의 정치 선언>으로 대변되는 좌파 가속주의는 좌파 내부에 널리 퍼진 이른바 ‘통속 정치’folk politics 경향에 반대하는 움직임입니다. 통속 정치가 과거(이전 단계의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 이전)나 바깥이라는 상상된 영토로 회귀하려 한다면, 좌파 가속주의는 새로운 것과 미래에 여전히 판돈을 거는 기획입니다. 이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본주의가 생산한 것들에서 물러나는 대신 수중에 쥐고 이용할 것.

이 글에서 피셔는 좌파 가속주의 입장을 관리(혹은 경영)라는 쟁점과 연결합니다. 관리 문제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식별한 새로운 관료주의(그리고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정신 건강) 문제의 다른 이름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큰 국가를 몰아내면서 관료주의도 쫓아냈다고 자랑스레 외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보여 주기식의 불필요한 관료주의 업무”가 노동 그 자체보다 중요시되며 우리를 질식시킬 지경인 현실을요. 그렇다면 이처럼 관료주의를 증식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관리 자체에 반대해야 할까요? 이에 피셔는 질문을 뒤집어 “너무 많은 관리가 아니라 너무 적은 관리가 동시대 자본주의의 문제”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좌파 가속주의 입장을 채택해 ‘다른 관리’를 상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많은 노동을 부과하는―저 자신의 노동 중독을 본보기로 이용해―관리자 대신 우리를 과도 노동에서 보호하는 관리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미세 요구들로 우리를 질식시키는 관리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각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이해하는 관리자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피셔의 정치적 입장이 늘 한결같은 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그도 반의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고 정치 자체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습니다(그의 정치 관련 블로그 게시물을 모은 ≪k-펑크≫ 3권이 출간되면 전반적인 변화 과정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2009년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이르면 “지속적인 사회 변형에 꼭 필요한 (잠재적이고 실제적인) 하부 구조들을 중심에 두는 정치”를 명시적으로 지향하게 되고 이는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이와 관련해서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9장과 말미에 실린 조디 딘과의 대담, ≪#가속하라: 가속주의자 독본≫에 실린 <터미네이터 대 아바타>, 피셔와 동료 제러미 길버트가 나눈 대담,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집필한 팸플릿인 ≪현대성 되찾기≫ 등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 썼을 것이라 추정되는 <관리를 가속하라>에서도 그는 이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관리와 가속주의라는 쟁점을 검토하며 그는 우리가 지향할 바는 신자유주의가 내걸었지만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정확히 타격하는 것이라고, 자본주의의 산물들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좌파가 그 주역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간명하고 짜릿하며 도발적인 산문으로요. 최종적이지도 완벽하지도 않겠지만, 또 논쟁과 비판의 여지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입장일 겁니다.

원문 링크: https://parsejournal.com/article/accelerate-mana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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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
리시올 편집부 옮김

“보통 아침 다섯 시나 다섯 시 십오 분에 일어납니다. 일어나면 이메일부터 보내는 게 제 오랜 전통이죠. 물론 모든 사람이 저와 비슷한 시간대에 활동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되도록 일곱 시가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메일을 보내기 전에는 운동을 하고 뭔가를 읽고 우리 제품을 사용해 보죠. […] 저는 잠이 많은 편이 아니고 예전부터 쭉 그래 왔어요. 잠으로 허비하기에 삶은 너무나 짜릿하니까요.” “아들이 제 침대에 올라와 우유를 마시는 동안 이메일을 빠르게 훑습니다. 긴급한 내용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답신을 보내죠. 나머지는 표시해 뒀다가 출근길에 처리하고요. […] 매일 받는 메일이 500통 가까이 돼요. 그러니 종일 이메일을 보낸다고 할 수 있죠.”[1] “최상위 CEO들”의 말을 인용한 이 두 구절―전자는 AOL의 팀 암스트롱이고 후자는 미디어컴 UK의 캐런 블래킷이다―은 동시대 자본주의 문화에서 노동과 관리의 대대적인 강화라 할 만한 것을 시사한다. 두 CEO의 발언은 수없이 논의된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 패러다임이 완전히 정착했음을 확증해 준다. 이제 노동은 사무실이나 공장에 한정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영역과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침범한다. 정말이지 암스트롱의 진술은 조너선 크레리가 ≪24/7: 후기 자본주의와 잠의 종말≫에서 제시한 분석이 얼마나 적실한지를 입증하는 사례다. 크레리에 따르면 지금 자본주의는 영속적인 순환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벽 가운데 하나를 허무는 과정에 있다: 잠. 수면 중인 몸은 비생산적이고 비소통적인 몸의 전형적인 사례며, 그리하여 자본주의 순환의 영속적인 팽창을 가로막는 방해물로 작용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순환이 현재 취하는 형태는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노동 재구조화에만 기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또 기술적, 소통적, 리비도적 하부 구조―조디 딘은 소통 자본주의communicative capitalism라고,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는 기호 자본주의semio-capitalism라고 부르는 체계―에도 기반해 있다. 소통 자본주의(본 글의 목적에 비추어 이 표현을 베라르디의 기호 자본주의와 대강 동의어로 사용하겠다)라는 맥락 속에서 개별 메시지들은 “이미지, 여론, 정보의 순환에, 수십억의 정보 및 정서 덩어리에 기여할 따름이며, 그 목표는 주의를 끌고 유지하는 것, 저 방향이 아닌 이 방향으로 여론, 취향, 유행을 선도하거나 장악하는 것”이다.[2]

베라르디는 자본주의 사이버 공간의 명령에 신경 체계가 끊임없이 종속된 상황의 정신 병리적 결과들을 부단히 강조해 왔다. ≪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에서 그는 어떻게 “정보 교환의 가속화가 개별 인간 정신은 물론이고 집단 정신에는 더더욱 병리적인 유형의 효과를 생산했고 지금도 생산하고 있는지” 썼다. “개개인은 각자의 컴퓨터, 휴대 전화, 텔레비전 화면, 전자 다이어리, 머릿속에 들어온 어마어마할 뿐 아니라 나날이 증가하는 정보 덩어리를 처리할 수 없다. 그렇지만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승자가 되고 싶다면 이 모든 정보를 따라잡고 파악하며 평가하고 처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 정보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필요한 시간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3]

최근 글에서 베라르디는 이렇게 주장한다. “가속화는 자본주의적 예속의 한 특징이다. 무의식은 갈수록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정보권Infosphere에 굴복하며 이 같은 포섭 형식은 고통을 안긴다.”[4] 그런데 위에서 인용한 팀 암스트롱의 논평은 자본주의 사이버 공간에 대한 무의식의 굴복이 마냥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님을―적어도 일부에게는―시사한다. 사이버 공간화된 자본주의의 주인들은 기호 자본주의의 쉼 없는 흐름에 굴복함으로써―혹은 그 흐름의 꼭대기에 올라타 서핑함으로써―일종의 향유를, 조증과도 같은 환희를 챙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예속을 제대로 해명하려면 이 리비도적 배당금을 셈에 넣어야 한다. CEO는 하급자들에게 단순히 예속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CEO는 노동에 대한 자기 자신의 준총체적인 굴복을 따라야 할 본보기로 제시한다. 의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자기 희생(이런 입장의 망령이 멀리 떨어져 있는 건 결코 아니지만)보다는 강렬한 향유를 경험하는 데 꼭 필요한 희생에 가까운 본보기로. 이 CEO들에게 노동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은 중독으로―이들이 유익하고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중독―보는 것이다. 앞선 자본주의 시기에 프로테스탄트적인 노동 윤리의 결과였던 금욕주의는 이제 일종의 쾌락주의적 강제와 명시적으로 일치한다(“명시적으로”라고 말한 까닭은 금욕주의가 ‘공식적’으로는 반리비도적인 억압 양식이라는 입지를 점해 왔지만 실은 언제나 하나의 리비도 형성물, 하나의 향유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동시대 자본주의가 경영과 노동에 접근하는 방식의 특징을 분별하기 위해 텔레비전 시리즈 ≪매드 맨≫ 첫 시즌에 나오는 두 장면을 살펴보자. 이 시즌에서 묘사되는 세계와 지금을 대비하면 단순히 창조성에 기생하고 그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형식―1960년대 초 자본주의―과 창조성 발휘를 불가능에 가깝게 만드는 자본주의 형식―현재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혹은 니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둘 중 첫 장면에서 드라마의 배경인 광고 대행사 대표 버트럼 쿠퍼는 회사의 ‘창조’creative 부서 수장인 돈 드레이퍼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간다. 쿠퍼는 드레이퍼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사실에 익숙해지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가 옳다. 많은 장면에서 드레이퍼는 등을 기댄 채 의자에 앉아 있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시청자들은 쿠퍼가 느낀 당혹감에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쿠퍼가 그 이상 토를 달지는 않고 뒤꿈치를 돌려 사무실에서 나간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동시대 노동 환경이라면 이 장면이 어떻게 연출될지 상상해 보자. 오늘날의 대표는 쿠퍼와 달리 드레이퍼의 방법이 효과적임을 신뢰하고 그를 내버려 두는 대신, 드레이퍼가 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시간을 없애기 위해 온갖 무의미한 과제를 그에게 떠맡길 것이다. 이야말로 서양에서 동시대 노동의 광적인 타성이 도달한 것, 즉 생산성의 시뮬라시옹이다. ‘인지 노동’ 개념이 그토록 불만족스러운 이유 중 하나도 오늘날 노동 환경에서 마지막에야 허용되는 것이 생각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띌 때만, 그리고 수량화될 수 있을 때만 노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메일에 답신하는 것은 진짜 노동으로 느껴지는 반면 ‘그저’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더 최악은 일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장 분명한 방법 중 하나가 타자[다른 목적]들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설문지, 평가 보고서, 자기 감시 일지 등등. 물론 이메일 자체도 그렇다. 무의미함이 악순환을 이루며 끝도 없이 이어진다.

주목하고 싶은 ≪매드 맨≫의 다른 장면을 보자. 드레이퍼는 비서이자 카피 라이터가 되기를 열망하는 인물인 페기에게 조언을 던진다. 아이디어가 막힌 페기에게 드레이퍼는 소재를 아주 깊이 생각한 다음 잊으라고 말한다. 그러면 해결책이 떠오를 것이라면서 말이다. 이렇게 ‘잊는 것’, 즉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하는 동안 무의식이 문제를 처리하도록 놔두는 것은 오늘날 방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드물게만 누릴 수 있는 기회다. 두뇌는 무언가에 흠뻑 몰입하는 것만이 아니라 빈둥거리는 것도 허락받지 못한다. 그 대신 가차 없는 자극 공세가 두뇌에 쏟아진다. 고용주가 멀티 태스킹을 강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두뇌와 신경 체계에 끊임없이 과부하를 거는 자본주의적 사이버 공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중독이 그리할 것이다(“우리 자신”이라고 말했지만 이 중독은 우리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행위 능력과 반성 역량을 빼앗고자 하는 저 세력들이 신중하게 육성한 것이다). 세계의 돈 드레이퍼들이 사무실에 앉아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착취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이에는 당연히 페기나 드레이퍼의 아내인 베티(드레이퍼가 늦게까지 일터에 남아 있거나 수차례 외도를 벌이는 동안 가정을 건사해야 했던) 같은 여자들에 대한 착취가 포함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판본의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돈 드레이퍼가 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첫 시즌 초반부의 페기처럼 만들었다. 하루 대부분을 행정 업무를 처리하며 보내고, 공식적인 노동일이 끝난 뒤에야 창조성과 생각을 위한 시간을 짜내도록 말이다. 이 구속을 더욱 악화하는 것은 이미 봤듯이 자본주의의 현 조건들 아래서 공식적인 노동일 같은 것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조로운 잡무drudgery가 한계를 모르고 증식한다. 사무실 안은 고사하고 바깥에도 생각을 위한 공간은 없으며, 그런 공간이 실존하더라도 그것을 보호할 관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건이 이러한데 관리를 가속하라는 요구를 진보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베라르디가 옳다면 동시대 자본주의 노동 문화의 문제는 이미 너무나 가속화되었고 너무나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미시 통제, 과잉 관리, 자기 감시에 종속되어 있으니 도주선은 감속과 물러남 형태로 구성된다고 베라르디는 주장한다. 그런데 너무 많은 관리가 아니라 너무 적은 관리가 동시대 자본주의의 문제라면? 제도와 이데올로기를 장악한 신자유주의는 우리더러 관리를 관리주의와 등치하라고 강요한다. 그렇지만 관리주의를 파악하는 최선의 방식은 신자유주의적인 개념과 관행 들의 착근을 전반적인 목표로 삼는 일련의 종별적인 전략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캐슬린 린치의 설명을 보자.

새로운 관리주의는 신자유주의의 조직군orginizing army이다. […] 새로운 관리주의를 서로 다른 문화적, 경제적 맥락을 가로질러 일관되게 실행되는 단일한 전체로 본다면 오류를 범하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공공 서비스 공급이 재설계된 방식을 통해 관리주의의 핵심 특징을 뽑아 낼 수 있다. 투입 대비 산출의 강조, (성과 지표, 등급, 실적 일람표, 성과 관리의 포괄적인 사용을 통한) 피고용인 성과의 면밀한 모니터링 및 피고용인에 대한 자기 모니터링 장려가 그런 특징이다. 또 예산 및 인사 권한을 일선 관리자들에게 부여해 권한을 탈중심화하는 동시에 중앙 레벨에서는 [계속] 권력과 통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새롭고 한층 임시적인 계약 고용을 도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비용 절감과 통제 행사에 일조하는 핵심 특징을 이룬다.[5]

이어 린치는 공공 서비스에 도입된 관리주의가 시장 메커니즘을 위해 공공재라는 개념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서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고 지적한다. 그보다도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나는 관리주의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른 것―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없다는 만연한 믿음―의 실행에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비즈니스계로부터 도입한 시장 기반 언어와 관행은 신자유주의를 자연화하는 데, 비즈니스를 공공 서비스라는 ‘상아탑’이 적응해야 하는 ‘현실’로 자리매김하는 데 봉사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에 대한 어떤 대안도 낡아 빠진 과거의 유물로 전락시킨다.

소통 자본주의와 관리주의의 조합은 소통 자본주의 리얼리즘communicative capitalist realism이라 부를 만한 것을 낳았다. 소형 전자 기기가 새로운 중심성을 획득하고 미래가 근본적으로 디지털 소통 기술에 의해 빚어질 것이라는 발상이 널리 승인됨에 따라 관리주의의 명령들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의식과 시간에 침투했다. 아이폰을 이용한 관리는 명령들이 최소한의 반성 과정만을 거쳐 재빨리 퍼져 나가도록 허용한다. 이메일 자체도 관리주의 목적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기술이다. 명령을 상이한 공간에 흩어져 있는 복수의 개인에게 단번에 발행하니 말이다. 스마트폰으로 노동 관련 이메일을 수신하는 개인들은 보통 물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타인들과 연대할 전망을 거부당한다. PDF 첨부 역시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노동량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수백 쪽에 달하는 문서가 이메일 한 통에 첨부되기도 하니까. 노동 과업이 물리적 형태에서 사이버 공간화된 형태로 이전됨으로써 베라르디가 지적한 범람inundation이라는 느낌이 전반적으로 강화되었다. 이전에는 문서 더미를 능히 처리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무한정한 디지털 과업 세트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화면―특히 소형 기기 화면―을 통해 노동 과업에 접근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overview 감각을 잃고 대신 ‘부분만을 보고 있다’underview는 영속적인 기분에 사로잡힌다. 끝없이 이어지는 요구에 압도당한 나머지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떠받치는 것은 노동의 자본주의적인 사이버 공간화에 대한 어떤 반대도 향수에 젖어 있다는 주장, 디지털 미래에 저항하는 부질없는 시도라는 주장이다.

이 중 무엇도 노동자의 효율성 증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반대다. 소통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깊숙이 포섭된 노동자는 앞선 세대보다 과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내내 초조함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소통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실행 목표가 생산성 증대였다면 실패했다고 여겨도 무방하다. 그런데 생산성 증대는 이 체계의 진짜 목표도, 더 포괄적인 관리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목표도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선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효율을 제고해 왔다. 개인들을 관료주의적 간섭에서 해방했으며 이른바 고장난 공공 서비스를 시장 메커니즘으로 점점 더 대체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설득력 있게 논증했듯 신자유주의는 경제 성장 증대라는 목표를 노동자의 예속이라는 진짜 목표에 종속시키는 거버넌스 형식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라는 쉬볼렛은 신자유주의가 체계적으로 집단 행위 능력 역량을 좌절시키고자 한 방식에 혼동을 일으킨다. “자본주의를 유일하게 가능한 경제 체계로 보이게 만드는 행동 방침과 자본주의를 실행 가능하고 장기적인 경제 체계로 변형하는 행동 방침 사이에서 선택이 주어질 때마다 신자유주의는 전자를 택한다. 일자리 안전성을 파괴하고 노동 시간을 늘리는 것이 더욱 생산적인 노동 인구(더욱 혁신적이거나 충실한 노동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를 창출하지 못한 이유는 수없이 많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이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80~90년대에 세계 전역에서 성장률이 하락한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선택은 노동을 탈정치화하고 미래를 과잉 결정하는 데 효과적이었다.”[6]

그레이버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비행 자동차 […] 역장, 견인 광선, 순간 이동 포드, 반중력 썰매, 트라이코더, 영생 보장 약물, 화성 식민지” 같은 약속을, 20세기의 특정 시점에는 실현 가능해 보였던 약속들을 이행하는 데 체계적으로 실패한 방식을 논하는 맥락에서 이런 요점을 제시한다. 그레이버의 주장―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의 중심 논변 일부를 반향하고 확장하는―은 신자유주의가 부상한 바로 그 시기에 우주 탐사를 가능케 했던 기술들이 시뮬레이션 기술들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포스트모던한 감성, 즉 새로운 것이라곤 없음을 우리가 이해하게 된 새로운 역사적 시대에 영문도 모른 채 들어섰다는 느낌, 진보와 해방이라는 거대한 역사 서사가 무의미해졌다는 느낌, 모든 것이 이제는 모사, 아이러니한 반복, 파편화, 혼성 모방이 되었다는 느낌. 특정한 기술 환경에서는 이 모든 것이 이치에 맞는다. 이미 실존하는 것이나 결코 실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 것에 대한 가상적 투사들을 더욱 수월하게 창조하고 이전하고 재배열할 수 있게 하는 것들만이 유일한 돌파구가 된 환경에서는 말이다. 우리가 화성에 지어진 측지선 돔에 휴가를 가거나 포켓형 핵 융합 공장이나 원격 독심술 기기를 들고 다녔다면 분명 누구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7]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속주의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벌어진 최근의 논쟁을 재검토할 수 있다.[8] 가속주의 담론이 중요한 이유 하나는 그레이버가 식별한 문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정치학을 세우고자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포스트모던 자본주의가 그 자신이 의존해 있을 뿐 아니라 가능케 하기도 하는 바로 그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힘을 저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문제. 일부 비평가는 가속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이단적 형태로 자리매김하지만, 주요 좌파 가속주의 사상가들의 핵심 주장은 자본주의가 생산적 잠재력을 일으킴에도 필연적으로 그것을 좌절시킨다는 마르크스의 발상과 궤를 같이한다.

대략적으로 말해 우리는 가속주의 이론의 세 물결을 구별할 수 있다(선구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마르크스 자신이 있으며 ≪#가속하라: 가속주의자 독본≫에서는 니콜라이 표도로프, 새뮤얼 버틀러, 소스타인 베블런도 훗날의 가속주의 입장을 ‘선취’했다고 분류한다). 1차 물결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및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리비도 경제≫와 주로 결부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입장은 자본주의를 ‘탈영토화’ 힘과 ‘재영토화’ 힘의 긴장으로 특징짓는 두 사람의 자본주의 분석에 뿌리를 둔다. 탈영토화 힘은 확립된 정체성, 한계, 기성 이해 관계에 압박을 가해 새로운 공간과 잠재력을 열어젖힌다.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재영토화 힘은 안정된 경계와 오래된 (종교적, 민족주의적, 권위주의적) 권력 형태를 재확립하려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은 자본주의가 이 긴장으로 정의된다는 것이고, 이는 자본주의가 오래된 요소들을 포함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그러니 자본주의란 근본적으로 시대 착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기술적으로 새로운 것이 사회적으로 퇴행적인 것과 결합하게 될 스팀 펑크 콜라주로 보는 것이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푸드 뱅크가 아이폰과 공존하는 21세기 긴축 영국이 딱 그렇지 않은가. 이 관점에서 보면 가속주의가 던지는 수는 명확하다. 재영토화의 반동적 에너지에 맞서 현대화의 탈영토화 힘과 연합하는 것이 혁명적인 경로라는 것. 이 논의의 귀결 하나는 자본주의가 손대지 않은 (문화, 정치, 심리) 영역은 없다는 주장이다. 자본주의의 순수 외부, 자본주의에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외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세계에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에 속하는 것도 거의 없다. 도리어 자본이 자신의 지배 아래 생겨나는 기술적, 사회적 잠재력을 억누르고 저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저 잠재력들이 매우 상이한 정치-경제 조건들 아래서 현실화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음을 증언한다. 정말이지 이 잠재력들이 매우 상이한 조건들 아래서 현실화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속주의 사고의 2차 물결은 특히 닉 랜드의 1990년대 작업과 결부된다. 1990년대의 사이버 문화라는 맥락에서 집필된 랜드의 핵심 저술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사이버 고딕적 혹은 기술 니힐리즘적 리믹스를 제공했다. 랜드의 작업은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알려졌지만, 모종의 자유 지상주의로 보는 편이 제일 나을 것이다. 여기서 자율성을 칭송받는 힘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랜드의 시야에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공간이 거의 없다. 대신 혁명적 탈영토화 힘이 지지 대상이 되며 인간은 한낱 꼭두각시, 더 낫게 표현하면 기계 부품에 불과해진다. 사실상 랜드는 자본주의에서 탈영토화 힘과 재영토화 힘이 긴장을 빚는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을 무시한다. 그가 이해하기에 자본주의는 전적으로 혁명적인 행위자며, 자신이 ‘인간 안전 체계’라 부르는 것에서 탈출하도록 추동된다.

랜드가 가속주의 사고의 3차 물결에 중요한 까닭은 동시대 좌파의 사고에 도전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는 좌파가 퇴행적이며 기술 공포증에 빠져 있다고, 저항과 비판이라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고 조롱한다. 반대로 랜드의 관점에서 자본은 준생기론적 에너지 체계로, 그 자체를 포함해 현존하는 어떤 한계도 부단히 극복하려는 체계로 형상화된다. 가속주의 이론의 3차 물결은 이 이해 방식을 뒤집으려 해 왔다. 부분적으로는 동시대 반자본주의 투쟁의 특징 가운데 좌파에 대한 랜드의 공격과 가장 강하게 공명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거부함으로써 말이다. 새로운 좌파 가속주의를 정초하는 문헌이 된 <#가속하라: 가속주의 정치 선언>에서 닉 서르닉과 알렉스 윌리엄스는 이렇게 쓴다. “우리는 오늘 좌파의 가장 중요한 분할선이 지역주의, 직접 행동, 끈질긴 수평주의로 이루어진 통속 정치folk politics[9]를 고수하는 이들과 추상화, 복잡성, 지구성, 기술로 이루어진 현대성에 부합하는 가속주의 정치라 불려야 하는 것의 윤곽을 그리는 이들 사이에 그어져 있다고 믿는다.”[10] 우리의 목적과 관련해 서르닉과 윌리엄스의 개입은 이 대립에 관심을 표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무매개성, 자생성, 진정한 경험의 정치와 지속적인 사회 변형에 꼭 필요한 (잠재적이고 실제적인) 하부 구조들을 중심에 두는 정치의 대립. 서르닉과 윌리엄스가 식별하는 ‘통속 정치’ 경향들은 점령 운동 때 전면에 부각되었다. 이 운동이 직접 민주주의와 집회를 강조하고 의회 정치와 대중 매체(사실상 모든 종류의 매개)를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 경향들은 점령 운동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점령 운동이야말로 적어도 1990년대 이래의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자리를 차지해 온 각종 행동주의적, 담론적 조류가 도달한 정점일 따름이었다. 통속 정치의 지배적인 분위기는 신아나키즘이다. 정치 정당과 노동 조합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하면서 자기 조직화를, 그리고 자신이 억압적인 (그리고 낡아 빠진) 위계 구조로 특징짓는 것에 대항하는 네트워크의 수평적인 동역학을 포용하니 말이다.

실천적인 측면에서 이는 시위protest(특수한 부정의들에 맞서는)와 예시화prefiguration(새로운 사회의 선취)의 혼합에 기초한 정치로 이어진다. 이 조합은 철학적으로나 리비도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일관되지 못하다. 우선 시위와 예시화라는 두 원리는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시위는 어떤 대타자를, 명령하는 권위를, 시위의 내용을 듣고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자를 전제한다. 예시화는 이 권위의 필요를 폐기하고 요구들을 포기하며 새로운 일련의 사회 관계를 즉각 실행한다고 가정된다. 이 두 전략 사이에는 이른바 직접 행동이 있다. 하지만 직접 행동은 [대문자] 자본의 병참학적 작동을 방해하게 될 그 어떤 행동에도 이르지 못한 채 소유의 상징적 파괴에 그치는 경우가 너무나 잦다. 이런 파괴는 선전의 층위에서는 힘을 발휘하지만 실천적인 층위에서는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쉽게 무시된다.

이처럼 여러 전략과 지향으로 이루어진 다소 혼란스러운 혼합물과 달리 좌파 가속주의는 간접 행동, 즉 현실로 경험되는 것의 틀을 이루는 헤게모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하부 구조들을 표적으로 삼는 행동의 필요성에 주목한다. 여기서 우리는 관리의 문제로 돌아갈 수 있다. 신아나키즘은 툭하면 관리를 억압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관리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적 행위 능력과 그 조건, 직접적인 것과 경험을 빚는 가상 기계virtual machinery들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다. 또 관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좌파는 1960년대 이래 행동주의를 지배해 온 모반rebellion 모델에서 벗어나 사회, 문화, 경제 자원의 통제권을 획득했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하게 될지 상상할 수 있다. 나아가 좌파 가속주의 관점을 장착하면 관리를 근본적으로 공산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가치로 되찾을 수 있다. 관리된 사회가 아니라면 공산주의 사회가 무엇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때의 관리가 권위주의적인 명령일 필요는 없으며 사실상 그럴 수도 없다. 실제로 권위주의와 사회, 정치 무질서를 결합해 온 건 신자유주의의 관리주의였다. 모든 행위 능력을 자본의 맹목적인 자동 운동automatism에 굴복시켰으니 말이다. 이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프랜시스 스푸퍼드의 비범한 작품―이걸 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망설여진다―인 ≪붉은 풍요≫Red Plenty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붉은 풍요≫는 스탈린 이후 소련에 대한 일종의 복고-사변적 허구화다. 소비에트 경제가 맞수인 미국보다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이 시기에는 완전한 공산주의라는 꿈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만 같았다. 요점은 이 꿈이 실패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요 소비에트 체계를 어떤 식으로든 변호하는 것도 아니다(스탈린 이후 시기에 권위주의와 억압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요점은 좌익 정치가 한때 손에 넣었던 야심이라는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좌파 진영에서 통속 정치와 신아나키즘이 부상한 것이 야심의 축소와 연관된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때 좌파가 관리되는 사회를 구축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임시적인 자율 구역을, 자본주의에서 물러난 소규모 공간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쪼그라들었다고 말이다. ≪붉은 풍요≫가 제시하는 관점은 그야말로 가속주의적이다. 자본주의―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경이들―를 공산주의로 향하는 도정에서 잠시 들르는 기착지로 상상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자본주의가 생산한 좋은 것들이 어쩌다 보니 생겨난 반면, 공산주의 아래서 좋은 것들은 설계되고 관리되는―합리적으로 공동-조직되는―방식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붉은 풍요≫ 초반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감상이 전형적이다.

그는 운이 좋았다.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도록 놔두는 대신 인간이 이성에 따라 사건들을 일으킬 힘을 가진 행성 유일의 나라에서 살 수 있다니. 오직 이곳에서만 사람들은 이 엉터리 난센스에서 벗어났고, 현실의 노리개 대신 의도적인 설계자가 되었다.[11]

좌파 가속주의 입장이 너무나 많은 오해를 초래한 나머지 근작인 ≪미래를 발명하기: 통속 정치와 좌파≫에서 서르닉과 윌리엄스는 급기야 이 용어를 버리기에 이르렀다. 특히 두 가지 오류가 좌파 가속주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첫째는 가속주의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궁극에는 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라는 발상이다. 자본주의의 비참이 강화되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혁명이 불가피해진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거친 개관만으로도 이미 분명해졌겠지만, 이것은 좌파 가속주의 입장이 아니다. 좌파 가속주의 입장은 그 대신 자본주의 권력과 헤게모니의 해체로 이어질 과정들의 강화를 주장한다. 이는 자본주의 전체를 가속하는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의 악독한 측면을 가속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둘째 오류는 추구되는 가속이 현상학적 가속이라는 발상이다. 이런 오해가 생겨나는 이유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가속과 끊임없이 가속화되는 경험의 등치가 프랑코 베라르디가 제시하고 내가 위에서 인용한 비판의 근저를 이룬다. 하지만 좌파 가속주의가 원하는 가속은 경험이 아니라 과정 및 경향과 관련된다. 실제로 베라르디가 묘사한 것, 즉 자극이 범람하는 개인 및 집단 정신이 정치와 문화 층위에서는 정확히 감속을 초래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과적된 정신은 혁신에 필요한 실존적 자원을 보유하지 못한다. 게다가 소통 자본주의의 흐름에 끊임없이 종속되는 두뇌―이 글 서두에서 논한 CEO들의 두뇌 같은―는 앞으로를 위한 계획을 세우거나 여하한 종류의 실효성 있는 조망을 제시할 역량을 보유하지 못한다. 대신 이들은 공포를 퍼뜨리고 타인들을 자신의 반동적인 긴급함의 장urgency field에 끌어들일 뿐이다. 그 결과는 광란에 찬 무력함으로, 시간과 자원을 관리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통해서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지금쯤이면 관리를 가속하라는 요청이 관리 개념을 신자유주의적 관리주의의 인질 신세로부터 떼어 내라는 요청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특히 문화와 창조 노동의 맥락에서 결정적인 것은 관리자 역할을 재상상하는 것이다. 제러미 길버트와 내가 다른 글에서 논했듯 “대부분의 관리자는 스스로를 공공 서비스계의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토니 윌슨으로 생각하길 진심으로 선호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는 이들이 현대판 [토머스] 그래드그라인드가 되었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말이다.”[12] 우리에게 너무 많은 노동을 부과하는―저 자신의 노동 중독을 본보기로 이용해―관리자 대신 우리를 과도 노동에서 보호하는 관리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미세 요구들로 우리를 질식시키는 관리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각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이해하는 관리자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합리적으로 자원을 할당한다는 목표, 우리 자신을 “현실의 노리개 대신 의도적인 설계자”로 만들려는 욕망―집단적으로 숙의되는 인간 행위 능력의 복원―이것은 근본적으로 관리 문제다. 그리고 좌파는 자신만이 사회를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1] Tim Dowling, Laura Barnett, and Patrick Kingsley. “What Time Do Top CEOS Wake Up”. The Guardian, 1 April 2013. https://www.theguardian.com/money/2013/apr/01/what-time-ceos-start-day (2016년 6월 30일 접속)
[2] Jodi Dean, Democracy and Other Neoliberal Fantasies: Communicative Capitalism and Left Politics, London and New York: Duke University Press, 2009, p.24.
[3] Franco Berardi, Precarious Rhapsody: Semiocapitalism and the Pathologies of the Post-Alpha Generation, London: Minor Compositions. 2009. p. 41[≪프레카리아트를 위한 랩소디: 기호 자본주의의 불안정성과 정보 노동의 정신 병리≫, 정유리 옮김, 난장, 2013, 79~80쪽].
[4] Franco Berardi, “Accelerationism Questione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Body”, e-flux Journal, #46, June 2013. (2016년 6월 30일 접속)
[5] Kathleen Lynch, “‘New Managerialism’ in Education: the Organisational Form of Neoliberalism”, OpenDemocracy, 16 September 2014. https://www.opendemocracy.net/kathleen-lynch/’new-managerialism’-in-education-organisational-form-of-neoliberalism (2016년 6월 14일 접속)
[6] David Graeber, “Of Flying Cars and the Declining Rate of Profit”, The Baffler, No.19, 2012. http://thebaffler.com/salvos/of-flying-cars-and-the-declining-rate-of-profit (2016년 6월 16일 접속)
[7] Ibid.
[8] 이 용어의 역사를 상세히 논한 글로는 #Accelerate: The Accelerationist Reader, Armen Avanessian and Robin Mackay eds., Falmouth: Urbanomic, 2014의 <서론>을 보라[≪#가속하라: 가속주의자 독본≫,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3].
[9] [옮긴이]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서르닉이 <#가속하라: 가속주의 정치 선언>과 ≪미래를 발명하기≫에서 당대 좌파에 널린 퍼진 경향을 일컫고자 사용한 표현이다. 이들에 따르면 folk politics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적 무매개성(직접성)을 추구하며, 2000년대 말의 점령 운동 및 대부분의 수평주의 운동, 각종 지역주의 등에 이 정치가 스며들어 있다. 두 사람은 세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비선형적인 지구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folk politics가 성공하기란 요원하며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데 무능하다는 요지의 비판을 제시한다. 상식이나 직관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이 표현을 ‘통속 정치’로 옮길 수 있지만 일상적인 용법에서 ‘통속’이 크게 부정적인 함의를 띠고 있어 아주 적절한 번역어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아가 ‘통속’은 윌리엄스가 서르닉이 folk에 담는 의미들(소규모, 진정성, 무매개성 등등)도 거의 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중’이나 ‘민중’, ‘민속’, ‘서민’ 등 후보가 될 만한 다른 표현들도 사정이 더 낫지는 않아 마땅한 대안을 찾기가 어렵고, 그래서 이제까지 몇몇 문헌에서 사용해 온 ‘통속 정치’라는 번역어를 잠정적으로 따른다.
[10] Nick Srnicek, and Alex Williams, “#Accelerate: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 In Avanessian and Mackay, p.354[≪#가속하라: 가속주의자 독본≫, 346쪽].
[11] Francis Spufford, Red Plenty, London: Faber and Faber, 2010. p.11.
[12] Mark Fisher, and Jeremy Gilbert, Reclaim Modernity: Beyond Markets, Beyond Machines, Compass pamphlet, October 2014. http://www.compassonline.org.uk/wp-content/uploads/2014/10/Compass-Reclaiming-Modernity-Beyond-markets_-2.pdf (2017년 2월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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