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와 보듬기

≪아르고호의 선원들≫ 해외 서평을 번역해 공유합니다. 조너선 파머가 2015년 9월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쓰기와 보듬기>예요.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마음까지 보듬어 주는 글이에요. 이예원 번역가께서 옮겨 주셨고,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의 허락을 받아 이 글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Copyright © 2015 by Los Angeles Review of Books)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작업하며 길을 잃은 기분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몇 편의 서평과 인터뷰가 길을 밝혀 주었는데요. 그중 하나가 이 글이었습니다. 또한 가장 울림이 큰 글이었고요.

파머는 이 책의 표층 아래에서 흐르는 “괄목할 특징이자 묘하게 전복적인 저류”를 포착합니다. 그에게 ≪아르고호의 선원들≫의 호소력은 “건강만큼이나 지루하고 밋밋한 것을 귀하게 대하는 자세”와 우리를 초대하려는 이 책의 헌신에서 비롯합니다.

저희에게 이 서평은 “추상적이고 심지어는 난해한 언어를 거쳐 속 깊은 직언으로 다가오며 의외로 포괄적인 단어에 안착한다” 같은 문장으로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작업하는 내내 어렴풋이 머릿속을 맴돌았던 느낌과 생각을 언어화해 준 글입니다.

조너선 파머는 넬슨이 독자를 믿고 그들을 초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그는 작가로서 넬슨을 믿으라고, 무엇보다도 독자인 우리 자신을 믿고 우리만의 읽기를 발전시켜 보라고 독려합니다. 우리가 넬슨과 그 가족을 바라보는 동시에 넬슨의 글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유념하면서요.

원문 링크: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writing-and-ho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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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파머, 2015년 9월 12일
이예원 옮김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랑, 언어, 모성, 퀴어함, 비판 이론을 아우르는 회고록으로 널리 찬사받은 ≪아르고호의 선원들≫(이예원 옮김) 첫머리에 매기 넬슨은 쓴다. “여기엔 치유책이 없다.” 사람과 안팎으로 얽히고 마는 현상에서 완치될 길 없는 것으로 언어를 보는 경향—그리고 언어 안의 우리 존재를 일종의 전염병으로 여기는 두려움—이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넬슨이 이 책에서 선보이는 언어 개념의 변주가 비범한 까닭은, 불치인 것이 이 책에서 넉넉한 건강으로의 초대가 되어 가고 있어서다.

물론 ‘건강’도 면역 체계가 저하돼 있고 인간에게—우리의 여러 목적과 추정에—줄곧 노출되기 마련인 우리 언어의 일부다 보니, 결코 소박한 이상은 아니다. 넬슨이 번역하는 건강은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이고 전신적인 동시에 임시적인 상태로, 솔직함에 뿌리를 두며,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도 그때그때 한 사람의 필요를 수발한다. 넬슨은 남편 해리의 트랜지션과 그에 따라 해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경감이 “완전한 평안은 아니”라고, 그럼에도 “숨 막히는 불안에 에워싸인 가운데 얻는 일말의 평온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쓴다.

해리와의 연애 초기에 넬슨은 테세우스의 배로도 알려진 아르고호의 수수께끼를 소개한다.

사랑 선언을 한 다음 날인가 다다음 날, [야생적인 여림vulnerability에 나를 내맡기고]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의] 구절을 네게 보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는 “선박의 이름은 그대로임에도 바다를 항해하며 배를 점차 새로이 만들어 가는 아르고호의 선원”과도 같다고 바르트가 설명한 대목이었다.

바르트를 인용한 바로 다음 문장에서 넬슨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나는 이 대목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내가 사랑 고백을 무르려는 의도로 이 글을 보냈다고 여겼다. 이제 와 보면 둘 다였지 싶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읽어 내는 방식도, 호평하는 방식도 각양각색일 테다. 실제로 비평가들은 이 책이 정상성과 정상화에 기울이는 관심에, 선보이는 총칭적 자유로움에, 지적 탁월함과 감정적 설득력을 결합한 점에, 다양한 트랜지션[옮겨 감, 변태]의 과정을 부각하며 온갖 이분법에 저항하고 있음에, 그리고 젠더와 모성을 두루 살피는 세심함에 마땅히 초점을 맞췄다. 이에 더해 이 책의 괄목할 특징이자 묘하게 전복적인 살림 감각의practicality 저류에 대해서도 시간을 들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건강만큼이나 지루하고 밋밋한 것을 귀하게 대하는 이 글의 자세에 대해. 나는 이러한 자세가 ≪아르고호의 선원들≫이 갖는 호소력—사랑하고 정체화하는 방식을 빌미로 사회가 오랫동안 불건강한 사람 취급해 온 이들에게 유난히 각별할 호소력—의 불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다양한 학문적 통찰과 (본인과 타인의) 개별 경험이라는 안경으로 세계를 보려는 이 책의 꾸준한 노력, 특정 단어를 사용하거나 듣게 될 법한 수다한 맥락을 글로 불러들이려는 노력에도 꼭 필요한 요소다.

≪아르고호의 선원들≫ 여러 곳에서 넬슨은 순기능하는 연애 또는 성애 관계를 너와 내 도착 간의 궁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논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지는 않지만, perversity(도착)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 즉 ‘돌아섬’이라는 [어원상의] 말뜻을 염두한 듯하다. 넬슨의 ‘도착 간의 궁합’은 우리 모두가 도착적으로 행동할 여지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고착된 규범에서 단순히 돌아선다기보다도 어떤 대상을 향하려 다른 것에서 돌아선다. 건강은 우리가 제각각의 돌아섬들에 자리를 넉넉히 내줄 것을 요구하고, 이에는 언어를 경유하는 돌아섬도 포함된다. 이미 불완전한 언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부단한 돌아섬으로, 온갖 도착으로 으레 언어 안에 우리 흔적을 남긴다. 보다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로도. 넬슨이 말하듯: “새 어휘(보이boi, 시스젠더화된, 앤드로-패그andro-fag)를 소개하고 이들이 뜻하는 바를 구체화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물론 이렇게 해서 얻는 힘과 실용성이 있음은 명백하지만). 이와 더불어 수많은 가능한 용례와 맥락, 낱낱의 단어가 날아오르게 만들 날개들 또한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네가 내 귀에 대고 넌 구멍일 뿐이야, 내가 가득 채워 주길 기다리는 구멍이라고 속삭일 때처럼. 내가 널 남편이라고 부를 때처럼.”

방금 인용한 짤막한 대목을 시간을 기울여 찬찬히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넬슨이 논쟁적인 입장(새롭거나 개선된 용어의 고안만으로 정의正義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을 잠시 고려하다가 괄호 친 문장 하나로 이내 무력화시키는 방식을 살피며. 사용역이 각기 다른 단어 대여섯 개를 매끄럽게 디뎌(“구체화”, “실용성”, “용례”, “물론”, “구멍일 뿐이야”, “널”) 또 다른 사용역에 해당하는 단어이자 퀴어하고 이론적인 공간에서는 (정상화할 잠재성이 강한 단어다 보니) 다소 의외라 유난히 더 정겹게 다가오는 단어(“남편”)에 안착하는 방식을 살피며. 마지막 문장이 첫 문장의 퉁명한 직설을 되울리는 동시에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피며. 이 각기의 돌아섬들은 토대적이다. 다시 말해 언어를 일종의 다각적인 도착으로 이해하고, 도착을—그 수용을—어떤 형태로든 건강 가운데, 곧 기능적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만나게 되는 즉흥적인 조화로움 가운데 살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 이해하는 넬슨의 감각을 구성한다. 나아가 넬슨에게는 이러한 받아들임이 운신의 자유—개개인의 이러저러한 도착이 그 방향으로 이동을 요구하는 한은 퀴어함의 예상 범위마저 벗어날 자유(자칫 너무 멀리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또한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라이드 축제에서 받은 전단지 내용을 보고 넬슨은 “혁명 언어를 일종의 페티시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쓴다. 전단지에 적힌 혁명적 목표 중 일부에 역시나 공감하면서도(“이 세상에는 존나 조져 마땅한 악랄함이 넘친다”), 그는“공격”하자는 요청과 다양함에 자리를 내주지 않은 채 고정된 집단 정체감을 지향하는 “동지”가 되자는 요청에는 저항한다. “어쩌면 정작 재고가 필요한 단어는 래디컬인지도 모르겠다. 한데 그 대신 또는 그에 더해 어느 쪽으로 방향을 튼다? 열려 있음? 그만하면 충분한가, 충분히 강한가?”

이런 식으로 똑 떼어 인용하면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치기 십상인 “그만하면 충분한”good enough이라는 표현은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관통하는 삶과 언어의 이상으로 작용한다. 넬슨은 20세기 영국 심리학자 D. W. 위니콧에게서 이 표현을 빌려 온다. 위니콧은 프로이트가 남긴 거창한 항적 가운데 보기 드문 외딴 섬과도 같은, 살림 감각과 겸허를 지닌 인물이었다. 넬슨이 본인을 참살이well-being로 인도하는 “마음속 복수 젠더 어머니들”(시인 데이나 워드에게서 빌려와 이 책에서 반복해 인용하는 표현) 중 한 사람으로 위니콧을 명시하지는 않지만, 책 곳곳에 그의 불가결한 영향이 녹아 있다. 불완전하고, 몸과 똑 떼이지 않고, 줄곧 변화하는 개인의 필요와 느낌을 기꺼이 살피려 드는 점만 해도 그렇다. 위니콧이 “진짜라는 느낌”[현실감](확실히 이론적 용어와는 다르다)을 강조했음에 넬슨은 특히 주목한다.

위니콧은 이런 느낌을 살아 있음의 총체적 일차 감각으로 보고, 우러나는 몸짓을 가능하게 하는“체조직의 살아 있음과 심장 활동 및 숨쉬기를 아우르는 신체 기능의 작동”으로 설명한다. 위니콧은 이 느낌이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정체성도 아니라고 본다. 위니콧에게 진짜라는 느낌[현실감]은 하나의 감각이다. 퍼져 나가는 감각. 무엇보다도, 이 감각은 [누군가를] 살고 싶게 한다.

여기서 넬슨은 앞서 인용한 대목(“내가 널 남편이라고 부를 때처럼”으로 끝맺는)에서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이고 심지어는 난해한 언어를 거쳐 속 깊은 직언으로 다가오며 의외로 포괄적인 단어에 안착한다. 차츰 토대적인 것에 이르고 나니 이제 무조건적으로 손을 내밀 수 있게 됐다는 듯—“one”[누군가]. “이 감각은 [누군가를] 살고 싶게 한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은 눈부신 사랑 이야기, 무척이나 오랜만에 읽어 본 강렬한 사랑 이야기다. 또 한 가지 서서히 깨닫게 되는 사실은, 이 책을 쓰는 행위가 넬슨이 사랑의 가호 아래 겪는 다양한 변태의 표상이라는 점이다. 그가 사랑하는 예술가 해리 도지도 이 시기에 변태하는 중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해리가 젠더를 옮기는 과정에 있으면서도 여성이나 남성으로 정체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남성 대명사라는 것, 도지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he, him, his는 그 자체로 ‘그만하면 충분한’ 언어의 한 예이자, 그럭저럭 쓸 만한 언어 안에 임시로 머물며 옮겨 갈 때 찾게 되기도 하는 자유의 한 예다.)

넬슨은 생모에게 물려받은 복잡한 유산을 적의 없이 설명한다. 여기에는 의존에 대한 두려움이 포함된다. 그는 애덤 필립스와 바버라 테일러를 인용한다. “교감에 기반한 애착 관계가 전무한 ‘나’는 허구이거나 광기다. […] [그럼에도] 의존은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멸시의 대상이 된다. 자립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것임에도 의존은 관계와 양립할 수 없다는 듯이 업신여김당한다.” 이어 본인이 친모에게 물려받은 또 한 가지 습관을 묘사한다. “내 자존감의 대부분을 고도의 능력 발휘에서 끌어내는 것, 내 자립도가 완전에 가깝다고 비합리적이지만 열렬하게 믿는 것.” 정교함과 다각적인 접근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지향하고 있음에도, ≪아르고호의 선원들≫은 넬슨을 능란함과 고정된 정체성 너머의 공간으로 밀어붙인다. 그리해 넬슨은 본인과 해리의 옮아 감을 소재로 글을 쓰는 와중에, ”남부끄러운 대로 백주 대낮에 [미주알을] 펼쳐” 놓는 모드로 실시간으로 옮겨 가게 된다.

다만 “남부끄러운 대로 백주 대낮에 펼쳐” 놓거나 “그만하면 충분함”을 포용한다고 해서 넬슨이 현실 안주를 선택지로 여기는 건 아니다. 건강은 안주가 아니며 가만한 것은 결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체의 각 부위가 교체되고 그러므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선박이 아님에도 변함없이 아르고호라는 이름으로 부르듯이, 연인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이 문장에 담긴 의미는 그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매번 갱신되어야 한다”고 그는 쓴다. 서로 거듭해 빚어 가는 둘 사이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얻으며, 넬슨과 도지는 사실상 관계의 일환으로 이 책을 짓는 과정에 함께한다. 둘 사이의 관계를 지어 가는 과정이 이 책의 일환이듯. 넬슨은 책의 3분의 1밖에 지나지 않은 지점에서 벌써 공동 작업을 언급하면서,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까지 서로의 어머니와 아이 노릇을 겸해야만 하는지가 두드러지는 일화를 전한다.

이 책의 초고를 완성하자마자 해리에게 읽어 보라고 준다. 퇴근해 집에 돌아오니 해리의 배낭에 든 흐트러진 원고 귀퉁이와 해리가 발산하는 기분이 나를 맞는다. 다 읽었다는 말이 필요 없다. 내가 감지한 해리의 기분은, 단어를 붙이자면 조용한 분노에 가깝다. 우리는 내일 점심을 나가 먹으며 원고 얘기를 하기로 한다. 다음 날 해리는 내 글이 자기를 제대로 보지도 보듬어 주지도 못하는 느낌이라고 토로한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느낌인지야 나도 안다. 우리는 샤프 연필을 각기 손에 쥐고 원고를 한 페이지씩 같이 살피고, 내가 초고에서 해리와 우리 둘을 재현한 방식을 어떻게 더 정교히 다듬으면 좋을지 해리가 이런저런 제안을 한다. 나는 그 말을 귀담아들으려 애쓰며, 애초 자신에 대해 쓰는 걸 허락해 준 해리의 아량을 되새긴다. 해리는 사생활을 무척 중시하는 사람이고, 나와 함께 사는 건 뇌전증을 앓으며 인공 심박 조율기를 몸에 달고 사는 사람이 섬광등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와 결혼해 사는 것만] 같다고도 여러 차례 얘기했으니까. 그래도 내 자기 변호 충동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어 넬슨의 내적 독백 안에서 말다툼이 벌어진다. 넬슨이 상상한 가상의 해리 도지가 참다 못해 “그냥 나와 우리를, 우리 행복을 적당한 선에서 증언하는 글을 쓰면 안 돼?”라고 따진 뒤에야 이 다툼은 끝이 난다. 도지의 말에 넬슨은 “자기 변호 충동”과는 한참 먼, 본인의 부족함을 시인하는 답을 한다. “그야 [내가] 아직 글쓰기와 행복, 글쓰기와 보듬음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아직 못함”에 담긴 저 조용한 확신이 시간을 곱절한다. 해리의 도움을 받아 이해하게 것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사이 그리 터득한 교훈이 책 전체에 다시 스며 이 책을 쓴 행위가 다른 이를 보듬는―해리와 넬슨 본인과 두 아이를 개개로 그리고 함께 보듬는―시도가 되었음을 암시함으로써. 그런데 이런 쓰기―이런 보듬음―가 가능하려면 우선 본인이 그 과정에서 자기 통제 밖에 있는 요소들에 손들어야 하며 나아가 자신의 달리 되어 감에도 손들어야 함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아르고호의 선원들≫ 뒷부분에 이르면, 벽의 역할을 하던 포궁 경부가 분만 중에 문으로 변태하는 과정을 담은 대목이 나오며 책을 닫는 두 갈래 내러티브를 연다. 더불어 아들 이기의 탄생과 해리 양어머니의 죽음이―또 한 쌍의 변태가―넬슨을 다시금 토대적인 것으로, 곧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과 죽음으로 이끈다. “이[포궁 경관이 열리는 느낌]에 존재론적인 가치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썩 좋은 [느낌]은 아니다.” 또한 “아기를 내놓는 몸은 산산이 부서질 각오를 해야만 한다.” 넬슨이 명시하지는 않지만, 산산이 부서질 각오를 하려면 그 뒤에 복원 과정이 따르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옆에 있는 사람이 앞으로 내가 되어 갈 나 또한 수용할 만큼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넬슨의 경우 이 대상은 도지뿐 아니라 완치될 길 없는 이 수다한 말 가운데서 넬슨을 맞닥뜨릴 독자들도 포함한다.

이 장면에서 불과 몇 단락 뒤, 넬슨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순간을 돌아본다. 해리에게 죽어 가는 네 어머니를 계속 모실 수 없으니 아무래도 디트로이트로—홀로 죽음을 맞을 집으로—돌아가시는 게 좋겠다고 말한 순간을. 그로써 해리의 어머니가 돌아가 다시 마주하게 될 처지에 대해서는 “그만하면 [괜찮]지 싶었다”라고 썼다가, 뒤이어 이 생각을 무른다. 그리고 본인이 내린 결정을 정당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대신 느닷없이 “통증에서 자유로운” 해리와 해리의 아들(넬슨의 의붓아들)에게 화가 났던 순간에 대해 쓴다.[1] 해리에게 상처를 가한 본인의 행동을 해리가 다른 종류의 고통에 무감해 보인다고 자신이 화를 낸 일 옆에 어떤 정당화도 없이 둠으로써 그는 남부끄러운 대로 스스로를 백주 대낮에 펼쳐 놓는다. 독자가 이해해 줄 거라는 신뢰에 기반해.

그사이 해리가 용서했거나 적어도 이해해 줬을 것으로 짐작하는 이 남부끄러움, 이 실패가 해리 어머니의 죽음을 담은 장면들 위에 드리워진다. 이 지점에서 넬슨은 공동 작업과 대화를 넘어, 해리에게 아예 지면을 넘긴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아니 충분함을 능가했다고―해리가 어머니 병상에 올라 그만 내려놓고 쉬도록 어머니를 보살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했어. “고마워, 엄마.” 눈물이 줄줄 샜지만 이제는 엄마에게서 눈물을 숨기려 했어. 화장실 불을 켜고 문을 반 이상 닫아 30센티미터 폭의 노란 직사각형이 엄마 발부터 머리까지 드리워지게 했어. 담요 위로 엄마의 두 발을 만지고 이어 두 허벅지를, 허리를, 목 아래 드러난 윗가슴 살을, 엄마의 어깨와 얼굴과 두 귀를 만졌어. 벗어진 아름다운 머리에 온통 입을 맞추고서 “잘 자, 엄마. 이제 그만 쉬어”라고 말했어. 그런 다음 내 작은 의자형 침대에 누워 겉옷을 상체에 둘러 덮고는 소리 없이 울다가 잠이 들었어. 엄마의 숨소리, 깊고 깔딱거리고 확실하게 들려오는.

≪아르고호의 선원들≫의 세상에는 그만하면 괜찮지 않은 것이 넘치고―그로테스크한 편협함, 전 지구적 파괴, 무관심, 맹목, 잔인함, 탐욕―넬슨은 이들을 지적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는 한, 그만하면 괜찮다고 그는 분명히 말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도착, 여림, 상상력을 감안하는 사랑이라면 더더욱. “젠더퀴어 친족 만들기가 […] 선사하는 선물 중 하나는 돌봄이 특정 젠더나 특정 지각-존재로부터 분리가 가능하고 또한 부착도 가능함을 드러내 보여 준다는 것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다. 언어도 그만하면 괜찮다. 사랑과 삶이 스며 있는 이상, 그리고 실패, 의견 차, 변화의 와중에도 자기가 놓인 맥락에 깨어 있는 이상. 무엇보다도 넬슨이 바라는 건 소박하고 단일하며 여린 것, 살뜰함 혹은 돌봄과 맥이 통하는 것이다. 개개인을 보살피는 돌봄, 그리고 퀴어함을 포용하면서 제약하지는 않는 주의 깊음과 상상력을 지닌 눈-보듬음[바라봄]. 오밀조밀하고 불완전하며 꾸준히 달라지는 부위들의 어울림, 곧 몸의 분주한 계속됨에 찬란하고도 건강하게 깨어 있는 넬슨 본인의 몸의 자각을 누군가 집으로 여기도록 살뜰히 보살피는 실질적인 작업, 이게 그가 추구하는 일이다. “내가 아는 건 우리가 […] 여기 있다는 것”이라고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쓴다. 이 말이 해리에게 직접 건네는 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얼마 동안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우리의 돌봄, 그 진행 중인 노래로 여기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 동시에 우리를 염두한 말이라고도 생각한다. 계속되는 저마다의 도착 가운데서 넬슨과 해리를 눈으로 보듬고 있는, 그리고 넬슨의 말들로 불완전하게나마 보듬어지고 있는 우리 독자들을.


[1] [편집자주] 이는 서평자의 착오인 듯하다. 진통을 겪는 넬슨이“통증에서 자유로운 이 두 광대가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할 때 그가 가리키는 건 해리와 제시카(넬슨의 출산을 보조하는 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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