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 넬슨과의 대화

매기 넬슨이 2015년 «북포럼» 지면에서 «어덜트» 매거진 편집장이자 인터뷰어와 작가로 활동하는 세라 니콜 프리켓Sarah Nicole Prickett과 나눈 대화를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 세라 니콜 프리켓의 허락을 받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이 대화에서 두 사람은 수행적 글쓰기, 장르 구분, 폴 B. 프레시아도, 퀴어함과 급진, 글쓰기의 위험, 페미니즘적인 무심함, 여성에게 이기심을 덧씌우는 문화, 개개인이 처한 맥락의 중요성 등을 주제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쓰면서 넬슨이 무엇을 의도했고 무엇을 걱정했는지, 또 무엇을 피하고자 했는지가 이 인터뷰로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나리라 생각해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고 재밌는 글이기도 하고요.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읽었거나 읽으려 하는 독자분들께 도움이 되는 글이 되길 희망합니다.

원문 링크: Bookforum talks with Maggie Nelson – Bookforum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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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기 넬슨과의 대화

세라 니콜 프리켓
2015년 5월 29일
플레이타임 편집부 옮김

매기 넬슨은 내가 만난 진지하고 문학적인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나보다 더 많이 대화를 “알죠?”로 채우는 인물이다. 나와는 다르게 아마도 그의 음성 틱은 [자신을 위한] 목발보다 상대에게 내미는 손에 가까울 것이다. 그가 명철하고 사려 깊은 이야기를 엄청난 속도로 늘어놓아서 듣는 입장에서 그런 그의 말을 완전히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러다가도 그가 “알죠?”라고 덧붙이는 순간 다 따라가고 있는 느낌이 들기에. 마찬가지로 글에서도 그는 누구에게든 말을 거는 소질을 선보이며, 그렇게 독자들에게도 작품에 들여온 철학자, 시인, 논픽션 분야의 영웅―롤랑 바르트, 이브 코소프스키 세지윅, 뤼스 이리가레, 오드리 로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대화하면서 보인 것과 같은 근사한 유창함과 이해받고 있다는 가정으로 말을 건넨다. 시인이자 ≪블루엣≫(2009)과 ≪잔인함의 예술≫(2011)의 지은이인 넬슨은 이러한 자신의 방자함을 [나와는] 정반대로 설명한다. 이번에 출간된 ≪아르고호의 선원들≫에서 그가 묘사하는 건 고독 가운데 “대상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한바탕씩 쏟아 내는 글쓰기”다. (이 구절을 다시 읽는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건 “대상을 염두에 두지도 않고 한바탕씩 쏟아 내는 글쓰기, 알죠?”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은 넬슨이 고독을 뒤로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해리 도지―남성 대명사 he를 쓰지만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정체화하지 않은 예술가―와 일대일 연애 관계에 빠지고 얼마 뒤 도지와 그의 아들과 같이 살기 시작한다. 도지는 테스토스테론 투여를 시작하고 넬슨은 정자 주입을 시작한다. 나중에 넬슨은 아기를 낳고 도지의 어머니는 유방암으로 죽어 간다. 짝을 이루는 이 고단한 일화들에 결혼, 퀴어함, 급진성, 항문 섹스와 출산, ‘뒤로 하는 모성’과 A. L. 스타이너에 대한 능란하고 종종 배꼽 잡는 대화들colloquy이 더해진다. 그 결과물은 엄밀히 따지면 에세이지만 드문 순간에만 에세이처럼 들리는 한 편의 사랑 노래다.

넬슨의 문장들은 때로 심장이 멎을 만큼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만, ≪아르고호의 선원들≫의 가장 큰 놀라움은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잡음의 부재에 있다. 각각의 요소에 정확한 무게를 부여한 덕에 불필요한 부분이 전혀 없다: 책의 어느 장을 펼쳐 읽든 바로 앞으로 떠밀리는 느낌을 받는다. 책을 덮고 싶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1부 (전화로 진행)

그럼 저도 주책 그만 떨게요.

온라인으로 하는 일이 이메일 주고받는 것밖에 없어서요. 받은 편지함 관리가 제 온라인 생태계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어젯밤에 누가 알려 줬는데 유럽에서는 이메일을 우편물처럼 대한대요. 프랑스에서 보낸 우편물이 에스파냐에 도착하는 데 나흘이 걸린다면 이메일에 답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나흘이 적당하다는 거죠. ‘너무 좋다’ 싶더라고요. 유럽의 시간 관념을 제 삶에 적용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가 좀 과도하게 기능하는 경향이 있어서요. 더 내려놓을 필요를 느껴요.

자전적인 글을 쓰는 많은 사람에겐 행동보다는 기억이 주된 소재가 되기 마련이죠. 비하하는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니에요. 다만 제겐 기억이 그렇게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랍니다. 저는 수행적인 글쓰기에 흥미가 있어요. 뜨거운 글 또는 함께 움직인다는 느낌을 주는 글을 추구해요. 반면 거즈 천 같은 효과를 내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이는 편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기억이 거짓임을 글쓰기가 수행하도록 보여 주자는 거죠,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네 읽었어요. 정말 마음에 들던데요?

저도 그래요. 저는 문학을 둘러싼 문화가 왜 그렇게 강박적으로 분류에 몰두하는지 이해하려 여전히 애쓰는 중이에요. 혼종성에 대한 강박은 새로운 규범을 낳을 뿐이고 새로운 규범만큼 도망치고 싶게 만드는 것도 없잖아요?. 저는 책을 쓸 때마다 그 책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으려 노력했어요. ≪제인: 어느 살인 사건≫을 썼을 때 어떤 부제를 달아야 할지 오래 고심했죠. 그러다 브라이언 에븐슨의 ≪어두운 속성: 어떤 고통≫Dark Property: An Affliction을 접하고 장르가 아니라 명사를, 심지어는 동사도 부제로 달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깨달음이 해방감을 안겨 줬죠. 그 덕에 ≪제인≫은 ‘어느 살인 사건’이 ≪잔인함의 예술≫은 ‘하나의 심판’이 되었고요. ≪아르고호의 선원들≫에는 부제가 없어요. 그렇지만 이 책을 ‘자기 이론’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뒤표지에 이 표현을 넣어도 좋다고 허락했죠.

‘회고록’은 별로지만 ‘자기 이론’은 괜찮은 이유는 그걸 기회 삼아 폴 B. 프레시아도의 ≪테스토 정키≫Testo yonqui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이메일에서 언급한 책이기도 하죠. 저는 이 책의 첫 부분을 사랑해요.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다. 이 책은 테스토스테론에 기초한 자발적 약물 치료 계획으로, BP[1]의 몸과 정서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나의 몸-에세이. 극단으로 밀어붙여야만 한다면 이 책은 신체-정치 허구, 자기에 대한 이론 혹은 자기 이론이다.”

책을 거의 다 쓰기 직전까지 프레시아도와 ≪테스토 정키≫를 읽지 않았어요. 마무리 단계에서야 이 책을 읽고 책을 끝내는 데 필요한 뻔뻔함을 얻었죠. 재밌는 점은 제가 아는 많은 사람이 ≪테스토 정키≫의 이론적인 부분을 사랑하지만 “자전적인 부분은 잘 못 읽겠어”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저도 그래요! 최근 몇 년간 읽은 섹스를 다룬 글 가운데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익숙한 묘사가 별로 없었거든요. 그래서 ≪테스토 정키≫를 읽으면서 굉장히 편안했어요. 나도 이런 식으로 쓸 수 있겠구나 싶었고요. 지금 이 순간을 다루는 주류 서사들을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프레시아도의 것과 같은 책을 특정 유형의 페미니즘들, 말하자면 비르지니 데팡트가 ≪킹콩 이론≫King Kong Théorie을 통해 목소리를 부여한 페미니즘들과 대립시키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BP와 VD가 이 책들을 나란히 쓰고 있음을 ≪테스토 정키≫가 보여 준다는 사실이 정말로 좋아요. 피켓 라인을 사이에 두고 양편이 늘 서로에게 고함만 치는 건 아니잖아요.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당돌하죠.

맞아요. 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위 ‘자기 돌봄’[자기 관리]이 에로틱하다는 사실을 폭로하죠. 그 대목에는 또 비르지니가 ≪킹콩 이론≫ 원고를 타이핑하고 그러는 사이 베아트리스는 테스토스테론을 투여하며 ≪테스토 정키≫를 구상하기 시작하는 부분도 나오죠. 이들은 완전히 다르지만 또 완전히 연결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런 관계가 저희 집 상황과도 비슷해 아주 익숙하게 다가왔어요. 그 점이 좋았죠.

제목 후보 중 상당수가 일종의 내부 혹은 상호 관통에, 즉 내면으로의 운동에 주의를 돌리는 표현이었어요. 한동안은 ‘안으로의 돌아섬’involution이라고 불렀어요.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거품≫Blasen을 읽었을 땐 거품 내부 혹은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고찰에 강박적으로 매달렸고요. ≪거품≫은 정말로 정말로 기이한 글쓰기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테스토 정키≫와 비슷해요. 저는 이런 글쓰기를 ‘야생 이론’이라고 불러요. 특정한 분과―많은 경우 학계에 속한―내부에서 이루어지지만 창의성과 무모함 덕분에 다른 어딘가에도 속하는 글쓰기라서요. 슬로터다이크가 무슨 말을 하면 ‘와 정말 광인의 작업에 가깝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아일린 마일스가 거품foam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 ≪거품≫을 읽었다며 추천해 줬어요. 마찬가지로 뛰어난 에세이고 제게 영감을 주기도 했죠. 마일스는 반려견에 관한 놀라운 책을 얼마 전에 마무리했어요. 이 책도 상당히 야생적이죠. 아일린 마일스와 아는 사이인지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죠. 그건 아니에요. 퀴어 섹슈얼리티와 논바이너리 젠더 정체성이 진보나 급진을 담보한다는 생각을 납득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옹호할 수 없죠. 이성애 관계가 보수를 담보한다는 가정도 마찬가지고요. 이와 관련해 책에서 리오 버사니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어요. “가해를 당하는 입장이라도 래디컬한 면이 전혀 없을 수 있으며, 이런 경우를 억압받는 여느 소수자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 사이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최근에 저는 엘런 윌리스의 글을 많이 읽었어요. 그는 이성애와 그 안에 잠재한 급진성을 빈틈없이 살핀 작가예요.

섹슈얼리티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푸코는 “저는 독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대요. 정말로 사랑스러운 대답 아닌가요. 책을 쓸 때마다 그랬지만 이 책을 쓰면서도 제가 너무 많은 동일시를 범할까 봐 걱정했어요. 잔인함에 관해 쓰거나 이모의 살해에 관해 쓸 때도 스스로 ‘잔인함에 정통한 사람이 되고 싶어? 살인에 정통한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당시 제가 생각하던 주제인 모성과 젠더,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글을 쓰고 싶었던 한편 이런 쟁점들에 관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사고 방식들을 재기입하기를―혹은 그런 방식들에 의해 재기입되기를―원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정말로 이는 제 통제를 넘어서는 문제예요.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오직 글쓰기뿐이죠(이조차도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요). 그래서 좋아, 쓰는 건 오케이. 단 절대 출판하지 말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어요.

그러게요. 일 년이라니, 맙소사.

예외도 분명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말해 써서는 안 될 걸 쓰고 있다는 걱정이 드는 순간을 간간이 마주하지 않는 글쓰기는 위험을 감수하는 글쓰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책에서도 말했지만 때론 내가 느끼는 불안이 그럴 만한 이유에서 나온 불안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그럴 만한 이유’가 뭔지 판별하는 것조차 힘들고요. 다만 제가 아는 건, 저는 걱정이 되는 글을 많이 써 온 사람이고 아직까진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이죠. 이러면 스스로를 나르시시스트로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제 책을 사례로 들어 볼게요. 여성과 뉴욕 학파를 다룬 책을 썼을 때 저는 1970년대의 일부 여성 시인이 지닌 관심사가 얼마나 묵직했고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에 커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었어요. 이 여성 시인들은 프랭크 오하라 같은 뉴욕 학파 작가들이 펼쳐 낸 거침없음과 당돌함을 수행할 수 없었죠. 이들이 ‘나 혼자 세 아이를 돌보는 게 어찌나 행복한지 몰라, 이토록 흥미진진한 모험이라니’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앨리스 노틀리나 버나뎃 메이어처럼 제가 다룬 여러 시인은 한층 명시적으로 ‘진지’한 작가로 꼽히던 당대의 일부 여성 작가와도 거리를 두고서 ‘무심함’을 수행할 다른 방법들을 물색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가부장제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가부장제 클럽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무심함의 매우 심오한 형식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페미니즘적인 무심함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캠프한 무심함과는 좀 다르고, 캠프한 무심함은 니힐리즘적인 무심함과 또 다르죠. ≪아르고호의 선원들≫에서 제가 동화/혁명 논쟁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인 건 사실이에요. 또 동성애 규범성이나 이성애 규범성에도 관심을 기울였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여기서 유심함이 내게 제시된 이분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면요.

그렇죠, 그렇죠. [웃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게, 사람들이 제 글을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비판하면 흥미가 동하지 않지만, 독자들이 제 글을 유심히 살피고 대화를, 나아가 논쟁을 원한다면 언제든 응하고 싶거든요. 문학이나 섹스, 이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서로를 찾아낸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번 찾으면 놓지 않아요. 이런 데 특정한 방식으로 몰입하는 사람이 워낙 드무니까요. 반면에 단속이나 망신 주기로 변하는 관심은 훨씬 시시하게 느껴져요.

당신이 일하는 ≪어덜트≫ 매거진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하나요?

와, 근사한 얘기네요. 저는 ≪블루엣≫과 관련해선 주로 헤어진 이야기만 듣지 가까워지는 얘기는 처음이에요.

재밌는 말이네요. 뭐, 책이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말한 유형의 글쓰기에는 저도 익숙한 편인데 이것 혹은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이기적이라는 느낌은 익숙하지 않네요. 어머니들(혹은 어머니 아닌 이들)의 ‘이기적임’을 논하는 이야기에서는 여자들을 단속하겠다는, 여자들에게 인간성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악취가 풍겨요. 어느새 아이를 열심히 돌보게 됐으니 이제 근본적으로 이기적이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는 자기 만족적 관념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이 이기적이라는 관념만큼이나 터무니없어 보여요. 전 단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기적’이라는 개념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과 관련해서는 더더군다나, 제 단점 목록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않아요. 당신은 어떤가요?

그럼요, 좋은데요. 당장 이 책을 주문해야겠어요.

정말 재밌는데요. 우리가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 사람들이 말하던 게 떠오르네요. “아기 눕힐 공간이 없으면 양말 서랍에 넣어!” 그런데 말씀하신 대목을 제 식대로 해석해 보자면 뒤라스는 아이를 어디에 둘 거냐는 문제는 내가 어느 공간에 있느냐에 좌우된다고,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할 거냐는 문제는 질문을 던지는 내가 어느 공간이나 맥락에 있느냐에 좌우된다고 말하는 듯해요. 자서전 수업에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해요. 예를 들어 백인 여자에게는 해방이 가족으로부터의 탈출로 이해될 때가 많지만 유색 인종 여자에게는 해방의 서사가 가족 만들기를 위한 탈출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고요. 이는 국가가 유색 인종 여자와 가족에 역사적으로 가해 온 압력들과 깊이 연관돼 있죠. 이 점과 관련해서는 리사 두건의 <탈출 속도, 또는 ‘가족’을 퀴어화하는 방법이 50개는 있을 텐데>Escape Velocity, or, There Must Be 50 Ways to Queer ‘The Family’란 글이 대단히 유익해요. 거기서 그는 “체제를 거스르는 젠더 및 성적 실천과 생활 양식이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등장하는” 경우들을 보여 주고자 자신의 가족사를 들려줍니다. “국지적인 조건과 의미를 넘어서는 어떤 일반화도, 어떤 ‘대의’의 추출도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 내가 가족을, 가족 꾸리기를 어떻게 느끼는지는 내 계급 경험, 내 인종, 내가 경험한 보살핌 등등의 여러 요소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이 다 별도의 사안이고요. 제가 일반화에 심각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 때문이에요.

많은 퀴어 이론과 심지어 일부 훌륭한 페미니즘적 사고 방식도 재생산이나 보살핌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원천일 수 있다는 발상에 건강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듯해요. 그런 답답함에 저도 크게 공감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는 쪽으로 너무 순순히 기우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살아 있고 필요를 가진 모든 것을 유심히 살피고 돌볼 의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이 사회적 의무를 알아차리기 위해 꼭 아이를 좋아하거나 아이를 갖고 싶어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임신과 출산 혹은 보살핌에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에 납득할 만하게 불편함을 표하는 페미니즘/퀴어 입장과 모든 사람―누구 하나 빠짐없이―에게 살 만한 삶의 기반을 보장해 주려 힘써야 한다고 말하는 (심지어 주장하는!) 정치 간에 종종 마찰이 일기도 해요. 비행기에서 아기가 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하지만 공공 장소에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많은 사람이 불만을 숨기지 않는 현실은 우리 문화가 대문자 아이를 숭배하는 데만 매진하지 유의미한 방식으로 실제 아이들을 위한 조치를 마련하는 데는 무관심함을 빈번히 드러내 준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아이가 있는 사람(또는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 장애인, 깨끗한 공기와 물이 필요한 사람 등등)에게 “그건 당신 문제잖아, 그건 당신 문제지”라고 계속 되뇝니다. 이것이 바로 민영화의 핵심이죠. 서로를 향한 의무의 감각을 각자가 돈을 써 해결해야 할 (혹은 종교적 자선 몇 방울을 기대해야 할) ‘개인적 문제’로 둔갑시키는 것이죠.

여하간 전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기를 각별히 생각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기를 각별히 생각하는 사람들로 세상이 넘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아기와 ‘아기에 환장하는 사람’에게 왜 경솔한 혐오를 표하는지 냉정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까요. 아기를 가지려 노력하던 초반에는 곧바로 임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갈수록 초조하고 필사적인 30대 후반의 여자가 될 마음은 없었거든요. 하지만 과정이 순탄치 않았고, 그건 힘든 동시에 아주 좋은 일이기도 했어요. 결국 임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임신하려 노력 중인’ 누군가가 되길 원하지 않던 제 모든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졌거든요. 그러면서 ‘늦은 나이’에 보조 생식술을 시도하는 여자들을 혐오하는 우리 문화를 제가 내면화해 왔음을 깨달았어요. 이전에는 꺼렸던 집단에 가입할 때처럼 이 새로운 공동체에 발 들이는 건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답니다. 이제는 인공 수정과 관련해 저와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제가 알게 된 것들을 나눌 수 있어 기뻐요. 이건 우리가 부끄러움 없이 진입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지식 공유 영역이에요. 미셸 티의 환상적인 블로그인 ‘미셸 티와 함께 마흔에 임신하기’Getting Pregnant at 40 with Michelle Tea는 이런 나눔이 어떤 모습을 취할 수 있고 어떤 느낌을 줄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명료하고 유쾌한 사례입니다.

우편으로 비스의 책을 받고 그에게 편지를 썼어요. “뒤표지에 여성이 쓴 추천사만 실은 게 너무나 인상적이에요”라고 말했죠. 이 결정이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나는 내가 헤비급 작가라는 걸 알아. 내가 진지한 논픽션 작가라는 걸 알지. 그러니 문화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이해되는 소재를 다루는 책에 헤비급 남자 작가들의 추천사를 와글와글하게 싣는 식으로 그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아도 돼.” 이런 식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거죠.

2부 (이메일로 진행)

먼저 최근에 프레드 모튼에게 들은 말을 차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크게 동의하는 말인데요. 그에 따르면 ‘정체성[동일성] 정치’는 여성, 퀴어, 유색 인종이 90년대 들어 갑자기 발명한 게 아니에요. 아주 오래된 것, 즉 고대 그리스를 떠올릴 만치 오래된 것이죠. 늘 그렇듯 특정 몸들이 이를 옹호하기 시작하면서 엄청나게 나쁜 평판을 얻게 되었고요. 둘째, 당신이 질문에서 짓고 있는 구분이 완전히 납득되지는 않는데요. 개인적으로 저는 사람들이 자신이 인종과 계급 경험 등등에 따라 각기 빚어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빚는) 방식을 검토하는 것과 소위 ‘정체성 정치’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을 전복하는 게 갈등 관계에 있다고 느끼지 않아요. 실제로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새롭게 생각하고 살고 쓰고 기타 등등을 하고 싶은 이상, 즉 타인에 대한 배제나 착취에 기초하지 않는 방식을 원하는 한,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람들을 어떻게 억눌러 왔으며 사람들은 또 그것을 어떻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해 왔는지 이해해야 하니까요.

프로이트의 늑대 인간 사례를 다시 읽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정말 재밌었어요.

신기하네요. 해리가 최근 뉴욕 월스페이스에서 열린 전시 제목을 ‘사랑의 흐름’이라고 붙일까 했거든요. 왜 그러려고 했는지 물어봐야겠어요. (결국 이 표현 대신 ‘사이버네틱 폴드’를 택했지만요.) 문장을 조목조목 분석하기 좋아하는 제 입장에서는 당신이 ‘사랑’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그리고흐름’을 어떤 의미로 쓰는 건지부터 물어야 할 텐데요. 동시에 제 안에는 그와 별개로 당장 네, 믿고말고요라고 대답하는 부분도 있어요


[1] ≪테스토 정키≫는 폴 B. 프레시아도가 트랜지션을 시작하기 전인 2008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 속 ‘자기’는 BP(베아트리스 프레시아도)라는 이니셜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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