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료타가 문학, 음악 평론가이자 «디스토피아 픽션론» 등을 집필한 엔도 도시아키와 2021년 웹진 «리얼 사운드 북» 지면에서 나눈 대화를 번역해, «리얼 사운드 북»의 허가를 받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대화는 후쿠시마의 비평 경력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작가 마이조 오타로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해,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는 헤이세이의 상징적 빈곤을 돌아보며 화제를 확장해 나갑니다. 후쿠시마의 현상학적 소설론, ‘근대 문학의 종언’ 이후의 비평론, 오늘날 문학의 소외를 “더 거시적이고 자유로운 시각을 취할 수 있는 기회”로 파악하는 시각 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아가 포스트 코로나의 2020년대에 일본 문학이 놓인 조건을 «나선형 상상력» 3장 논의를 되살리며 점검하고, 지금 자신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말합니다(여기서 언급되는 «헬로, 유라시아»는 2025~2026년 중에 리시올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일본 문학 비평을 넘어 동시대와 호흡하고 고민한 결과물로서 «나선형 상상력»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한 글이에요. 후쿠시마 스스로도 이 책이 외국 독자나 업계에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고 하니, 이 글이 조금 더 쉽게 책에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원문 링크: https://realsound.jp/book/2021/05/post-7542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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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료타, 헤이세이 문학의 부채와 비평가의 책무를 말하다
“잿더미에서 되살아나는 것도 있는 법이다”
엔도 도시아키
2021년 4월 16일
리시올 편집부 옮김
후쿠시마 료타 씨는 작년[2020년] 9월 «나선형 상상력: 헤이세이 일본 문학의 문제군»을 간행했다. ‘나: 이상한 주관’, ‘세계: 디스토피아’, ‘언어: 속어화의 침투’라는 경향이 나타난 헤이세이 30여 년간의 문학에 대해 고찰한 내용이 담겨 있다. 마이조 오타로, 가와카미 히로미, 무라카미 하루키, 다와다 요코, 다카하시 겐이치로, 아베 가즈시게, 무라카미 류 등등… 내러티브, 내향, 정치와 문학, 사소설, 범죄, 역사와 허구 등의 주제에 따라 많은 작가와 작품이 논의된 책이다. 쇼와부터 헤이세이, 그리고 지금인 레이와에 이르는 동안 일본 문학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다시 한번 저자의 견해를 들었다.
의식이 갖는 불안정함과 공허함을 본뜬 헤이세이 문학
엔도 «나선형 상상력»은 우선 <시작하며>에서 문제군을 제시한 후 1장 <마이조 오타로와 헤이세이 문학의 내러티브>로 들어갑니다. 후쿠시마 씨는 2004년에 아즈마 히로키 씨가 발행하던 메일 매거진 «하조겐론»에 투고한 마이조 오타로론을 통해 비평가로 데뷔했습니다만, 이번 책에서도 마이조에서부터 헤이세이 문학론을 시작하셨네요. 2001년에 데뷔한 이 작가에게 원래 특별한 애착이 있었나요?
후쿠시마 지금으로서는 기억해 내기 어렵지만 기존 문학과는 다른 이상한 작가가 나타났다는 인상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표면만 흡수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종교배를 통해 문학을 거칠게 찢어 버림으로써 다시 한번 그 표현 기술을 고쳐 쓰고자 한 것이죠. 그러면 당연히 구멍이 숭숭 난 위태로운 문체가 되지만, 그것이 헤이세이 일본 사회의 붕괴 과정과 연동성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듣기 좋은 말에는 의미가 없다’는 당시의 분위기가 문화에 가장 직설적으로 나타나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대진재 이후 출판계에서는 천진하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 늘었으니 답답한 일입니다.
한 가지 포인트는 ‘상징적 빈곤’입니다. 메이지에서 쇼와까지 100년 가까이에 걸쳐 쌓아 온 문화적 자산에서 마이조의 세대는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을 역이용해 폭력에 관한 개념적 문제를 포착하려 했죠. 마이조뿐만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메피스토상을 받고 동시기에 데뷔한 사토 유야도 그랬는데, 2000년대 전반의 작품은 거칠고 폭력적인 반면 개념적인 자기 언급이 여기저기 들어가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추상도를 올린 언어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있었을 것이고, 초기 사토 씨로 말하자면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가 아니라면 신뢰할 수 없다는 듯한 벼랑 끝에 선 듯한 운치도 있었는데, 게다가 그 비참한 조건을 딛고 묘하게 사변적인 시간론을 이야기하곤 했죠. 그렇게 꼬여 있는 게 재미있었어요.
엔도 후쿠시마 씨는 1981년생이니 헤이세이가 시작된 1989년에는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죠. 마이조 작품을 읽었을 때는 스무 살 무렵인가요?
후쿠시마 이십 대 전반이었습니다.
엔도 그 이전에 처음 만났던 문학은 무엇이었나요? 거기서부터 과거로 어떻게 거슬러 올라갔고, 또 자신에게 있어서의 문학사를 어떻게 재구성해 나갔습니까?
후쿠시마 뭐라 해야 좋을까요… 저는 특정 소설가, 특정 작품에 영향을 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굳이 말하면 문학이라는 영위 자체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있고 거기서부터 취향을 넓히는 형태로 뭔가를 써 나가는 게 보통이긴 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좀 별난 점일 수 있어요. 즉 상징적 빈곤은 마이조 씨나 사토 씨 이전에, 요컨대 제 문제였죠(웃음). 사는 데에 실속이 없고 뼈대만으로 지탱하고 있다는 느낌. 그런 상태에서는 취미나 쾌락만으로 의욕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직접 프로그램을 짜서 어려운 문제를 해석해 나가는 도전이 없으면 자신을 고무할 수 없습니다. 제게는 ‘문학’과 ‘중국’이 그런 불투명한 수수께끼였습니다.
저는 1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소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헤이세이에 대해 쓰고 있을 때도, 바탕에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단순하게 정의하면 소설이란 의식에 떠오른 세계를 정착시켜 나가는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의식이라는 것의 회선은 불안정한 법이고, 예를 들어 지금 저는 커피를 마시면서 엔도 씨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면서 말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의식이 세 개 정도의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 의식의 상태는 곧 소멸해 버리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습니다. 의식은 항상 무언가에 접속하고 있는 회선의 묶음 같은 것입니다만, 접속 환경 자체가 좋지 않기 때문에 바로 5초 전까지 기억하고 있던 것을 금방 잊어버린다든지 하는 일이 흔합니다. 의식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실행하지만, 그 ‘장’ 자체가 불확정적이고 불안정한 회선임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불안정한 의식의 회선을 조금이라도 굵게 만들고 에너지를 집중시켜 가는 작업이 아마 소설을 쓴다는 것 아닐까요. 이것이 제가 최근 1년 사이에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은 후설 현상학에 가까운 비전이지만, 저는 현상학이 하려고 했던 것이 소설의 본질에 가장 가까웠던 것 아닐까 생각해요. 지향성을 가진 의식의 안테나가 여러 전파를 수신하는 거죠. 게다가 후설을 읽어도 의식 자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의식은 의식 이외의 무언가에 접속해 의식의 장을 채울 뿐입니다.
헤이세이 문학에는 이러한 의식이 가지는 불안정함이나 공허함을 본뜬 면이 있습니다. 쇼와 문학은 의식의 회선이 비교적 굵은 상태로 작동했습니다. 뭔가 목적이 있고 그것을 분명한 형태로 만들어 가는 기술이 있었어요. 한편 헤이세이가 되면 접속 불량 그 자체가 작품의 테마가 됩니다. 그 결과로 엔도 씨가 쓴 디스토피아의 문제(«디스토피아 픽션론») 같은 것도 나온 것이죠. 사회의 불안정 이전에 의식 상태 자체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이 상승했기 때문에 디스토피아에 강하게 반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헤이세이 문학 속에도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성질이 나타나 있던 것은 아닐까 해요.
착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본 비평의 역할
엔도 «나선형 상상력»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2004년 «근대 문학의 종언»을 발표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사실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고 규정된 시대에 후쿠시마 씨는 문예 비평의 길을 걷기 시작한 셈입니다.
후쿠시마 맞습니다. 다만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날개를 펼친다’는 헤겔의 말처럼 끝났기에 비로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 때는 그 현상 자체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축제가 끝나고 폐허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이해되는 것도 있기 때문에 저는 특별히 비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살릴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어쨌든 문학 비평은 문명 비평이기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모두 업계만 쳐다보는 작가주의처럼 되어 새로운 작가를 칭찬하거나 깎아내리는 차원에서만 커뮤니케이션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헛된 일이라 봅니다. 더 거시적이고 자유로운 시각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도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엔도 ‘근대 문학의 종언’을 실감하시나요?
후쿠시마 결국 문학이 문화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잃었다는 것이지요. 쇼와 시대의 문학자는 지식인이었지만, 헤이세이 작가는 더 이상 지식인이라고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슨 사건이 일어나도 옛날과 달리 미디어가 작가에게 의견을 들으러 가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소설가는 이제 지적 직업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렇다 치고 국내 문예 시장은 수축하고 있는데 글로벌하게는 일본 문학이 전에 없이 많이 번역되어 문학상을 받기도 합니다. 수축과 확산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일본의 평론가로서 설명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라타 사야카든 다와다 요코든 진공 지대에서 갑자기 나온 작가가 아니에요. 어느 정도 역사의 뒷받침이 있어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다와다 씨는 후루이 요시키치적인 ‘내향’의 에세이즘에 연결되고, 무라타 씨는 오카다 도시키나 마에다 시로의 로스트 제너레이션적인 풍토를 재시동한 것이라 봐요. 어쨌든 컨텍스트를 재현해야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참고로 이 책은 이번에 한국어판이 나오는데 처음부터 저는 외국인 독자를 가정해서 쓴 부분이 있습니다. 문학 업계에 관심이 없어도 작가들이 어떤 관계성 속에서 나왔는지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엔도 가라타니가 ‘근대 문학의 종언’을 2000년대 들어 처음 말한 것은 아니고,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이나 «반문학론»을 쓴 1970년대 말부터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광경을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선형 상상력»에는 가라타니에게 “일본 근대 문학이란 후타바테이 시메이에서 시작해 나카가미 겐지로 끝나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나카가미 겐지는 «곶»으로 1976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는데, 바로 다음 회차 수상작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였으니 그 무렵 하나의 전환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무라카미 류도 «나선형 상상력»에서 다뤄지고 있지요. 또 마이조 오타로는 데뷔 당시에 가족이라는 테마, 특정 지역에 대한 고집(나카가미는 기슈, 마이조는 후쿠이), 폭력성이라는 특징에서 자주 나카가미 겐지에 견주어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카가미에서 마이조로 근대 문학의 종언이 반복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후쿠시마 인간의 의식은 쉽게 공중 납치hijacking되기 때문에 제멋대로 과거로 날아가거나 미래로 도약하거나 합니다. 문학의 모더니즘은 그런 의식의 속성을 엄청나게 확대해서 시간이나 공간을 근본적으로 재프로그래밍하는 기술을 축적해 왔습니다. 나카가미 겐지도 무라카미 류도 그것을 계승했고,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문맥도 빌려서 더욱 셔플하면 마이조 오타로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죠.
다만 뭐랄까, 문학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의 귀퉁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장르거든요. 그러나 쇼와의 성공 체험을 잊지 못한 탓에 귀퉁이에서 살아가기 위한 퇴각전의 짜임새가 부족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완전히 포퓰리즘으로 흘러 정치적 올바름 아니면 아쿠타가와상과 무라카미 하루키 정도밖에 화제가 없어요. 그래서 다른 퇴각전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결국 끝났다고 제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재가 되었어도 잿더미에서 되살아나는 것이 당연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조직할 책무가 비평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엔도 쇼와에서 헤이세이로의 변화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이 있나요?
후쿠시마 역시 쇼와 천황의 사거와 루마니아의 챠우셰스쿠 총살, 그리고 오구리 캡이 아리마 기념 경마 경주에서 갑자기 부활한 일이죠(웃음). 그런 쇼와 끄트머리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그 정도입니다. 정말 쇼와의 황혼만 본 것 같네요.
엔도 쇼와의 끝에서 헤이세이의 시작에 걸쳐 미야자키 쓰토무의 유아 연속 살해 사건이 있었고, 그와 함께 ‘오타쿠’라는 호칭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이후 그 호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희미해지고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선형 상상력»은 오타쿠 문화적인 것과 거리를 둔 인상입니다. 의도적인 것인가요?
후쿠시마 2000년대 초반에 이 책을 쓰는 것과 2020년에 와서 이 책을 쓰는 것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어요. 2000년대 전반에 오타쿠나 인터넷에 관한 논의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열기를 띠었던 것은, 그것이 미규정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넷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상태였고, 그것이 마음대로 이것저것을 말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이 어떤 것인지 모두가 무겁도록 알고 있어요. 2020년대에는 미규정성이 상실된 상태에서 뭔가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역시 비평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비평을 페티시화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고바야시 히데오 이래 비평이 지켜 온 본연의 자세는 나름대로 존중합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고바야시는 서양 근대라는 게임이 허망하고 사이비지만, 이 허망 이외에는 플레이할 것이 없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서 활동했습니다.
고바야시와 같은 세대에 미키 기요시라는 우수한 철학자가 있는데, 그는 말하자면 근대의 룰에 따라 100점 만점을 받으려고 한 사람이에요. ‘근대의 초극’에 전념했지만 그것도 완전히 서양의 컨텍스트 속에서였습니다. 한편 고바야시는 미키에 비하면 교양이 없었지만 근대 게임의 허구성을 강하게 의식하고서 글을 썼습니다. 주어진 게임에서 100점을 받아도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거죠. 즉 자신들이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 보드 자체에 대한 의심이 없으면 비평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고바야시 히데오 이후의 일본 비평은 허구인 줄 알면서도 이 근대라는 게임을 플레이할 수밖에 없다는 곤경 속에서 생겨난 장르입니다. 반대로 미키는 우수할지언정 비평가는 아니었던 것이죠.
달리 말해 비평이란 착시 그림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양상aspect을 설명하면서 예로 든 오리로도 토끼로도 보이는 이상한 그림이 있잖아요. 그런 착시 그림을 그려 보이는 것이 일본 비평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책도, 헤이세이의 작가들이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을 해 왔다고도,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이며, 그 양면성이 없으면 평론이 아닙니다.
레이와 문학은 정치의 보결에 지나지 않는다
엔도 «나선형 상상력»의 종장에는 ‘감염과 경색’이라는 절이 있고, “헤이세이라는 시대를 상징하는 것도 감염성 역병보다는 마음의 경색(폐색)에 관련된 병이고, 이는 헤이세이 후기 문학에도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부분은 연호가 레이와로 바뀐 후인 작년 초에 쓰인 것이군요. 동시대 코로나를 의식한 문장이라고 느꼈는데요.
후쿠시마 맞아요. 쇼와 시대에는 결핵이 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큰 문제였습니다. 이 결핵이라는 문제가 퇴조하고 나서, 헤이세이는 마음의 문제에 경사되었고 90년대 후반에는 다중 인격물이 출현합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아동 발달 장애, 성인 우울증, 노인 인지 저하층이 일종의 국민병이 됩니다. 그런 한편, 바이러스의 모델은 컴퓨터 바이러스나 인터넷 바이럴 마케팅에 흡수되어 갑니다. 그러다가 레이와가 되어 오랜만에 진짜 바이러스가 찾아온 느낌입니다.
다만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는 표상적으로 빈곤합니다. 흑사병은 몸이 거무스름해져 죽는다며 극적인 상상력과 결부되었습니다. 앙토냉 아르토나 푸시킨이 있죠. 결핵도 호리 다쓰오를 필두로 로맨틱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에 얽힌 이미지나 표상은 평범의 극치예요. 코로나를 표현하는 것은 일일 감염자 수 그래프나 현미경으로 찍힌 공 모양 사진이지 극적이거나 로맨틱한 것과는 무관합니다.
얼마 전 «종합 진료»라는 잡지에 코로나는 거울 같은 것, 혹은 스타니스와프 렘이 그린 ‘행성 솔라리스’ 같은 것이라고 썼습니다. 즉 이 바이러스는 각자 지금까지의 욕망이나 사상을 투영하는 거울이라는 거죠.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자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한층 강하게 비판하게 되었고 생태주의자는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되었으며, IT 예찬자는 이제 ZOOM을 사용한 텔레워크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누구 하나 코로나에 걸렸다고 사상 전향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상이 데포르메되어 말해지게 된 것이 이 전염병의 효과입니다.
엔도 «나선형 상상력»에서 다루어지는 작가 중에서는 무라카미 류의 «휴가 바이러스»가 감염증을 다루며 바이러스가 인간의 각성을 재촉한다는 듯이 그려집니다만, 그런 느낌…
후쿠시마 전혀 아니죠. 무라카미 류가 그린 것은 에이즈와 에볼라의 합성 같은 바이러스로서 무척 요란한 것인데요, 요란하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이라는 의미에서는 불리하고 바보 같은 거라서 이 점에서 보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극히 현명한 바이러스입니다.
엔도 헤이세이 문학론을 상재한 지도 얼마간 지난 지금, 레이와 문학을 어떻게 보시나요?
후쿠시마 책의 3장에서 자세히 썼지만 ‘정치와 문학’이라는 문제 설정이 오랜만에 부활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옛날의 정치는 마르크스주의였지만 지금은 정치적 올바름이죠. 정치와 문학인데 지금은 정치가 압도적 우위에 있고 문학은 거기 기생하는 형태입니다. 옛날 프롤레타리아 문학 같은 것에 가깝습니다. 이 상황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렇게 되면 일관된 문학사를 쓸 수 있는 것은 헤이세이에서 실질적으로 끝이 아닐까 싶습니다. 레이와 문학은 정치의 보결에 불과하고 더 이상 문학으로서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다만 저 자신은 이러한 환경과는 다른 세계를 보고 싶기 때문에, 지금 «군상»에서 하고 있는 연재[«헬로, 유라시아», 2021년 단행본으로 출간됨]에서는 홍콩과 중국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언설을 파악하는 방향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의 일본은 관민 모두 상당히 이상하다고 봐서요.
엔도 문학이 PC를 많이 의식하고 있죠.
후쿠시마 결국 PC의 언어가 너무 강합니다. 힘을 가진 언어를 충분한 성찰 없이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일반론이죠. 지금까지는 강한 국가 권력이 맞은편에 있고 문학은 약한 언어의 대표, 혹은 약하기 때문에 강한 언어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민 사회의 강한 언어로 문학이 무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저는 생리적으로 권력에 접근하고 싶지 않아요.
엔도 오늘날 PC가 권력화했다는 말씀이신가요?
후쿠시마 물론 상황 파악은 다면적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불이익을 받던 사람들이 반기를 드는 것은 당연하니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학생들에게도 자주 말하는 것이, 좀 더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젝도 말했지만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일로 바쁘기 때문에 남을 시기하거나 해를 끼칠 틈이 없습니다(웃음). 게다가 그런 자기 중심적인 이해로 움직이는 사람이 공공적인 문제로 넘어가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의 관심이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이 PC가 가져온 변화입니다. 표면적인 인상과는 반대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줄어들고 있지 않습니까.
엔도 지금까지의 후쿠시마 씨 저작을 보면 «부흥 문화론: 일본적 창조의 계보», «성가신 유산: 일본 근대 문학과 연극적 상상력», «백 년의 비평: 근대를 어떻게 상속할 것인가» 등 역사나 시대를 다룬 것이 많습니다. 키워드가 되는 것이 유산, 상속입니다. 어떻게 계승할지가 문제의식의 중심인 걸까요?
후쿠시마 유산이라고 해도 좋은 유산과 나쁜 유산이 있고 물려받기 싫은 부채도 당연히 있죠. 저는 부채 문제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언어화하고 검증하는 것이 사상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채로 인한 문제를 많이 품고 있는 작가 쪽이 좋은 작가일 때가 있거든요.
엔도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계승된 것 가운데 단 하나를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후쿠시마 쇼와라면 주옥같은 명작이 많습니다만, 헤이세이는 그런 의미에서의 아름다운 작품이 별로 없어요. 문학사적으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작품이 남을지 불투명한 부분이 꽤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절판된 것도 많아요.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 헤이세이의 문학은 굉장히 읽기 어렵고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워진 것이 분명하며, 바로 그 자체가 부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입구를 좁히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에서 문학을 구출하는 방법입니다. 결국에는 토끼와 오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