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SNS에 올린 «나선형 상상력» 관련 글 가운데 본문 내용을 소개한 것들을 모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헤이세이 30년 일본 문학의 지형도를 그리는 너른 시야의 책인 만큼, 전체상을 또렷하게 인지할수록 책의 유용성도 따라 향상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본문과 같은 ‘이야기, 내향, 정치, 사소설, 범죄, 역사’ 여섯 개 테마의 순서대로 정리해 보았어요. 이 책이 궁금한 분들만이 아니라 이미 읽은 분들이 감상을 정리해 보시는 데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내러티브
1장은 불과 몇 년 전의 사건도 간단히 잊히고 문학이라는 장르의 연속성 자체가 희미해지는 현실을 짚은 후, 헤이세이 동안 ‘내러티브의 위기’라는 문제에 천착한 작가들을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전개할 ‘헤이세이 문학론’의 포석을 놓으려 합니다.
헤이세이 초에 이 위기를 예민하게 의식한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였습니다. 세계를 굽어보며 주인공의 성장을 그리는 안정적 내러티브가 불가능해졌다는 인식에서, 오에는 매 작품마다 임시적 내러티브를 설계해 복잡하고 불투명한 현실의 단면을 잘라낼 필요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헤이세이적 허무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꼽히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이야기할 내용이 없다 해도 이야기의 자세를 설계할 수는 있다’는 아이러니의 내러티브를 실천했고, 이후 출현하는 작가들도 내러티브의 위기에 대한 선배 작가들의 전략을 일정하게 공유하게 됩니다.
성장을 그리기 어려워진 시대를 날카롭게 반영한 작가군으로 90년대부터 왕성히 활동한 오가와 요코, 가와카미 히로미, 다와다 요코 3인방이 꼽힙니다. 이들은 비인간 존재들을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 맞아들여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여 주는 ‘이종 내러티브’의 전략을 주로 활용했습니다. 자서전 쓰는 북극곰(다와다, «눈 속의 에튀드»)이나 신화에서 단절되어 현대 세계에 던져진 신(가와카미, «신») 같은 ‘난민적 이종’을 경유해 인간 사회를 우화적으로 관찰하거나 인간 신체와 감정조차 ‘표본’으로 만드는(오가와, <약지의 표본> 등) 반휴머니즘을 그들 작품은 공유했습니다.
신자유주의화가 심화된 2000년대,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은 하루키와 같은 ‘이야기하기 위한 자세’조차 무너진 채 ‘뒹굴기의 내러티브’를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무기력한 자세로 사회적 현실의 편린을 말로 훔쳐 내는” 서술자를 내세워 헤이세이의 상징적 빈곤을 그려 냈습니다. 불황의 만성화 속에서 성장을 잊고 휴대전화와 인터넷으로 소일하는 사회상을 문학 언어를 부러 저속하게 만들어 포착하려는 발상이었고, 이후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의 활동은 정체되었지만 2016년 화제가 된 «편의점 인간»(무라타 사야카) 같은 작품의 토양이 이렇게 마련된 셈입니다.
한편 앞서 소개했듯 후쿠시마는 2000년대 중반부터 비평가 활동을 시작했고, 특히 마이조 오타로를 필두로 한 이종 교배적 작가들(사토 유야, 니시오 이신 등)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순문학을 포함하는 기성 문화 시스템을 타격하면서도 내러티브의 위기에 적극적으로 응답했다는 것인데요. 이들은 잡지 «파우스트»를 근거지 삼고 컬트 작가 세이료인 류스이를 뒤따라 본래 논리를 중시하는 신본격 미스터리 장르에 폭력과 망상, 부조리와 음울함을 불러들인 범죄 소설을 써 나갔습니다. 이들에게 폭력이라는 주제는 의미의 사막인 헤이세이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주술과도 같았습니다.
특히 마이조는 “그 이야기로 이야기할 수 있는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소설의 원동력이라며 자신이 ‘내러티브의 문제’를 첨예하게 의식하는 작가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장르를 거침없이 분해하고 또 봉합하면서 헤이세이의 이야기를 “재기동”하려 한 작가로서 평가됩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쓰쿠모주쿠»는 자기 동일성의 보존도 어려운 모조품이자 모독으로 오히려 신성을 얻는 신적 존재라는 양면성을 가진 서술자를 내세워, 망상과 중독을 가져오면서 위태롭게 성립하는 내러티브를 구현한 희유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비록 2010년대 들어 내러티브 실험을 둘러싼 에너지는 소실되었지만(그 경위를 인용된 알티에서 간단히 정리했어요), 문학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문학과 언어를 모독하고 탈성역화할 필요가 있었다는 이 작가들의 인식이 ‘이야기’의 문제군이 남긴 하나의 유산으로서 제시됩니다.
내향
‘내향’은 일본 현대 순문학에 대한 대외적 인상과도 맞닿는 키워드입니다. 한국에 소개되어 인기를 얻은 많은 헤이세이 소설가들이 내향적인 서술자를 내세우거나 고요한 서정성의 세계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2장은 그 계보를 검증합니다.
오가와 요코, 가와카미 히로미, 다와다 요코 3인방이 다시 논의의 중심에 놓입니다. 그리고 그 전사로서 후루이 요시키치(그는 오에 겐자부로와 동세대로, 두 사람의 대담집이 번역되어 있기도 합니다)의 작품 세계가 조명돼요. 후루이는 자아를 벗어나는 엑스터시의 문학을 추구한 작가로 설명됩니다. 신체의 오관을 거쳐 얻어지는 현실 감각이 아니라, 그것을 붕괴로 몰아붙여 ‘현실 못지않은 가상’을 감각하는 ‘가능성 감각’의 기관을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 그의 방법론이었습니다.
가능성 감각 개념은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에게서 유래해요. 세계대전의 불온한 공기가 유럽을 지배하던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무질은 방사능부터 무의식에 이르는 초감각적 현실의 등장에 자극받아 가능성 감각 개념을 창안했고, 독문학을 공부한 후루이는 이 개념에 매료되었던 듯해요. 근대 리얼리즘에 대한 의심을 반내러티브적 형식으로 반영했던 무질은 이런 경로를 통해 헤이세이 일본이라는 포스트 역사적 세계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후루이에서 오가와, 가와카미, 다와다로 이어지는 계보 중간에는 ‘무심함’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포함되어야 하겠고요.
다와다 요코는 «여행하는 말들»처럼 외부를 환기하는 제목을 종종 활용했지만 실제로는 정적인 이야기 속에서 내부 감각을 수필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특기로 했습니다. 특히 “모어와 현실 감각의 안정적인 연결을 끊어 가능성 감각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번역 기술은 다와다의 대표적 무기였습니다. 문학은 활자를 통해 “감각한 적이 없는 것을 감각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늘 잠재적으로 가능성 감각의 매체이기도 합니다. 다와다 등 내향 작가들은 여러 층위의 번역을 구사해 인간 너머로까지 가능성 감각을 확장하는 능력이 현시대에도 유효한 문학의 기능일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다만 이들의 ‘바깥’과 성장에 대한 거부는 헤이세이에 진행된 신자유주의화를 고려했을 때 의문을 자아내는 면이 있습니다. 동세대인 미야베 미유키가 «화차»에서 “철벽과 같은 존재 의지”를 가진 범죄자 여성을 그려 여성의 주체화 (실패) 문제를 짚은 것은 이에 비추어 시사적입니다. 나아가 이토야마 아키코와 가쿠타 미쓰요의 2000년대 작품들이 ‘일하는 여성’ 서술자를 통해 여성의 대안적 주체화 경로에 대한 사고를 자극한 것을 돌아보며, 현실을 차단한 내향 소설가들은 마땅히 문학의 몫이어야 했을 역할 하나를 너무 쉽게 방기한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집니다.
내향 작가들의 서술자는 종종 페티시즘에 추동되고 유혹에 취약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것이 ‘나’의 자명성을 의문에 부치는 문학적 탐구의 성격을 가지더라도, 약탈적 외부에 대한 방어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위험성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으로 읽힙니다. 다만 예컨대 동조 압력이 심한 사회에서 내부 감각에 대한 침잠은 외부에 쉽게 휩쓸리지 않을 거리를 확보하는 의미도 가집니다. 또 내향 작가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분신적 존재와의 관계 묘사는 인터넷 공간의 “실재한다고도 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타자성의 위협을 선취한 면이 있습니다. 내향 문학이 달성한 의의는 신중히 계승하되 그것이 초래하는 취약함도 함께 평가할 것, 그리고 ‘내향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는 주문이 2장을 관통한다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정치
3장은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1993년에 나눈 대화로 시작해 다이쇼에서 레이와에 이르는 약 한 세기 동안 정치와 문학이 맺은 관계를 돌아보고, 양자의 결합 방식에 대해 다카하시의 작업이 던져 주는 시사점을 검토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일본 연호의 교체와 함께하듯 정치와 문학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해 왔고, 헤이세이는 분명 탈정치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헤이세이 후기(2010년대)부터 이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 “1993년 시점에 문학자의 상식이었던” 것이 단숨에 뒤바뀌어 문학에 정치의 계절이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다만 그 양상은 지난 시대와 사뭇 달랐습니다. 후쿠시마는 대표적으로 문학의 평가 기준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급부상을 들고, 이 변화가 얼마나 급격한 것이었는지 그 배경에 놓인 사회 변화는 무엇이었는지를 비평적 수준에서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에 따르면 다이쇼에서 쇼와에 걸친 시기인 1920년대 중반에 모더니즘(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신감각파)과 마르크스주의(프롤레타리아파)가 도래해 새로운 문예 사조를 일으킨 것이 일본에서 ‘정치와 문학’ 관계의 기본적인 틀을 설정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쇼와 문학에 예술 지상주의자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치통’을 심었고, 비평이라는 장르는 고바야시 히데오나 에토 준 같은 비평가들이 보여 주었듯 그 치통에 대한 부단한 인식과 긴장 속에서 자기 위치를 끊임없이 조정하며 자리 잡은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 현재 일본 문학에 등장한 정치(다문화주의적 자유주의)는 이 긴장을 잃고서 문학에 직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반대로 말해 문학이 정치에 직접 기대지 않고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는 가치 상대화의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이 새로운 소통의 토대가 되어 준 것, 둘째는 SNS의 정착이 끝없는 자기 표현 게임으로 모두를 빨아들인 것. 그리고 좀 더 일본의 맥락에 닿은 배경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진재를 듭니다. 대진재 직후 재난을 소재로 한 문학이 많이 창작되었지만 조급함이 앞설 뿐 성과는 드물었고, 짧은 비등 후 찾아온 공백을 인터넷과 결합한 새로운 정치가 메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의는 정치와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는 문학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다카하시 겐이치로에게로 돌아갑니다.
다카하시는 해외 포스트모던 문학과 일본 시 문학, 비판적 정치 의식을 혼융한 «사요나라, 갱들이여» 등 작품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우화적 세계 안에서 역설적으로 소비 사회의 악을 그려 내는 뛰어난 솜씨로 평판을 얻었고, 이후로도 곡예를 부리는 듯이 정치성을 구현하는 창작을 이어나갔습니다. 후쿠시마는 다카하시가 대진재 직후 발표한 «사랑하는 원자력 발전»(2011)을 관통하는 ‘정치의 외설성에 조응한 문학의 외설성’이라는 전략에 의문 부호를 달면서도, 정치와 문학이 공유하는 외설적 비밀을 통해 둘을 접속시킨다는 다카하시적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재확인하며 논의를 마무리합니다.
사소설
작가의 실제 삶을 일인칭 ‘나’의 고백으로 그려 내는 사소설은 일본 특유의 문학 장르로 꼽히곤 합니다. 4장은 이 ‘나’가 서양 근대의 모방 과정에서 형성된 불안정한 기호라는 관점에서 출발해 실험적인 사소설 작품을 독해하고 헤이세이의 주체가 봉착한 곤경을 검토합니다. “민족주의와 근대 소설이라는 특허 없는 발명품”을 절도하듯 모방해 ‘해적판’ 근대 문학을 형성했으나, 원본과 달리 시민 사회라는 기반이 확립되지 않았던 일본 문학의 ‘나’들은 민낯=솔직함을 무기 삼아 가족적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를 안정화하는 사소설로 향하기 쉬웠다는 것입니다.
다만 쇼와와 헤이세이의 끊임없는 사회 변동은 그렇게 정착시킨 사소설적 ‘나’를 늘 위협했고, 그 불안과 동요 속에서 문학가들은 새로운 문학 표현을 발견하기 위한 실험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헤이세이 작가 가운데 무라카미 류와 하루키, 야마다 에이미, 다카하시 겐이치로, 다와다 요코 등이 서양이라는 교사(초자아)를 두면서도 그에 대한 패러디나 패티시를 거쳐 독특하게 변조된 ‘나’를 구성함으로써 자율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취한 것이 평가됩니다.
일찍이 고바야시 히데오가 “사회화되지 않은 나”를 비판했듯, 정치와 문학의 사이에서 존재 근거를 찾는 비평에 있어 ‘세계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자기로 가득 채우는’ 사소설은 늘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소설의 끈질김은 사실 그 반사회성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선 장들에서도 헤이세이 사회의 리얼리티 해체와 성장을 거부하는 문학이 갖는 상관성을 살펴보았는데요. 원래도 탈사회적 허구의 성격을 가졌던 사소설은 사회 시스템의 액체화라는 현실에 대해 상대적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후쿠시마는 헤이세이 사소설의 시공간 묘사에 주목할 것을 주문합니다. 무뢰파적인 니시무라 긴타의 사소설에서 ‘나’의 인간관계는 붕괴를 거듭하지만 정교하게 묘사된 생활 공간은 항상 그를 안락하게 감싸 줍니다. 반면 미국과 일본을 오가는 작가 미즈무라 미나에는 “역사의 각인을 짊어진 시공간”을 가진 유사 사소설 «어머니의 유산»(2012)을 창작했습니다. 그 시공간은 안정성의 원천이기는커녕, 문화적 교양의 습득이 끔찍한 저주로 돌아오는 “근대 일본 여성 주체화의 실패”를 응축한 곳으로서 재현됩니다.
주체화의 실패가 황량하고 혼돈에 찬 시공간을 통해 그려지는 또 하나의 작품은 비평가로 잘 알려진 아즈마 히로키의 «퀀텀 패밀리즈»(2009)입니다. SF이지만 자기 삶의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고민을 평행 세계의 습격이라는 소재로 풀어 나가는 작품이에요. “무수한 가능성이 망령처럼 중첩되는 세계” 속에서 불안정해진 ‘나’는 글로벌 자본주의와 과잉 동일화하며 테러리즘으로 내몰리듯 접근하지만, 아즈마는 자신의 아바타를 테러로 폭발시키기보다는 “일본 사소설 특유의 왜소한 아버지”상으로 착지시키며 이 실험적 사소설을 마무리합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일본 근현대 문학이 갖는 ‘나’의 탐구이자 주관성(혹은 주체화)의 역사로서 성격이, 현대 사회에서 주체가 봉착한 위기와 함께 선명해진 것 같습니다. 작가의 ‘나’가 실추된 과정을 말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죽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소셜 미디어 시대가 가속한 기호 자본주의적 시공간의 확장은 ‘나’에게 새로운 운명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그 ‘나’의 가치는 결코 과거와 같지 않을 테지만요. 후쿠시마는 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주체를 옹호한 과거 어슐러 르 귄의 논변을 참조하며 이 장의 논의를 마무리합니다.
범죄
범죄를 어떻게 그릴지는 문학에서 고전적인 물음입니다. 5장은 루소 이래 문학이 가져다준 ‘가장 근대인다운 근대인은 잠재적 범죄자의 일면을 가진다’는 앎을 바탕으로, 헤이세이에 ‘범죄와 문학’이라는 패러다임이 거친 변형을 추적하고 그 현주소까지를 짚습니다.
헤이세이 동안 장르나 작풍을 공유하지 않는 많은 작가가 과격한 범죄와 폭력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옴 진리교 사건(1995), 고베 아동 연쇄 살인 사건(1997) 등은 상식을 무너뜨리는 충격이었고, 이에 과거라면 황당무계했을 표현이 오히려 ‘리얼한 것’으로서 시의성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2002)는 꿈속 범죄의 충격으로 가출한 소년이 사려 깊게 배치된 성장담의 수행을 거쳐 자기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그려, ‘탈법적 입법자’를 축으로 하는 근대 교양주의를 그야말로 교과서적으로 재연했습니다. «희망의 나라로 엑소더스»(2000) 등의 무라카미 류도 ‘탈법적 입법자’이자 ‘빈 서판’ 같은 소년들을 주인공 삼아, 해체되고 있는 헤이세이 사회에서 범죄적 일탈을 매개로 근대성을 재발명할 방법을 작품화하고자 했습니다.
다만 후쿠시마는 이들의 전략이 상징적 수준을 넘어 “정신 의료적인 교양 소설”로서 효과를 발휘하기에는 힘에 부쳤다고 보는 듯해요. 무라카미 류의 경우 소비 사회적 활기조차 사라진 세계에서 주체를 각성시키기 위해 사디스틱한 타자까지 동원한 끝에 결국 소박한 향수로 회귀한 점도 짚고요.
헤이세이의 젊은 작가들은 소년의 건강함으로 문학에 힘을 불어넣는다는 선배 작가들의 발상을 비평하는 듯한 작품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사토 유야의 «수몰 피아노»(2002)는 헤이세이란 바로 그런 건강함이 성립하기 어려워진 시대임을 스스로 기억을 지운 소년을 서술자 삼아 보여 주었습니다. 아베 가즈시게의 «신세미아»(2003)나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괴»(2008)는 테러의 시대로 개막한 2000년대의 세계를 반영해 탈법적 입법자의 모델조차 해체된 포스트모던 범죄 소설을 그렸습니다. 이로부터 익명적이고 비대칭적인 악을 문학이 어떻게 다룰 것인지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5장은 끝으로 헤이세이 범죄자들의 ‘자기 이야기’를 살펴보고, 분기점으로서 2008년 아키하바라 살상 사건이 갖는 의미를 읽어 내며, 그 흐름이 레이와의 개막을 덮친 2019년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과 갖는 연결점을 조명하고, 범죄를 이해하는 언어적 회로를 구축하는 문학의 역할을 촉구합니다.
역사
6장은 역사를 다룹니다. 헤이세이에는 냉전으로 봉인되어 있던 일본의 전쟁 책임이 회귀해 일본 집단 심리에 가시 같은 당혹감을 심었고, 역사 수정주의의 대두부터 가토 노리히로의 «패전후론»을 둘러싼 논쟁에 이르는 여러 방향의 반응이 전 사회적으로 분출했습니다. 문학에서는 ‘허구로 역사에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의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역사는 흔히 이야기의 힘을 빌려 전파되지만, 그렇기에 이야기를 만드는 쪽에 역사가 사유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역사라는 각축장은 그렇게 창작자의 참여(재역사화)를 유도하고 탈역사화의 충동을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일본적 미니멀리즘의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탈역사화에 이끌리며 주인공이 정적으로 감싸인 사이판에서 고독에 잠기는 «암리타»(1994)를 창작했지만, 후쿠시마는 이 작품에서 그럼에도 놓여날 수 없는 역사의 인력에 대한 초조함이 배어 나오는 것을 읽어 냅니다. 같은 탈역사화의 맥락에서 후쿠시마는 90년대 오타쿠계에서 등장한 노블 게임들을 ‘게임적 소설’로 다루며 “감각도 기억도 그저 유희이고 언제라도 리셋될 수 있다는 명쾌한 체념”을 가진 이 게임 속 ‘나’들의 상징적 빈곤을 (그 낭만주의와 함께) 조명하기도 합니다.
후쿠시마는 이어서 재역사화의 기저에 있는 욕망을 살피고자 합니다. 들뢰즈·가타리의 ‘탈영토화/재영토화’ 논의,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의 오에 겐자부로 논평 등을 참조하며 헤이세이 문학의 재역사화에는 비대한 서술자의 자아로 역사를 덮어쓰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짚습니다. 이로부터 쇼노 요리코, 오쿠이즈미 히카루의 소설들이 재역사화=재영토화의 편집증적 성격을 간파하고 전후 일본의 정신적 황폐함을 직면하게 만든 작품으로서 조명되고, 나아가 이들을 종합하는 의의를 갖는 작품으로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가 호명됩니다.
본래 역사를 게임화하는 포스트모던한 작가로 등장한 무라카미는 이 작품에서 2차 대전이 남긴 폭력의 기억을 전면화하며 ‘허구로 역사에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의 문제를 받아안습니다. 다만 «오디세이아»를 반전시킨 이 소설의 주인공은 원본과 달리 실패와 헛수고를 반복합니다. 후쿠시마는 언뜻 혼미로 빠져들 뿐인 이 공회전이 섣부른 재역사화를 피하기 위해 설계된 복잡한 우회로일 수 있음을 세심한 독해로 드러냅니다. 나아가 많은 헤이세이 작가가 때로 과격한 방법론을 동원해 세계를 ‘나’의 주관으로 포섭하려 했던 것과 대조되는 수동적인 ‘나’의 가능성을 시사해요.
헤이세이 문학 전반에는 어떤 요령부득한 인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문학의 전반적인 쇠약(독자와의 거리를 포함해)을 가져왔을지도 모르지만, 후쿠시마에 따르면 그 방황에는 나름의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본 여섯 개의 장은 그 필연성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