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우리: 미국의 대화»
클로디아 랭킨 지음 | 양미래 옮김 | 436쪽 | 26,000원
흑인을 상대로 한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며 분출한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번져 나가고 18세 청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경찰관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해 인종 차별과 그에 대한 저항이 절정에 이르렀던 2014년 10월 시인 클로디아 랭킨은 «시민: 미국의 서정시»를 출간했다. 운문과 산문, 시각 자료를 아우르는 혼종적인 형식을 취한 이 책은 그와 친구들이 겪은 인종 차별, 흑인을 상대로 한 과잉 진압과 증오 범죄를 매개로 인종 차별적 언어의 작동 방식과 언어 자체의 한계를 파헤쳤다. «시민»은 당시의 분위기와 맞물려 출간 직후부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랭킨은 여전한 미국의 인종 차별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가장 선명한 목소리 중 하나가 되었다.
허망하게도 이 모든 노력의 정치적 귀착점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많은 백인이 버락 오바마 이후 인종 분리가 종식되었다고 믿는 동시에 백악관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 대통령이 민족주의적 언사로 대중을 선동하고, 그에 자극된 폭력이 공간을 가리지 않고 난무하는 상황에서 랭킨은 더욱더 달랠 길 없는 절망과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그는 ‘백인 특권’을 주제로 백인들과 대화해 보기로 결심한다. 2020년에 발표한 «그냥 우리: 미국의 대화»는 그러한 대화 시도를, 이 시도들이 난파하는 과정을, 랭킨의 내면에서 들끓는 갖가지 질문과 감정을 기록한 책이다.
랭킨은 각종 (무)경계 공간과 사적 공간―공항, 비행기, 극장, 디너 파티, 딸이 다니는 고등학교, 전화 통화―에서 낯설거나 가까운 백인(그리고 비백인)에게 말을 건다. 백인 특권을 부인하는 비행기 옆자리 백인 남성, 인종 차별이 화두에 오를 기미가 보이면 잽싸게 화제를 돌리는 파티 참석자, 금발로 염색하는 여성들, 가족의 안위를 우선시하며 일상의 차별에 도전하지 않는 친구, 몇십 년간 함께 활동하며 웃음과 눈물을 나눈 백인 남편과의 (상상 속) 대화를 통해 그는 인종적 편견이 여전히 빈틈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그리고 백인이 변화를 거부하고 있음을 거듭 확인한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관계를 뒤흔드는 변화를 기대하며 시작한 대화들은 이렇듯 번번이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는 흑인으로서 자신이 버림받은 처지라는 기분을 떨쳐 내는 데 끝내 실패하고 이 실패 탓에 곧잘 비관적인 기분에 빠지지만, 인쇄된 글의 형태로 그의 심정을 듣는 우리는 이상한 위안과 약간의 희망을 얻게 된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잠식한 망설임, 울분, 원망, 자기 의심과도 대면해야 하는 그가 자신의 ‘비백인 취약성’을 숨김없이 펼쳐 보이며, 이 정직함이 우리를 또 하나의 대화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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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만약에
(무)경계 공간 i
진화
레모네이드
양팔을 벌린
딸
백인주에 관한 비망록
티키 횃불
백인 남성 특권에 관한 연구
키가 큰
사회 계약
폭력적인
소리와 분노
빅 리틀 라이즈
윤리적 외로움
(무)경계 공간 ii
호세 마르티
남자들이 원래 다 그렇잖아요
공모하는 자유들
미백
(무)경계 공간 iii
감사의 말
옮긴이 후기
이미지와 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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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클로디아 랭킨Claudia Rankine
1963년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태어나 1970년 부모와 함께 뉴욕의 브롱크스로 이주했고 이후 귀화한 미국 시민이 되었다. 윌리엄스 칼리지에 입학해 시인 루이즈 글릭에게 배운 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2015년까지 포모나 칼리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예일 대학교를 거쳐 2021년부터 뉴욕 대학교의 창의적 글쓰기 프로그램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종 차별을 중심으로 공적 현실과 사적 서사를 결합하고 운문과 산문, 텍스트와 시각 자료를 혼합한 작품을 발표해 왔다. 시집 다섯 권을 출간한 바 있으며, 그중 2004년의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 미국의 서정시»(2004), «시민: 미국의 서정시»(2014), «그냥 우리: 미국의 대화»(2020)는 일종의 미국 삼부작을 이루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또한 «화이트 카드»(2018)와 «도와주세요»(2020) 등의 희곡을 집필했으며, 남편이자 사진 작가인 존 루커스와 함께 비디오 에세이 연작인 «상황들»을 만들고 금발을 주제로 한 사진 전시 «낙인찍힌»을 기획했다. 그 외에 여러 작가의 인종 관련 글을 묶은 «인종 상상계: 작가들, 정신의 삶에 자리한 인종을 말하다»(2015)를 공동 편집했다.
2014년 작 «시민»으로 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상 시 부문, 잭슨상, 펜 오픈 북 어워드 등을 수상했으며, 구겐하임 재단과 맥아더 재단 등의 펠로십에 선정되었다. 맥아더 재단 펠로십 상금으로 2016년 ‘인종 상상계 연구소’를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옮긴이 / 양미래
카밀라 샴지의 «홈 파이어», 파리누쉬 사니이의 «목소리를 삼킨 아이», 존 M. 렉터의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나는 왜 SF를 쓰는가»와 «스톤 매트리스», 앤 보이어의 «언다잉», 링 마의 «단절», 리베카 솔닛의 «야만의 꿈들», 세라 망구소의 «망각 일기», 마욜린 판 헤임스트라의 «우주에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 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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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그냥 우리»는 클로디아 랭킨이 인종, 차이, 정치, 미국에 관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한 명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저작이다. 겸손과 유머, 비평과 공감을 겸비한 이 책에서 랭킨은 긴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대화를 개시한다. _ 비엣 타인 응우옌
클로디아 랭킨의 눈부시고 다층적인 이 책은 백인성을 주제로 공개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하나의 요청, 촉구, 집요하고 마땅히 갈급할 수밖에 없는 요구다. 수치를 모르고 횡행하는 인종 차별이 국가의 기조로 활개 치는 이 순간, «그냥 우리»는 평범한 삶이 인종의 역사에 침윤된 상황에서 우리가 사고하고 느껴야 하는 방식을 제시하며, 집념, 비판적 끈기, 잠재적인 긍정을 향한 보기 드문 정직함으로 대화들 사이를 오간다. _ 주디스 버틀러
직업 특성상 나는 선의로 뭉친 백인들로부터 어떻게 해야 인종 차별을 인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끝없이 받는다. 그런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돌려줄 수도 있겠다. “어째서 우리는 그동안 인종 차별을 보지 못했을까요?” 정보는 지천에 널려 있고, 귀를 기울인다면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시적이면서도 추상성에 머물지 않는 계몽적인 증언이 하나 더 있다. 클로디아 랭킨은 명료하고 우아한 글쓰기로 백인이 일삼는 부인에 강펀치를 날린다. «그냥 우리»는 탁월한 책, 대담하고 계시적이며 강력한 책이다. _ 로빈 디앤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