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네이션»에 게재된 «그냥 우리» 서평(일라이어스 로드리케스의 <이 존재 양식>)을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글은 흑인 페미니즘 전통 안에 랭킨을 자리매김한 뒤 «그냥 우리»와 랭킨의 작업 전반에서 유색인의 배제와 고립이 초래하는 ‘외로움’을 발견합니다. 랭킨이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 하나는 자신의 책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부터 «그냥 우리»에 이르는 그의 저작들은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이 서평은 “그의 희망에 동력을 불어넣는 것도 바로 이 비관주의”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이 서평은 랭킨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그냥 우리»를 읽으며 어렴풋하게 다가왔던 느낌들을 구체화해 줍니다. 특히 랭킨의 전작을 읽고 싶었던 분들에게는 궁금증을 얼마간 해소해 줄 글이리라 생각합니다.
원문 링크: https://www.thenation.com/article/culture/claudia-rankine-just-us-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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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존재 양식
클로디아 랭킨이 미국과 나누는 대화
일라이어스 로드리케스
2020년 10월 19일
플레이타임 편집부 옮김
20세기 흑인 페미니즘은 많은 것을 남겼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적 배제에 대한 강력한 분석을 제공했다. 20세기 중반의 걸출한 흑인 페미니스트였던 클로디아 존슨은 가난한 흑인 여성들이 백인 중심의 자유주의 사회뿐 아니라 인종 차별에 맞선 흑인 활동가들의 성과에서도, 자본주의 계급 체계에 맞선 공산주의자들의 성과에서도, 가부장제에 맞선 페미니스트들의 성과에서도 빈번하게 배제되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존스가 강조하길 가난한 흑인 여성들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무시되기 일쑤였다.
존스가 한층 포함적이고 해방적인 정치를 요청한 이래 미국의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사고 노선을 확장해 왔다. 1977년 컴바히강 공동체(Combahee River Collective)는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 차별이 ‘맞물려’ 작용하는 억압들을, 그리고 이런 복수의 억압 중 하나에만 맞서는 투쟁들에서 흑인 여성이 배제되는 경향을 책망했다. 1991년 글 <주변부 지도 그리기>(Mapping the Margins)에서 킴벌리 크렌쇼는 인종 차별 반대 행동주의가 주로 흑인 남성에게 초점을 맞추고 성 차별 반대 행동주의가 주로 백인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는 풍조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교차’ 정치가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요컨대 크렌쇼는 존스가 흑인 여성의 배제를 처음 진단한 이래 몇십 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 셈이었다.
1994년 첫 시집 «자연에 사적인 것은 없다»를 펴낸 클로디아 랭킨은 이런 배제가 초래하는 고립을 가장 뛰어나게 묘사한 작가 중 한 명이다. 시각 예술, 운문, 산문시―일기와 에세이가 혼합된―를 결합한 작품들을 통해 그는 어린 시절에 겪은 소외의 기억뿐 아니라 작가와 교수가 된 이후의 경험도 기록해 왔다. 그의 시는 낯선 사람과의 마주침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들은 길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의 영역을 침범하고, 그를 오해하며, 그가 이름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또한 친구들과 가족은 그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죽어 있고, 그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세세히 묘사하듯 그런 상황은 그를 더더욱 외롭게 만든다.
외로움에 대한 랭킨의 재현은 언제나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이었다. 2014년 경찰 폭력에 맞선 저항이 전국적으로 분출했을 때 그의 작업이 대중의 관심을 얻은 것도 그 덕분이다.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경찰관 대런 윌슨이 마이클 브라운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고 두 달 뒤에 출간된 랭킨의 «시민»은 경찰 폭력에 대한 긴 시를 통해 동시대 미국에서 흑인이 경험하는 인종 차별 폭력을 정확히 담아낸 책이 필요하다는 대중의 요청에 부응한 작품이다. 이 책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어느 지면에나 그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는 맥아더 펠로십에 선정되었고 예일 대학교는 그를 석좌 교수로 임용했다. 평생 이방인이었던 그가 별안간 누구나 아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랭킨이 신작 «그냥 우리»에서 들려주듯 그의 말이 포함되었다고 해서 그라는 개인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명성을 얻은 뒤로도 그는 주변화와 그로 인한 고립을 계속 경험했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흑인 여성인 탓에 여전히 한없는 “윤리적 외로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윤리적 외로움은 질 스토퍼가 동명의 2015년 작에서 고안한 (그리고 랭킨이 인용하는) 용어로 “부당한 침해를 당한 사람이, 혹은 박해받는 집단의 일원이 인류에게 혹은 타인의 삶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느끼는 고립감”(«그냥 우리» 255쪽)을 묘사한다.
«그냥 우리»에서는 랭킨의 내쳐짐이 새로운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그가 포함되는 와중에도 경험하는 인종 차별은 새로운 여러 현장―딸이 다니는 학교, 디너 파티, 예일 대학교에서 자신이 맡은 수업―에서 내쳐져 있다는 기분에 빠져들게 만든다. 부와 명성을 확보했을 순 있지만 그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언제든 외로움을 맞닥뜨리곤 한다.
랭킨이 이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대화였고 지금도 그렇다. 대화는 «그냥 우리» 전체를 채우는 전략이다. 이건 상식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다. 혼자라고 느낀다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그가 아무 얘기나 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우리»에서 그는 주로 백인인 상대방과 인종을 두고, 인종이 사람들―피부색을 막론하고―의 세계 경험을 어떻게 채색하는지를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는 이런 대화를 통해 사람들이 각자의 행동과 삶을 빚는 인종 차별과 대면하는 것을 도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외로움을 누그러뜨릴 뿐 아니라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백인 우월주의를 뿌리 뽑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그는 백인들과 흑인성뿐 아니라 백인성에 관해서도 대화를 나누고자 하고, 백인성으로 인해 백인이 흑인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이해하도록 돕고자 한다.
«백인의 역사»를 쓴 넬 어빈 페인터와 «유대인은 어떻게 백인이 되었고 이 사실은 미국의 인종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를 쓴 캐런 브로드킨을 비롯한 백인성 분야의 연구자들과 비슷하게 랭킨은 (미국의 유색인이 인종을 경험하듯) 백인이 어떤 식으로 인종을 경험하는지, 이 같은 인종 경험 및 그에 수반되는 특권이 어떤 식으로 반흑인성이라는 체계에 의존하는지를 전경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페인터나 브로드킨과 유사하게 랭킨은 백인종이 사회적으로 구축된 것인 한편 일상의 소소한 행동 패턴과 그보다 포괄적인 권력 및 폭력 구조 모두로 고착화되었다고 강조한다.
이 역사학자들의 작업과 «그냥 우리»의 차이는 후자가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미국의 인종 차별을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그는 독자들에게 포괄적인 권력 및 폭력 구조를,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개개인이 인종 차별 사회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지를 숙고해 보자고 요청한다. 사람들과 백인성을 주제로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함으로써 그는 또한 독자들에게도 말을 걸어 어떻게 백인성―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폭력에서 “면제될 수 있다는 생각”―이 “매 순간 살아 있는”(415쪽) 환상이 되는지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 그의 설명에서 백인성이라는 환상은 흑인에게 자행되는 폭력을 허가하는 한편 이런 폭력과 흑인의 인간성을 지운다. 텍스트를 통해 여러 사람과 사적으로 관계 맺고 또한 독자들과도 관계 맺는 랭킨은 이들이 미국의 인종 차별이라는 병폐를 진단하도록 돕고자 하며, 그 결과로 인종 차별이 야기하는 흑인에 대한 폭력과 흑인의 인간성 말살을 폐지하는 작업을 이들이 시작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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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킨은 1963년 자메이카의 킹스턴에서 태어나 1970년 부모와 함께 뉴욕시의 브롱크스로 이주했다. 윌리엄스 칼리지에 입학해 시인 루이즈 글릭과 함께 공부했고 1993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시 전공으로 예술학 석사 학위를 땄다. 이 시기에 그는 에이드리언 리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리치가 매우 개인적인 위치에서 사회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어요. 그걸 보며 나도 뭔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죠.” 이렇듯 그의 초기 시들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융합하고자 했다.
사적이고도 공적인 시를 빚으려 한 랭킨의 노력은 생산적인 결과물들을 산출했다. 마흔한 살 때까지 그는 세 권의 시집을 펴냈고 비평가와 독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가 형식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전면적인 변화를 꾀한 것은 2004년 작인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에 이르러서였다. 산문과 운문뿐 아니라 시각 예술도 혼합한 이 책은 그의 작업을 담당해 온 출판사에서 반려되었다. ‘시’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이 책은 시집이었지만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랭보와 볼드윈을 조합한 것 같은 일기식 산문시로 꾸며진 이 책은 결국 그레이울프 출판사에서 나왔고, 독자들이 «시민»으로 친숙해진 목소리와 형식을 확립한 작품이 되었다.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는 주로 랭킨이 집에 혼자 있는 상황을 묘사한다. 집에서 그는 종일 텔레비전을 틀어 놓는다. 서두부터 소외가 죽음의 발뒤꿈치 가까이서 뒤따른다. 첫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잘 아는 사람 중에 죽은 이는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다음 랭킨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 그는 아버지가 “우리 집 계단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 “아버지는 내가 자신의 홀로됨을 이해하는 사람인 것처럼 나를 바라본다. 외로움을. 할머니가 막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장례식을 치르러 자메이카에 다녀온 참이다. 랭킨은 데려가지 않았고 돌아온 뒤 아버지는 장례식에 관해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죽음은, 나아가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침묵은 아버지와 랭킨도 서로 고립시킨다.
죽음이 고립을 초래하는 한편 고립 또한 랭킨을 죽음 가까이에 데려간다. 몇 쪽 뒤에서 그는 전국 자살 예방 핫라인에 전화해 이렇게 말한다. “이미 죽어 있는 기분이에요.” 십오 분 후에 앰뷸런스가 그의 집에 도착한다. 랭킨은 기분이 나아졌다고 말하지만 구급 대원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구급 대원이]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그는 쓴다. “아니면 선생님을 억지로 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위안을 찾는 동안에도 그는 사람들이 듣기보다는 기꺼이 상처 입히기를 택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국에 만연한 반흑인 폭력은 자신이 취약하며 혼자라는 랭킨의 감각을 더 악화시킨다. 뒷부분에서 그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텔레비전에는 애브너 루이마가 나오는 중이다. 그는 1997년에 뉴욕시 경찰국의 경찰관들에게 얻어맞고 대걸레로 집단 성 폭행을 당했다. 뉴욕시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 승소한 후 한 기자가 루이마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랭킨은 쓴다. “부자가 된 기분이 어떠신가요?” “루이마는 말했다. 부자가 된 게 아니라 운이 좋은 겁니다. 운 좋게 살아남은 거니까요.” 랭킨에게 이 장면은 흑인이 살해당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수많은 흑인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와중에 어떤 폭력을 맞닥뜨리게 되는지가 전면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루이마는 운이 좋았다. 살아남을 확률이 극히 낮았기 때문이다.
랭킨은 뉴욕시 경찰국이 아마두 디알로를 살해한 사건도 떠올린다. “마흔한 발이라는 숫자는 결코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결코 마흔한 번의 총격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총알들은 결코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두 디알로의 죽음이 발표되었을 때 텔레비전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인종 차별 폭력이 흑인의 공통 경험이라는 사실 때문에 디알로를 애도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고 랭킨은 설명한다. 경찰 폭력을 막지 못하는 무능이 그에게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할 수 없는 것”만을 상기시키는 탓이다. 흑인에게 자행되는 살해와 공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의 무력함―디알로를 소생시킬 수도 없고 루이마에 대한 경찰의 공격을 되돌릴 수도 없는 무능 ―은 그를 다른 흑인들에게서도 고립시킨다.
랭킨에게는 이런 고립을 야기하는 반흑인성이야말로 미국 정치의 뚜렷한 특징이다. 조지 W. 부시의 당선으로 시작하는 시에서 그는 부시를 [주지사 임기 기간이던 1998년] 텍사스에서 제임스 버드 주니어를 린치한 혐의로 “두세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지” 여부를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로 칭한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부시를 향해 말한다. 이로부터 그가 느끼는 슬픔은 “사실 조지 W.나 우리 미국의 낙관주의에 대한” 슬픔이 아니다. 이 슬픔은 “어떤 삶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서 비롯하는 슬픔이다. 미국이라는 국가는 자국에서나 해외에서나 특정한 사람들의 삶을 평가 절하한다.
중요시되지 않는 경험은 9/11을 거치며 갈수록 악화되기만 했다. 당시 경찰들은 쌍둥이 빌딩의 잔해 앞에 서서 이른바 ‘공격’을 당한 대중을 단속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공히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을 때 이 경험은 더더욱 그를 괴롭혔다. 국가가 귀화한 시민권자인 그를 시민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는지 여부와 별개로, 국가가 흑인과 갈인에게 반복적으로 폭력을 가하기 때문에 랭킨은 자신이 소속되지 않았다는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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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작인 «시민»에서 그는 미국의 반흑인성을 더욱 깊이 파헤쳤다. 광택이 두드러지는 흰색 종이가 텍스트의 검은색을 강조하는 «시민»은 다시 한번 혼자임이라는 테마를 취하지만, 이번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당신’, 아마도 랭킨 자신일 어느 인물의 경험을 묘사한다. 첫 시에서 그는 일련의 인종 차별 행동을 떠올린다: 한 친구는 실수로 화자를 흑인 가사 노동자 이름으로 부른다. 한 친구는 좋은 작가가 아니라 유색인 작가를 고용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를 쏟아 낸다. 한 이웃은 화자의 집에서 아이를 봐 주고 있는 화자의 흑인 친구를 경찰에 신고한다. 화자의 치료사는 그를 침입자로 오해한다(전부 첫 시에 나오는 일화며 이후에도 반흑인 정서와의 마주침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반흑인성이 어디서나 랭킨의 화자를 따라다니는 듯 보이며, 심지어는 그가 밤에 잠들어 있는 중에도 인종 차별 기억들이 쇄도하듯 밀려든다.
랭킨은 종종 흑인 여성, 특히 흑인 여성 운동 선수들에게서 공동의 대의를 발견한다. 한 친구가 화자를 “짧은 곱슬머리 매춘부”nappy-headed ho[nappy는 빡빡한 곱슬머리를 암시하는 흑인 비하 표현이며 ho는 whore의 속어다]―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돈 아이머스가 [2007년 주로 흑인 선수로 구성된] 러트거스 대학 여성 농구팀을 가리키며 사용한 인종 차별적 멸칭―라고 부르고, 화자는 이 농담이 “봉합했던 상처를 돌연 들쑤시며 열어젖히는” “상처” 같다고 느낀다. 여성들[러트거스 대학 여성 농구팀 선수들]이 공개적으로 경험한 인종 차별적 성 차별은 사적인 고통으로 다시 살아난다. 이 경험은 세리나 윌리엄스의 경기를 시청할 때도 되풀이된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그의 자매도 그의 검은 몸이 코트에, 저희의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 저 사람들로부터 그를 완전히 보호해 줄 수는 없었다.” 이 “저 사람들” 중 가장 지독한 이가 바로 테니스 선수 캐롤린 워즈니아키다. 그는 윌리엄스를 흉내 낸답시고 가슴과 엉덩이에 패드를 찼다(얼굴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것만은 삼갔지만). 윌리엄스의 신체에 대한 이런 인종 차별적 희화화는 윌리엄스의 흑인성에 대한 공격일 뿐 아니라 젠더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랭킨이 거듭 상기시키듯 흑인 여성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마다 조롱과 독설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랭킨이 보기에 흑인 여성 운동 선수를 이런 식으로 폄훼하도록 부추기는 인종 차별은 세계 전역의 흑인을 살해할 권한을 국가에 부여하는 것과 동일한 인종 차별이다. 한 편의 긴 시에서 그는 국가가 저지르거나 국가가 인가한 인종 차별적 살인 사건 중 널리 알려진 여러 건―조지 짐머먼의 트레이번 마틴 살해, 대릴 데드먼의 제임스 크레이그 앤더슨 살해, 런던 경찰의 마크 더건 살해를 포함한―과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에서 흑인이 방치된 상황 등을 이야기한다. 이 참혹한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흑인의 죽음을 생산하는 하나의 세계를 가리켜 보인다. 이 시는 끝나지 않는 목록을 열거하며 정점에 이른다.
조던 러셀 데이비스를 추모하며
에릭 가너를 추모하며
존 크로퍼드를 추모하며
너무 이르게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이 이름들의 목록은 계속 이어지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글자는 희미해진다. 마지막에 이르면 “추모하며”라는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된다. 그 옆에는 이름이 없다. 더 많은 이름이 거기 적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4년 이래로도 경찰이 [유색인을] 살해한 많은 사례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증명해 왔다.
흑인을 향한 국가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기에 랭킨의 화자는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그의 파트너(아마 랭킨의 남편으로 백인 영화 감독이자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인 존 루커스일 것이다)가 운전 중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을 때 화자는 차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때 라디오에서는 트레이번 마틴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누구도 당신을 뒤쫓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법 체계는 다른 계획을 세워 두고 있다”라고 랭킨은 쓴다. 다음번 ‘추모’의 대상이 당신일 수도 있다.
경찰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랭킨의 두려움은 그가 «시민»에서 그 폭력의 원인들을 심문하도록 이끈다. 그 원인이란 백인 우월주의와 그것이 미국의 백인에게 주입하는 흑인에 대한 두려움이다. “백인 남자들이 / 자신의 상상을 단속할 수 없기 때문에 / 흑인들이 죽어 가고 있다”라고 그는 쓴다. 이 현실 앞에서 혼자임과 두려움을 느끼는 한편, 그는 또한 공동의 자기 방어에서 해결책을 발견한다. 놀고 있는 이웃 아이들이, 아마도, 납치되지 않도록 그중 한 아이의 아버지가 지켜보는 모습을 발견한 후 화자는 자신도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 방어가 남자를 가족으로, 한 명의 수호자로 만든다. 이 전환은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에서도 되풀이된다.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있던 아들을 어느 남자가 밀치고 지나갔다. 친구는 남자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다. “그때 아름다운 일이 벌어졌어.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내 뒤에 서 줬거든. 새로운 삼촌과 남자 형제를 얻은 기분이었어.” 단호하고 전투적인 자기 방어는 낯선 관계의 사람들을 친족으로 만들며, 고립을 공동체로, 취약성을 안전으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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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에서는 자기 방어를 통해 형성된 친족 관계가 흑인의 취약성을 해소할 가능한 해결책인 반면, 새 책에서 랭킨은 다시 한번 자신이 외로움 속에 거주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냥 우리»의 첫 산문시는 여행 중에 겪은 소외 경험을 들려준다. 일등석 대기 줄에 서 있는 그의 앞으로 어느 백인 남자가 끼어든다. 흑인 여자가 일등석 승객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백인 남자 무리는 자기들끼리 줄을 만들어 선다. 이들의 백인 특권이 그걸 허용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여행객은 랭킨에게 소수 집단 우대 정책 때문에 아들이 예일 대학교 입시에 낙방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맥아더 펠로십과 아이비 리그 대학교의 석좌 교수 자리도 랭킨이 이런 경험에서 발원하는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혹자는 일등석 승객이 아닌 이들은 얼마나 더 외로움을 느낄지 궁금해할 수도 있겠다).
전작들과 달리 «그냥 우리»는 백인성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셰릴 해리스와 데이비드 로디거 같은 백인성 연구 분야 학자들의 작업에 의존하는 랭킨은―비백인성뿐 아니라―백인성을 연구 대상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일등석 여행에 대한 산문시에서 그는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느 백인 남자에게 이의를 제기하며 그 인연으로 그와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편지에서 남자는 “그날 비행 이후 저는 우리가 나눈 대화를 많이 생각했습니다”라고 쓴다. 그런 다음 어린 시절을 반추해 봤더니 백인 아이들과 흑인 아이들이 싸운 기억, 백인 학생들이 반흑인 비속어를 사용했던 기억, “주로 백인 학생이 흑인 학생에게 잔혹하게 굴었”(73~75)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편지를 읽은 뒤 랭킨은 “그가 통합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사실은 흑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아도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동요가 인 적이 일평생 한 번도 없었음을 의미했다.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내 생계에 지장을 주지 않는 사건이라면 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75)라고 생각한다.
백인성이 불러일으키는 좌절은 때때로 랭킨의 결혼 생활에도 부담을 얹는다. 남편도 오랫동안 인종 차별 반대 활동에 헌신해 온 사람이지만 랭킨은 자신의 백인성과 씨름하기를 꺼리는 그의 태도에 갈수록 불만을 느낀다. 랭킨이 백인 특권과 맞닥뜨린 경험을 들려줄 때면 남편은 백인의 취약성을 비판하지만, 마치 자신은 그 일부가 아니라는 듯이 스스로 “백인 남성 우위 패턴과 무관하다고”(55) 여긴다. 두 사람의 갈등은 랭킨이 암에서 회복되는 과정에서 폭발 직전까지 간다. 랭킨은 남편에게 당신은 “미국에서 나를, 흑인 여자를 대체할 상대를 찾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혼 상담사에게 이 일화를 얘기하면서 랭킨은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제 남편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어쨌든 백인들의 미국에 속해 있지 않나요?”(103) 혹은 그가 다른 부분에서 지적하듯 “은유가 현실이 될 수도 있는 법”(97)이다. 백인에게 갈수록 좌절감은 느끼는 랭킨은 어느 순간 자신의 결혼 생활―남편과의, 미국과의―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가 이 두 결혼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궁극적인 힘은 사랑이다. 딸에 대한 장에서 그가 설명하듯 부분적으로 이는 딸에 대한 사랑 덕분이다. “내 딸을 위한 세상을 바라는”(121) 랭킨은 더욱 정의로운 미국을 만들고자 여전히 애쓰고 있다. 다른 장에서 그는 피츠버그의 회당에서 총기로 열한 명의 신도가 살해당한 사건과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티키 횃불을 들고 행진하다가 급기야는 반대편 시위자 한 명이 살해당한 시위를 묘사한다. 딸에 대한 장을 맺으며 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딸에게 바라는 것은 뭘까? […] 여전히 나는 내 딸을 위한 세상, 내 딸이 이미 속해 있는 이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기 때문이다”(137). 달리 말해 랭킨은 자신이 느껴 온 (그리고 지금도 느끼는) 인종 차별 폭력으로 인한 소외와 두려움을 딸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랭킨은 어떻게 그런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상상할까? 그가 암시하는 해결책 하나는 그가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그가 마지막 장에 적듯 “백인 우월주의를 지향하는 사고 방식은 보편적인 사고와 객관적인 시각으로 포장되며, 백인 우월주의 사상에 방해가 되는 사람이라면—나라는 실제 존재, 나의 인간성까지—없애 버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사람의 존재 양식 자체를 말이다”(413~415). 백인 우월주의의 피해자인 비백인과 주변화된 사람들의 현존과 인간성을 재단언하는 것이 지배적인 방향을 되돌리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작업은 부분적으로 백인들을 위한 것―다른 집단들의 인간성을 지우는 데 있어 백인성이 담당하는 역할을 고민해 보라고 요청함으로써―이고 부분적으로는 랭킨 자신을 위한 것이다. 어느 장에서 그는 자신에게 라틴엑스 사람들의 인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많은 배움을 향한 여정을 들려준다.
이것들을 비롯한 많은 사례에서 백인 우월주의―흑인이나 여타 비백인이나 주변화된 집단을 괴롭히는―를 되돌리는 작업은 대화적이다. “우리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미래가 아닌 다른 미래”를 소망한다고 말하며 그는 이 책을 다음의 말로 마무리한다. “말해 줄래요, 한마디, 그 한마디, 내게 한번 말해 줄래요”(423). 정직하게 말한다면―백인성을 언급되지 않는 보편적 기준으로 전제하지 않고 말한다면, 흑인의 인간성을 인정한 상태로 말한다면―세계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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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흑인 인종 차별이 야기하는 고립을 랭킨이 오랜 세월 기록해 왔음을 고려하면 «그냥 우리»에서 그가 도널드 트럼프를 당선시킨 나라에 대한 자신의 양가 감정을 철저하게 검토하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 앞부분에 그는 이렇게 적는다. “흑인 여자로서 백인 남편과 꾸린 내 결혼 생활 또한 삶을 더욱 고단하게 만드는 인종 차별적인 미국에서 펼쳐졌다”(105). 그런 다음 이렇게 자문한다. “우리를 결합시킨 구조가 없었더라도 사랑과 웃음이 싹틀 수 있었을까?”(107) 그는 그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인종에 관한 대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미래 속에서 발견될 것이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과 말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인종 차별과 그에 따른 고립으로 빚어진 세계를 되돌리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냥 우리»에서 랭킨은 인종 차별을 상호 개인적인 것으로 재현하곤 한다. 여러 작업을 통해 무의식적이고 암묵적인 편견을 논해 온 그이지만, «그냥 우리»는 그가 편견의 갖가지 형태를 가장 명시적이고 상세하게 살핀 책이다. «그냥 우리»는 또 백인성이―특히 백인의 순수함이라는 관념이―백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거둔 성공에서 인종 차별이 담당한 역할을 잊도록 만드는 방식을 가장 심도 있게 들여다보는 책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진단함에 있어 그는 <내 마음속 구역에서 보낸 편지>(«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에 수록된)에서 “백인이 흑인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모르는지 엄밀하고도 가차 없이 드러낸다”고 말한 제임스 볼드윈과 뜻을 함께한다. «어둠 속 유희»의 토니 모리슨처럼 랭킨은―다만 모리슨과 달리 구술이라는 방법으로―백인성이 하나의 연구 대상임을 단언하고 백인성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흑인성이 차지하는 자리를 밝혀내고자 한다.
대화의 해방적 가능성에 매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때때로 «그냥 우리» 읽기가 좌절스럽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는 누군가는 누차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그렇게 대화하려 하는가? 당신을 그토록 형편없이 대하는 이들과의 친구 관계를 왜 유지하는가? 일등석에 함께 탑승한 사람들에게 왜 말을 거는가? 고통만 느낄 게 뻔한데 왜 백인이 가득한 디너 파티에 가는가? 그는 그들과 말을 섞지 않을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고, 다른 기관에서 가르칠 수 있으며, 인종 차별 반대 활동(누군가는 일등석, 아이비 리그, 부 같은 것들의 실존 자체에 반대하는 활동도 바랄 것이다)을 벌이는 정치 조직에서 공동체를 찾을 수 있다. 당연히 이런 사람과 공동체 들도 분명 언젠가는 그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랭킨이 그토록 모욕감을 느끼는 바로 그 체계를 되돌리는 데 한층 진심이다. 적어도 그런 사람과 공동체는 더 나은 동행 아닐까.
하지만 책의 말미에 이르면 랭킨이 이 대화들을 특수한 종류의 작업으로 본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피부색을 보지 않는 자유주의를 설파하는 이들, 그보다 더 대놓고 인종 차별주의자인 이들과 대면함으로써 그는 인종이 미국의 일상적 상호 작용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전면에 드러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가 이들과 대화하는 이유 중 하나는 결혼 생활 및 딸의 미래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화들에 참여하고자 하는 그의 충동은 또한 특정한 사회 변혁 이론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종 차별을 종식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인종 차별주의자들을 교육하는 것이라는 이론 말이다(이 이론은 인종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과 대비된다). «그냥 우리»는 랭킨의 개인적인 대화를 전환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 다른 대화를 시작하길 희망하는 시로 빚는다. 클로디아 존슨과 킴벌리 크렌쇼가 흑인 여성의 고유한 억압을 종식시키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정치 활동가들이 그 억압을 보지 못하는 방식에 빛을 비추었듯, 랭킨도 또 다른 인종 폭력을 막고자 하는 마음으로 미국에서 인종이 작동하는 비가시적인 방식을 전환하고자 한다.
이 미래 지향성이 그의 최근작을 비관주의적으로 만든다. 2004년에 그는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라는 제목으로 독자들에게 자신의 고립을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로부터 16년간 그가 발표한 저작들은 우리가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그의 희망에 동력을 불어넣는 것도 바로 이 비관주의다. 랭킨은 현재가 패배의 순간이라고 믿을지 모른다(다르게 생각하기엔 너무나 많은 폭력과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목격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의 고통은 딸과 우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작업하도록 그를 자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