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우리» 출간 후에 클로디아 랭킨이 «와사피리»(Wasafiri) 지면에서 나눈 인터뷰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이 인터뷰에서 인터뷰 진행자 마야 카스피리는 랭킨과 함께 대화, 글의 형식과 내용, (무)경계 공간, 언어의 물질성, ‘만약에’와 희망 등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랭킨이 어떤 의도와 마음가짐으로 «그냥 우리»라는 책을 구상하고 집필하고 형식을 갖추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인터뷰예요. 또 인종 ‘분리’가 상징적일 뿐 아니라 여전히 물리적인 강제력으로 작용하는 미국에서 랭킨이 대화와 접촉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원문 링크: https://www.wasafiri.org/content/writing-whiteness-a-conversation-with-claudia-rank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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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성 쓰기
클로디아 랭킨과의 대화
마야 카스피리
2020년 10월 13일
양미래 옮김
클로디아 랭킨은 1963년 자메이카에서 출생한 후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했다. 지난 수십 년간 시인, 극작가, 에세이스트로 활동한 랭킨의 작품은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 미국의 서정시»(2004), «시민:미국의 서정시»(2014), «화이트 카드»(2019) 등을 아우른다.
2020년 9월에는 신작 «그냥 우리»가 출간되었다. 본문 곳곳에 시, 에세이, 시각 예술 작품이 실린 «그냥 우리»는 랭킨이 친구나 낯선 사람과 나눈 대화를 세세히 들려주고 아카이브에 보관된 기록물, 현대 대중 매체, 다른 작가와 예술가의 목소리를 무대에 올리듯 펼쳐 보인다. 책 전반에 걸쳐 랭킨은 백인성이 동시대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며, 백인성의 역사, 백인성의 짜임, 백인성의 폭력을 실감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백인성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
오래전부터 랭킨은 작품을 통해 노예제, 인종 분리, 인종 차별주의의 폭력적인 역사가 계속해서 현재의 모습을 결정짓는 방식을 심도 있게 탐구해 왔다. 그런데 «그냥 우리»는 인종 차별주의에 기반한 폭력, 전 세계에서 넘실대는 시위의 물결, 팬데믹이 불러일으킨 충격, 임박한 미국 대선을 둘러싸고 커지는 불안으로 점철된 수개월이 지난 후 그 어느 때보다도 격한 풍랑이 이는 시점에 출간되었다.
랭킨은 «뉴욕 타임스» 6월호 표제작으로 실린 시 <날씨>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을 낯섦과 반복의 시간, 숨을 못 쉬겠어요의 시간, 팬데믹의 시간, ‘거듭되는 폭력’의 시간으로 강렬하게 표현한다. «그냥 우리»를 비롯한 랭킨의 다른 작업과 마찬가지로 <날씨>에서도 현재는 이미 지나간 시간의 침전물 위에, 노예제의 역사 위에 세워진다. 현재의 폭력은 새롭지만, 반복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그냥 우리»는 소진된 현재를 포착해 보여 주지만, 희망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욕망도 선명히 드러낸다. «그냥 우리»는 폭력적인 세상을 지금 모습 그대로 기록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조건문과 가능성과 ‘만약에’로 시작하는 가정과 현재와는 다른 모습의 세상을 담겠다는 의지 사이에서 때로는 초조하게 갈팡질팡한다. 또한 글쓰기―그리고 작가―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동시대의 불안을 드러내 보여 주면서 이 책은 공감을 정치적 해결책으로 찬양하는 일부 자유주의적 휴머니스트의 무기력을 넌지시 비판하지만, 그러면서도 친밀함과 ‘대화’를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으로 설정하는 대안 정치를 구상한다. 랭킨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그냥 우리»는 변혁적이고 저항적인 무언가가 창의적인 형식을 통해 태동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새로운 대화와 친밀함이라는 개방성을 통해, 기존 경로로부터의 ‘급격한 방향 전환’을 통해, 과거의 목소리와 저항의 아카이브 동원을 통해서 말이다.
인터뷰는 9월 초에 진행했다. 분명 긴박한 시기였지만 우리의 대화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랭킨의 열린 마음과 관대함이 특히 돋보였다.
«와사피리» 인터뷰 진행자 마야 카스파리:«그냥 우리»의 부제는 ‘미국의 대화’입니다. 랭킨 씨에게는 ‘대화’가 왜 중요한가요?
클로디아 랭킨: «그냥 우리»는 대화가 어떻게 벌어지는지, 어떻게 엇나가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는 일련의 질문을 담은 책입니다. 진짜 질문은 이거였죠. 대화란 뭘까? 지금 우리는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무언가를 쌓게 될 거예요. 그런데 그 무언가를 쌓는 동안 우리는 어떤 역사를 소환하고 있을까요? 우리 둘 모두가 이 대화에 끌어들이고 있는 뿌리 깊은 편견은 무엇일까요? «그냥 우리»는 노예제로 말미암은 역사가 갖가지 방식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로 친밀함이라는 건물의 구조를 샅샅이 파헤쳐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저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정신과를 찾아가기도 했어요. 거기서 제가 어떤 말을 내뱉었을 때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또 제 대화 상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었죠. 그런 다음에는 팩트 체커를 고용했습니다. 변호사인 한 친구가 이 책을 통독해 주었고요.
이 책은 정말이지 독자와 나누는 일종의 다장르 대화입니다. 저는 이 책이 일종의 연상 작용을 불러일으켜서 독자들이 자기가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따져 물어볼 수 있기를,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것저것 찾아보고 자신이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인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우리»와 전작의 연속성이 이해가 되네요. 그렇다면 글쓰기 동기 면에서 달라진 점이 혹시 있나요?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와 «시민»을 작업할 때는 사람들의 감정적 풍경에, 인종 차별주의의 역사를 등에 업고 더욱 강해진 역학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시민»에서 저는 관찰자에 가까운 입장을 취합니다. 거의 사진가처럼 말이죠. «그냥 우리»에서는 대화 상대의 입장을 취하는데, 그 점에서 «그냥 우리»는 정말로 그런 만남에 관한 책이에요. 무엇이 말해지는지, 말해진 것들이 어떤 협상을 거치는지, 우리가 어떻게 뒤얽히는지를 말하는 책이죠. 뒤얽힘은 이런 상호 작용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혼자 멀뚱멀뚱 서 있는 건 불가능하죠.
«시민»에서는 실수를 하나 했던 것 같아요. ‘몸’이라는 표현을 썼죠. 그냥 ‘사람’이라고 해야 했는데 말이에요. 죽어 있으면 보통 사람person이 아니라 몸body으로 지칭하니까요. 그래서 «그냥 우리»에서는 ‘몸’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시민»에서 제가 죽어 있는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를 모호하게 뒤섞고, ‘흑인의 몸’을 주체적인 사람보다는 하나의 객체로 취급한 것 같았거든요. 몸과 사람은 서로 떼어 놓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요. «그냥 우리»에서 대화는 음성 언어로 진행됩니다. 이 책은 흑인이라는 사람을 흑인의 몸으로 축소해 버리는 백인의 응시를 넘어서고, 언어를 통해 사고와 질문과 감정과 기대와 실망이라는 지평으로 진입하려는 다양한 시도예요. 인종 차별주의는 사람을 순전히 피부색으로 인식하고 분류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에 «그냥 우리»는 실로 만남 속에서 연결되고자 하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는 소위 (무)경계 공간liminal space으로 들어가죠.
그 공간에서 저는 감정의 풍경(서정시라는 형식이 참 잘 포착하는 부분이죠)보다는 일련의 질문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제가 무엇보다 관심을 두는 부분은 전체 역학 관계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이렇게 말이죠. 무엇이 만남을 유도하나요? 우리 모두에게 작용하는 역사는 무엇인가요?
일종의 해부를 하듯, 특히 백인성과의 관계 속에서 대화를 “하나하나 뜯어본다”는 부분이 흥미롭네요. 백인성에 렌즈를 갖다 대는 이유는 지금까지 백인성이 그런 식으로 대상화된 적이 없어서인가요?
역사적으로 백인들은 그냥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토니 모리슨이 말하듯 그 밖의 모든 사람은 수식어가 붙은 무슨 무슨 사람으로 불렸죠. 그렇다면 역사가 렌즈의 각도를 틀어 백인성 자체를 아메리카 원주민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이르는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며 이득을 챙긴 인종, 만들어진 인종으로 바라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최근 작품들에 ‘미국의 서정시’, 혹은 «그냥 우리»의 경우 ‘미국의 대화’ 같은 부제가 붙었는데요, 이런 주제들은 확실히 ‘미국’이라는 맥락을 넘어서서 공명하지 않나 싶습니다. 백인성에 관한 대화들의 번역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제가 ‘미국의’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제가 논할 수 있다고 느끼는 역학 관계라고 말하기 위해서고, 그렇게 말하려는 이유는 제가 그 역학 관계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경을 오가는 동안 저는 백인성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여전히 특권을 유지하고 있음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그냥 우리»에 실은 [일본인/아이티인/미국인인] 테니스 선수 나오미 오사카에 관한 에세이를 쓸 때 보니, 참 흥미롭게도 나오미가 일본 시민권을 획득한 후부터 일본에서 백인처럼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지더군요.
[이와 동시에] 미국에서는 ‘유색인’이라는 표현이 흔히 쓰입니다. 이 표현은 라틴엑스와 아시아인과 흑인이 서로 아주 다르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포괄적인 용어가 되고 있죠. 2차 대전 기간에 독일인/유대인 정체성을 나누었듯 우리도 흑인/백인 정체성을 일종의 단순한 방정식으로 생각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는 이민자로 살기 시작했다가 이제는 캅카스인이라는 백인 범주에 속할 수 있게 된 사람뿐 아니라 계속 그 범주에서 배제되는 사람도 무척 많습니다. 라틴엑스는 끊임없이 변하는 흥미로운 영역을 점하고 있고요. 피부색 때문에 백인과 동화될 수 있는 라틴엑스도 간간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 조사국은 그런 라틴엑스들을 흑인과 구분하려 애쓰고 있죠.
«그냥 우리»에서 많은 대화가 비행기나 ‘통로’ 같은 (무)경계 공간, 사이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무)경계성이라는 개념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는 말 그대로 여기도 저기도 아닌 공간에 대해 말하려고 그 개념을 쓰고 있어요. 일단 어떤 공간이 여기든 저기든 돼 버리면, 사람들은 사회에서 부여받은 역할에 자기를끼워 맞추게 됩니다. 그런데 (무)경계 공간 안에서는 새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대화를 나누기 전에든 후에든 책임을 부여받지 않고 무언가를 탐구할 수 있죠. 저는 그 (무)경계 공간을 활용하고 싶었어요. 저는 (무)경계 공간이 사물들이 잠재적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무의식적 공간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좋아합니다. (무)경계 공간에 들어가면 어떤 결론이나 해결책을 떠올릴 필요 없이 무언가를 살펴볼 수 있는 거죠.
(무)경계공간이 갖는 생산성은 창작의 가능성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을까요? 랭킨 씨가 설명하는 (무)경계 공간을 생각하면 조금 전에 랭킨 씨가 말한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대화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세상―우리가 소환하는 역사―그리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변화나 ‘만약에’로 시작하는 가정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협상이라는 말씀이요.
예술가에게 만약에라는 생각은 [핵심적인데요]. ‘만약에 우리가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면 어떨까?’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저는 그게 문화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문화는 작가, 예술가, 극작가, 에세이스트가―어떤 장르에 속해 있건―즉흥적으로 뭔가를 떠올리고 그걸 기반으로 창작할 수 있게 해 주죠. 제 새 책의 핵심적인 질문은 우리가 무언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냐는 겁니다. 우리가 밟을 수 있는 다른 경로들에 대해 생각할 때 말이죠. 제가 작가로서,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문화 생산자로서 받은 훈련은 고정되고 한정된 시간에서 주제를 끄집어내 어제, 내일, 오늘과의 대화에 끌어들일 일종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런 대화에서 급격한 방향 전환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어떻게 하면 피해를 입거나 주지 않을 수 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취약성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새로운 ‘경로’를 연다는 말씀을 들으니 텍스트와 이미지를 병치하고 다른 작가와 예술가의 견해를 활용하는 등 작품에 활용된 다양한 재현 방식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매번 색다른 방식으로 다르게 읽게 될 것 같고요. 책에 실은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 모든 작품은 제 생각에 영향을 미친 견해들을 싣고 싶다는 욕망에 기초해 있습니다. 제 입장이 독서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늘 애써 왔고요. 제임스 볼드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짊어지고 산다.” 저는 이 문장을 마음에 새긴 채 작업하고, 또 어떻게 오늘의 발언이 어제의 역사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포착하려 합니다. 이 문장은 형식에도 반영됩니다.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내용을 형식과 맞붙일 것인지, 어떻게 내용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형식이 구현할 수 있게 할 것인지를 탐구하는 것이죠. 마치 수학 문제를 푸는 것 같아요. 형식과 내용 중 하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다른 것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형식을 결합하고 구조화하는 일은 내용을 쓰는 일만큼이나 흥미진진합니다.
그렇게 형식의 정치와 언어의 물질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랭킨 씨가 다른 곳에서 언급하기도 한 카리브 시인 고 카마우 브라스웨이트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와 같은 작가의 목소리는 지면에서 펼치는 실험을 통해 역사의 퇴적물을 움직이죠.
저는 언어가 시간을 관통하며 움직이는 방식에 관심이 많은데요, 때로 이 방식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단어 자체가 가진 물질성과 연관됩니다. 말씀하신 카마우 브라스웨이트도 그렇고 파울 첼란, 거트루드 스타인, 랭스턴 휴스의 작품도 그렇죠. 저는 어떤 단어로부터 공격을 받았음에도 우리가 인지조차 하지 못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탐구하고 싶어요. «그냥 우리»에 실린 <남자들이 원래 다 그렇잖아요>라는 에세이에는 [제가 지켜보던 남자가] 아내를 바보idiot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저는 그 남자가 아니라 바보라는 단어 자체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지?’가 아니라 ‘이 단어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지?’에 집중한 거죠.
역사는 어떤 식으로 단어의 물질성과 결합할까요? 우리는 ‘N’ 워드가 가지는 영향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흑인 남자와 여자를 겨냥하는 다른 모든 단어는 어떤가요? «그냥 우리»의 <폭력적인>이라는 에세이에서는 교사가 ‘폭력적’이라는 단어를 써서 네 살배기 흑인 아이를 지칭하는 방식을 논합니다. 그 단어 안에 어떤 종류의 장기적인 공격이 담겨 있을까요? 그 단어는 흑인 남자와 여자가 훗날 범죄자 취급을 받는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 단어를 사용해 사회는 흑인을 상대로 저지른 단속, 살인, 인종 프로파일링을 용인받죠.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그냥 우리 는 체념하고 소진되는 현재, 그리고 희망을 품는 순간들을 중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우리»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면 어쩌나?”라고 묻죠. ‘만약에’로 시작하는 질문은 상황이 희망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에 맞서는 의미도 품고 있는 듯하고요…
그게 바로 지금 미국인의 삶에 드리운 두려움입니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에요. 애도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가 20만 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찰, 국가가 승인한 폭력, 군대처럼 변해 가는 시위 진압대로 인해 흑인들이 거듭 살해당하고 있어요. 정말 암담한 시기죠. ‘만약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하는 순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살아 있다는 것은 희망을 품는다는 겁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믿어요.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적어도 제가 인간으로 생각하는 그 누구도, 지금 사람들이 취급받는 방식으로 취급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이란 ‘만약에’가 ‘지금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를 묻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희망하는 일인가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탐구하는 것, 타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그리고 타인과의 만남이 이끌어 낼 수 있는 결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계속해서 여기에 존재하려 할 때 하는 행동입니다.
«그냥 우리»의 몇몇 대목은 친밀함과 면밀한 독해의 정치 속에서, 즉 우리가 가까운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암시적으로 말합니다. 사랑을 ‘면밀한 독해’라고 설명한 동시대 시인 에리카 헌트를 인용한 대목이 생각나는데요…
저는 에리카 헌트라는 시인을 참 좋아하고, 그 표현을 만났을 때는 아, 맞아, 그게 진짜 사랑이지, 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친밀한 관계에서 기대하는 것은 상대가 나를 보편적인 차원에서도, 또 구체적인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나를 알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알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거죠. 그래서 면밀한 독해라는 사랑의 개념은 대화의 역할이라는 개념과 상당히 깊이 공명합니다. 대화를 하려면 타인에 대한 일종의 면밀한 경청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상대와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쌓을 수 있도록 상대가 말하는 것을 독해해야 하죠.
«그냥 우리»가 취한 형식은 대화를 바탕으로 면밀한 독해를 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말씀을 들으니 초기 작품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에 인용된 “시는 악수와 같습니다”라는 파울 첼란의 문장이 생각나네요. 직접 인용된 구절은 아니지만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와 «그냥 우리»를 읽으면 프란츠 파농이 1952년 작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던진 “왜 단순히 타인과 살을 맞대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떠오르고요.[1] 흥미롭게도 파농은 접촉이 진정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따져 물으면서도 접촉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하나의 질문으로 제시합니다.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에서 계속해서 다룬 주제 중 하나가 타인이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에 있다는 것, 여기에 타인과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죠. ‘여기’라는 단어는 «그냥 우리»에도 등장해요. 만남은―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의미는―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미국의 인종 분리 정책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저기에 있으리라는 관념으로 인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관념으로 인해 이 만남을 잃었습니다. 왜 단순히 서로 살을 맞대지 않는가? 이것이 대화의 핵심입니다. 대화는 누군가와 접촉하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접촉이―그리고 대화가―폭력적으로 번질 위험도 있지 않나요? 말씀하셨다시피 우리는 동일한 역사나 동등한 입장을 가지고 대화를 하지 않으니까요…
언어에 마음을 연다는 것은 공격과 뒤얽힘에도 마음을 연다는 것이고, 이것은 타인과 접촉한다는 개념과 다시 연결됩니다. 그런 접촉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 접촉이 목숨을 끊어 버릴까요?아니면 일종의 공동체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힐까요?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나요? 이 인식이 또 다른 종류의 ‘타자화’를 의미한다면 접촉은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거울상처럼 생각하는 타인과 만난다면, 그때의 접촉은 첼란이 말하는 악수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랭킨 씨는 수년간 오늘 우리가 다룬 많은 주제―백인성, 인종 차별주의, 저항과 희망의 정치―에 관한 작품을 써 왔는데요. 현 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예순을 앞둔 나이인데 어쩌면 지금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암담한 시기일 거예요. 도널드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해체하려 하고 있습니다. 다가올 대선이 앞으로 수년간 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죠.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상황입니다. 끔찍한 시기인데, 여기에 격리라는 상황까지 더해졌죠…
그래도 저는 디지털 기술이 최선의 방식으로 이 [저항의] 시간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도 우리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피부색을 이유로 총 맞아 죽는 일 말이죠. 하지만 핸드폰이 있는 지금, 내가 목격한 것을 재량껏 업로드할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은 우리가 논의의 주제를 바꾸고 새로운 종류의 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통제는 아래로만 향하지 않습니다. 마틴 루서 킹은 사망 전에 남긴 졸업식 연설에서 사회를 변화시킬 우리의 능력을 기술이 압도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같은 조직들이 있는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기술이 저항 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마야 카스파리는 런던 출신의 연구자이자 작가다. 클로디아 랭킨을 비롯한 작가를 중심으로 현대 세계 문학에서 펼쳐지는 접촉의 정치학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1]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노서경 옮김, 문학동네, 2014, 22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