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김지승

만약에, 라고 시작해 보자. 만약에 클로디아 랭킨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고장 난 구조의 일부라면. 흑인 차별적인 각본의 체제 안에서 기능하며 모든 장르의 관습을 재창조할 뿐이라면. 현재는 꽁꽁 막혔고 미래는 이미 상실되었다면. 구멍 난 과거만이 우리를 지탱한다면. 모든 걸 딛고 얻은 생존, 바로 그 생존의 콜라주인 한 권의 책을 앞에 두고 펼칠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기록과 자료를 기꺼이 나눈 흑인들이 공동 저자인 책의 서문을 읽을 수 있다면.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더 많은 것들이 남아 있지만
더 이상의 시간도, 공간도 없다. […] 다만 내게는 떠나야 할 여정과
이름 붙일 배들, 함께할 선원들이 있을 뿐.[2]

1974년 토니 모리슨이 편집한 «더 블랙 북»을 채운 기억과 기록은 예언이 되었다. 생존의 예언이다. 우리가 그랬듯 너도 생존할 것이라는 예언. 토니 모리슨이 “나는 내가 살아남았던 모든 방식”이라고 선언할 때, 그는 이전 흑인 여성, 그 전의 흑인 여성들의 역사와 연결되며 생존의 기억을 전달하는 몸이 된다. “더 이상의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에서 변화는 가능한가, 하는 절박한 질문을 옮기는 몸. «그냥 우리»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클로디아 랭킨은 그 몸의 다음다음 몸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몸들. 해리엇 제이컵스가 «린다 브렌트 이야기»에서 자신의 할머니와 딸을 포기하지 않던 장면을 떠올린다. 1970년대 등장한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 단체인 컴바히 리버 컬렉티브Combahee River Collective 선언문에서 “무수한 세대를 거친 우리 어머니들과 자매들”[3]을 흑인 여성들이 체감해 온 억압의 다중성과 동시성의 역사로 호명하는 순간을 떠올린다. 랭킨이 백인성 연구 분야의 대표적인 작업으로 토니 모리슨의 «어둠 속 유희: 백인성과 문학적 상상력»[4]을 언급할 때 그들 몸의 기억이 포개지는 감각을 떠올린다. 자꾸 지워지지만 ‘만약에’의 리듬으로 목소리를 전달하며 살아 있는 ‘그냥 우리’를 떠올린다. 그들의 외로움과 사랑을 떠올린다. 이 글의 끝까지.

클로디아 랭킨은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 «시민», «그냥 우리»로 이어지는 3부작에서 인종, 인종 차별, 백인성을 재가시화하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문학적 상상력과 수사로 재현한다. 특히 3부작의 마지막인 «그냥 우리»는 관습을 벗어난 책의 형식과 장르, 다중 양식multimodality이 좌우 페이지의 관계성을 연신 새롭게 구성하면서 토니 모리슨이 더 이상 자신에게 (혹은 흑인에게) 없다고 호소한 시간과 공간을 재차 마련한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다. 백인과의 대화라는 경계 넘기의 상황이 때로는 숨이 막히고, 어째서 매번 다시 제자리로 (더 나빠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인지 절망스럽기도 하다.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발생하는 여러 감정이 읽기의 시간까지 간섭하고 분절한다. 읽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통계 자료와 기사, 시각 자료이지만 우리 몸이 닿는 것은 그런 감정들이다. 바람, 무너짐, 포기하지 않음, 외로움, 사랑… 흑인 여성이 사랑을 말하면 “이 나라가 흑인들에게 저지른 가장 처참한 일은 사랑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도록 한 것”[5]이라던 토니 모리슨의 말이 그 여성과 우리 사이에 놓인다. 사랑에 붙은 모든 장식을 단번에 와르르 무너뜨리는 역사가 그 ‘사랑’에는 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대화를 이끌어 내길 바라는 랭킨의 바람이 거의 매 장 무너지더라도 그가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그는 시인이고, 시는 쓰인 행보다 쓰이지 않은 여백이 더 큰 장르다. 랭킨이 실패한 대화의 공간은 미학적 공간으로, 더 넓은 초대의 공간으로 다시 열린다.

인 메디아스 레스

«그냥 우리»에서는 대부분의 만남이 어떤 맥락의 한가운데로 돌연 던져진다. 맥락이 기억의 연쇄적 구조라고 할 수 있다면 기억의 상승과 하강, 틈입과 교차하는 운동성은 선형적인 시간성을 헝클어뜨린다. 문학에서 ‘이야기 한가운데에서 시작하는 서술 기법’을 의미하는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는 흑인 디아스포라의 기억과 이야기, 시간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디아스포라의 삶은 출발점(처음, 기원)과 목적지(끝, 결말)로 이어지는 단선적인 시간이나 장소에서 벗어나 ‘중간’에서 진행된다. 그들의 이야기도 대체로 기원과 마지막이 명확하지 않다. 이미 시작된 어떤 흐름의 중간에서 자기 서사를 이어 쓴다고 해야 할까. 현재의 정체성과 연결된 기억과 미래의 욕망이 콜라주처럼 파편적으로 수집되고 재조합되는 과정에서 가능해지는 쓰기다. 그래서 «그냥 우리»를 읽는다는 건 때로 공백과 단절 속에서, 중단된 역사 속에서,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차별 속에서 랭킨이 재구성한 ‘흑인이 현실로 인식하는 현실’ 한가운데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신을 당황스럽게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먼저 오른쪽 페이지에 등장하는 빨간 점이 눈에 띈다. 학술적인 글을 쓸 때 적용되는 각주 표시 방식, 각주의 위치와 기능이 «그냥 우리»에서는 다른 패턴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오래지 않아 눈치챈다. 책을 펼치면 우선 왼쪽 페이지에 관습적으로 시선이 간다. 그곳은 비어 있거나 대체로 주석과 이미지가 놓인다. 중요한 서술이 진행되는 오른쪽 페이지와의 위계를 재빨리 (이 역시 관습적으로) 판단하고 나면 시선은 오른쪽 페이지를 향한다. 그러다 빨간 점이 등장하면 그 해당 주석이 놓인 왼쪽 페이지로 돌아간다. 읽기의 체계가 잡힌다. 오른쪽 본문의 시간은 비교적 가까운 현재이고, 왼쪽의 주석과 이미지는 그보다 먼 과거다. 즉 시선과 몸을 움직여 세계 한가운데의 어떤 상황을 읽고, 상황의 의미를 과거에서 재설정한 후 상상과 가정의 시간으로 한 발 움직이게 되는 셈이다. 시간이 얽히고 겹치며 계속해서 다시 호출되는 차별에 관한 감각은 사이디야 하트먼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기억이 과거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과거의 시간성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그는 담담하게 피력한다. “나 역시 노예제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즉 노예제가 만들어 낸 미래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다”[6]라는 하트먼의 문장은 백인성에 관한 자신의 반응을 의심하던 랭킨의 자문을 부드럽게 도닥인다. 노예제와 숱한 죽음의 기억이 잔재하는 흑인의 몸까지도. 그들에게 과거는 가장 혹독한 타자다.

‘인 메디아스 레스’의 시간성은 흑인 여성 작가의 기억과 서사 구성에서 주요하게 작동해 왔다. 조라 닐 허스턴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말하는 흑인 여성’ 제니가 자신이 떠났던 마을로 귀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제니의 이야기는 귀환의 장면 한가운데에서, 기억의 응답으로 재구성된다. 한 점에서 출발해 미래로 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균열과 반복, 귀환이 불연속적으로 구성하는 이야기는 흑인 디아스포라의 낙인과 부재의 시간을 ‘말하기’의 시간으로 전환한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역시 도입부터 세서의 과거와 관련된 한 남성의 귀환으로 시간과 기억이 얽힌다. 세서는 노예제의 기억을 잊고 싶어 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재현하고, 그 기억이 현재를 점령한 탓에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성은 해체된다. 테레사 학경 차는 «딕테»에서 ‘in media res’[7]를 디아스포라 여성이 기원도 끝도 없이 흩어진 시간의 파편 사이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그냥 우리»에서 랭킨이 여백을 활용하는 방식이나 양쪽 페이지의 관계를 다양하게 설정해 현실을 재서사화하는 방식이 «딕테» 전체를 구성하는 다중 양식이기도 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디아스포라 존재의 시간과 공간은 주류 세계의 보이지 않는 틈새에 있다. 그로 인해 겪는 소외와 시차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다층적 시간성의 계승자인 랭킨은 ‘정의’Justice와 ‘그냥 우리’Just Us 같은 언어 유희, 주석의 범위 안팎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 이미지와 텍스트의 ‘좌우’ 이분법을 초과하는 관계성 등으로 맥락의 잔여를 흔들며 미국 흑인 여성의 시간을 가시화한다.

()경계 공간 iv

페이지를 채우거나 비우면서 변주하는 여백의 시각적 수사는 랭킨이 백인 남성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무)경계 공간liminal space들에도 물질성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비움과 채움, 기록과 기억, 이미지와 문자 등의 관계가 상호 간섭하는 페이지들이 (무)경계 공간의 경계성, 혼종성, 교차성을 탐색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양 페이지는 주석과 본문으로 이분된 위계적인 관계를 형성한 듯 보이다가 불규칙적인 배치와 반복, 비움이 그 위계를 무화하고 마지막까지 예측하기 힘든 관계의 공간으로 남는다. 보이지 않거나 위험한 몸으로 간주되는 흑인성과 자명하나 부재하고 논의의 요청조차 받지 않는 백인성의 관계는 각각 검은 활자와 백지로 치환되었다가 랭킨이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들에서는 한결 복잡해진다. 랭킨은 «시민»에서 백인의 공간에 놓인 흑인 몸의 경험을 언급하며 조라 닐 허스턴의 문장을 불러온다. “선명한 하얀 배경 위에 던져졌을 때 내가 유색인임을 가장 강하게 느낀다.”[8] 그는 이 문장이 모든 흑인 삶의 어떤 국면을 대표한다고 썼다. 왼쪽 페이지가 완전히 비워지며 선명해지는 백색이 드러내는 건 그곳에 놓였던 흑인의 몸과 그 몸을 타자화해 온 백인성에 대한 축적된 질문일 것이다. 질문은 경계를 넘은 몸에서 몸에게로 전해진다.

랭킨에게 (무)경계 공간은 대화가 생성되는 곳이다. 이곳과 저곳, 시작과 끝, 나와 나 아닌 것 사이 등의 물리적, 정서적, 비유적 공간. 어떤 경계이면서 경계를 흐리는 제3의 공간이기도 한 (무)경계 공간은 디아스포라의 몸이자 DMZ이고 세계의 사건에 심리적 용의자로 개입하는 기억의 서식지다. 글로리아 안살두아가 접경 지역 여성borderlands woman으로서 가변적이고 다중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경계 지역이 모종의 능력과 억눌린 의식을 활성화했기 때문이다. 랭킨 역시 노예제부터 흑인의 몸에 새겨진 무수한 경계의 표식들이 자유롭게 드러나고 움직일 수 있는 (무)경계 공간에서 새로운 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탐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부유하는 존재들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경계 틈에서 분열된 채 더 자주 경계 너머를 상상한다. 가령 다와다 요코에게 ‘경계’는 강력한 작업 원리이자 은유다. 몇몇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고립된 경계적liminal 주체가 언어의 경계나 시간의 경계, 기억의 균열선, 정치적 현실의 틈새를 통과하며 다른 존재나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테레사 학경 차도 비행기, 기차, 배와 같은 운송 수단을 이주와 경계 넘기의 비유로 쓰면서 경계 시학적 공간을 마련한다.

끊임없이 이동하지만 실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는, 가장 분열하고 부유하며 소란스러운 제3의 공간을 상상해 온 여성 작가들은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 경계가 자주 무화된 채 백인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열된 의식 틀 안에서 주로 해석되어 왔다. 흑인 여성 작가가 흑인 예술과 문화가 기대하는 리얼리즘에 부응하지 못하는 포스트모던 작품을 시도했을 때 처하는 곤경에 대해 벨 훅스, 토니 모리슨 등이 토로한 배경에는 그러한 외부 시각의 백인성이 존재한다. 랭킨은 여성 작가들이 처한 곤경을 시적 수사와 사회학적 레퍼런스, 자기 경험을 혼합해 재배치하면서 타개해 나간다. 흑인성의 본질은 거부하되 경험과 기억으로 흑인성을 구체화하며 백인성을 가시화하는 데 성공한다. 400년 전으로부터 도착한 목소리들과 함께인 시도이자 오랜 곤경을 넘어서는 그의 대화 요청은 너무도 역동적이고 뜨겁고 부글거리고 출렁인다. 선 그어질 수 없는 물 위로 도착한 400년 전 새벽의 외로운 배들처럼. 그 외로움 끝에 사랑을 생성하는 힘으로 그와 우리의 시공간은 기쁘게 얽힌다.

다른 시공간의 번역

«그냥 우리»에서 랭킨이 시도하는 대화는 언어로 어떤 경계를 넘는 시도라는 점에서 번역과 닮았다. 문자 언어만이 아니라 사진과 트윗, 뉴스 인용, 연구 결과 이미지 모두가 번역의 대상이 된다. 좌우 페이지들이 활발하게 반응하는 상호 번역과 실제 랭킨과의 대화에서 백인 남성들이 연신 실패하는 맥락의 번역, 백인 중심 읽기-쓰기의 흐름을 일순 끊고 독자에게 요청하는 재번역 등으로 랭킨의 시공간은 책 밖으로 확장된다. 여기에 영어-한국어 번역이 좌우 페이지의 빔과 채움, 있음과 없음을 새롭게 구성하면서 새로운 시공간이 뜻밖의 선물처럼 주어진다.

이미지 1. «그냥 우리» 영어본 50~51페이지
이미지 2. «그냥 우리» 한글 번역본 68~69페이지

«그냥 우리» 영어본 50페이지 위의 인용문, 호텐스 J. 스필러스의 “현실을 직시하자. 나는 표식을 가진 여자이지만 모두가 내 이름을 아는 것은 아니다”는 오른쪽 51페이지 “저는 흑인 여자가 아닌가요?”와 조응한다. 왼쪽 페이지 아래 알렉시스 오해니언의 “[…]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는 오른쪽 페이지의 “선생님은 백인 남자가 아닌가요?”와 상호 인용처럼 쓰인다. 50페이지 아래위의 두 인용문 사이에는 여백이 놓이는데, 이 여백은 옆 페이지의 나란한 내용이 틈입하는 자리일 수도 있고, 읽는 이들의 비슷한 경험이 영사되는 막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글자 수 차이 때문에 페이지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한글 번역본의 경우 «그냥 우리»와 같은 작품의 페이지 구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상당한 고민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영어본과 비교했을 때 좌우 페이지의 뒤얽힘과 상호 참조성을 최대한 살린 번역본의 편집 덕분에 우리는 조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이미지 2). 번역본에서는 오른쪽 페이지의 “저는 흑인 여자가 아닌가요?”와 “선생님은 백인 남자가 아닌가요?”에 달린 주석의 내용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등장한다. 대신 왼쪽 페이지를 꽉 채운 “피부색을 보지 않는다는 수사의 사례들”이 두 문장에 실린 의미와 감정을 증폭시킨다. 다음 장에서 만나게 될 주석은 앞선 사례들과 함께 강렬한 정동으로 두 문장과 묶이게 된다. 영어본의 물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번역된 한국어의 몸이 문화적 타자의 교차점에서 작동하도록 한 편집의 의도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우리여도 우리가 아니어도 그냥

«그냥 우리»에는 다른 언어, 다른 인종, 다른 시공간, 다른 기억으로 발생하는 뜻밖의 효과와 번역의 차이로부터 확장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이 책을 읽기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두 언어의 차이 덕분에 한국 독자는 영어본보다 약 30쪽 분량의 ‘텅 빔’을 더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랭킨의 말을 빌리자면 이 텅 빈 페이지에서 “만남이 새롭게 펼쳐지는 순간 우리 사이에는 이미 하나의 대화가 발생한 셈이다”.[9] 우리가 갖게 된 더 많은 백지에 무엇을 교차하고 어떤 대화의 층위를 구성할지, 이제 랭킨의 외로움을 조금 나눠 가져도 좋지 않을까. 우리, 그냥.

토니 모리슨의 «타인의 기원» 추천사에서 타네하시 코츠는 2016년 대선 이후 극심한 좌절 속에서 “우리가 왜 또다시 제자리로 왔는지 이해해야 하는 지금, 천만다행으로 토니 모리슨이 있다”라고 썼다.[10] 백인성의 전 세계적 합의가 팔레스타인을 외면하는 지금, 우리가 왜 또다시 그 죽음들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 질문해야 하는 2025년, 다행스럽게도 클로디아 랭킨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는 무수한 반복의 차이, 그 미세한 틈 사이에 도사리고 있다.


[1] 클로디아 랭킨, «그냥 우리: 미국의 대화», 양미래 옮김, 플레이타임, 2025, 123쪽.
[2] Toni Morrison complied, The Black Book, Random House, 1974, preface.
[3] 그들은 선언문에서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프란시스 하퍼Frances E. W. Harper, 아이다 웰스 바넷Ida B. Wells Barnett, 메리 처치 테럴Mary Church Terrell” 등도 함께 호명한다.
[4] 랭킨, «그냥 우리», 25쪽.
[5] 토니 모리슨, «토니 모리슨의 말», 이다희 옮김, 마음산책, 2024, 48쪽.
[6] Saidiya Hartman, Lose Your Mother: A Journey Along the Atlantic Slave Route, Farrar, Straus and Giroux, 2007, p.133.
[7] 테르프시코레 합창 무용 장에서 그는 Medias를 잘못 기입한 듯한 In Media Res로 말과 목소리의 물질성을 드러낸다. In Media Res는 In Media less로 들리기도 해서, ‘매체 없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8] Claudia Rankine, Citizen: An American Lyric, Graywolf Press, 2014, p.14.
[9] 랭킨, «그냥 우리», 417쪽.
[10] 토니 모리슨, «타인의 기원», 이다희 옮김, 바다출판사, 2022,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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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승
경계 안팎의 유동적 위치성을 체현하는 작가이자 독립 연구자.
문학, 문화 이론, 정신 분석학을 공부했고 비영리 단체 사업 기획 및 매체 업무를 통해 다양한 삶을 만났다. 현재 제도 밖에서 여성적 읽기-쓰기의 공간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며 아픈 몸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어쩔 수 없이) 탐색 중이다. 불편과 불안을 지탱하는 언어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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