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에 대해

시몬 베유
리시올/플레이타임 편집부 옮김

이 글은 여태 알맞은 명칭을 얻지 못했으나 아마도 ‘읽기’라는 명칭이 적당할 개념을 정의하려는 시도입니다. 읽기에는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숙고해 본다면 인간 삶의 여타 수수께끼들을 해명하진 못하더라도 포착하는 데는 분명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감각이 직접적이고 돌연하며 놀라움으로 우리를 장악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한 사람이 예고도 없이 명치를 가격당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모든 게 바뀝니다. 내가 뜨거운 물체를 건드립니다. 손을 데었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화들짝 놀랍니다. 무언가가 나를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고 이로 인해 나는 우주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우리는 우리를 붙잡은 주먹질, 뜨거운 물체, 갑작스러운 소리의 권력에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 외부에서, 물질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리고 정신은 그것들을 겪을 뿐 그에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거나 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생각들은 우리에게서 감정을 일으키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를 붙잡지는 않습니다.

수수께끼는 이것입니다. 그 자체로는 그리 강렬하지 않지만 자신의 의미를 통해 그처럼 우리를 붙잡는 감각들이 있다는 것. 하얀 종이에 적힌 검은색 글자는 명치를 가격한 주먹과 매우 다릅니다. 그런데 때로 이 둘은 같은 효과를 발휘하지요. 정도 차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편지나 신문으로 접한 비보의 효과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정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이 뒤흔들리고 비틀거리며, 그런 뒤에도 그 편지를 다시 볼 때마다 고통을 느낍니다. 시간이 지나 고통이 가라앉더라도 문서를 정리하다 우연히 그 편지를 발견하면 더욱 선연한 고통에 빠져들곤 하지요. 물리적 고통과 다를 바 없이 급작스럽고 모진 이 고통은 외부에서 온 것처럼, 불 속에 물체가 있듯 편지 속에 고통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붙잡습니다. 두 명의 여성이 각자 편지를 받습니다. 편지엔 아들이 죽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 여성은 편지를 보자마자 실신합니다. 죽는 날까지 그의 눈, 그의 입, 그의 움직임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다른 여성은 편지를 보고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빛과 자세엔 변화가 없습니다. 글을 읽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첫째 여성을 붙잡은 것은 감각이 아니라 의미입니다. 그가 끼어들지 않아도 의미가, 감각이 우리를 붙잡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직접적이고 돌연하게 그의 정신에 닿은 것입니다. 편지 자체 속에 고통이 있어 편지를 읽는 얼굴로 달려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편지지나 잉크의 색은 감각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고통만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이렇듯 삶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외부에 있는 것에, 겉모습apparence에서 읽은 의미들에 붙잡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두고 끝도 없이 토론할 수 있습니다. 세계라고 불리는 것이 우리가 읽는 저 의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계는 실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의미가 외부에서 우리를 붙잡기에 세계는 실재입니다. 이 모순을 해소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상에서 생각의 가장 고귀한 임무가 풀리지 않는 모순들을 찾아내 명상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플라톤이 말했듯 그런 모순들은 우리를 위로 끌어당기는 것이지요.[2] 이 상황의 독특한 점은 감각과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읽는 것만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활자를 보는 게 아닙니다. 특히 증언에 대한 연구들이 이 점을 명확히 밝혀 왔습니다. 원고 교정 작업이 까다로운 까닭은 우리가 읽을 때 식자공이 조판한 활자만큼이나 빠뜨린 활자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의미를, 단어와 문장의 의미가 아니라 알파벳 철자의 의미를 읽도록 애써야 합니다.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잊지는 않으면서 말이지요. 읽지 않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언어로 쓰인 텍스트가 적절한 자리에 놓여 있을 때 그것을 전혀 읽지 않고 보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 연습해야만 읽지 않는 데—기껏해야 어느 정도만—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데카르트가 발견한 ‘맹인의 지팡이’ 사례가 읽기와 유사한 이미지를 제시해 줍니다. 펜을 쥐면 그 감촉이 펜 끝에 전달된다고 누구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종이가 고르지 않을 때면 마찰이 곧바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글을 읽는 데 사용하는 손가락과 손의 감각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지요. 그런데 이런 마찰이 우리가 읽는 유일한 무언가입니다. 하늘, 바다, 태양, 별, 인간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읽는 무언가이고요. 우리가 교정된 감각적 환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정된 읽기입니다. 해가 진 뒤 인적 없는 길거리를 걷는 중에 무언가를 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나무 대신 사람이 숨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위협적인 사람이 나를 해치려 한다고요. 편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두려움으로 몸서리칩니다. 하지만 그것을 향해 다가가자 불현듯 모든 것이 달라지고 나는 더 이상 떨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읽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겉모습도 하나의 해석도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가 눈을 거쳐 내 영혼에 침투했고, 이제는 나무의 존재가 불현듯 내 영혼에 침투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한편에는 그가, 다른 편에는 내 미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향해 다가올 때 내게 접근하는 것은 혐오스러움입니다. 내 눈에는 그의 영혼의 사악함이 그의 머리색보다 더욱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그가 금발이면 혐오스러운 금발이고 갈색머리면 혐오스러운 갈색머리입니다. 〔구약의 에스더서에서〕 아하수에로 왕 앞으로 나아간 에스더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남자에게 다가간 게 아닙니다. 왕권 자체에, 공포 자체에 다가간 것이지요. 이 공포는 눈을 거쳐 에스더의 영혼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그를 향해 걸어가려는 노력 자체가 에스더를 실신하게 만듭니다. 에스더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두려움 속에서 응시하는 것은 아하수에로의 이마가 아니라 그 이마에 새겨져 있으며 자신이 그로부터 읽은 왕권이라고. 이럴 때 우리는 보통 상상력의 효과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읽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 단어는 겉모습이 효과를 생산함을 함축하지만 겉모습은 나타나지 않거나 겨우 나타날 뿐입니다. 문자들에서 문장이 나타났듯 겉모습과 관련된 다른 무언가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겉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불현듯, 돌연히, 외부에서 나타난 것이자 명증함 덕분에 반박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내가 검은색으로 장정된 책을 본다면, 그걸 철학적 문제로 다루지 않는 한, 그것이 검은색임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신문 상단에서 ‘6월 14일’이라는 문구를 본다면 그 신문이 6월 14일 자임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미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경멸하거나 사랑하는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혐오스러움, 위험, 야비함, 사랑스러움이 내 앞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나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신문을 본 누군가가 자기에겐 날짜가 6월 14일이 아니라 6월 15일로 읽힌다고 진지하게 몇 번이나 말한다면 나는 혼란스러울 것이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내가 미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경멸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본 누군가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때도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끼겠지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그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면 그 존재들의 간접적인 현현을 보면서—어떻게 혐오스러움, 위험, 야비함, 사랑스러움을 읽지 않는 걸까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위선을 떨고 있습니다.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기 때문에 위험에 빠져 있다고 믿는다는 말은 부정확합니다. 거꾸로 우리는 위험이 자리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지요. 위험이 두려움을 야기합니다. 그런데 위험은 내가 읽는 무언가입니다. 소리나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 자체론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위험과 맺는 관계는 종이와 거기 쓰인 잉크가 협박 편지와 맺는 관계와 같습니다. 그런데 협박 편지 사례처럼 내가 읽는 이 위험은 외부에서 나를 장악하고 공포에 빠뜨립니다. 내가 폭발음을 듣는다면 두려움은 그 소리 안에 존재하며 귀를 거쳐 내 영혼을 장악할 겁니다. 나로서는 그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듯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도 없습니다. 내가 기관총 소리를 안다면 그 소리를 들을 때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반대로 모른다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겠지요. 하지만 이는 조건 반사와 유사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읽기와 유사한 무언가입니다. 읽기에서는 이따금 기호들의 완전히 새로운 조합—전에는 본 적 없는—이 내 영혼을 붙잡습니다. 상처를 입히는 의미가 하얀색 및 검은색과 더불어 불가항력으로 내 영혼에 침투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의미—추상적으로 검토할 땐 단순한 생각처럼 보이는—는 나를 둘러싼 모든 곳에서 불쑥 솟아나 내 영혼을 장악하고 시시각각 변화시킵니다. 친숙한 영어 구절로 표현하면 ‘내 영혼이지만 내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나는 내가 읽은 것을 믿습니다. 내가 읽은 것에 따라 판단하고요. 내가 읽은 것에 기초해 행동합니다.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소리를 듣고 획득해야 할 영예를 읽는다면 나는 그 소리 쪽으로 달려갈 겁니다. 오직 위험만을 읽는다면 그 소리를 피해 달려갈 테고요. 두 사례 모두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주저하면서도—행동할 필요가, 소리 자체처럼 그리고 소리와 더불어, 명백하고도 직접적으로 내게 부과됩니다. 나는 소리 속에서 이 필요를 읽지요. 마찬가지로 소요 사태나 전시에는 때때로 무장하지 않은 사람이 살해당합니다. 옷, 머리칼, 얼굴과 더불어 이 사람들 안의 비천한 무언가가 눈을 거쳐 무장한 사람들의 영혼에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이 무언가가 무장한 사람들에게 이들을 없애라고 요구하지요. 무장한 사람은 무장하지 않은 사람의 머리색과 피부색을 보고 죽여야 할 필요를 읽는 것이고요. 정상적인 생애 과정에서 범죄가 거의 저질러지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누군가와 마주 볼 때 눈에 들어오는 색깔들 속에서 얼마간 존중해야 하는 무언가를 읽기 때문입니다. 이 두 상태의 차이는 인적 없는 길거리를 걷는 사람이 겪은 차이와 같습니다. 처음에 그는 겉모습에서 자신을 노리는 사람을, 다음에는 나무를 읽습니다. 처음에 그는 정말로 사람이 있는 듯이 반응합니다.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생겨난 추상적이고 근거 없는 생각으로 그를 물어뜯지 않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중단 단계를 거치지 않고, 자신이 혼자며 사물과 식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칩니다. 지금 나무를 지각하는 그곳에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근거를 잃지요.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시기에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 내부에서 생겨난다면, 겉모습에서 읽히지 않습니다. 거꾸로 우리는 겉모습에서 그러한 행동의 금지를 읽습니다. 하지만 내전 중에는 특정 부류의 사람을 살려 준다는 생각, 근거가 없으며 우리 내부에서 생겨나는 이 생각이 그들의 겉모습에서 읽히지 않습니다. 그 생각은 정신에 나타나지만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중간 단계는 없습니다. 이행은 찰나에 일어납니다. 각각의 상황에서 두 읽기는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며, 다른 것들은 순전히 상상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들은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든 삶은 동일한 직물로 짜여 있고 잇달아 우리에게 부과되는 의미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리고 각각의 의미는, 그것이 나타나고 감각을 거쳐 우리에게 닿을 때, 자신과 대립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환영의 지위로 격하합니다.

나는 우주에 대해 일정한 권력을 보유하고 따라서 겉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소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노동을 통해 그렇게 하지요. 검은색으로 장정된 책 위에 하얀 종이를 올려놓으면 더는 검은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권력은 내 물리적 힘의 한계에 의해 제한됩니다. 또 나는 겉모습에서 읽는 것이자 내게 부과되는 것인 의미들을 바꿀 권력을 보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권력 역시 제한적이고 간접적이며 노동을 통해 행사됩니다. 통상적인 의미의 노동이 하나의 사례입니다. 모든 도구는 맹인의 지팡이, 즉 읽기를 위한 수단이며, 개개의 수련 과정은 읽기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수련 과정을 마치면 펜 끝에서 의미가 나타나거나 인쇄된 활자 속에서 문장이 나타날 겁니다. 뱃사람에게, 경험이 풍부한 선장에게 그의 배는 어떤 의미론 자기 몸의 연장延長이 됩니다. 배는 폭풍우를 읽는 수단이며 그는 승객과는 완전히 다르게 폭풍우를 읽지요. 승객이 혼돈을, 제한 없는 위험을, 두려움을 읽는 반면 선장은 필요를, 제한된 위험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을, 용기와 도의의 의무를 읽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작용한 행동은 의미를 바꾸고자 합니다. 국가 원수가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의미들이 사천만 개개인의 주변에서 불쑥 솟아납니다. 장군의 기예는 적군 병사들이 겉모습에서 패퇴를 읽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버틴다는 생각이 모든 근거와 유효성을 잃도록 말입니다. 그는 예컨대 전략, 급습, 신무기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전쟁, 정치, 웅변, 예술, 교육 등 타인에게 작용하는 모든 행동은 본질적으로 그들이 읽는 것을 바꾸려 합니다.

행동의 대상이 자신이든 타인이든 두 가지 문제가, 즉 테크닉과 가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겉모습이 활자인 텍스트들은 내 영혼을 장악하고, 내 영혼을 저버리며, 다른 텍스트들로 대체됩니다. 어떤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보다 가치가 더 높을까요? 어떤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보다 더 참될까요? 어디서 규준을 찾을 수 있을까요? 내가 읽지 않는, 결코 읽은 적 없는 어떤 참된 텍스트를 생각하는 것은 그 참된 텍스트, 즉 신의 독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모순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읽기 개념을 내가 신을 말할 때 떠올리는 존재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적용할 수 있더라도, 여전히 내가 읽는 텍스트들을 가치의 위계에 따라 정렬할 수는 없겠지요.[3]

이렇게 제기된 이 문제는 아마도 숙고해 볼 가치가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제기됨으로써 이 문제는 가치와 관계된 모든 가능한 문제를, 그것들이 구체적인 한에서, 한꺼번에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위탁품을 가로채려는 사람은 단순히 «실천 이성 비판»을 읽었다는 이유로 그 마음을 억누르지 않을 겁니다.[4] 그가 억누른다면 아마도, 그 자신에도 불구하고, 위탁품의 겉모습 자체가 그에게 반환하라고 외쳐대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모두가 비슷한 상태를 경험합니다. 나쁜 짓을 하려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지요. 어떨 때는 착하게 행동하려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고요. 위탁품을 바라보며 이렇게 읽는 사람이 그것을 가로챘을 때 충족할 수 있는 온갖 욕망을 겉모습에서 읽는 사람보다 더 나은지를 탐구하는 것, 어떤 기준이 그것을 결정하며 어떤 테크닉이 하나의 읽기에서 다른 읽기로 이행하게 해 주는지를 탐구하는 것, 이것들은 위탁품을 가로챌지 반환할지를 탐구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인 문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읽기 개념을 둘러싸고 제기된 가치의 문제는 선만이 아니라 진실 및 아름다움과도 관계 맺습니다. 이 셋을 분리하기란 불가능하지요. 어쩌면 이로써 하나의 수수께끼인 이 셋의 연관 관계가 조금 더 분명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함께 생각하는 법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분리해 생각될 수 없습니다.


옮긴이 주
[1] Simone Weil, “Essai sur la notion de lecture”, Œuvres complètes, IV-1, Gallimard, 2008, pp.73~79. 시몬 베유가 1941년 봄에 쓴 글로 사후인 1946년 Les Études philosophiques, no.1, pp.13~19에 처음 발표되었고 이후 『전집』 IV-1권에 수록되었습니다.
[2] 베유는 <플라톤에게서의 신>에서 플라톤의 «국가» 7권을 주해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모순을 발견하는 모든 경우에 지성은 모순을 연결성으로 고쳐 주는 관계를 포착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위쪽으로 끌어올려지지요”(«전집» IV-2권, 102쪽).
[3] «전집» IV-1권의 편집자 주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문단은 철학하는 방법에 대한 시몬 베유의 매우 밀도 높은 종합을 제시합니다. ‘어떤 테크닉이 하나의 읽기에서 다른 읽기로 옮겨 가는 걸 허용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정화purification의 방법’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화의 방법을 통해 ‘필연성들의 세계가 아닌 가치들의 세계를 붙잡으려’ 합니다(<과학과 우리>, «전집» IV-1권, 148쪽). 마지막 단계, 즉 ‘읽지 않기’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내가 읽지 않는 참된 텍스트’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신은 그 참된 텍스트에 대해 더 이상 독자가 아니고 저자입니다.”
[4] 임마누엘 칸트가 «실천 이성 비판» 1편 1권 1장의 §4에서 제시한 사례입니다. 칸트는 위탁품의 원 소유자가 죽었을 때 반환하지 않는 것이 도덕 법칙의 형식을 취할 수 있는지 물은 다음 주관적 행복을 보편 법칙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고 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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