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에 대해

시몬 베유
리시올/플레이타임 편집부 옮김

이 글은 여태 알맞은 명칭을 얻지 못했으나 아마도 ‘읽기’라는 명칭이 적당할 개념을 정의하려는 시도입니다. 읽기에는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숙고해 본다면 인간 삶의 여타 수수께끼들을 해명하진 못하더라도 포착하는 데는 분명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감각이 직접적이고 돌연하며 놀라움으로 우리를 장악한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한 사람이 예고도 없이 명치를 가격당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모든 게 바뀝니다. 내가 뜨거운 물체를 건드립니다. 손을 데었다는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나는 화들짝 놀랍니다. 무언가가 나를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고 이로 인해 나는 우주의 존재를 알아차립니다. 우리는 우리를 붙잡은 주먹질, 뜨거운 물체, 갑작스러운 소리의 권력에 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 외부에서, 물질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리고 정신은 그것들을 겪을 뿐 그에 관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거나 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생각들은 우리에게서 감정을 일으키지만 이런 식으로 우리를 붙잡지는 않습니다.

읽는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김지승

만약에, 라고 시작해 보자. 만약에 클로디아 랭킨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고장 난 구조의 일부라면. 흑인 차별적인 각본의 체제 안에서 기능하며 모든 장르의 관습을 재창조할 뿐이라면. 현재는 꽁꽁 막혔고 미래는 이미 상실되었다면. 구멍 난 과거만이 우리를 지탱한다면. 모든 걸 딛고 얻은 생존, 바로 그 생존의 콜라주인 한 권의 책을 앞에 두고 펼칠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기록과 자료를 기꺼이 나눈 흑인들이 공동 저자인 책의 서문을 읽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그냥 우리» 디자인 후기

«그냥 우리» 원고를 처음 읽을 때부터 막연하지만 어떤 상을 떠올렸다. 완성된 책의 표지가 당시 떠올린 상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보면 구현하고 싶은 대략적인 모습은 이때부터 꽤 분명했던 것 같다.

«그냥 우리»에 수록된 장들은 분량이 일정치 않다. 오십 쪽 가까이 되는 장도 있고 두 쪽에 불과한 장도 있다. 그중 두 번째로 짧은 글인 <양팔을 벌린>에는 매우 엷게 인쇄된 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다. 어느 도시 풍경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담은 이 사진은 필름부에 빛이 새어 들어갔거나 노출 과다로 찍힌 잘못된 사진처럼 보인다. 얼핏 보면 안개가 자욱한 괴기스러운 풍경 같기도, 서정적이고 여유로운 분위기 같기도 하다. «그냥 우리»는 오른쪽 페이지에서만 본문이 이어지고 왼쪽 페이지는 각종 사진이나 참고 자료로 채우거나 백면으로 비우는 구성을 취하는데, 이 사진은 다른 왼쪽 페이지에 들어찬 선명하거나 강한 색상의 그림, 한눈에 파악되는 그래프 등과는 확연히 다른 희미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본문을 읽다 보면 이 허연 사진의 내부 요소들에 조금 더 가까이 눈을 대게 된다.

«그냥 우리» 디자인 후기

백인성 쓰기: 클로디아 랭킨과의 대화

«그냥 우리» 출간 후에 클로디아 랭킨이 «와사피리»(Wasafiri) 지면에서 나눈 인터뷰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이 인터뷰에서 인터뷰 진행자 마야 카스피리는 랭킨과 함께 대화, 글의 형식과 내용, (무)경계 공간, 언어의 물질성, ‘만약에’와 희망 등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랭킨이 어떤 의도와 마음가짐으로 «그냥 우리»라는 책을 구상하고 집필하고 형식을 갖추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인터뷰예요. 또 인종 ‘분리’가 상징적일 뿐 아니라 여전히 물리적인 강제력으로 작용하는 미국에서 랭킨이 대화와 접촉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원문 링크: https://www.wasafiri.org/content/writing-whiteness-a-conversation-with-claudia-rankine/

백인성 쓰기: 클로디아 랭킨과의 대화

이 존재 양식

2020년 «네이션»에 게재된 «그냥 우리» 서평(일라이어스 로드리케스의 <이 존재 양식>)을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글은 흑인 페미니즘 전통 안에 랭킨을 자리매김한 뒤 «그냥 우리»와 랭킨의 작업 전반에서 유색인의 배제와 고립이 초래하는 ‘외로움’을 발견합니다. 랭킨이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 하나는 자신의 책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부터 «그냥 우리»에 이르는 그의 저작들은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이 서평은 “그의 희망에 동력을 불어넣는 것도 바로 이 비관주의”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이 서평은 랭킨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그냥 우리»를 읽으며 어렴풋하게 다가왔던 느낌들을 구체화해 줍니다. 특히 랭킨의 전작을 읽고 싶었던 분들에게는 궁금증을 얼마간 해소해 줄 글이리라 생각합니다.

원문 링크: https://www.thenation.com/article/culture/claudia-rankine-just-us-review/

이 존재 양식

«삼체»의 문화사적 위치

올해 군산 북페어에서 소책자로 공개한 후쿠시마 료타의 <«삼체»의 문화사적 위치>(윤재민, 정창훈 옮김)를 블로그에 올립니다. 후쿠시마의 «헬로, 유라시아»(2021)에 보론으로 수록된 글이며, «헬로, 유라시아»는 추후 두 옮긴이의 번역으로 리시올에서 출간될 예정이에요.

2008년 1부가 출간되었고 올해 넷플릭스에서 영상화되기도 한 류츠신의 «삼체»를, 중화권의 문화사적 맥락 속에서 그 탄생부터 현재적 함의까지 짚어 설명한 글입니다. 중문학자이기도 한 후쿠시마의 비평이 어떤 종합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시사해 주는 글이기도 해요. 중국이 오랫동안 SF의 불모지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부터 이런 대작이 나올 수 있게 한 배경(홍콩이라는 변경의 존재, 양계초와 루쉰에 이르는 문화적 전통, 켄 리우의 우수한 번역 등)은 무엇이었는지를 꼼꼼히 조명하고, 웅장하면서도도 오싹한 ‘우주론적 진화론’의 의미를 밝힙니다.

«나선형 상상력»의 출간 후 인터뷰에서 후쿠시마는 “더 거시적이고 자유로운 시각”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요. 이 글이 작품의 내부와 외부, 문학과 정치, 로컬과 글로벌을 능수능란하게 연결 지으며 주는 자유의 감각을 여러분도 느껴 보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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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의 문화사적 위치

«나선형 상상력»의 전체상

그간 SNS에 올린 «나선형 상상력» 관련 글 가운데 본문 내용을 소개한 것들을 모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헤이세이 30년 일본 문학의 지형도를 그리는 너른 시야의 책인 만큼, 전체상을 또렷하게 인지할수록 책의 유용성도 따라 향상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본문과 같은 ‘이야기, 내향, 정치, 사소설, 범죄, 역사’ 여섯 개 테마의 순서대로 정리해 보았어요. 이 책이 궁금한 분들만이 아니라 이미 읽은 분들이 감상을 정리해 보시는 데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1장은 불과 몇 년 전의 사건도 간단히 잊히고 문학이라는 장르의 연속성 자체가 희미해지는 현실을 짚은 후, 헤이세이 동안 ‘내러티브의 위기’라는 문제에 천착한 작가들을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전개할 ‘헤이세이 문학론’의 포석을 놓으려 합니다.

헤이세이 초에 이 위기를 예민하게 의식한 작가가 오에 겐자부로였습니다. 세계를 굽어보며 주인공의 성장을 그리는 안정적 내러티브가 불가능해졌다는 인식에서, 오에는 매 작품마다 임시적 내러티브를 설계해 복잡하고 불투명한 현실의 단면을 잘라낼 필요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헤이세이적 허무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꼽히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이야기할 내용이 없다 해도 이야기의 자세를 설계할 수는 있다’는 아이러니의 내러티브를 실천했고, 이후 출현하는 작가들도 내러티브의 위기에 대한 선배 작가들의 전략을 일정하게 공유하게 됩니다.

«나선형 상상력»의 전체상

후쿠시마 료타, 헤이세이 문학의 부채와 비평가의 책무를 말하다

후쿠시마 료타가 문학, 음악 평론가이자 «디스토피아 픽션론» 등을 집필한 엔도 도시아키와 2021년 웹진 «리얼 사운드 북» 지면에서 나눈 대화를 번역해, «리얼 사운드 북»의 허가를 받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대화는 후쿠시마의 비평 경력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작가 마이조 오타로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해,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는 헤이세이의 상징적 빈곤을 돌아보며 화제를 확장해 나갑니다. 후쿠시마의 현상학적 소설론, ‘근대 문학의 종언’ 이후의 비평론, 오늘날 문학의 소외를 “더 거시적이고 자유로운 시각을 취할 수 있는 기회”로 파악하는 시각 등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아가 포스트 코로나의 2020년대에 일본 문학이 놓인 조건을 «나선형 상상력» 3장 논의를 되살리며 점검하고, 지금 자신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말합니다(여기서 언급되는 «헬로, 유라시아»는 2025~2026년 중에 리시올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일본 문학 비평을 넘어 동시대와 호흡하고 고민한 결과물로서 «나선형 상상력»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한 글이에요. 후쿠시마 스스로도 이 책이 외국 독자나 업계에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고 하니, 이 글이 조금 더 쉽게 책에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원문 링크: https://realsound.jp/book/2021/05/post-754213.html

후쿠시마 료타, 헤이세이 문학의 부채와 비평가의 책무를 말하다

매기 넬슨과의 대화

매기 넬슨이 2015년 «북포럼» 지면에서 «어덜트» 매거진 편집장이자 인터뷰어와 작가로 활동하는 세라 니콜 프리켓Sarah Nicole Prickett과 나눈 대화를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 세라 니콜 프리켓의 허락을 받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이 대화에서 두 사람은 수행적 글쓰기, 장르 구분, 폴 B. 프레시아도, 퀴어함과 급진, 글쓰기의 위험, 페미니즘적인 무심함, 여성에게 이기심을 덧씌우는 문화, 개개인이 처한 맥락의 중요성 등을 주제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쓰면서 넬슨이 무엇을 의도했고 무엇을 걱정했는지, 또 무엇을 피하고자 했는지가 이 인터뷰로 조금 더 분명히 드러나리라 생각해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고 재밌는 글이기도 하고요.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읽었거나 읽으려 하는 독자분들께 도움이 되는 글이 되길 희망합니다.

원문 링크: Bookforum talks with Maggie Nelson – Bookforum Magazine

매기 넬슨과의 대화

≪아르고호의 선원들≫이 인용한 문헌들

매기 넬슨이 ≪아르고호의 선원들≫에서 인용한 글과 책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책의 원서에는 인용 문헌의 출처를 밝힌 주석이나 참고 문헌이 없습니다. 저희는 이 결정이 인용된 텍스트와 넬슨 자신의 말을 뒤섞는 시도이자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하려는 (그리하여 직접 찾아보도록 우리를 꾀는) 전략이라고 이해했어요. 넬슨이 무엇을 염두에 뒀는지와는 별개로 그의 결정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한국어판에도 문헌 출처를 넣어 주지 않았는데요. 영어권 독자는 넬슨이 인용한 구절을 실마리 삼아 어렵지 않게 (대부분 영어인) 출처를 찾을 수 있는 반면, 번역본만으로는 그러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를 감안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끝내 확인하지 못한 문헌도 있습니다) 저희가 찾을 수 있는 한에서 참고 문헌을 재생해 보았습니다. 넬슨이 인용하는 문헌과 인용하는 방식에 흥미를 느낀 독자분들께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이 인용한 문헌들

쓰기와 보듬기

≪아르고호의 선원들≫ 해외 서평을 번역해 공유합니다. 조너선 파머가 2015년 9월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에 기고한 <쓰기와 보듬기>예요.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마음까지 보듬어 주는 글이에요. 이예원 번역가께서 옮겨 주셨고, ≪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의 허락을 받아 이 글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Copyright © 2015 by Los Angeles Review of Books)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작업하며 길을 잃은 기분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몇 편의 서평과 인터뷰가 길을 밝혀 주었는데요. 그중 하나가 이 글이었습니다. 또한 가장 울림이 큰 글이었고요.

파머는 이 책의 표층 아래에서 흐르는 “괄목할 특징이자 묘하게 전복적인 저류”를 포착합니다. 그에게 ≪아르고호의 선원들≫의 호소력은 “건강만큼이나 지루하고 밋밋한 것을 귀하게 대하는 자세”와 우리를 초대하려는 이 책의 헌신에서 비롯합니다.

저희에게 이 서평은 “추상적이고 심지어는 난해한 언어를 거쳐 속 깊은 직언으로 다가오며 의외로 포괄적인 단어에 안착한다” 같은 문장으로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작업하는 내내 어렴풋이 머릿속을 맴돌았던 느낌과 생각을 언어화해 준 글입니다.

조너선 파머는 넬슨이 독자를 믿고 그들을 초대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그는 작가로서 넬슨을 믿으라고, 무엇보다도 독자인 우리 자신을 믿고 우리만의 읽기를 발전시켜 보라고 독려합니다. 우리가 넬슨과 그 가족을 바라보는 동시에 넬슨의 글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유념하면서요.

원문 링크: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writing-and-holding/

쓰기와 보듬기

≪아르고호의 선원들≫ 디자인 후기

나는 직업인으로서의 디자이너에 가깝다. 나만의 디자인 철학이랄 것도 없고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 같은 것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이론적인 논의를 펼치거나 담론을 형성하려는 걸 볼 때면 자극을 느끼기도 하지만, 내 얕음이 들통날까 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더욱더 안쪽으로 숨어드는 편이다. 이제까지 쓴 디자인 후기들에서 작업을 맞닥뜨린 내 어리둥절함과 막막함 같은 솔직한 심정을 줄줄이 쓰긴 했지만 이것도 큰맘 먹고 용기를 낸 거고, 디자이너라는 멋진 직업이 내 삶을 작지 않은 무게로 억눌러 왔음을 느낀다. 게다가 성격 탓도 있어 좁디좁은 생활 반경과 대인 관계를 이어 오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스스로를 좀 더 내보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 부족하거나 약점인 부분들까지도 겁내지 않고, 망설임 없이 새로운 관계에 뛰어들며. 몇몇 계기가 있었는데 ≪아르고호의 선원들≫을 읽고 작업한 것도 그중 하나다.

≪아르고호의 선원들≫ 디자인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