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김지승

만약에, 라고 시작해 보자. 만약에 클로디아 랭킨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고장 난 구조의 일부라면. 흑인 차별적인 각본의 체제 안에서 기능하며 모든 장르의 관습을 재창조할 뿐이라면. 현재는 꽁꽁 막혔고 미래는 이미 상실되었다면. 구멍 난 과거만이 우리를 지탱한다면. 모든 걸 딛고 얻은 생존, 바로 그 생존의 콜라주인 한 권의 책을 앞에 두고 펼칠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기록과 자료를 기꺼이 나눈 흑인들이 공동 저자인 책의 서문을 읽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미래)

«그냥 우리» 디자인 후기

«그냥 우리» 원고를 처음 읽을 때부터 막연하지만 어떤 상을 떠올렸다. 완성된 책의 표지가 당시 떠올린 상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돌이켜 보면 구현하고 싶은 대략적인 모습은 이때부터 꽤 분명했던 것 같다.

«그냥 우리»에 수록된 장들은 분량이 일정치 않다. 오십 쪽 가까이 되는 장도 있고 두 쪽에 불과한 장도 있다. 그중 두 번째로 짧은 글인 <양팔을 벌린>에는 매우 엷게 인쇄된 사진 한 장이 수록되어 있다. 어느 도시 풍경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담은 이 사진은 필름부에 빛이 새어 들어갔거나 노출 과다로 찍힌 잘못된 사진처럼 보인다. 얼핏 보면 안개가 자욱한 괴기스러운 풍경 같기도, 서정적이고 여유로운 분위기 같기도 하다. «그냥 우리»는 오른쪽 페이지에서만 본문이 이어지고 왼쪽 페이지는 각종 사진이나 참고 자료로 채우거나 백면으로 비우는 구성을 취하는데, 이 사진은 다른 왼쪽 페이지에 들어찬 선명하거나 강한 색상의 그림, 한눈에 파악되는 그래프 등과는 확연히 다른 희미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본문을 읽다 보면 이 허연 사진의 내부 요소들에 조금 더 가까이 눈을 대게 된다.

«그냥 우리» 디자인 후기

백인성 쓰기: 클로디아 랭킨과의 대화

«그냥 우리» 출간 후에 클로디아 랭킨이 «와사피리»(Wasafiri) 지면에서 나눈 인터뷰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이 인터뷰에서 인터뷰 진행자 마야 카스피리는 랭킨과 함께 대화, 글의 형식과 내용, (무)경계 공간, 언어의 물질성, ‘만약에’와 희망 등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랭킨이 어떤 의도와 마음가짐으로 «그냥 우리»라는 책을 구상하고 집필하고 형식을 갖추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인터뷰예요. 또 인종 ‘분리’가 상징적일 뿐 아니라 여전히 물리적인 강제력으로 작용하는 미국에서 랭킨이 대화와 접촉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원문 링크: https://www.wasafiri.org/content/writing-whiteness-a-conversation-with-claudia-rankine/

백인성 쓰기: 클로디아 랭킨과의 대화

이 존재 양식

2020년 «네이션»에 게재된 «그냥 우리» 서평(일라이어스 로드리케스의 <이 존재 양식>)을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글은 흑인 페미니즘 전통 안에 랭킨을 자리매김한 뒤 «그냥 우리»와 랭킨의 작업 전반에서 유색인의 배제와 고립이 초래하는 ‘외로움’을 발견합니다. 랭킨이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 하나는 자신의 책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외롭게 두지 말아요»부터 «그냥 우리»에 이르는 그의 저작들은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이 서평은 “그의 희망에 동력을 불어넣는 것도 바로 이 비관주의”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이 서평은 랭킨의 작품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그냥 우리»를 읽으며 어렴풋하게 다가왔던 느낌들을 구체화해 줍니다. 특히 랭킨의 전작을 읽고 싶었던 분들에게는 궁금증을 얼마간 해소해 줄 글이리라 생각합니다.

원문 링크: https://www.thenation.com/article/culture/claudia-rankine-just-us-review/

이 존재 양식

«그냥 우리»

흑인을 상대로 한 경찰의 폭력을 규탄하며 분출한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번져 나가고 18세 청소년 마이클 브라운이 경찰관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해 인종 차별과 그에 대한 저항이 절정에 이르렀던 2014년 10월 시인 클로디아 랭킨은 «시민: 미국의 서정시»를 출간했다. 운문과 산문, 시각 자료를 아우르는 혼종적인 형식을 취한 이 책은 그와 친구들이 겪은 인종 차별, 흑인을 상대로 한 과잉 진압과 증오 범죄를 매개로 인종 차별적 언어의 작동 방식과 언어 자체의 한계를 파헤쳤다. «시민»은 당시의 분위기와 맞물려 출간 직후부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랭킨은 여전한 미국의 인종 차별을 증언하고 고발하는 가장 선명한 목소리 중 하나가 되었다.

허망하게도 이 모든 노력의 정치적 귀착점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많은 백인이 버락 오바마 이후 인종 분리가 종식되었다고 믿는 동시에 백악관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 대통령이 민족주의적 언사로 대중을 선동하고, 그에 자극된 폭력이 공간을 가리지 않고 난무하는 상황에서 랭킨은 더욱더 달랠 길 없는 절망과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그는 ‘백인 특권’을 주제로 백인들과 대화해 보기로 결심한다. 2020년에 발표한 «그냥 우리: 미국의 대화»는 그러한 대화 시도를, 이 시도들이 난파하는 과정을, 랭킨의 내면에서 들끓는 갖가지 질문과 감정을 기록한 책이다.

랭킨은 각종 (무)경계 공간과 사적 공간―공항, 비행기, 극장, 디너 파티, 딸이 다니는 고등학교, 전화 통화―에서 낯설거나 가까운 백인(그리고 비백인)에게 말을 건다. 백인 특권을 부인하는 비행기 옆자리 백인 남성, 인종 차별이 화두에 오를 기미가 보이면 잽싸게 화제를 돌리는 파티 참석자, 금발로 염색하는 여성들, 가족의 안위를 우선시하며 일상의 차별에 도전하지 않는 친구, 몇십 년간 함께 활동하며 웃음과 눈물을 나눈 백인 남편과의 (상상 속) 대화를 통해 그는 인종적 편견이 여전히 빈틈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그리고 백인이 변화를 거부하고 있음을 거듭 확인한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관계를 뒤흔드는 변화를 기대하며 시작한 대화들은 이렇듯 번번이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는 흑인으로서 자신이 버림받은 처지라는 기분을 떨쳐 내는 데 끝내 실패하고 이 실패 탓에 곧잘 비관적인 기분에 빠지지만, 인쇄된 글의 형태로 그의 심정을 듣는 우리는 이상한 위안과 약간의 희망을 얻게 된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잠식한 망설임, 울분, 원망, 자기 의심과도 대면해야 하는 그가 자신의 ‘비백인 취약성’을 숨김없이 펼쳐 보이며, 이 정직함이 우리를 또 하나의 대화로 초대하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